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광수 소설 <권태>의 페티시즘과 유미적 상상력 >
김성수(문학평론가·연세대교수)
1. 머리말 : 논의의 전제
문학(예술)은 현실의 질료를 원료로, 그리고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삶의 긴장과 억압을 풀어내고 끊임없이 욕망의 새 지평을 밝혀주는 거울이면서 램프이다. M. H. 에이브럼즈의 구분처럼, 현실을 기계적으로 객관화하고 외면화하는 고전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거울이며, 창조적 주관성의 상징으로 현실을 주관화하고 내면화하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램프이다. (임철규, <왜 유토피아인가>, 민음사, 1994, 317쪽.) 현실을 구심성의 원리로 파악하는 문학은 그래서 그 제한된 폭과 깊이에 인간 삶의 무수한 상(像)을 담기 위해 전형성과 보편성의 원리를 채택하는 반면, 현실의 경계를 원심성의 원리에 의해 벗어나려는 문학은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향하게 된다. 이 점은 우리들이 세계를 에토스적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파토스적으로 수용할 것인지를 요청하는 형식(미학)의 문제와 관련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문학이 일차적으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때 그 반영의 매개물인 ‘거울’은 어떤 성질의 물체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는 결국 서양 문학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매우 중요한 논의를 유발시켜 온 본질적 문제이기도 했다. 거울에 비치는 현실의 어떤 상(像)은 그것이 평면거울이냐 아니면 ‘오목·볼록’ 거울이냐에 따라서 그 형체가 사뭇 달라진다. 또한 다면체의 거울 속에서도 그 형상은 원래의 것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만화경으로 비유되는 현실은 그것을 비추는 거울의 종류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택자의 취향과 의지, 그리고 목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언어로 반영하는 문학, 특히 소설은 서술자가 어떤 거울을 선택해서 어느 곳을 비추느냐 하는 문제가 형식적 본질을 이루게 되는데, 그 거울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현실과 욕망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반영체로서의 문학은 단순한 평면거울이 아니라 가깝게도 혹은 멀리도 볼 수 있도록 실제의 상(像)을 굴절시키는 입체적 거울로서의 ‘렌즈’에 비유할 수 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볼록거울을 응용한 것이듯이, 문학이 현실의 여러 상(像)을 다양하게 변형시키는 것은 결국 작가가 선택하는 거울의 종류와 각도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을 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비추는 거울과는 달리 실제상들의 굴절과 변형체인 문학적 거울(렌즈)은, 작가의 체험과 사유의 방식에 따라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인간 실존의 욕망을 비추어 내고자 한다. 그것은 집단의 공통 체험과 소망을 비출 수도 있지만, 인간 내면의 잠재된 욕망을 보여주는 의식의 내시경일 수도 있다. 작가는 현실을 가깝게도 혹은 멀리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용한 거울을 품에 안고서, 자신의 욕망을 문학이라는 가공적 거울을 통해 비추어 보고자 한다. 그 욕망이 실현되기 어려울수록 더욱 더 집요하게 그것에 집착하는 작가의 비극적 전망은 분명히 문학의 역설적 본질에 다름 아니다. 문학이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매우 입체적인 거울을 통해 비추어낼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우리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상징적 상상력의 거울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귀납적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연역적 특성을 가진 상징적 거울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상상해내는 요술거울, 즉 상상력은 현실적 질서에 대한 작가의 면책적 거울이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논의는 출발하고자 한다. 작가의 의식과 욕망의 거울에 현상(現像)되는 현실은 곧 문학적 프리즘을 통해 마치 영사막처럼 가시화 될 수 있는데, 프리즘 이전의 빛(현실)과 이후의 빛(상상 혹은 꿈)은 문학이라는 거울 속에서 모두 상징적 상상력으로 연역되어 때로는 진실보다 더한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징적 상상력의 소산인 문학(소설) 안의 현실원칙(문학적 약속)을 프리즘 통과 이전의 현실원칙(사회적 규범 혹은 윤리)과 차별 없이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프리즘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한, 의식의 거울로 현상(現像)되는 어떤 상상, 즉 현실의 프리즘은 결코 유보할 수 없는 우리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꿈은 분명히 다르고, 그래서 꿈속의 어떤 일도 현실의 원칙으로부터 면죄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금기의 경계를 가로질러 현실을 위반하려는 문학적 상상, 즉 작가의 내면 의식이라는 거울에 나타나는 갖가지 상(像)들은 그것이 문학인 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상적 자유를 본질로 한다. 플라톤이 ‘동굴의 신화’에서 말한 사물의 그림자는 결코 그 본질이 이것이라고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도 또한 그 그림자의 본질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자를 매개로 사물의 정확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경험적 지식을 통해 귀납적으로 그 본질에 도달하려는 과학과는 달리, 문학은 끊임없는 상상적 표현(表現) 과정을 통해 그것을 연역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그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다시 역으로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는 현실의 본질,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연역적으로 가시화 될 수 있으며, 그렇게 규정된 주관적 본질은 그 구체성과 당장의 현실적용성의 가능성 여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거기엔 어떤 규범이나 윤리가 쉽게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것이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비평의 내적 체제만이 배심원의 자격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학과 윤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가역적 폐쇄회로인 셈이다. 