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 마광수 문화비평집
마광수 지음 / 새빛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 마광수가 쓴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를 읽고 ].


< 전체보다 개인,
질서보다 자유이다

이 시대는 전체주의자가 아니라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모난 돌'은 좋은 돌이므로
'정'을 맞아서는 안된다

개성이 튀는 사람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
그래서 이 나라는 점점 사그라든다 >
--------<서시>

마광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교수라는 자리에서 솔직했던 모습이 좋아서다.
감히 교수가 감히 의사가 감히 검찰이 가면을 쉽게 벗지는 못한 사회이기에
마광수의 돌발적인 모습에 속이 시원했고
또한 나와 기질도 비슷해 보여 공감이 갔다.

기질이 비슷하단 말은
쓸 데 없이 솔직하는 데 있다.
마광수는 쓸 데 없이 솔직해서 모난 돌로 찍혀 정 맞았다.
비슷하다면 나 또한 가끔 모가 나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찍히고 찍혔다만
이런 나와 비슷한 모습이 마광수에게 있다.

마광수가 얼마나 솔직하냐면
독자인 나의 얼굴을 벌겋게 하다 못해
책에 도저히 시선을 오래 둘 수 없게끔 만든다.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를 택했던 이유 두 번째로는
이 책 옆에 있던 마광수의 책 제목이 너무 야했기 때문이다.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책을 읽어 보진 않았지만 제목만 봐도 너무 벗었다 싶다.
이 책 소 제목에도 비슷한 부류의 제목이 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교수건 의사건 검사건 국회의원이건 남자라면
이 말에 공감하겠지만
그 놈의 도덕, 윤리 의식 가면 쓰기에 바뻐
몰래 성 왕래하다 들키는 것들이 가끔 신문에 방송에서 보게 된다.

차라리 마광수처럼 솔직해 지면 면책을 덜 당할 터인데
그의 책을 읽노라면 그가 교수였다는 생각을 잊게 된다.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고 그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었다 보니
특별히 교수라는 직책으로 그와 나의 관계를 계급으로 구분 지을 필요가 없어서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다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도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편한 직업이 될 것 같아서
(대인관계에 서툴러도 되고, 입으로 실컷 배설할 수 있어서 좋고,
또 명예욕도 적당히 충족시켜주므로)
그랬던 것이지, 위대한 학자나 스승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쓰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복받치는 우울감과 고독감을 풀어버리려고 썼지,
미리부터 야심 있게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습작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말처럼 복받치는 우울감과 고독감을 풀어버리려고 쓴 글이라 하기엔
어딘가 감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 어디에서도 글을 쓰고 있는 그의 감정이 처절히 밑바닥까지 내려 앉았음을
느낄 수가 없다.
절제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가 교수로서 느껴지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평범하다 못해 '교수가 저런 행동을'이란 스캔들이 있었기에
이 책을 사게 됐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다.
매우 평범한 책이다. 그의 이슈화에 비하면.
또 한 구절을 소개한다.

[어쩐지 내가 영원한 철부지 소년으로 머물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이른바 의젓하고 늠름한
인물이 되는 건 단념하기로 했다.]

공감 조금이다.
음. 좀 더 도발적으로 글을 쓴다면 그의 스캔들 명예에 빛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슬픔
마광수 / 해냄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한낮의 더위에 짜증이 났다. 시장기가 느껴져 먹거리를 찾아

나선김에 덤으로 몇권의 책을 빌리려 도서관에 들렸다.

빽빽이 들어찬 책들 가운데 마광수의 <사랑의 슬픔>이란 책에

시선이 꼿혔다. 원색에 가까운 그의 솔직하다 못해 슬퍼져버린

시어들에 치맛속을 들추는 듯한 소름이 돋아 났다.

더이상 책을 읽어 내려 갈 수 없었다.

책속에 수록된 원색의 그림들....그리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촉수를 더듬는 그의 시어들....그의 시어에 빠져....

나는 움직일수가 없었다....그리고....잠시....절정에 빠져 들었다.

마광수...그는 광적이며 뜨거운 불을 가진 시인이다.

마치...그는 네가 그래도 솔직 하지 않을수 없어...

자. 너의 위선을 벗어 던지고 솔직한 네 알몸을 보여봐...

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의 시집을 덮고.

도망을 치듯 책속을 빠져 나왔다.

그의 책은 빌릴수 없었다......

지금 빌려온 책을 반납하러 갈 즈음엔 마광수의 <사랑의 슬픔>을

대출하고 있을 여자가 떠오른다.

후회와 후희의 차이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문득 일기장을 들쳐 보다....지난 여름에 썼던 일기의 한부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책을 대출하면서 마광수의 <사랑의 슬픔>처럼 애를 먹인 경우는 없었다.

성에 있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마광수 시인....그는 아직까지 대중에게

읽히는 시인이며 문단에 있어 소외 받은 시인이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추천 목록에 수록이 되어 있는 시들이 많다.

그의 시를 읽을 때면....젊은 날의 미래가 없었던 사랑이 떠오른다.

욕망과 분노.... 욕정과 순수가....그리고 광기와 나태가....그 모든 것들이

부글 부글 끓어 오르다 한순간 사그러 들던. 온통 혼미스러웠던

젊은 날의 그 사랑스러웠던 날들이 떠올려 지기 때문이다.

미래를 내다 볼수 없는 사랑....그렇기에 뜨거울수 밖에 없었고

온몸을 내던져 사랑 할수 밖에 없었던 나의 20대

가끔은....그 20대의 혼미스러웠던 날들이 그리워 지는날....

그런 날....나는 마광수의 시들을 즐겨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 마광수 문화비평집
마광수 지음 / 새빛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우리는 흔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남이 보는 데서 하는 것과 남이 없을 때 하는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결과 우리의 삶은 가식적이고 또 이중적이 된다.
그렇다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마광수는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로서는 항상 그의 행보가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마광수는 자신이 선택한 그 가치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도 있었다.

‘마광수!’하면 보통 ‘성’에 관해 솔직하다 못해 과감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부분 때문에 구속이 되고 교수직위도 잃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마광수의 그런 솔직함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내가 못하는 것을 그는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버자이너 문화사>(동아시아. 2007)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극명하게 표현되었듯이 여성의 성기에 관한 책으로 적나라한 표현에 속이 시원했던 기억이 있다. 마광수의 글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광수의 글을 읽으면 일단 그의 과감함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새빛. 2007)는 마광수의 문화비평을 모아놓은 책으로 그의 폭넓은 문화에의 관심과 또 전문가로서의 날카로움이 번득인다. 마광수는 우리에게 성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만 알려진 것에 대해 강한 부정이라도 하듯이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 및 교육 나아가 종교에 까지 그의 관심 영역이 넓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는 역시 그의 ‘성담론’이 마음에 든다.

어쨌든 마광수다운 것은 노골적인 ‘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항상 ‘야한 여자’가 좋다고 소리친다. 그가 말하는 야한 여자는 ‘夜한 여자’가 아닌 ‘野한 여자’이다. 그가 말하는 ‘野한’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야하다의 어원을 ‘들야(野)’자로 보아 본능에 솔직하다고 본다. 본능적 욕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욕이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성의 눈에 띄어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에서 독자들은 그의 표현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본능으로만 살지 않는다’라는 거부감과 아울러 ‘이성의 눈에 띄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마광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아마 많은 생물학자들의 견해도 이와 같을 것이고, 나의 생각도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을 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사고나 행동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라고 느낀
다.

그의 예술관을 한 번 들어보자.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금지된 것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어야 하고 ‘자유에 대한 한없는 갈망’이어야 한다. 정치적 억압에 대한 도전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인들은 거의가 ‘성 알레르기’증세에 걸려 있어 성에 대해서만은 중세기적 ‘모럴 테러리즘(moral terrorism)`을 행사하는 것을 예사로 한다. 그러다보니 도덕과 윤리를 핑계로 한 정치적 억압이 은근히 정당화되고, 일반 민중들은 여전히 공포와 죄의식 속에서 각자 각자의 천부적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그의 가치관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외침은 끝없는 ‘자유’에의 의지에 있다. 예술도 성도 모두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가감없이 투영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자유에의 열정과 아울러 거침없는 자기표현에 찬사를 보내주고 싶다. 내가 못하고 있는 것을 그는 아주 쉽게(?) 표현함으로써 내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태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마광수 소설 <권태>의 페티시즘과 유미적 상상력 >


김성수(문학평론가·연세대교수)


1. 머리말 : 논의의 전제

문학(예술)은 현실의 질료를 원료로, 그리고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삶의 긴장과 억압을 풀어내고 끊임없이 욕망의 새 지평을 밝혀주는 거울이면서 램프이다. M. H. 에이브럼즈의 구분처럼, 현실을 기계적으로 객관화하고 외면화하는 고전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거울이며, 창조적 주관성의 상징으로 현실을 주관화하고 내면화하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램프이다. (임철규, <왜 유토피아인가>, 민음사, 1994, 317쪽.)
현실을 구심성의 원리로 파악하는 문학은 그래서 그 제한된 폭과 깊이에 인간 삶의 무수한 상(像)을 담기 위해 전형성과 보편성의 원리를 채택하는 반면, 현실의 경계를 원심성의 원리에 의해 벗어나려는 문학은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향하게 된다. 이 점은 우리들이 세계를 에토스적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파토스적으로 수용할 것인지를 요청하는 형식(미학)의 문제와 관련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문학이 일차적으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때 그 반영의 매개물인 ‘거울’은 어떤 성질의 물체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는 결국 서양 문학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매우 중요한 논의를 유발시켜 온 본질적 문제이기도 했다. 거울에 비치는 현실의 어떤 상(像)은 그것이 평면거울이냐 아니면 ‘오목·볼록’ 거울이냐에 따라서 그 형체가 사뭇 달라진다. 또한 다면체의 거울 속에서도 그 형상은 원래의 것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만화경으로 비유되는 현실은 그것을 비추는 거울의 종류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택자의 취향과 의지, 그리고 목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언어로 반영하는 문학, 특히 소설은 서술자가 어떤 거울을 선택해서 어느 곳을 비추느냐 하는 문제가 형식적 본질을 이루게 되는데, 그 거울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현실과 욕망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반영체로서의 문학은 단순한 평면거울이 아니라 가깝게도 혹은 멀리도 볼 수 있도록 실제의 상(像)을 굴절시키는 입체적 거울로서의 ‘렌즈’에 비유할 수 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볼록거울을 응용한 것이듯이, 문학이 현실의 여러 상(像)을 다양하게 변형시키는 것은 결국 작가가 선택하는 거울의 종류와 각도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을 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비추는 거울과는 달리 실제상들의 굴절과 변형체인 문학적 거울(렌즈)은, 작가의 체험과 사유의 방식에 따라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인간 실존의 욕망을 비추어 내고자 한다. 그것은 집단의 공통 체험과 소망을 비출 수도 있지만, 인간 내면의 잠재된 욕망을 보여주는 의식의 내시경일 수도 있다. 작가는 현실을 가깝게도 혹은 멀리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용한 거울을 품에 안고서, 자신의 욕망을 문학이라는 가공적 거울을 통해 비추어 보고자 한다. 그 욕망이 실현되기 어려울수록 더욱 더 집요하게 그것에 집착하는 작가의 비극적 전망은 분명히 문학의 역설적 본질에 다름 아니다.
문학이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매우 입체적인 거울을 통해 비추어낼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우리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상징적 상상력의 거울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귀납적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연역적 특성을 가진 상징적 거울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상상해내는 요술거울, 즉 상상력은 현실적 질서에 대한 작가의 면책적 거울이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논의는 출발하고자 한다.
작가의 의식과 욕망의 거울에 현상(現像)되는 현실은 곧 문학적 프리즘을 통해 마치 영사막처럼 가시화 될 수 있는데, 프리즘 이전의 빛(현실)과 이후의 빛(상상 혹은 꿈)은 문학이라는 거울 속에서 모두 상징적 상상력으로 연역되어 때로는 진실보다 더한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징적 상상력의 소산인 문학(소설) 안의 현실원칙(문학적 약속)을 프리즘 통과 이전의 현실원칙(사회적 규범 혹은 윤리)과 차별 없이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프리즘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한, 의식의 거울로 현상(現像)되는 어떤 상상, 즉 현실의 프리즘은 결코 유보할 수 없는 우리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꿈은 분명히 다르고, 그래서 꿈속의 어떤 일도 현실의 원칙으로부터 면죄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금기의 경계를 가로질러 현실을 위반하려는 문학적 상상, 즉 작가의 내면 의식이라는 거울에 나타나는 갖가지 상(像)들은 그것이 문학인 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상적 자유를 본질로 한다.
플라톤이 ‘동굴의 신화’에서 말한 사물의 그림자는 결코 그 본질이 이것이라고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도 또한 그 그림자의 본질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자를 매개로 사물의 정확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경험적 지식을 통해 귀납적으로 그 본질에 도달하려는 과학과는 달리, 문학은 끊임없는 상상적 표현(表現) 과정을 통해 그것을 연역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그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다시 역으로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는 현실의 본질,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연역적으로 가시화 될 수 있으며, 그렇게 규정된 주관적 본질은 그 구체성과 당장의 현실적용성의 가능성 여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거기엔 어떤 규범이나 윤리가 쉽게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것이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비평의 내적 체제만이 배심원의 자격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학과 윤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가역적 폐쇄회로인 셈이다.
그것은 우리들 인간들이 절대자의 전지전능함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품을 수 없듯이 현실의 상상인 작품 속의 현실에 대한 도덕적 가치평가는 그다지 유쾌한 행위로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육체와 행위와 정신이 언어로 재창조되어 소설 속에 들어갈 때는 소설의 내적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모두 생물이긴 하지만 그 둘의 종류가 다른 것처럼, 문학과 윤리가 모두 현실적 욕망을 내화(內貨)로 가지고 있지만 문학이 문학이고 윤리가 윤리인 한에서 양자의 외화(外貨)는 달리 환산돼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적 현실에 대해 그것이 성적 담론이든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든 자유와 상상을 억압하는 일체의 검열과 통제는 불순한 것이다. 변태행위로 규정하는 어떤 것이나 심지어는 마약의 문제, 그리고 빨치산의 산 속 생활에 대한 실존적 의미로서의 인간애에 바탕을 둔 묘사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의 지향 등 그 어떤 것도 윤리와 체제의 이름으로 유폐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작가의 진실한 묘사와 진지한 주제 탐구만이 문학의 자기검열로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인정하면서 마광수의 소설의 세계를 조망할 때, 그의 소설은 낭만정신, 자유정신, 분방하고 발랄한 상상력, 탈권위적 문체와 탈윤리적 인물설정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권태>와 <광마일기>, 그리고 <즐거운 사라>는 물론, 여러 편의 단편과 장편(掌篇)소설들은 모두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를 두고 성적 판타지의 무애(無碍)한 상상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의 소설들이 우리의 비평시장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첫 문화비평적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이후 일련의 그의 저작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지나친 성 알레르기 현상의 부정적 여파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연장선 위에서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이든 비판적 리얼리즘이든)만이 우리 소설과 비평의 주화(主貨)처럼 통용되는 비평의 시장에서 그의 소설들이 독자들의 호오(好惡)에 상관없이 활발하게 거론되지 못한 것은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체의 성적 담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반응들은 작가 자신에 대한 편견으로 악화되고, 또한 이런 현상의 한 요인이 우리 사회의 열린 담론 구조를 폐쇄시키는 억압구조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의 작품을 비롯한 성적 담론의 작품들에 대한 좀 더 공정한 해석과 평가의 태도는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으로 성 담론이 용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관심이 더 긴절히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때 해석이란 작품에 나타난 여러 요소들을 세밀하게 따져보는 일이며 그리고 난 이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 대한 ‘자세히 읽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의의 전제가 된다. 여기에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이 미리부터 개입해서는 결코 온전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마광수의 소설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평가는 따라서 좀 더 자세하고 진지한 독서가 전제돼야 함은 물론 공정한 비평의 태도가 확보돼야 한다.
이 글에서는 마광수의 소설세계 전반에 짙게 나타나는 성적 담론의 본질과 유미적 시각의 미학적 테마를, 소설의 일반적 분석틀 가운데 주로 인물과 문체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봄으로써 그의 소설세계가 추구하는 주제에 대해 해석과 평가로 연결시켜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2. <권태>의 미적 근거

화자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의 문학을 소설이라고 할 때, 작가가 자신의 창작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 구상하는 것은 인물일 것이다. 이야기의 형태로 포장된 여러 가지 구성 요소, 즉 인물·환경·플롯·문체 가운데서 특히 인물은 우리들 인간의 삶의 모습을 되비쳐 보기 위한 가상적 표상(그러나 한 전형적 표상)으로, 소설이 실제의 사건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꾸며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철저히 비실제적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화적인 여러 종류의 동물이나 환상적 공간의 비(非)인간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하게 인물과 관련하여 소설의 허구성과 개연성을 강조하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소설 속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을 혼동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인식상의 혼란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예를 들면, 무대 위에서 가련한 주인공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악한을 향해 객석의 관객이 방아쇠를 당기는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희화적 해프닝이나, 전후 50년대의 세태풍속을 그린 정비석의 <자유부인> 외설성 논쟁도 따지고 보면 그런 혼동의 똑같은 실례들이다. 최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을 읽고 주인공의 애국적 행동에 감명 받은 독자들이 작가가 국립묘지에 묻힌 것으로 그려낸 주인공을 참배하기 위해 묘지 관리인에게 그 무덤의 위치를 물어보는 일이 하루에도 몇 건씩 생긴다는 신문기사의 보도도, 실제 현실과 소설적 허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희극적인 예들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이 그만큼 현실과 구별되기 어려운 사실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현상의 분명한 반영임과 동시에, 허구적 사실과 실제적 현실을 동일시하려는 태도로부터 소설의 가공적 세계는 차별화 되어야 한다는 소설적 당위성을 요청하게 한다. 이런 전제 밑에서만이 소설은 서사적 형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성적이며 동시에 전형적인 인물의 창조적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서사 미학적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마광수의 소설에 대한 해석과 평가 및 비판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태도의 미학’은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소설의 여러 원칙과 약속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과 아울러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 마광수는 자신의 소설과 작품 속의 인물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평자들이 지나치게 작가와 작품 속의 인물을 동일시하는 발생적 오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그런 발언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는 <권태>, <광마일기>, 그리고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들에 대한 작의(作意)를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 자신이 소설 속의 인물에 대해 어떤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내가 발표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다 가공인물들이다. 이것이 소설과 시의 다른 점인데, 시는 나 자신이 그대로 시 속의 화자(話者)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 생활을 시로 시작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썼다. 그러나 시를 써 나가는 동안 뭔가 답답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시가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긴 하지만 ‘거짓말하는 즐거움’이 소설만큼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갖고 있는 허구적 특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처음부터 겁도 없이 장편소설에 손을 대게 되었다.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262쪽.)>


마광수는 이미 1977년 박두진 시인에 의해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등 여섯 편의 시가 <현대문학>지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데뷔한 바 있고, 세 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그가 소설가로 정식 등단한 것은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연재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따지면 그는 이미 문화비평적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 단편소설과 여러 편의 장편(掌篇), 즉 콩트를 발표한 바 있다.
단편소설 <손톱>을 비롯하여 콩트 <서기 2200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그 여자의 손톱>, <인생살이>, <개미>, <신선이 되기까지> 등과, 그 후에 발간된 <사랑받지 못하여>, <열려라 참깨>에 수록된 단편소설 <초상화>, <인생은 즐거워>, 그리고 콩트 <벽 속에서>, <등기우편>, <돼지꿈>, <K씨의 비극>, <이상한 전당포>, <유다> 등을 통해서 그는 이미 자신의 소설적 구성과 인물, 그리고 주제를 피력해 놓은 바 있다.
콩트라는 양식 자체도 분명히 소설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의 소설가로서의 출발은 1989년 이전부터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콩트에서 그리고자 했던 분위기도 위의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 ‘가공적 세계’의 성적 판타지와 즐거움을 주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꾸며진 허구이며 이 사실은 이야기와 역사를 구분해 줄뿐만 아니라 (조정래·나병철, <소설이란 무엇인가>, 평민사, 1991, 31쪽.), 이야기 속의 인물도 실제 현실의 인물보다 초월적이거나 비인간적이며 비규범적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공인물’과 ‘거짓말하는 즐거움’이라고 밝힌 것도 이와 같은 소설의 원론적 약속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물론 이 ‘허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개연적 특성으로서의 좀 더 포괄적이고 전형적인 현실 적용 가능성에 대한, 과학이나 철학과 구별되는 변별 자질로서의 소설적 특성임은 물론이다. 바로 허구성과 개연성에 의지하고 있는 마광수의 소설세계는 그 단초부터가 자유주의적 낭만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90년에 발표된 장편 <권태>나 <광마일기>, 1992년에 발표된 문제의 <즐거운 사라> 등은 그 자신의 소설에 대한 이전의 진지한 관심사가 장편양식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 대한 이와 같은 전제 밑에서 출발한 마광수의 소설세계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리얼리즘적 미학의 소설 세계와는 다른 분위기와 서사 미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그의 소설이 추구하는 미학적 형식으로서의 인물이나 문체 그리고 묘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3. 유미적 상상력과 묘사의 핍진성

<권태>를 비롯하여 <광마일기>와 <즐거운 사라> 등 그의 세 편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인물로서, 우리 근대소설의 인물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그의 소설의 인물 창조는 자신의 문학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문학의 근본적 창작동기를 ‘판타지의 창조’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념지향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실비판과 전망의 제시보다, 낭만주의적 환상에 바탕을 둔 소설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꼭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고 하는 말에도 나는 찬동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작품은 다 <리얼>한 것이다. 낭만적 환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 수법은 환상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해 내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물론 요즘 주장되는 리얼리즘은 <묘사론>적 기법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긴 하지만, 아무튼 인간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든, 환타지에 의한 공상에 의한 것이든─을 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마광수,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권태> 후기, 409­-410쪽.)>