그것은 우리들 인간들이 절대자의 전지전능함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품을 수 없듯이 현실의 상상인 작품 속의 현실에 대한 도덕적 가치평가는 그다지 유쾌한 행위로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육체와 행위와 정신이 언어로 재창조되어 소설 속에 들어갈 때는 소설의 내적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모두 생물이긴 하지만 그 둘의 종류가 다른 것처럼, 문학과 윤리가 모두 현실적 욕망을 내화(內貨)로 가지고 있지만 문학이 문학이고 윤리가 윤리인 한에서 양자의 외화(外貨)는 달리 환산돼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적 현실에 대해 그것이 성적 담론이든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든 자유와 상상을 억압하는 일체의 검열과 통제는 불순한 것이다. 변태행위로 규정하는 어떤 것이나 심지어는 마약의 문제, 그리고 빨치산의 산 속 생활에 대한 실존적 의미로서의 인간애에 바탕을 둔 묘사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의 지향 등 그 어떤 것도 윤리와 체제의 이름으로 유폐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작가의 진실한 묘사와 진지한 주제 탐구만이 문학의 자기검열로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인정하면서 마광수의 소설의 세계를 조망할 때, 그의 소설은 낭만정신, 자유정신, 분방하고 발랄한 상상력, 탈권위적 문체와 탈윤리적 인물설정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권태>와 <광마일기>, 그리고 <즐거운 사라>는 물론, 여러 편의 단편과 장편(掌篇)소설들은 모두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를 두고 성적 판타지의 무애(無碍)한 상상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의 소설들이 우리의 비평시장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첫 문화비평적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이후 일련의 그의 저작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지나친 성 알레르기 현상의 부정적 여파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연장선 위에서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이든 비판적 리얼리즘이든)만이 우리 소설과 비평의 주화(主貨)처럼 통용되는 비평의 시장에서 그의 소설들이 독자들의 호오(好惡)에 상관없이 활발하게 거론되지 못한 것은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체의 성적 담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반응들은 작가 자신에 대한 편견으로 악화되고, 또한 이런 현상의 한 요인이 우리 사회의 열린 담론 구조를 폐쇄시키는 억압구조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의 작품을 비롯한 성적 담론의 작품들에 대한 좀 더 공정한 해석과 평가의 태도는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으로 성 담론이 용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관심이 더 긴절히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때 해석이란 작품에 나타난 여러 요소들을 세밀하게 따져보는 일이며 그리고 난 이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 대한 ‘자세히 읽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의의 전제가 된다. 여기에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이 미리부터 개입해서는 결코 온전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마광수의 소설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평가는 따라서 좀 더 자세하고 진지한 독서가 전제돼야 함은 물론 공정한 비평의 태도가 확보돼야 한다. 이 글에서는 마광수의 소설세계 전반에 짙게 나타나는 성적 담론의 본질과 유미적 시각의 미학적 테마를, 소설의 일반적 분석틀 가운데 주로 인물과 문체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봄으로써 그의 소설세계가 추구하는 주제에 대해 해석과 평가로 연결시켜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2. <권태>의 미적 근거
화자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의 문학을 소설이라고 할 때, 작가가 자신의 창작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 구상하는 것은 인물일 것이다. 이야기의 형태로 포장된 여러 가지 구성 요소, 즉 인물·환경·플롯·문체 가운데서 특히 인물은 우리들 인간의 삶의 모습을 되비쳐 보기 위한 가상적 표상(그러나 한 전형적 표상)으로, 소설이 실제의 사건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꾸며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철저히 비실제적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화적인 여러 종류의 동물이나 환상적 공간의 비(非)인간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하게 인물과 관련하여 소설의 허구성과 개연성을 강조하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소설 속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을 혼동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인식상의 혼란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예를 들면, 무대 위에서 가련한 주인공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악한을 향해 객석의 관객이 방아쇠를 당기는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희화적 해프닝이나, 전후 50년대의 세태풍속을 그린 정비석의 <자유부인> 외설성 논쟁도 따지고 보면 그런 혼동의 똑같은 실례들이다. 최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을 읽고 주인공의 애국적 행동에 감명 받은 독자들이 작가가 국립묘지에 묻힌 것으로 그려낸 주인공을 참배하기 위해 묘지 관리인에게 그 무덤의 위치를 물어보는 일이 하루에도 몇 건씩 생긴다는 신문기사의 보도도, 실제 현실과 소설적 허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희극적인 예들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이 그만큼 현실과 구별되기 어려운 사실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현상의 분명한 반영임과 동시에, 허구적 사실과 실제적 현실을 동일시하려는 태도로부터 소설의 가공적 세계는 차별화 되어야 한다는 소설적 당위성을 요청하게 한다. 이런 전제 밑에서만이 소설은 서사적 형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성적이며 동시에 전형적인 인물의 창조적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서사 미학적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마광수의 소설에 대한 해석과 평가 및 비판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태도의 미학’은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소설의 여러 원칙과 약속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과 아울러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 마광수는 자신의 소설과 작품 속의 인물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평자들이 지나치게 작가와 작품 속의 인물을 동일시하는 발생적 오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그런 발언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는 <권태>, <광마일기>, 그리고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들에 대한 작의(作意)를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 자신이 소설 속의 인물에 대해 어떤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내가 발표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다 가공인물들이다. 