그는 이념적 지향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그것은 앞서 밝힌 바 있듯이 자신의 소설적 입장에 대한 뚜렷한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특히 ‘묘사론’적 기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심리적·외면적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묘사’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소설은 흔히 인물들이 사건을 만나 그것을 이끌어 가는 서사적 구조를 지닌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에만 독자의 흥미가 집중되기 쉽다. 그러나 『권태』는 사건 전개의 과정이 펼쳐지기보다는,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마치 영화의 화면처럼 생동감 있게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발전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보다 더 크고 색다른 감흥을, 그림책이 정지된 느낌 속에서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음을 감지하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마광수의 탁월한 묘사력은 상상력의 등을 타고 신나게 달린다. 도도한 물줄기처럼 거침없는 문장력은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조화를 이룬다. ‘그림 같은’ 묘사적 표현에 적당한 말을 골라내려고 고심한 작가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는 소설이 바로 <권태>(문학사상사, 1990)이다.
우리가 리얼리즘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거론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형’의 개념이다. 이 전형성의 개념은 마가레트 하크네스의 소설 <어느 도회지 아가씨>에 대해 엥겔스가 독후감 형식으로 보낸 편지에서 비롯되어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한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항목이 되었다. 특히 루카치에 의해 세련되고 정식화된 이 개념은, 우리의 리얼리즘 문학 논의에서도 작중인물과 환경의 전형적인 창조라는 의미에서 작품평가의 핵심 참조조항 역할을 하고 있는 덕목이다. 엥겔스는 “세목의 진실 이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의 재생” (유종호, &#65378;급진적 상상력의 비평&#65379;, <세계의 문학>, 1987 가을호, 45­52쪽.)을 지적하면서 작중인물의 탁월한 묘사를 말하고 있다. 루카치도 진정한 리얼리즘의 전제조건으로서 전형적인 인물과 연관된 전형적 상황의 중요성을 그의 실제비평에서 강조하였다.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전형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의미규정과 실제 작품에의 구체적 적용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미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엥겔스의 발언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세목의 진실’이라는 부분이다. 하크네스의 인물에 대한 묘사의 탁월성을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엥겔스가 관심의 대부분을 전형성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상승하는 노동계급의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전망을 가능케 하는 의미로서의 전형성이 상황과 인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체적 보편’으로 드러나야만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우리의 노동소설이나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을 다루는 리얼리즘 계열 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개념일 것이다. 이념으로서의 주제를 인물과 상황의 교호작용 속에서 전형화 하는 리얼리즘의 이러한 미학적 태도는, 따라서 졸라나 플로베르적인 묘사의 추구가 사태의 본질이나 현상의 역동적인 관계를 외면한다는 관점에서 예술적으로도 질이 떨어진다는 견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자연주의에 대한 도식적 비판이 아무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예술적 양식과 미학적 범주로서의 자연주의적 묘사가 단순히 문학적 기법의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외면으로서의 대상세계에 대한 상호 연관성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19세기적인 사실주의적 묘사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미학적 개념으로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념적 지향이 개체의 심리적 진실보다는 집단적이며 사회적인 범주로 향하는 이 시대에 있어, 작중인물의 심리나 외양(외모로서의 얼굴, 복장, 집, 음식, 색깔, 장신구 등등) 등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가치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사회집단의 공통된 소망뿐만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욕망과 존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대에 있어서, 문학적 이념으로서의 세부진실에 대한 묘사는 매우 긴요한 소설의 미학으로 의미화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근대소설이 보여주는 인물과 대상의 묘사에 대한 문학적 전통은 의외로 소극적인 편이다.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에 묘사된 B사감의 얼굴, 김유정의 소설에서 보이는 외면묘사 등이 우리의 고전소설인 <흥부전>, <춘향전>의 묘사적 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과 춘향의 성희의 세부묘사나 여러 가지 다양한 정밀묘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문과 관심을 충분히 제기해 주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위 인용문에서 마광수가 지적하는 마음이나 공상의 세부묘사 기법은 단순히 기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오늘날의 소설미학이 추구하는 대상세계의 묘사적 진실성을 보여주는 태도로 수용될 수 있다고 본다.
작가가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외형적 장식으로서의 호사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들 인간의 내면과 가치는 무의식 저 밑바닥에 고정되어 침잠 돼 있지만은 않고 의식의 껍질을 부단히 깨뜨리며 외화 되는 과정을 되풀이할 뿐만 아니라, 이 외화된 내면의 심리가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 일상적 인간들의 외모나 장신구, 화장술, 의상, 헤어스타일 등이라고 할 때,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모습은 작품 전체의 주제와 분위기를 풍부하게 형성해 줄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 방식까지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추기경의 옷 색깔, 황제의 장신구뿐만 아니라 일상인들의 평범한 귀걸이, 구두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사람(인물)의 육체를 보완해 주는 일체의 물체들은 굳이 플로베르식의 묘사를 들지 않아도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성격에 소중한 의미를 갖게 한다.
이와 같은 문제가 창작의 주요 모티프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마광수의 첫 장편소설 <권태>는, 작가의 묘사적 기법에 대한 소설적 신념과 대상사물에 대한 심리적 열정이 미학적 등가물로 표현된 페티시즘(fetishism)의 내면세계를 환상적 리얼리즘의 묘사와 서술기법에 의해 그려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권태>는 화자인 ‘나’와 주인공인 ‘희수’가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나 이틀 동안 나누는 환상적 사랑의 카니발을 통해, ‘몽상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가 창출해 내는 ‘관능적 상상력의 해방’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희수’와 그녀의 독특한 개성과 성관(性觀)을 설명해 주는 보조자이면서 또 다른 주인공인 ‘나’, 그리고 희수의 유아적(幼兒的) 에피고넨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소녀 ‘민희(미니)’ 세 사람이다. 희수는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엄청나게 부자인 노(老) 패트론에 의해 생활하는, 똑똑하면서도 ‘나’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을 당당히 즐기는 마조히스트로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나와 희수와의 질탕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즐거운 ‘환상적인 이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일견 인물들 간의 다양한 매개와 관련성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구성상의 도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희수와 나의 성격과 행동 및 취향이 신기하리만치 조화로운 궁합을 갖게 만든 작의(作意)는 독자의 시각을 좀 더 새롭게 요구하고 있다.
분명히 이 작품은 어떤 휴머니즘적 감동이나 사회문명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프로이트적 심리학을 바탕에 깔고 있긴 하지만 프로이트의 ‘변태’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변태’란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의 결과물이이고 창조적 상상력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권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해 온 남성과 여성의 성관을 심리학적 기제 속에서 치밀하게 해부하고 분석하여 성 심리와 성행동의 환상적 원형(原型)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성격과 취향이 학교교육과 가정교육 등의 공식·비공식적 과정을 통해 좋든 나쁘든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 형질이나 남녀 간의 성차(性差)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 ‘권태’를 초극할 수 있는 ‘창조적 변태’의 원형으로 삼고 있는 두 개념소인 ‘마조히즘·사디즘’, 즉 ‘사도마조히즘’은 차라리 생물학적이기까지 하다. 작가는 희수를 창조해 낸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희수는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적 여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똑똑한 마조히스트’의 성격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희수’라는 이름도 ‘喜囚’라는 한자가 연상되도록 만들었다. ‘똑똑한 마조히스트’란 마조히즘이 단순한 복종심리, 또는 힘 앞에 할 수없이 굴복하게 되는 심리가 아니라, 마치 음양의 관계처럼 사디즘과 당당하게 대(對)를 이루는 심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마조히스트를 가리킨다.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들>,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262쪽.)>


작가가 의도한 것의 성취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비평의 기능일 수 있으며, 작가의 주관적 성취와 독자(비평가)의 객관적 성취가 백 퍼센트 완벽하게 한 소설에서 그대로 구현되느냐 하는 것은 분명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철저하게 작가의 욕망의 대리배설이라고 보는 마광수의 소설이론에 비추어 볼 때, 위의 진술은 이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한 참조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완벽한 마조히스트이며 페티시스트인 희수와, 사디스트이며 페티시스트인 나의 심리적 역학관계를 성이라는 행동과 담론 구조 속에서 그려내고자 한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을 처음 대할 때 우선 강렬하고 충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선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묘사력이다. 그리고 그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특이하며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특히 ‘페티시즘’에 관한 것이다. 페티시즘에 관한 소설적 보고서라고도 부제를 붙일만한 이 소설은 작가의 편집증적인 ‘손톱’ 취향을 주축으로 해서, 화자인 ‘나’가 희수의 육체를 성적 매재(媒材)로 삼아 온갖 성적 페티쉬의 환상을 체험하는 심리와 행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페티시즘, 혹은 사도마조히즘의 성 심리를 단순히 작가 자신의 기벽적(奇癖的)인 성 취향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보다 심층적인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 내재되어 있다. 소설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복잡한 심리를 예술적으로 복원해내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때, 작가는 화자인 ‘나’를 프리즘으로 하여 주인공 ‘희수’의 심리를 비추어 해부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페티시즘의 문제를 작중인물, 특히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주인공들의 심리문제와 관련지어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소설의 주요 테마인 ‘사랑’의 문제를, 그가 왜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육체와 대상사물에 투사하여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작가가 이 작품 속에서 희수에게 입고, 붙이고, 걸고, 칠하기를 요구하는 페티시적 욕망의 본질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페티시즘은 원래 물신숭배(物神崇拜)나 주물숭배(呪物崇拜) 또는 고착성욕 등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특히 어떤 물건에 집착하면서 쾌감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든가, 어른들이 이성의 특정한 장신구나 의복 또는 신체 부위 등에 특별히 집착하는 현상 역시 페티시즘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페티시즘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심리를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실적 삶의 고통에 의해 야기되는 인간의 퇴행욕구는 어떤 영원한 물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원초적 소망을 갖게 하며,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강력한 긍정을 하게 만든다. 페티시즘은 그래서 ‘죽음에의 욕구’와 통해 있으며, 따라서 마조히즘과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마광수, <권태>, 문학사상사, 1991, 107쪽.)

마광수의 시 해석에 의하면 유치환의 바위라는 시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중략) 억년 비정의 침묵에/안으로만 안으로만 채찍질하여/(중략)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고 소리하지도 않는 바위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읊고 있다. 이 시의 ‘바위’는 바로 시인 자신이 궁극적으로 소망하여 마지않는 영원불변의 무감각적 물질로서 시적 페티쉬를 이루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전환이며, 곧 ‘생물체’에서 ‘무생물체’로의 존재전이이다. 더 나아가 페티시즘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감’이나 ‘무생물에의 동경’에서 비롯된 ‘중성 지향적 심리’에 그 현실적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생물은 삶과 죽음의 중간입장에 서 있는데, 그것은 곧 남성과 여성의 차별성을 벗어난 ‘행복한 통합’의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남녀양성(hermaphrodite)처럼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남성이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면 인간의 성에 대한 욕구는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심리비평이나 원형비평 등에서 ‘아니무스’나 ‘아니마’의 개념 정도로 인간의 양성지향성을 설명하고 있긴 하다. 플라톤의 우화적 진술대로 너무나도 완벽한 남녀양성의 인간이 제우스신의 질투심 때문에 불행하게도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린 이래, 인간의 이성(異性)에 대한 지향은 그만큼 처절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성(異性)에 대한 집착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인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은 우선 정신보다는 육체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에 대한 욕망은 ‘잃어버린 육체적 완전성’에 대한 회복의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성 심리는 중성적 혹은 양성적 심리를 궁극적인 지향목표로 삼게 되는데, 페티시즘은 바로 이와 같은 심리에 대한 대안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권태>의 ‘나’와 ‘희수’, <광마일기>의 주인공 ‘나’와 女鬼(妖精)들, 그리고 <즐거운 사라>의 한지섭 교수와 사라 등이 모두 헤비 페티시스트들로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페티시즘적 소망(그의 페티시는 ‘손톱’으로 보인다)이 작품 속에 반영된 흔적들이다. 마광수는 여성의 미의식과 ‘치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러워하며 사회제도로 강요된 남녀의 변별성을 거부하고 양성적 나르시시즘을 꿈꾼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닌 상태’로서의 중성적 존재가 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한 중성적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손톱이다. 마광수는 그가 수많은 페티시 가운데서 특히 ‘긴 손톱’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를, 물질과 생명 양자를 포용하는 의미와 유미적 실용주의 및 평화주의, 그리고 양성적 의미로 수용하여 각각 다음과 같이 밝히거나 암시하고 있다.

<손톱은 좀 특별한 종류의 페티쉬(fetish)이다. 손톱은 감각이 없고, 각질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물질에 가깝다. 그러나 손톱은 보통의 물질처럼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씩 자라난다. 그러니까 손톱은 물질적인 성질만이 아니라 약간의 생명력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73쪽)

<몇 초 동안의 오르가즘이 우리의 종족 번식을 이루게 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영생에의 가냘픈 미망을 품게 만들어준다. 저주받을진저, 그 망할 놈의 오르가즘!(…)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오르가즘의 순간을 거부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정 후엔 반드시 권태가 오고, 곧이어 오름가즘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오르가즘을 없애고 사정을 없애버리면, 그리고 성적 결합을 없애고 결혼을 없애버리면 이데올로기도 없어지고 관념의 유희도 없어지고 인과응보도 없어지고 내세도 없어질 것이다.(……) 자연(自然)이 <사정>이라면 인공미(人工美)는 <발기의 지속>이다. 자연은 가난하고, 못생기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은 역시 아름답다. 손톱은 원시시대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무기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손톱은 가학적 무기가 아니라 가학적 아름다움의 심볼로 변했다. <자연의 손톱>은 가고 <인공의 손톱>이 왔다. 자연미보다 인공미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예가 바로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고, 싸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가학적 용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적·관능적 용도를 위해 한껏 길게 기른 손톱이다. 고통과 권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고통과 권태 사이에 존재하는 관능적 오르가즘의 순간을 최대한으로 오래 지속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있어야 과학이 발달하게 된다. 과학은 시적 상상력의 토대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희수의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긴 손톱들을 하나하나 내 입속에다 넣고 쪽쪽 빨아도 보고 핥아도 보았다.>
(<권태>, 235-239쪽)

<아,
꽃들은
얼마나
좋을까

자기 몸
안에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갖고
있으니>

끝에 인용한 시는 마광수의 어느 외로운 날 이라는 시인데, 이 시에서 그는 양성지향성을 모티프로 삼고 꽃에 대한 페티시적 열망을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시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페티시스트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유미적 평화주의와 여성적 ‘인공미’에 대한 열망이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열망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삶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 심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들 일상사에서 고독이나 불안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더 포괄적으로는 권태감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독이나 불안, 권태는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여과과정을 거쳐 성적 페티시와 판타지에 대한 발랄한 상상력으로 구체화된다. 이 점이 마광수의 소설을 기존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변별되게 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앞서 논의의 전제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소설이란 상상적 현실의 재현을 통한 상징적 상상력의 연역적 표현이 가능한 서술 공간이라고 볼 때, 에이브럼즈의 문학해석 좌표 중 표현론적 측면에서 작가의 작의(作意)가 지향하고 의도하는 회로를 인정한다면 마광수 소설 논의의 발생론적 오류는 상당히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권태>는 철저히 낭만적 환상의 프리즘을 통해 페티시즘과 그것의 밑바탕을 이루는 사도마조히즘의 성 심리를 상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희수는 “손톱을 길게 기름으로써 손가락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데 따른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으로 향수하는 여성” (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들>, 앞의 책, 263쪽.)으로 나오는데, 이러한 인물의 성격은 종교에서처럼 철저히 복종하는 것에 만족감을 얻는 완전한 마조히즘의 심리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조히즘은 인간심리의 보편적 양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순명(順命)처럼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상적 삶의 여러 영역에서도 쉽게 발견되고 느껴지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시 <복종>은 아마도 이와 같은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나는 복종을 좋아해요”라고 화자는 진술하면서,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타자화 되는 데서 느껴지는 절대자유의 심리를 역설적 표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절대자유라는 것은 황제가 노예를 부리듯이 주체가 타자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왕이나 황제가 결코 될 수 없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과학이나 철학과 달리 문학은 이것을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서 상상(꿈)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데, <권태>의 ‘희수’가 보여주는 절대복종으로서의 마조히즘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 저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욕망의 보편적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투쟁과 갈등 과정을 극복하고 그 결과물로 무궁한 자유가 얻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물론 현실원칙에 토대를 둔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의 제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의 공동체적 소망에 근거하여 그들의 행복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현실적 투쟁이 끊임없이 요청되는 것이 당연하다. 리얼리즘은 이와 같은 현실문제를 문학의 영역 안에서 이루고자 노력하는 문학 이념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에 대한 창문을 좀 더 활짝 열어젖히고서 밖을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어내는 데는 다양한 상상의 넓이와 깊이가 또한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학의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상상력, 즉 상징적 상상력에 의한 꿈의 자기실현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다.
예술은 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적어도 예술을 감상하는 동안에는 현실의식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로 약속하는 행동이며, 예술의 감상에 있어서도 집중적으로 꿈의 상태에 머무는 훈련을 함으로써 예술의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인훈, <예술이 추구하는 길>, <길에 관한 명상>, 청하, 1989, 199쪽.)
이것은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요망되는 약속이다. 이 약속에 대해 어느 한 쪽이 인정할 수 없을 때 예술, 즉 문학의 원칙이나 효과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예술의 이러한 효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유용하다. 인간의 현실적 행동은 언제나 그 행동에 대한 꿈에서부터 출발하며, 예술이라는 모습에서 묘사된 꿈은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려는 의지를 자극한다. (위의 글, 199쪽.)

물론 예술적 상황과 현실적 상황은 분명히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술 속의 작중현실과 그것이 현실화되는 과정 사이에 어떤 조정 작업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어떤 작품을 해석하고 비판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조정 작업의 실패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수가 많은데, 이럴 경우 예술과 현실 사이에 상호 화해될 수 없는 오해와 혼란만이 가중되어 예술은 현실에 대하여, 그리고 현실은 예술에 대하여 서로 억압과 멍에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의 감상 과정에서 인정한 가치를 우리는 현실 안에서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의 성층권을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우주의 물리법칙에 따라야만 하고, 다시 지구로 귀환할 때는 지구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조정 작업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는 것이 문학·예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은 그 내용의 현실에의 이행여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위의 글, 200쪽.)
예술은 자기가 환상임을 잘 알면서, 이 환상의 영역 안에서 인간이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을 꾼다. 인생이 유한하고 역사에 불가능이 있는 동안은 예술은 인간에게 필수의 위안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억압 없는 행복 (위의 글, 200쪽.)임을 우리가 분명히 자각할 때만이 예술의 현실적 힘은 최대치가 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제든 성적 담론에 관한 것이든 이런 맥락에서는 모두 동일한 것이다. <권태>는 바로 이와 같은 작가의 소망적 사고가 페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의 심리에 대한 탐구를 통해 페티시스트인 ‘나’의 프리즘으로, 무한한 성적 판타지의 즐거움을 ‘희수’와 ‘미니’를 통해 실험해 보고자 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절대 복종만이 역설적으로 그런 자유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마조히즘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들은 철저한 주체적 정신으로 무장한다고 해도 험난한 이 세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운데, 소극적이며 비주체적인 이 마조히즘이 도대체 어떤 현실적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마광수 소설의 인물과 주제를 해석해 내는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또한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비역사적이고 퇴행적이라는 비난을 쉽게 하게 하는 부분이다. 현실적으로 마광수 소설에 대한 기존의 평가가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보다 정치(精緻)한 해석을 통한 평가와 비판만이 올바른 문학이해의 태도라고 볼 때, 그의 소설에서 보이는 그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인물설정과 주제의 모티프에 대한 문학적 설명을 더욱 요청하고 있다.
<권태>에서 희수의 마조히즘은 ‘나’에 의해 온갖 페티시들로 치장되는데, 이 페티시는 앞서도 밝힌 바 있듯이 마조히즘과 융합됨으로써 가장 완벽하게 탈의지적 심리, 즉 ‘가사상태를 통한 생존의 부담감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제이다. 이 탈의지적 심리는 ‘자궁회귀본능’과 관련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자궁회귀본능은 정신적 퇴행현상의 일종으로서, 성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며 살아갈 때 생존의지의 박약으로 말미암아 곧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을 느끼는 잠재심리이다. (마광수, <미의식의 원천으로서의 자궁회귀본능에 대하여>, <마광수 문학론집>, 청하, 1987, 9쪽.)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나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집착들이 바로 ‘자궁회귀본능’의 일종인데, 이것이 그의 소설 속에서는 여주인공의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집요하게 묘사되고 있다. <권태>에서 희수가 치장하는 장신구나 화장, 손톱 등의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심리의 소설적 장치로 기능한다.
‘아름다움’과 ‘자궁회귀본능’은 많은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여주인공의 ‘미모’의 문제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실제로 리얼리즘 문학이 문학의 본령인 것처럼 여겨지는 요즘 소설에서도 여주인공이 미녀로 그려지고 있는 현상을 생각할 때, <권태>에서 과장적으로 그려지는 희수의 외모에 대한 다양한 실험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소설 속의 미녀의 유형에 대해서 마광수는 다음과 같이 밝혀 놓은 바 있다.

<사실 리얼리즘 문학이 문학의 왕도인 양 행세하는 요즘의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여주인공으로 미녀가 나오지 않는 소설이 어디 있었던가? 소설의 여주인공이 꼭 미녀여야 한다는 점은 사실 문학의 기본 요건이라는 개연성(probability)을 상실하고 있는 현상인데도 아무도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미녀>는 대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아주 고귀한 신분의 여자로서 태어날 때부터 노동할 필요가 없는 유형이요, 다른 하나는 비록 신분은 천하더라도 빼어난 미모로 태어난 여인`─`그러나 돈많은 남자의 눈에 띄어 신분이 상승된다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가는 여인이다. 그러므로 미인의 조건은 신분과는 상관없이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으로 일단 정리될 수 있다. (위의 글, 10쪽.)>


그의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설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는 것도 작가의 이와 같은 작의(作意)에 의한 인물 설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즐기기 위하여 인간은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놓아두는 행위, 예컨대 손톱을 길게 길러 신체 활동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일 따위의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를 욕구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미의식의 원천으로서의 ‘자궁회귀본능’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미의식’과 ‘자궁회귀본능’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세 가지 개념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이라고 마광수는 파악한다. (위의 글, 11쪽.)