이것이 소설과 시의 다른 점인데, 시는 나 자신이 그대로 시 속의 화자(話者)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 생활을 시로 시작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썼다. 그러나 시를 써 나가는 동안 뭔가 답답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시가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긴 하지만 ‘거짓말하는 즐거움’이 소설만큼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갖고 있는 허구적 특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처음부터 겁도 없이 장편소설에 손을 대게 되었다.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262쪽.)>
마광수는 이미 1977년 박두진 시인에 의해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등 여섯 편의 시가 <현대문학>지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데뷔한 바 있고, 세 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그가 소설가로 정식 등단한 것은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연재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따지면 그는 이미 문화비평적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 단편소설과 여러 편의 장편(掌篇), 즉 콩트를 발표한 바 있다. 단편소설 <손톱>을 비롯하여 콩트 <서기 2200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그 여자의 손톱>, <인생살이>, <개미>, <신선이 되기까지> 등과, 그 후에 발간된 <사랑받지 못하여>, <열려라 참깨>에 수록된 단편소설 <초상화>, <인생은 즐거워>, 그리고 콩트 <벽 속에서>, <등기우편>, <돼지꿈>, <K씨의 비극>, <이상한 전당포>, <유다> 등을 통해서 그는 이미 자신의 소설적 구성과 인물, 그리고 주제를 피력해 놓은 바 있다. 콩트라는 양식 자체도 분명히 소설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의 소설가로서의 출발은 1989년 이전부터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콩트에서 그리고자 했던 분위기도 위의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 ‘가공적 세계’의 성적 판타지와 즐거움을 주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꾸며진 허구이며 이 사실은 이야기와 역사를 구분해 줄뿐만 아니라 (조정래·나병철, <소설이란 무엇인가>, 평민사, 1991, 31쪽.), 이야기 속의 인물도 실제 현실의 인물보다 초월적이거나 비인간적이며 비규범적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공인물’과 ‘거짓말하는 즐거움’이라고 밝힌 것도 이와 같은 소설의 원론적 약속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물론 이 ‘허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개연적 특성으로서의 좀 더 포괄적이고 전형적인 현실 적용 가능성에 대한, 과학이나 철학과 구별되는 변별 자질로서의 소설적 특성임은 물론이다. 바로 허구성과 개연성에 의지하고 있는 마광수의 소설세계는 그 단초부터가 자유주의적 낭만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90년에 발표된 장편 <권태>나 <광마일기>, 1992년에 발표된 문제의 <즐거운 사라> 등은 그 자신의 소설에 대한 이전의 진지한 관심사가 장편양식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 대한 이와 같은 전제 밑에서 출발한 마광수의 소설세계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리얼리즘적 미학의 소설 세계와는 다른 분위기와 서사 미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그의 소설이 추구하는 미학적 형식으로서의 인물이나 문체 그리고 묘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3. 유미적 상상력과 묘사의 핍진성
<권태>를 비롯하여 <광마일기>와 <즐거운 사라> 등 그의 세 편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인물로서, 우리 근대소설의 인물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그의 소설의 인물 창조는 자신의 문학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문학의 근본적 창작동기를 ‘판타지의 창조’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념지향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실비판과 전망의 제시보다, 낭만주의적 환상에 바탕을 둔 소설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꼭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고 하는 말에도 나는 찬동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작품은 다 <리얼>한 것이다. 낭만적 환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 수법은 환상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해 내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물론 요즘 주장되는 리얼리즘은 <묘사론>적 기법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긴 하지만, 아무튼 인간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든, 환타지에 의한 공상에 의한 것이든─을 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마광수,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권태> 후기, 409-410쪽.)>
그는 이념적 지향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그것은 앞서 밝힌 바 있듯이 자신의 소설적 입장에 대한 뚜렷한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특히 ‘묘사론’적 기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심리적·외면적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묘사’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소설은 흔히 인물들이 사건을 만나 그것을 이끌어 가는 서사적 구조를 지닌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에만 독자의 흥미가 집중되기 쉽다. 그러나 『권태』는 사건 전개의 과정이 펼쳐지기보다는,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마치 영화의 화면처럼 생동감 있게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발전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보다 더 크고 색다른 감흥을, 그림책이 정지된 느낌 속에서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음을 감지하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마광수의 탁월한 묘사력은 상상력의 등을 타고 신나게 달린다. 도도한 물줄기처럼 거침없는 문장력은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조화를 이룬다. ‘그림 같은’ 묘사적 표현에 적당한 말을 골라내려고 고심한 작가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는 소설이 바로 <권태>(문학사상사, 1990)이다. 우리가 리얼리즘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거론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형’의 개념이다. 이 전형성의 개념은 마가레트 하크네스의 소설 <어느 도회지 아가씨>에 대해 엥겔스가 독후감 형식으로 보낸 편지에서 비롯되어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한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항목이 되었다. 특히 루카치에 의해 세련되고 정식화된 이 개념은, 우리의 리얼리즘 문학 논의에서도 작중인물과 환경의 전형적인 창조라는 의미에서 작품평가의 핵심 참조조항 역할을 하고 있는 덕목이다. 엥겔스는 “세목의 진실 이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의 재생” (유종호, 「급진적 상상력의 비평」, <세계의 문학>, 1987 가을호, 4552쪽.)을 지적하면서 작중인물의 탁월한 묘사를 말하고 있다. 루카치도 진정한 리얼리즘의 전제조건으로서 전형적인 인물과 연관된 전형적 상황의 중요성을 그의 실제비평에서 강조하였다.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전형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의미규정과 실제 작품에의 구체적 적용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미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엥겔스의 발언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세목의 진실’이라는 부분이다. 하크네스의 인물에 대한 묘사의 탁월성을 지적하고 있으면서도 엥겔스가 관심의 대부분을 전형성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상승하는 노동계급의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전망을 가능케 하는 의미로서의 전형성이 상황과 인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체적 보편’으로 드러나야만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우리의 노동소설이나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을 다루는 리얼리즘 계열 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개념일 것이다. 이념으로서의 주제를 인물과 상황의 교호작용 속에서 전형화 하는 리얼리즘의 이러한 미학적 태도는, 따라서 졸라나 플로베르적인 묘사의 추구가 사태의 본질이나 현상의 역동적인 관계를 외면한다는 관점에서 예술적으로도 질이 떨어진다는 견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자연주의에 대한 도식적 비판이 아무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예술적 양식과 미학적 범주로서의 자연주의적 묘사가 단순히 문학적 기법의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외면으로서의 대상세계에 대한 상호 연관성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19세기적인 사실주의적 묘사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미학적 개념으로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념적 지향이 개체의 심리적 진실보다는 집단적이며 사회적인 범주로 향하는 이 시대에 있어, 작중인물의 심리나 외양(외모로서의 얼굴, 복장, 집, 음식, 색깔, 장신구 등등) 등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가치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사회집단의 공통된 소망뿐만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욕망과 존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대에 있어서, 문학적 이념으로서의 세부진실에 대한 묘사는 매우 긴요한 소설의 미학으로 의미화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근대소설이 보여주는 인물과 대상의 묘사에 대한 문학적 전통은 의외로 소극적인 편이다.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에 묘사된 B사감의 얼굴, 김유정의 소설에서 보이는 외면묘사 등이 우리의 고전소설인 <흥부전>, <춘향전>의 묘사적 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과 춘향의 성희의 세부묘사나 여러 가지 다양한 정밀묘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문과 관심을 충분히 제기해 주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위 인용문에서 마광수가 지적하는 마음이나 공상의 세부묘사 기법은 단순히 기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오늘날의 소설미학이 추구하는 대상세계의 묘사적 진실성을 보여주는 태도로 수용될 수 있다고 본다. 작가가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외형적 장식으로서의 호사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들 인간의 내면과 가치는 무의식 저 밑바닥에 고정되어 침잠 돼 있지만은 않고 의식의 껍질을 부단히 깨뜨리며 외화 되는 과정을 되풀이할 뿐만 아니라, 이 외화된 내면의 심리가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 일상적 인간들의 외모나 장신구, 화장술, 의상, 헤어스타일 등이라고 할 때,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모습은 작품 전체의 주제와 분위기를 풍부하게 형성해 줄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 방식까지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추기경의 옷 색깔, 황제의 장신구뿐만 아니라 일상인들의 평범한 귀걸이, 구두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사람(인물)의 육체를 보완해 주는 일체의 물체들은 굳이 플로베르식의 묘사를 들지 않아도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성격에 소중한 의미를 갖게 한다. 이와 같은 문제가 창작의 주요 모티프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마광수의 첫 장편소설 <권태>는, 작가의 묘사적 기법에 대한 소설적 신념과 대상사물에 대한 심리적 열정이 미학적 등가물로 표현된 페티시즘(fetishism)의 내면세계를 환상적 리얼리즘의 묘사와 서술기법에 의해 그려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권태>는 화자인 ‘나’와 주인공인 ‘희수’가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나 이틀 동안 나누는 환상적 사랑의 카니발을 통해, ‘몽상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가 창출해 내는 ‘관능적 상상력의 해방’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희수’와 그녀의 독특한 개성과 성관(性觀)을 설명해 주는 보조자이면서 또 다른 주인공인 ‘나’, 그리고 희수의 유아적(幼兒的) 에피고넨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소녀 ‘민희(미니)’ 세 사람이다. 