<권태>에서 희수가 보여주는 높은 굽의 하이힐, 긴 머리카락, 그로테스크한 화장 등 여러 가지 페티시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손톱’이다. 이것은 결국 작가의 ‘미의식’과 ‘자궁회귀본능’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페티시의 총합이 바로 ‘손톱’임을 짐작케 하는 것인데, 그의 손톱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화론적 상징성과 인간 심리의 가시적 표상성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취향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형성된 손톱이 환기시켜 주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가 손톱이라는 페티시 안에 집중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의 정치심리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마조히즘의 속성에 대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정열적으로 권력을 욕구하는 인간은 누군가 자기에게 음식을 먹여주거나 돌보아 주는 꿈 또는 공상을 가진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결국은 자궁회귀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글, 10쪽.)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노예나 시녀들이 먹여주는 음식을 편하게 받아먹기만 해도 되는 의사(擬似) 황제 심리는 자궁 속의 태아의 상태와 흡사한 것이다.

<자궁회귀본능이 <권력의 획득>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었던 전제주의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것이 일반 평민들한테까지도 <미>라는 <고상한 의식>에 부회하여 민주적 이론으로도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남성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도덕적 초자아(super-ego)의 억압 때문에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러한 권력추구본능 또는 자궁회귀본능을, 그러한 초자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적어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본능적 삶에 비교적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성을 통하여 대리해소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글, 12쪽.)>


<권태>의 ‘나’와 ‘희수’가 손톱을 비롯한 여러 페티시들을 통해 보여주는 완벽한 사도마조히즘은 바로 이와 같은 심리의 소설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손톱의 문화 심리적 성격에 대해 데스몬드 모리스는 <Body Watching>의 <손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대와 문화권을 달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육체노동도 할 필요가 없다는 표시로 손톱을 길러 왔다. 이러한 상류신분의 전시행위는 절대로 수고할 필요가 없는 손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 손톱에다 영롱한 물감을 칠해 더욱 돋보이게 한다. 고대 중국이나 이집트에서는 귀족의 남녀가 이런 까닭으로 손톱을 길게 길렀고, 황금으로 칠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일상적인 손놀림을 하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나중에는 새끼손가락에만 전시적(展示的)인 손질을 했을 뿐, 나머지 손가락들은 훨씬 짧게 깎았다. 또 다른 해결 방법으로는 평상시에는 보다 짧게 깍은 손톱을 쓰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적에는 어처구니없게 과장된 아주 긴 가짜 손톱을 끼게 되었다.” (데스먼드 모리스, <바디 워칭>, <마광수문학론집> 12쪽에서 재인용.)

손톱 페티시가 갖는 미학적 측면과 자궁회귀본능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현실주의 시인인 프랑스의 로트레아몽(Lautreamont)도 <말도로르의 노래 (Les Chants de Maldoror)>에서 날카로운 긴 손톱의 가학적 이미지를 표현했듯이, 마광수의 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날카롭고 긴 손톱은 권력욕구의 심층심리인 자궁회귀본능의 미학적 상징물로 기능하는 페티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권태>뿐만 아니라 <광마일기>나 <즐거운 사라>에서 여성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손톱 페티시는 이 작품들 이전에도 작가 자신에 의해 추구되었던 미학적 상징물로서 손톱이나 그 여자의 손톱 등 그의 장·단편(掌·短篇)소설에 등장한 바 있다. 다음 대목을 보자.

<그녀의 번쩍이는 손톱. 나는 다시 손톱을 보자마자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다시 손톱이 생각이 난다. 자꾸 지워 버리려 해도 머리 속에선 계속 길고 번쩍이는 손톱이 오락거린다. 크레오파트라의 발밑에 엎드린 노예, 노예, 그리고 손끝에서 5센티미터나 나와 있는 아주 길게 매니큐어한 손톱. 육체파 배우 스텔라 스티븐스의 긴 손톱 ……. >
(단편 <손톱>(1967) 가운데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 수록)

그의 손톱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1967년에 쓴 단편 <손톱>에서부터 나타나 있다. 그는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손톱’에 집착하여 그것의 상징성을 파헤쳐 나갔고, 그 결과 손톱의 상징은 그의 논문 <미의식의 원천으로서 자궁회귀본능에 대하여>에서 ‘자궁회귀본능’, ‘권력욕’,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 ‘미의식’의 심리적 추이체계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자궁 속의 태아가 되기도 하고 양성적 존재가 되기도 하고 또 삶과 죽음의 중간적 입장에 서기도 하는데,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 올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해방감과 함께 적극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태아나 무생물처럼 ‘권태로운 아름다움’의 상징인 ‘긴 손톱’이다. 긴 손톱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에 의해 우리는 ‘자연미’의 환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창조를 이룰 수 있고, 그러한 ‘인공미’의 창조는 과학발달에 따른 ‘상상의 실제화’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것이 대체로 마광수적 사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권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이와 같은 페티시들이 단순히 손톱, 발톱, 긴 머리카락, 구두, 장신구 등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페티시의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만화경 속의 신비로운 색채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자.

<저 여자의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을 다섯 다발로 나누어 빨강, 노랑, 초록, 보라색 등 오색물감으로 염색을 한다면 얼마나 더 멋있을까. 희뿌연 조명을 받아 더욱 신비로운 호박빛으로 빛나는 맥주를 한 모금 입 속에 털어 넣고 혓바닥으로 질금거리면서, 나는 부질없는 공상에 잠겨보았다.(…)그것은 담황색(淡黃色)이 약간 섞인 불그스레한 색조였다. 지금 저 여자의 머리카락 색깔이 내 눈엔 짙은 브라운 빛깔로 보이긴 하지만 여늬 때 보던 보통 여자들의 흔하디흔한 브라운 빛깔 머리카락은 아닌 것 같다. 조금 청동색 비슷한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고나 할까.(…)그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언젠가 어느 여자와 함께 데이트를 하다가 차를 타고 남산 터널을 통과할 때, 터널 천정에서 떨어지는 오렌지색 불빛을 받아 그 여자 손톱의 빨간색 매니큐어가 보라색으로 변해 보여 신기해 했던 기억이 스치며 지나갔다.(…) 가만있자…… 초록색 조명과 붉은색 조명이 합쳐지면 무슨 빛으로 변하더라. 그래 맞아, 그러면 노란빛이 되지. 그럼 푸른 빛과 붉은 빛이 합쳐지면? (…) 그래 그래, 그건 복숭아 빛이었지…… 그럼 붉은 갈색의 무대의상에 청록색(靑綠色) 조명을 때리면? …… 그건 …… 그건 …… 아마도 갈색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그녀의 머리색은 푸른빛이 약간 감도는 짙은 갈색이다. 얼른 보면 칙칙한 빨강색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실내조명은 담황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것…….(…) 무대에서 암적색으로 보이는 경우는 초록색 의상이나 소도구 등에 붉은 빛 조명을 비췄을 경우다. 그러면 저 여자의 본래 머리빛깔, 아니 염색한 머리 빛깔이 초록색이란 말일까?(…) 아야야……, 아야야…… 초록색 머리카락이라니! …… 그것도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권태>, 38-41쪽)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권태>의 몇 장면만 들춰보아도 여러 가지 색채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화려하게 나타나고 있다. 빨강, 노랑, 초록, 보라색 등 기본 색깔 이외에도 호박빛, 담황색, 청동색, 오렌지색, 복숭아 빛, 청록색, 암갈색, 암적색, 커피색, 분홍색, 황금색 등 시각적 쾌감을 줄 수 있는 색깔의 구체적 이미지를 페티시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이 미술의 색감과 연극의 조명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섬세한 관찰력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시각적 사실성을 보다 선명하게 확보케 하려는 작가의 섬세한 배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근대소설이 이와 같은 색채묘사에 의외로 둔감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묘사는 넓은 의미에서 리얼리즘의 묘사적 구체성을 진지하게 확보한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색채의 연금술적 마술 같은 묘사가 대상사물로서의 페티시에 채색됨으로써 비생명적인 대상에 육신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의 상상력은, 이 작품을 ‘읽는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보는 소설’로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스탕달의 <적과 흑> 제목에 나타난 색채가 그 정신적 고취와 그 시대의 유혹 사이의 긴장 (아지자 외 공저, <문학의 상징·주제 사전>, 청하, 1989, 129쪽.)을 나타내 주는 주제로 읽혀지는 것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묘사의 가능치를 매우 적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서술적 기능보다는 회화적 장면묘사에 더 역점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작품이다.
비단 색채 묘사뿐만 아니라 구두와 의상, 화장술 등에 관한 묘사에서도 그의 이런 노력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리얼리즘의 원래적 의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태』에서 그려진 페티시에 대한 다양하고 감각적인 묘사는 묘사 자체를 넘어서 독자들에게 회화적 만화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의 유미적 낭만성과 상상적 일탈을 통한 대리배설 효과를 무시한 채, 무조건 현실적 도덕과 당위의 잣대만 가지고 마광수의 문학세계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용환 교수 역시 이 점을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권태>는 시인이며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비추어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중인물의 거의 몰염치스럽다 할만치 외잡스런 일상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다루어지고 있는 경험 자체는 분명 몰염치스럽고 외잡스런 것이지만 그러나 <권태>는 몰염치스럽고 외잡스런 문학적 현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의 본격소설이 고수해 온 어떤 전통­인 스토이시즘이랄까 도덕주의의 전통에 <권태>는 충격을 가하고 있지만, 그같은 전통이야말로 한국소설의 정체와 답보의 한 가지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해야 될 것이다. 고착된 도덕주의는 도덕이 가장 나쁘게 자리잡은 모습일는지 모른다. 문학적 사고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에 준엄하고 경건한 온갖 역할, 심지어 혁명가와 사제의 역할까지를 요구하는 완강한 이데올로기에 권위적으로 지배되고 있는 우리의 근래 문학풍토는 자칫 문학적 상상력의 활기있는 실천을 위축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온갖 박해와 고난을 무릅쓰면서 우리시대의 문학적 신념은 의심할 바 없이 정당성을 확립해 냈다. 그러나 이 이념이 <권태>와 같이 외잡스럽지만 대담하고 용기 있는 문학적 현상을 그것이 퇴폐하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이유로 박해하는 또 다른 권위가 되어서는 안되리라 믿는다.>
(<중앙일보>, 1989. 9. 24, <이달의 소설>)

결국 마광수는 <권태>를 통해서, ‘죽음에의 공포’와 ‘죽음에의 욕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머물며 체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간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적 판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현란한 에로티시즘을 통해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작가들이 ‘권태’를 대개 부정적 의미로 수용한데 반하여, 마광수는 그것을 ‘창조적 판타지의 원천’의 의미로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소설을 크게 돋보이게 하는 점인데, 그러면서도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이 ‘창가를 맴돌다 결국 탈출에 실패하는 나방’의 답답하고 우울한 상징처리로 끝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창조적 판타지를 이해 못하고 현실의 우리 안에만 갇혀있는 한국문화의 답답한 폐쇄성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였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권태>의 독창적 의미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1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가벼움의 소설미학과 관능적 위월(違越)의 상상력
--- 마광수의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김성수(연세대 교수, 평론가)