희수는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엄청나게 부자인 노(老) 패트론에 의해 생활하는, 똑똑하면서도 ‘나’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을 당당히 즐기는 마조히스트로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나와 희수와의 질탕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즐거운 ‘환상적인 이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일견 인물들 간의 다양한 매개와 관련성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구성상의 도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희수와 나의 성격과 행동 및 취향이 신기하리만치 조화로운 궁합을 갖게 만든 작의(作意)는 독자의 시각을 좀 더 새롭게 요구하고 있다. 분명히 이 작품은 어떤 휴머니즘적 감동이나 사회문명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프로이트적 심리학을 바탕에 깔고 있긴 하지만 프로이트의 ‘변태’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변태’란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의 결과물이이고 창조적 상상력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권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해 온 남성과 여성의 성관을 심리학적 기제 속에서 치밀하게 해부하고 분석하여 성 심리와 성행동의 환상적 원형(原型)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성격과 취향이 학교교육과 가정교육 등의 공식·비공식적 과정을 통해 좋든 나쁘든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 형질이나 남녀 간의 성차(性差)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 ‘권태’를 초극할 수 있는 ‘창조적 변태’의 원형으로 삼고 있는 두 개념소인 ‘마조히즘·사디즘’, 즉 ‘사도마조히즘’은 차라리 생물학적이기까지 하다. 작가는 희수를 창조해 낸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희수는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적 여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똑똑한 마조히스트’의 성격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희수’라는 이름도 ‘喜囚’라는 한자가 연상되도록 만들었다. ‘똑똑한 마조히스트’란 마조히즘이 단순한 복종심리, 또는 힘 앞에 할 수없이 굴복하게 되는 심리가 아니라, 마치 음양의 관계처럼 사디즘과 당당하게 대(對)를 이루는 심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마조히스트를 가리킨다.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들>,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262쪽.)>
작가가 의도한 것의 성취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비평의 기능일 수 있으며, 작가의 주관적 성취와 독자(비평가)의 객관적 성취가 백 퍼센트 완벽하게 한 소설에서 그대로 구현되느냐 하는 것은 분명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철저하게 작가의 욕망의 대리배설이라고 보는 마광수의 소설이론에 비추어 볼 때, 위의 진술은 이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한 참조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완벽한 마조히스트이며 페티시스트인 희수와, 사디스트이며 페티시스트인 나의 심리적 역학관계를 성이라는 행동과 담론 구조 속에서 그려내고자 한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을 처음 대할 때 우선 강렬하고 충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선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묘사력이다. 그리고 그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특이하며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특히 ‘페티시즘’에 관한 것이다. 페티시즘에 관한 소설적 보고서라고도 부제를 붙일만한 이 소설은 작가의 편집증적인 ‘손톱’ 취향을 주축으로 해서, 화자인 ‘나’가 희수의 육체를 성적 매재(媒材)로 삼아 온갖 성적 페티쉬의 환상을 체험하는 심리와 행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페티시즘, 혹은 사도마조히즘의 성 심리를 단순히 작가 자신의 기벽적(奇癖的)인 성 취향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보다 심층적인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 내재되어 있다. 소설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복잡한 심리를 예술적으로 복원해내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때, 작가는 화자인 ‘나’를 프리즘으로 하여 주인공 ‘희수’의 심리를 비추어 해부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페티시즘의 문제를 작중인물, 특히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주인공들의 심리문제와 관련지어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소설의 주요 테마인 ‘사랑’의 문제를, 그가 왜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육체와 대상사물에 투사하여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작가가 이 작품 속에서 희수에게 입고, 붙이고, 걸고, 칠하기를 요구하는 페티시적 욕망의 본질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페티시즘은 원래 물신숭배(物神崇拜)나 주물숭배(呪物崇拜) 또는 고착성욕 등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특히 어떤 물건에 집착하면서 쾌감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든가, 어른들이 이성의 특정한 장신구나 의복 또는 신체 부위 등에 특별히 집착하는 현상 역시 페티시즘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페티시즘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심리를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실적 삶의 고통에 의해 야기되는 인간의 퇴행욕구는 어떤 영원한 물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원초적 소망을 갖게 하며,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강력한 긍정을 하게 만든다. 페티시즘은 그래서 ‘죽음에의 욕구’와 통해 있으며, 따라서 마조히즘과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마광수, <권태>, 문학사상사, 1991, 107쪽.)
마광수의 시 해석에 의하면 유치환의 바위라는 시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중략) 억년 비정의 침묵에/안으로만 안으로만 채찍질하여/(중략)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고 소리하지도 않는 바위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읊고 있다. 이 시의 ‘바위’는 바로 시인 자신이 궁극적으로 소망하여 마지않는 영원불변의 무감각적 물질로서 시적 페티쉬를 이루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전환이며, 곧 ‘생물체’에서 ‘무생물체’로의 존재전이이다. 더 나아가 페티시즘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감’이나 ‘무생물에의 동경’에서 비롯된 ‘중성 지향적 심리’에 그 현실적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생물은 삶과 죽음의 중간입장에 서 있는데, 그것은 곧 남성과 여성의 차별성을 벗어난 ‘행복한 통합’의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남녀양성(hermaphrodite)처럼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남성이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면 인간의 성에 대한 욕구는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심리비평이나 원형비평 등에서 ‘아니무스’나 ‘아니마’의 개념 정도로 인간의 양성지향성을 설명하고 있긴 하다. 플라톤의 우화적 진술대로 너무나도 완벽한 남녀양성의 인간이 제우스신의 질투심 때문에 불행하게도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린 이래, 인간의 이성(異性)에 대한 지향은 그만큼 처절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성(異性)에 대한 집착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인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은 우선 정신보다는 육체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에 대한 욕망은 ‘잃어버린 육체적 완전성’에 대한 회복의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성 심리는 중성적 혹은 양성적 심리를 궁극적인 지향목표로 삼게 되는데, 페티시즘은 바로 이와 같은 심리에 대한 대안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권태>의 ‘나’와 ‘희수’, <광마일기>의 주인공 ‘나’와 女鬼(妖精)들, 그리고 <즐거운 사라>의 한지섭 교수와 사라 등이 모두 헤비 페티시스트들로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페티시즘적 소망(그의 페티시는 ‘손톱’으로 보인다)이 작품 속에 반영된 흔적들이다. 마광수는 여성의 미의식과 ‘치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러워하며 사회제도로 강요된 남녀의 변별성을 거부하고 양성적 나르시시즘을 꿈꾼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닌 상태’로서의 중성적 존재가 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한 중성적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손톱이다. 마광수는 그가 수많은 페티시 가운데서 특히 ‘긴 손톱’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를, 물질과 생명 양자를 포용하는 의미와 유미적 실용주의 및 평화주의, 그리고 양성적 의미로 수용하여 각각 다음과 같이 밝히거나 암시하고 있다.
<손톱은 좀 특별한 종류의 페티쉬(fetish)이다. 손톱은 감각이 없고, 각질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물질에 가깝다. 그러나 손톱은 보통의 물질처럼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씩 자라난다. 그러니까 손톱은 물질적인 성질만이 아니라 약간의 생명력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73쪽)
<몇 초 동안의 오르가즘이 우리의 종족 번식을 이루게 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영생에의 가냘픈 미망을 품게 만들어준다. 저주받을진저, 그 망할 놈의 오르가즘!(…)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오르가즘의 순간을 거부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정 후엔 반드시 권태가 오고, 곧이어 오름가즘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오르가즘을 없애고 사정을 없애버리면, 그리고 성적 결합을 없애고 결혼을 없애버리면 이데올로기도 없어지고 관념의 유희도 없어지고 인과응보도 없어지고 내세도 없어질 것이다.(……) 자연(自然)이 <사정>이라면 인공미(人工美)는 <발기의 지속>이다. 자연은 가난하고, 못생기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은 역시 아름답다. 손톱은 원시시대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무기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손톱은 가학적 무기가 아니라 가학적 아름다움의 심볼로 변했다. <자연의 손톱>은 가고 <인공의 손톱>이 왔다. 자연미보다 인공미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예가 바로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고, 싸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가학적 용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적·관능적 용도를 위해 한껏 길게 기른 손톱이다. 고통과 권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고통과 권태 사이에 존재하는 관능적 오르가즘의 순간을 최대한으로 오래 지속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있어야 과학이 발달하게 된다. 과학은 시적 상상력의 토대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희수의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긴 손톱들을 하나하나 내 입속에다 넣고 쪽쪽 빨아도 보고 핥아도 보았다.> (<권태>, 235-239쪽)
<아, 꽃들은 얼마나 좋을까
자기 몸 안에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갖고 있으니>
끝에 인용한 시는 마광수의 어느 외로운 날 이라는 시인데, 이 시에서 그는 양성지향성을 모티프로 삼고 꽃에 대한 페티시적 열망을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시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페티시스트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유미적 평화주의와 여성적 ‘인공미’에 대한 열망이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열망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삶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 심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들 일상사에서 고독이나 불안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더 포괄적으로는 권태감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독이나 불안, 권태는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여과과정을 거쳐 성적 페티시와 판타지에 대한 발랄한 상상력으로 구체화된다. 이 점이 마광수의 소설을 기존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변별되게 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앞서 논의의 전제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소설이란 상상적 현실의 재현을 통한 상징적 상상력의 연역적 표현이 가능한 서술 공간이라고 볼 때, 에이브럼즈의 문학해석 좌표 중 표현론적 측면에서 작가의 작의(作意)가 지향하고 의도하는 회로를 인정한다면 마광수 소설 논의의 발생론적 오류는 상당히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권태>는 철저히 낭만적 환상의 프리즘을 통해 페티시즘과 그것의 밑바탕을 이루는 사도마조히즘의 성 심리를 상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희수는 “손톱을 길게 기름으로써 손가락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데 따른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으로 향수하는 여성” ( 마광수, <내 소설의 주인공들>, 앞의 책, 263쪽.)