1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권태>(1990), <즐거운 사라>(개정판, 1992), <광마일기>(개정판, 1996), <불안>(1996), <자궁 속으로>(1998)에 이은 마광수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로, 이번 신작은 작가가 오랫동안 일관되게 탐구해 온 성 문학의 독특한 미학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피력한 결정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알만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마광수’라는 이름은 ‘성 문학’과 ‘성 담론’을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뚜렷한 상징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마광수가 소설가로 등단한 시기가 이념이 해체되기 시작한 1980년대 말이었다는 점에서 지난 10여 년간 그를 동심원으로 한 다양한 논의들을 반추해 볼 때 그의 ‘성’에 대한 전위적 실험의식과 일관된 탐구는 이제 어떤 형태로든 평가해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마광수는 1977년 박두진 시인에 의해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등 6편의 시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데뷔한 이래,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등의 시선집을 포함한 4권의 시집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 등 7권의 에세이집, 그리고 <사라를 위한 변명>(1994) 등 2권의 문화비평집을 펴낸 바 있다. 또한 그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연재하면서부터 소설가로 등단하여 이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이르기까지 모두 6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하였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지난 10여 년 동안 축적된 마광수 문학의 미학과 철학이 온축된 ‘결정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첫 장편 <권태>가 소설의 묘사 문제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신념과 함께 대상 사물에 대한 심리적 열정이 미학적 등가물로 표현된 페티시즘(fetishism)의 내면세계를 환상적 리얼리즘의 묘사와 서술기법에 의해 그려낸 소설이라면, <즐거운 사라>는 사실주의 기법에 의해 20대 초반의 자유분방한 여대생의 연애 심리와 성에 대한 ‘학습욕구’라는 심리적 메카니즘의 미묘한 떨림을 경쾌한 문체로 그린 일종의 연애 성장소설이다. 또한 <광마일기>에서는 고전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양식적 실험을 통해 현실과 꿈 사이의 분방한 상상을 경쾌한 문체로 형상화하였으며, <불안>은 회화적인 기법을 원용하여 ‘긴 손톱’을 중심 모티프로 삼아 불안의 미학과 사도마조히즘의 이미지에 대한 영상 미학적 형식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성향의 작가가 옛 애인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열정을 배틋한 허무의 정조로 그리면서, 자신의 작품 때문에 사법적 검열과 구속을 당하는 ‘필화 사건’(작가의 실제 체험이기도 한)을 통해 두 개의 ‘자궁 속’ 세계(여기서 ‘자궁 속’이란 여인의 ‘품 속’과 ‘감옥’이라는 중의적 이미지를 함께 갖고 있다)를 형상화한 <자궁 속으로>는 <즐거운 사라>와 함께 일반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사실주의)적 작법을 충실하게 활용한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권태>로부터 장편 에세이 <인간>(1999)에 이르기까지 시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지난 10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온 마광수의 문학적 화두로서의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 미학이 종합적으로 결산되어 나온 작품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이다. 이 소설은 아랍 민중들의 이야기 모음집인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로도 번역되는)의 탁월한 이야기꾼 세헤라자데를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나오는 ‘램프’의 마신(魔神)으로 대체하여, 화자인 ‘나’(혹은 ‘나’의 여러 분신)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서고금의 미인과 에로틱한 ‘여귀(女鬼)’들과 어울려 ‘사도마조히즘’의 환상적 쾌락을 즐기기도 하고, 그녀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느낀 현실과 상상의 허무한 정조를 그린 옴니버스 형식의 이야기이다. 램프의 요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헤라자데와의 교합뿐만 아니라, 그녀의 도움으로 온갖 성적 쾌락과 시공을 넘나들며 꿈과 환상 속에서 겪고 들은 이야기인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낭만적 자유정신에 기반한 52가지의 성적 판타지와 그로테스크 미학이 총천연색의 페티시즘으로 형상화된 옴니버스 스타일의 독특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2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소설 제목에서 금세 우리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우리는 현실중심의 인생관과 육체적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배우게 된다. 서양의 교훈적이고 정신주의적인 문학 작품들에 비하여 이 책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인간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면, 쾌락을 강조하는 것이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그 쾌락이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쾌락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낭만적 공상’으로서의 쾌락이 현실에서 실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곧 인간의 무한한 창조적 상상력과 결부되어 실제적 진보와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실재화(實在化)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과학이 더욱 발달되면 우리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들같이 수많은 미녀 로보트(인간과 똑같이 닮은)들을 부려가며, 손하나 까딱 않고 쾌락만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노동은 절대로 신성한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흑백논리적 맹종에서 비롯되는 ‘전쟁’이 우리 지구촌을 전멸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호전적인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비관적 리얼리즘은 퇴폐적 낭만주의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건전한 쾌락주의와 성 해방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상상적인 환락의 신비경(神秘境)을 실제로 실현시킬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63~65쪽)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아리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여 패러디하고, 거기에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뾰족한 ‘손톱’이나 ‘하이힐’, ‘머리카락’과 ‘장신구’ 페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관능적 판타지를 52개의 짧은 이야기사슬로 구성한 소설이다. 일반적으로 장편소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큰 주제 밑에 부속된 부차적이고 다양한 사건을 겪어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큰 주제를 긴 시간 속에서 해결하는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다. 거기엔 대체로 인과적 개연성과 인물들간의 갈등, 역사철학적 이념이 라는 여러 요소들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이와 비교할 때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장편소설이 갖고 있는 기존의 관행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각 장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짤막한 소품들의 연쇄다발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장편소설처럼 사건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거나 갈등을 축적시켜 해소시키는 과정을 밟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1장부터 52장까지 배열된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이야기나 자유롭게 선택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소설의 시간 구성은 화자가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 나온 시점부터 복권이 되어 다시 학교에 복직하는 때까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인과적 연결성을 그다지 요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처음 이야기인 <아라베스크>로부터 마지막 이야기인 <갈매기의 꿈>에 이르기까지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하여 전능한 조력자인 램프의 요정 ‘세헤라자데’와 함께(없는 경우도 있다) 작품 속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다양한 인물로 변신하고 분신을 만들어 이야기를 만들고 이끌어 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직접 진술이 중간중간 개입하여 ‘작의(作意)’를 설명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소설의 형식을 취했는지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 그래서 나는 옴니버스 스타일의 이 소설을 더 전개해 나가기에 앞서, 우선 흔해 빠진 ‘미녀와 거지’ 스토리를 내 나름대로 각색한 단편소설 하나를 소개하여 이 소설의 재미를 ‘가벼움의 미학’으로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나는 원래 소설을 쓸 때 스토리보다는 쉬운 구어체의 문장(또는 ‘입심’)에 더 신경을 쓰고, 문장 가운데서도 묘사문에 신경을 쓴다. 글이란 결국 ‘문장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재나 주제보다는 ‘어떻게 썼느냐’를 더 중요시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앞의 이야기나 다음에 들려드릴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읽어나가면서, 너무 소재나 주제(거창하게 말하면 ‘사상’)에 집착하지 말아주시기를 독자들께 부탁드리고 싶다.(…)
나는 모든 소설은 결국 스토리나 구성이 재미를 가져다주기보다는, 작가의‘끼’에 의한 ‘반복적 집착’과 ‘입심’이 재미를 가져다준다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본능을 솔직하게 카타르시스(대리배설)시킬 수 있는 얘기를, 내 나름대로 변주(變奏)하여 뻥튀기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심산으로 있다.]
(<‘부마 콤플렉스’ 생각>, 1권, 42~43쪽)

서사학의 바이블로 평가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결국 비극의 선적(線的) ‘구성(plot)’에 관한 것이며, 프라이탁(Freytag)의 ‘피라밋단계론’을 모태로 하는 전통적 구성도 인과적 개연성에 기초를 둔 사건의 점진적 발전과 해결을 독자나 관객의 심리적 추이에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이론이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이 발전·파국의 구성단계론과 스토리텔링의 형식에 별로 구애받지 않고 ‘가벼움의 미학’과 ‘구어체 문장’으로 자유롭게 인물과 배경과 부분의 치밀한 ‘묘사’에 주력하겠다는 것이 이 소설의 창작방법임을 작가는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 전체를 통어하는 방법과 형식은 ‘옴니버스(omnibus)’ 스타일과 구어체의 문장, 그리고 대상에 대한 치밀한 세부 묘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옴니버스 스타일이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짜서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8~13세기 아라비아의 익조티시즘(exoticism)과 육체적 쾌락(하렘의 여인인 ‘오달리스크’나 배꼽춤인 ‘벨리댄스’)의 무애(無碍)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 <아라비안 나이트>의 분위기를 주조음으로 하고, 거기에다 에로틱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램프’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의 야하디야한 관능적 상상을 마음껏 발산해 내는 형식의 소설이다. 특히 첫 이야기인 ‘아라베스크’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얼개와 무늬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라비아 풍의 공예품이나 건축 장식 등에 쓰인 기하학적 무늬를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하는데,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신기한 램프’가 연기처럼 뿜어내는 아라베스크적 경향의 에로틱한 상상들의 직조(織造)에 의해 작품 전편의 분위기가 흘러간다. 아라베스크 소설은 시적이며 몽환에 가까운 산문들로 주로 신비의 세계와 공상에 가까운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라고 할 때, 화자인 ‘나’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인물들(<황진이>, <색희(色姬)와 양귀비>, <다시 육림(肉林) 속으로>, <쾌락의 별궁에서> 등)을 만난다거나, 비현실적 시공간(<아라베스크>, <즐거운 왕국>, <그림 속에서>, <서기 3000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샹그릴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을 넘나들며 벌이는 사랑의 몽환경이야말로 이 소설의 이야기 내용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는 ‘가벼움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 우리 나라의 현대 소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거움의 미학’으로만 일관해 왔다. 나는 교훈주의를 바탕에 깐 경건주의가 우리 나라 현대 소설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거운 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벼운 소설’을 경시하거나 폄하하면서 ‘무거운 소설’만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사라를 위한 변명>, 138쪽)

동양문학의 문체나 주제는 무거운 사상성을 위주로 하는 서구 문학의 분위기와는 달리 ‘가벼운 소설’에 그 정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 가령 <흥부전>과 <춘향전> 등에서 보이는 걸직한 육담이나 해학적 표현, 그리고 김유정이나 채만식 등의 소설에서 보이는 골계미나 풍자는 바로 내용적인 면에서 현실의 억압과 구속을 형식적으로나마 극복해보려고 하는 데서 나온 서사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같은 전기소설에서 보이는 몽환적 세계의 유현한 분위기 또한 무거운 현실을 가벼움의 소설 형식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볼 때, 작가가 말하는 ‘가벼운 소설’은 현실적 질곡의 무거운 무게를 가상적 현실 속에서나마 극복하고 풀어내려는 서사미학적 요청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가 <광마일기>나 이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전기소설적 형식을 원용한 의도는, 오늘의 한국문학적 풍토가 지나치게 이념 일변도의 ‘무거운 주제’만을 ‘무겁게’ 다루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동 의식의 실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문학이론에 대한 입장, 즉 동양문학론에 기초한 문학의 이해방식과 대체로 일치한다. 말하자면 마광수는 자신의 문학이론서인 <상징시학>에서, ‘재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보다는 ‘표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을 강조한 바 있는데, 그와 같은 이론과 논리가 소설창작 과정에서도 ‘가벼움의 미학’이라는 방법론을 생성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가벼운 소설’은 또한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된다. ‘무거운 소설’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가벼운 소설’은 다소 위악적(僞惡的)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거운 소설은 작가가 철학자나 사제(司祭) 같은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요, 가벼운 소설은 작가가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위의 책, 138쪽)

앞서도 말한 것처럼 문학이 독자들에게 진리나 교훈을 주지 않더라도 미적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개연성 있고 박진감 있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가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을 ‘무거운 소설’의 범주에 넣고, ‘작가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을 ‘가벼운 소설’로 분류하고 있는 태도는 현대적 관점에서 재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가벼움이 경박함이나 천박함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할 때 고전소설, 특히 전기소설 속에 나타나는 문체나 주제의 ‘가벼움’을 그가 이미 <광마일기>에서 활용한 바 있고, 이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여러 편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이런 미학에 근거한 것이다.
작가가 모든 문학 작품을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를 둔 ‘인공적인 꿈’이라고 보는 한에서, 우리는 앞의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소설 미학적 진술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인공적인 꿈’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장치들이 구성의 절묘함과 함께 소설 전체의 유쾌한 재미성을 받쳐 주고 있는 것이다. 서구 문학이론의 눈으로 마광수의 소설을 볼 때, 구성의 입체성이나 갈등의 양상이 아예 없거나 약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동양문학의 전통과 작가의 독특한 소설 미학적 관심에 바탕을 둔 소설 양식을 의도적으로 실험하려는 데서 나온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여러 편을 읽어보아도 동양적 소설미학에 서구적 묘사법을 가미하여 동서양 문학의 상승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어 훨씬 폭넓은 재미와 박진감을 자아내고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작가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현실과 상상 속을 넘나들며 <아라비안 나이트> 같이 다양한 성희(性戱)의 즐거움을 묘사하여 쾌락주의적 인생관을 강조하는 한편, 그 이면에는 죽어도 죽어지지 않는 인생을 시니컬하게 조망하거나(<X의 이야기>), 무섭고 불투명한 인생의 비참한 운명(<인생살이>)과 권태롭고 허무한 인생(<개미>)을 그리고, 거기에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다소 가미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관능적 상상이라고 해서 꼭 ‘쾌락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한 가지 덧붙일 말은, ‘관능적 상상’이란 반드시 즐겁고 쾌락한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관능적 상상은 곧 ‘야(野)한 상상’이므로 슬픈 것이 들어갈 수도 있다. 야(野)한 자연(自然) 속에서는 언제나 쾌락과 고통이 엇갈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생각>, 1권 63쪽)

<권태>를 비롯하여 <광마일기>와 <즐거운 사라>는 물론,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인물로, 우리 근대소설의 인물들과 비교할 때 유니크한 특징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인물 창조는 작가의 문학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문학의 근본적 창작 동기를 ‘판타지의 창조’에 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념지향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실비판과 전망의 제시보다, 낭만적 환상에 바탕을 둔 소설의 분위기를 추구한다. 사실 이 점이 그의 소설을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꼭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고 하는 말에도 나는 찬동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작품은 다 <리얼>한 것이다. 낭만적 환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 수법은 환상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해 내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물론 요즘 주장되는 리얼리즘은 <묘사론>적 기법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긴 하지만, 아무튼 인간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든, 환타지에 의한 공상에 의한 것이든─을 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와 별차이가 없다고 본다.]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권태> 후기)

[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그것이 ‘관능적 상상력’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상상은 언제나 실제화(實際化)되게 마련이고, 그래서 과학의 발달이나 인권신장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관능적 상상력을 모티프로 한 시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가는 내 손으로 새로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얘기 를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얻는 것이로로말 모든 인간의 궁극적 소원이요, 갈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달픈 현실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마음대로 못하면서, 숨소리조차 죽여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기에 딱했다. 그리고 상상을 단죄하기까지하는 이 나라의 참담한 현실에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해서, 소설로나마 그들을 위로해주고 나 또한 대리만족(또는 대리배설)의 효과를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다시금 정독해 나가는 동안, 요술 램프를 얻는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 이야기의 기본 모티프는 물론 바보 같은 ‘부마 콤플렉스’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알라딘이 요술램프를 얻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만큼은, 우리가 돈·섹스·명예 등 실제적인 행복과, 나아가서는 인권신장과 분배정의(分配正義)의 실현, 또는 진짜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를 성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생각>, 1권, 59~60쪽)

그는 이념적 지향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그것은 앞서 밝힌 바 있듯이 자신의 소설적 입장에 대한 뚜렷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묘사적’ 기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매우 적극적 입장을 취한다. 그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심리적·외면적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묘사’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사가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 의도 속에서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아울러 파악해야만 한다.


3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핵심 모티프 가운데 하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현란한 머리카락, 송곳처럼 뾰족한 하이힐, 육체를 치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장신구가 연출하는 그로테스크의 미(美)에 화자인 ‘나’가 ‘페티시즘’의 심리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페티시즘이란 말하자면 그로테스크 미의 상징적 극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페티시즘의 대상은 예외 없이 비현실적이고, 괴기스럽고, 유현미(幽玄美) 넘치는 관능적 심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페티시즘의 미적 승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61쪽). 첫 장편 <권태>와 마찬가지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도 상상의 램프를 마찰시켜 온갖 종류의 페티쉬(fetish:미적 고착 심리의 대상)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페티시즘에 관한 교과서라고도 부제를 붙일만한 소설이다. 특히 이 소설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손톱’ 취향을 축으로 해서 온갖 성적 페티쉬의 환상을 체험하는 작가의 심리와 행위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페티시즘의 심리를 단순히 작가 자신의 성적 기벽(奇癖) 취미로만 이해해서는 이 소설의 본의(本意)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거기에는 보다 심층적인 인간 심리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 개입되어 있다.
소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복잡한 심리를 예술적으로 복원해내어 이해하려는 노력의 한 가지 소산으로, 작가는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를 프리즘으로 하여 여러 가공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구현하는 성적 취향과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를 페티쉬를 통해 그리고 있다. 따라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페티시즘의 문제는 작중인물, 특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심리와 여성 인물들의 심리문제와 관련지어 함께 생각할 때 이해될 수 있다.

[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 워 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새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볼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인간의 가학성이 미의식과 합치되어 아름다운 환타지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류의 평화, 전쟁이 없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감정과 사상, 관념과 사물의 대립을 지양하고 그것을 생동력 있게 통일시킬 수 있는 근원적 에너지가 바로 ‘환타지’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관념적 사랑이 아닌 성애적(性愛的) 사랑이 합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당당한 쾌락추구에 기초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이나 높은 뾰족구두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등, 서양식 페티시즘(fetishism)에 대한 동경이 남달리 강했다. 나는 한복을 입은 여자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앞가리마를 타고 곱게 쪽을 찐 머리에 오이 씨 같은 버선, 그리고 흰 목이 날렵하게 드러나는 저고리의 동정 선(線) 등을 통해 페티시즘적 감흥에 빠져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황진이>, 1권 195쪽)

페티시즘은 원래 물신숭배(物神崇拜)나 주물숭배(呪物崇拜) 또는 고착성욕 등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특히 어떤 물건에 집착하면서 쾌감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든가, 어른들이 이성의 특정한 장신구나 의복 또는 신체 부위 등에 특별히 집착하는 현상 역시 페티시즘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페티시즘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심리를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실적 삶의 고통에 의해 야기되는 인간의 퇴행욕구는 어떤 영원한 물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원초적 소망을 갖게 하며,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강력한 긍정을 하게 만든다. 페티시즘은 그래서 ‘죽음에의 욕구’와 통해 있으며, 따라서 마조히즘과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전환이며, 곧 ‘생물체’에서 ‘무생물체’로의 존재전이이다. 가령, 벤야민적 관점에서 자살은 “비유기적인 사물에의 궁극적 감정이입”(유진 런,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이라고 할 때, 그것은 페티시즘의 극치를 이루는 심리적 양상의 한 형태를 구성한다. 타자에 의해 물질적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무생물로 돌아가 영원히 안주하고 싶어하는 심리, 즉 살아있는 육체가 아닌 무생물적 물질에 대한 집착이 페티시즘이다. 더 나아가 페티시즘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감’이나 ‘무생물에의 동경’에서 비롯된 ‘중성지향적 심리’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생물은 삶과 죽음의 중간입장에 서 있는데, 그것은 곧 남성과 여성의 차별성을 벗어난 ‘행복한 통합’의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남녀양성(hermaphrodite)처럼 남성과 여성이 한 몸 안에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면 인간의 이성(異性)에 대한 욕구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무스(Animus)’나 ‘아니마(Anima)’는 그런 심리 현상의 근원을 잘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12장 <어떤 만남>에 진술되어 있는 것처럼, “내 잠재의식 깊숙이 숨어 있던 여성다움에 대한 동경”(1권, 246쪽)인 ‘아니마(Anima)’ 같은 것도 남녀양성이나 중성지향 심리의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성(異性)에 대한 집착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인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은 우선 정신보다는 육체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에 대한 욕망은 ‘잃어버린 육체적 완전성’에 대한 회복의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성심리는 중성적 혹은 양성적 심리를 궁극적인 지향목표로 삼게 된다. 페티시즘은 바로 이와 같은 심리에 대한 대안적 욕망인 것이다.
또한 화자는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닌 상태’로서의 중성적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중성적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손톱’이다. 작가는 수많은 페티쉬 가운데서 특히 ‘긴 손톱’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를, 물질과 생명 양자를 포용하는 의미와 유미적 실용주의 및 평화주의, 그리고 양성적 의미로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옆의 남자가 설명해주기를, 탐미적 에로티시즘만큼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것은 없다는 거야. 남자건 여자건 머리를 짧게 깎아놓으면 다들 마음이 전투적으로 된다는 거지. 그리고 손톱을 길게 기르고 정성껏 가구는 사람은, 손톱이 부러지는 게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남을 할퀴지 않는다는 거야. 듣던 중 꽤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지.”]
(<너 죽어봤니?>, 1권 340쪽)

<권태>의 ‘나’와 ‘희수’, <광마일기>의 주인공 ‘나’와 ‘요정(妖精)들’, 그리고 <즐거운 사라>의 한지섭 교수와 ‘사라’,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나오는 세헤라자데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모두 지독한 페티시스트들로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페티시즘적 소망(그의 페티쉬는 길고 뾰족한 ‘손톱’이다)이 작품 속에 반영된 흔적들이다. 작가는 여성의 미의식과 ‘치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러워하며 사회제도로 강요된 남녀의 변별성을 거부하고 양성적 나르시시즘을 꿈꾼다. 화자는 <즐거운 왕국>, <남근석(男根石)의 최후>,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에서 앞으로의 사회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게 될 지도 모른다며 남성의 위축과 몰락을 에측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 지금까지의 사회제도는 남성들을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이 아름다움을 가꿀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여성 같은 화사한 몸매를 갖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여장남성(女裝男性)들의 수효가 급증하는 추세에 있는데, 이는‘남성해방운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반드시 용감해야 하고, 투박한 육체를 가져야 하고, 힘이 세야 한다는 사실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황진이>, 1권 221쪽)