으로 나오는데, 이러한 인물의 성격은 종교에서처럼 철저히 복종하는 것에 만족감을 얻는 완전한 마조히즘의 심리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조히즘은 인간심리의 보편적 양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순명(順命)처럼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상적 삶의 여러 영역에서도 쉽게 발견되고 느껴지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시 <복종>은 아마도 이와 같은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나는 복종을 좋아해요”라고 화자는 진술하면서,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타자화 되는 데서 느껴지는 절대자유의 심리를 역설적 표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절대자유라는 것은 황제가 노예를 부리듯이 주체가 타자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왕이나 황제가 결코 될 수 없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과학이나 철학과 달리 문학은 이것을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서 상상(꿈)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데, <권태>의 ‘희수’가 보여주는 절대복종으로서의 마조히즘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 저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욕망의 보편적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투쟁과 갈등 과정을 극복하고 그 결과물로 무궁한 자유가 얻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물론 현실원칙에 토대를 둔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의 제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의 공동체적 소망에 근거하여 그들의 행복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현실적 투쟁이 끊임없이 요청되는 것이 당연하다. 리얼리즘은 이와 같은 현실문제를 문학의 영역 안에서 이루고자 노력하는 문학 이념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에 대한 창문을 좀 더 활짝 열어젖히고서 밖을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어내는 데는 다양한 상상의 넓이와 깊이가 또한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학의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상상력, 즉 상징적 상상력에 의한 꿈의 자기실현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다. 예술은 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적어도 예술을 감상하는 동안에는 현실의식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로 약속하는 행동이며, 예술의 감상에 있어서도 집중적으로 꿈의 상태에 머무는 훈련을 함으로써 예술의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인훈, <예술이 추구하는 길>, <길에 관한 명상>, 청하, 1989, 199쪽.) 이것은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요망되는 약속이다. 이 약속에 대해 어느 한 쪽이 인정할 수 없을 때 예술, 즉 문학의 원칙이나 효과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예술의 이러한 효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유용하다. 인간의 현실적 행동은 언제나 그 행동에 대한 꿈에서부터 출발하며, 예술이라는 모습에서 묘사된 꿈은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려는 의지를 자극한다. (위의 글, 199쪽.)
물론 예술적 상황과 현실적 상황은 분명히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술 속의 작중현실과 그것이 현실화되는 과정 사이에 어떤 조정 작업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어떤 작품을 해석하고 비판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조정 작업의 실패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수가 많은데, 이럴 경우 예술과 현실 사이에 상호 화해될 수 없는 오해와 혼란만이 가중되어 예술은 현실에 대하여, 그리고 현실은 예술에 대하여 서로 억압과 멍에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의 감상 과정에서 인정한 가치를 우리는 현실 안에서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의 성층권을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우주의 물리법칙에 따라야만 하고, 다시 지구로 귀환할 때는 지구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조정 작업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는 것이 문학·예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은 그 내용의 현실에의 이행여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위의 글, 200쪽.) 예술은 자기가 환상임을 잘 알면서, 이 환상의 영역 안에서 인간이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을 꾼다. 인생이 유한하고 역사에 불가능이 있는 동안은 예술은 인간에게 필수의 위안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억압 없는 행복 (위의 글, 200쪽.)임을 우리가 분명히 자각할 때만이 예술의 현실적 힘은 최대치가 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제든 성적 담론에 관한 것이든 이런 맥락에서는 모두 동일한 것이다. <권태>는 바로 이와 같은 작가의 소망적 사고가 페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의 심리에 대한 탐구를 통해 페티시스트인 ‘나’의 프리즘으로, 무한한 성적 판타지의 즐거움을 ‘희수’와 ‘미니’를 통해 실험해 보고자 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절대 복종만이 역설적으로 그런 자유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마조히즘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들은 철저한 주체적 정신으로 무장한다고 해도 험난한 이 세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운데, 소극적이며 비주체적인 이 마조히즘이 도대체 어떤 현실적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마광수 소설의 인물과 주제를 해석해 내는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또한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비역사적이고 퇴행적이라는 비난을 쉽게 하게 하는 부분이다. 현실적으로 마광수 소설에 대한 기존의 평가가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보다 정치(精緻)한 해석을 통한 평가와 비판만이 올바른 문학이해의 태도라고 볼 때, 그의 소설에서 보이는 그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인물설정과 주제의 모티프에 대한 문학적 설명을 더욱 요청하고 있다. <권태>에서 희수의 마조히즘은 ‘나’에 의해 온갖 페티시들로 치장되는데, 이 페티시는 앞서도 밝힌 바 있듯이 마조히즘과 융합됨으로써 가장 완벽하게 탈의지적 심리, 즉 ‘가사상태를 통한 생존의 부담감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제이다. 이 탈의지적 심리는 ‘자궁회귀본능’과 관련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자궁회귀본능은 정신적 퇴행현상의 일종으로서, 성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며 살아갈 때 생존의지의 박약으로 말미암아 곧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을 느끼는 잠재심리이다. (마광수, <미의식의 원천으로서의 자궁회귀본능에 대하여>, <마광수 문학론집>, 청하, 1987, 9쪽.)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나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집착들이 바로 ‘자궁회귀본능’의 일종인데, 이것이 그의 소설 속에서는 여주인공의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집요하게 묘사되고 있다. <권태>에서 희수가 치장하는 장신구나 화장, 손톱 등의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심리의 소설적 장치로 기능한다. ‘아름다움’과 ‘자궁회귀본능’은 많은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여주인공의 ‘미모’의 문제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실제로 리얼리즘 문학이 문학의 본령인 것처럼 여겨지는 요즘 소설에서도 여주인공이 미녀로 그려지고 있는 현상을 생각할 때, <권태>에서 과장적으로 그려지는 희수의 외모에 대한 다양한 실험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소설 속의 미녀의 유형에 대해서 마광수는 다음과 같이 밝혀 놓은 바 있다.