이처럼 화자와 소설 속의 여성들이 모두 페티시스트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유미적 평화주의와 여성적 ‘인공미’에 대한 열망이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열망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삶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심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은 일상사에서 고독이나 불안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거나, 더 포괄적으로는 권태감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독이나 불안, 권태는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여과과정을 거쳐 성적 페티쉬와 판타지에 대한 발랄한 상상력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이 마광수의 소설을 기존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변별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손톱 페티쉬가 갖는 미학적 측면과 자궁회귀본능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현실주의 시인인 프랑스의 로트레아몽(Lautreamont)도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에서 날카로운 긴 손톱의 가학적 이미지를 표현했듯이, 마광수의 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날카롭고 긴 손톱은 권력욕구의 심층심리인 자궁회귀본능의 미학적 상징물로 기능하는 페티쉬라고 할 수 있다. <권태>뿐만 아니라 <광마일기>나 <즐거운 사라>를 거쳐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나’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여성 인물이 치장하고 있는 손톱 페티쉬는 이 작품들 이전에도 작가 자신에 의해 추구되었던 미학적 상징물로서 <손톱>에 잘 그려져 있다.
그의 손톱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1967년에 쓴 단편 <손톱>에서부터 나타난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50장 <손톱>에도 그려져 있듯이 그는 오랫동안 ‘손톱’에 집착하여 그것의 상징성을 파헤쳐 나갔고, 그 결과 손톱의 상징은 그의 논문 <미의식의 원천으로서 자궁회귀본능에 대하여>에서 ‘자궁회귀본능’, ‘권력욕’,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미의식’의 심리적 추이체계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이와 같은 페티쉬들이 단순히 손톱, 발톱, 긴 머리카락, 구두, 장신구 등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 이미지를 통해 재차 환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페티쉬의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만화경 속의 신비로운 색채적 환상을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근대소설이 이와 같은 색채묘사에 의외로 둔감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작품에 보이는 색채묘사는 넓은 의미에서 리얼리즘의 묘사적 구체성을 진지하게 확보한 것으로 보아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색채의 연금술적 마술 같은 묘사가 대상사물로서의 페티쉬에 채색됨으로써 비생명적인 대상에 육신을 불어넣으려는 듯한 작가의 상상력은, 이 작품을 ‘읽는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보는 소설’로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묘사의 가능치를 매우 적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서술적 기능보다는 회화적 장면묘사나 그림에 더 치중하고 있다. 23장 <그림 속에서>나 24장 <초상화>에서 현실과 그림 속의 비현실을 중첩시켜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현실을 초월한 몽상적 판타지와 황홀한 로맨스를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그려진 다양하고 감각적인 페티쉬 묘사는 묘사 그 자체를 넘어서 독자들에게 회화적 만화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매우 유니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로 평가할 수 있다.

4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의 본류는 주인공이 램프의 요정 세헤라자데를 매개로 시공을 넘나들며 몽환적 에로티시즘의 다양한 진경을 음미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렌즈의 초점을 조금 먼 곳에 맞춰 조망해 보면 이 소설은 작가가 체험한 현실의 비이성적 폭력에 대해서도 풍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장 <아라베스크>에 나타나 있듯이,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지나치게 야하다(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형사범 취급을 받고 급기야 현행범으로 구속되어 감옥 생활까지 하게 된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광수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궁 속으로>에서도, 작품이 야하다는 이유로 주인공(이 작품에서 주인공 ‘박민우’는 곧 작가 자신이다)인 작가를 반 국가사범으로 기소하여 구속하는 사법 당국의 반 성적 문화탄압과 작가의 상상력을 억누르는 우리 사회의 위선적 이중 구조에 대해 희화적으로 풍자한 바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제일 바깥 동심원에서 작가가 작품을 응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사법기관의 음험한 시선이나 유교 이데올로기를 전범(典範)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의 보이지 않는 감시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다소 격앙된 어조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과 상황은 “당시 언론의 하이에나 같은 작태와 꽉 막힌 지식인들의 비이성적 마녀사냥”(1권 13쪽)이다. 사법부의 황당한 법 집행과, 그로 인해 자신이 일하던 직장에서 해직되고, 사회에서조차 버림받는 등 교권과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한 데 대한 울화가 이 소설의 창작 동인이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의 심리적 대리배설은 <아라베스크> 이외에도 <램프의 요정> 등 작품 곳곳에서 화자의 우울한 정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전편을 통해서 작가의 그런 심리가 가장 역설적으로 풍자되고 있는 곳은 13장 <심각해 씨의 비극>이다. 작가가 직설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런 심리적 정황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 <즐거운 사라>가 형법상의 유죄라고 판결한 법원의 판결문 가운데는, 사라가 여자 친구와 재미삼아 동성애적 애무를 한번 연습해 보는 장면을 묘사한 몇 줄이 유죄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사라가 오럴 섹스나 자위행위를 하는 장면조차 유죄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라잉게임> 같은 동성애 영화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같은 항문성교 영화는 수입을 허가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자위행위나 오럴섹스조차 안 된다는 판결은 아무래도 기막힌 아이러니요 난센스였다. 도대체가 형평성도 없고 기준도 없었다. 권위주의적 강제(强制)와 비합리적 획일주의만 난무하는 것이 바로 이 땅의 현실이었다. 성문제에 대한 논란 이전에 인권보장이나 자유권 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합리적 지성’이 부재(不在)하는 윤리적 전제(專制) 시대의 질곡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심각해 씨의 비극>, 1권 249-250쪽)


<심각해 씨의 비극>은 현재가 아니라 22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실화에 대해 세헤라자데가 주인인 ‘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나’(주인님, 즉 작가 자신)와 정반대의 상황에서 고초를 겪은 대학 교수의 이야기이다. 20세기 말의 M교수 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한 성 개방이 이루어져 정신적 섹스와 육체적 섹스를 분리하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혀는 식사 및 섹스에 있어 동일한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결코 변태가 아니라 일반적 통념으로 인정된 사회에서 Y대학 성과학대학(性科學大學) 용설학과(用舌學科) 교수인 ‘심각해’가 <이성(理性)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 책의 내용은 정신으로서의 이성적 사랑과 성행위 시 혀를 사용하는 육체적 사랑을 분리하는 이론, 즉 “섹스행위 때 사용되는 혀는 먹는 행위 때 사용되는 혀와는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섹스행위 때 사용되는 혀에는 반드시 정신적 사랑, 즉 다시 말해서 ‘이성적 합일(合一)로서의 사랑이 심리적 동인(動因)으로 추가된다.”(1권, 252쪽)는 것이다. 자신의 새로운 학설 때문에 기성 학계나 권력층, 그리고 일부 독자들의 분노를 사는 한편, 풍속을 심각하게 위협할 사회의 암적 존재로 지목되고, 결국 ‘사회의 안위를 해치는 불온한 사고방식의 유포’에 해당되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는 이야기이다. 이런 설정은 ‘심각해 교수’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즐거운 사라>에서 묘사했다는 이유로 1992년 사법 당국에 의해 실제로 구속되기까지 했던 작가의 실제 체험을 180도 뒤집어 풍자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결국, 심각해 교수와는 정반대의 죄명으로 정죄당한 작가 자신의 뼈저린 체험과 울화와 우울이 역설적으로 풍자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심각해 씨의 비극>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법(法)’에 대한 풍자는 19장 <색희(色姬)와 양귀비>와 20장 <X의 이야기>에서도 계속된다. 죄업이 워낙 커 좋은 곳에 환생하지 못하고 아프리카의 우간다에 다시 태어날 운명에 처한 양귀비가 ‘나’와 즐기기 위해 태어날 날짜를 연기시키면서까지 호송을 맡은 귀졸(鬼卒)을 돈으로 매수한다. 죽어서도 뇌물이 통하고 명부(冥府)의 염라대왕조차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풍자를 화자는 전생의 일을 5대(代)까지 기억하고 있는 친구 X를 통해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친구 X의 이야기에 의하면, 공평무사해야 할 저승의 염라대왕은 물론이거니와 <색희와 양귀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법을 집행하는 ‘귀졸’조차도 뇌물을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과 독단에 쏠리고, 돈 있고 힘 있는 자에겐 관대하고 힘없는 자에겐 사디스틱한 게 바로 법관이요 염라대왕”(2권 11~12쪽)이라는 것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법의 여신 ‘디케’가 온전하게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양손에 ‘저울’과 ‘칼’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울은 내려놓고 서슬 푸른 칼만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을 작가는 저승의 염라대왕과 귀졸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물론 작가가 정의를 수호하는 법의 숭고한 정신에 대해 무조건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양심과 표현의 자유에까지 권력 기관의 하수인이 되어 칼날을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르는 법의 남용과 월권이다.
이 소설에서 풍자하고 있는 것은 비단 ‘법’만이 아니다. <남근석(男根石)의 최후>에서는 SF판타지의 만화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여자는 고위층이나 자본가들이 사육하는 애완동물”이 돼 버린 황량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남자도 여자의 자궁에서 나온 이상 미래는 여성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함으로써 남성(男性)을 상징하는 ‘남근석’의 몰락을 통해 자본주의와 성(性) 사이의 관계를 냉소적으로 풍자한다. 43장 <신선이 되기까지>에서는 젊은 수도자와 늙은 수도자가 신선이 되기 위해 마지막 관문인 육욕(肉慾)의 시험에 들게 된다. 젊은 수도자는 육욕을 못 이겨 파계를 각오하고 여인과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신선이 된 반면, 육욕의 시험을 참고 이겨 낸 늙은 수도자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늙은 수도자는 젊은 수도자의 도움으로 겨우 반쪽만의 신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육욕을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표출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요컨대 작가는 늙은 수도자의 경우를 모티프로 삼아 위선적 금욕주의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5

마광수의 소설은 이른바 ‘허구성’과 ‘개연성’을 기본 원리로 채택하여 자유롭고 낭만적인 상상을 통해 인간과 성의 문제를 주로 다양한 성 심리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벼움의 미학’에 토대를 둔 ‘묘사적’ 리얼리즘 기법과, 만화적 상상력과 낭만적 판타지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리얼리즘의 미학과는 다른 독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그가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 대신 ‘묘사적’ 기법의 리얼리즘으로 인물이나 대상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인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이성적인 것이든 판타지에 의한 공상에 속하는 것이든 모두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그와 같은 생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한 상황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광수 소설의 창작 정신과 방법론은 관능적 상상력에 토대를 둔 낭만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히 상징적 상상력의 실제적 효용과 문학적 카타르시스(대리배설)의 구체적 적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마광수의 문학관과 소설세계는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소설의 리얼리즘적 전통 속에서는 아웃사이더로 평가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소설세계는 의외로 동양적 문학 전통, 특히 우리의 고전소설 전통인 전기성(傳奇性)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소설 전통에 근접해 있다는 점을 여러 모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인간의 근본 심리를 기본 모티프로 하여 다양하고 현란한 페티시즘의 묘사를 통해 낭만적 판타지를 능란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을 억압하는 법과 도덕과 문화의 위선적 이중구조를 풍자하고 있다. 이전 작품에서도 그랬듯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작가가 특히 강조하여 묘사하고 있는 페티시즘의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구의 근대 소설적 전통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세계를 일구어 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작 장편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성적 대상물로서의 페티시를 단순하게 제시하거나 나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치밀한 형체 묘사와 색채 묘사를 덧붙여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심리와 연결시키고 있어, 실로 회화적 묘사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 낸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권태>와 <광마일기>를 포함하여 이번에 내놓은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마광수 문학의 형식과 정신을 선명하게 압축하여 보여주는 조감도이자 결산서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시공간을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즐거운 사라>나 <자궁 속으로>에서처럼 ‘현실’을 배경으로 했을 때 관능적 위월(違越)의 상상력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