<사실 리얼리즘 문학이 문학의 왕도인 양 행세하는 요즘의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여주인공으로 미녀가 나오지 않는 소설이 어디 있었던가? 소설의 여주인공이 꼭 미녀여야 한다는 점은 사실 문학의 기본 요건이라는 개연성(probability)을 상실하고 있는 현상인데도 아무도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미녀>는 대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아주 고귀한 신분의 여자로서 태어날 때부터 노동할 필요가 없는 유형이요, 다른 하나는 비록 신분은 천하더라도 빼어난 미모로 태어난 여인`─`그러나 돈많은 남자의 눈에 띄어 신분이 상승된다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가는 여인이다. 그러므로 미인의 조건은 신분과는 상관없이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으로 일단 정리될 수 있다. (위의 글, 10쪽.)>
그의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설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는 것도 작가의 이와 같은 작의(作意)에 의한 인물 설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즐기기 위하여 인간은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놓아두는 행위, 예컨대 손톱을 길게 길러 신체 활동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일 따위의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를 욕구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미의식의 원천으로서의 ‘자궁회귀본능’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미의식’과 ‘자궁회귀본능’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세 가지 개념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이라고 마광수는 파악한다. (위의 글, 11쪽.)
<권태>에서 희수가 보여주는 높은 굽의 하이힐, 긴 머리카락, 그로테스크한 화장 등 여러 가지 페티시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손톱’이다. 이것은 결국 작가의 ‘미의식’과 ‘자궁회귀본능’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페티시의 총합이 바로 ‘손톱’임을 짐작케 하는 것인데, 그의 손톱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화론적 상징성과 인간 심리의 가시적 표상성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취향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형성된 손톱이 환기시켜 주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가 손톱이라는 페티시 안에 집중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의 정치심리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마조히즘의 속성에 대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정열적으로 권력을 욕구하는 인간은 누군가 자기에게 음식을 먹여주거나 돌보아 주는 꿈 또는 공상을 가진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결국은 자궁회귀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글, 10쪽.)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노예나 시녀들이 먹여주는 음식을 편하게 받아먹기만 해도 되는 의사(擬似) 황제 심리는 자궁 속의 태아의 상태와 흡사한 것이다.
<자궁회귀본능이 <권력의 획득>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었던 전제주의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것이 일반 평민들한테까지도 <미>라는 <고상한 의식>에 부회하여 민주적 이론으로도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남성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도덕적 초자아(super-ego)의 억압 때문에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러한 권력추구본능 또는 자궁회귀본능을, 그러한 초자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적어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본능적 삶에 비교적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성을 통하여 대리해소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글, 12쪽.)>
<권태>의 ‘나’와 ‘희수’가 손톱을 비롯한 여러 페티시들을 통해 보여주는 완벽한 사도마조히즘은 바로 이와 같은 심리의 소설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손톱의 문화 심리적 성격에 대해 데스몬드 모리스는 <Body Watching>의 <손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대와 문화권을 달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육체노동도 할 필요가 없다는 표시로 손톱을 길러 왔다. 이러한 상류신분의 전시행위는 절대로 수고할 필요가 없는 손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 손톱에다 영롱한 물감을 칠해 더욱 돋보이게 한다. 고대 중국이나 이집트에서는 귀족의 남녀가 이런 까닭으로 손톱을 길게 길렀고, 황금으로 칠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일상적인 손놀림을 하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나중에는 새끼손가락에만 전시적(展示的)인 손질을 했을 뿐, 나머지 손가락들은 훨씬 짧게 깎았다. 또 다른 해결 방법으로는 평상시에는 보다 짧게 깍은 손톱을 쓰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적에는 어처구니없게 과장된 아주 긴 가짜 손톱을 끼게 되었다.” (데스먼드 모리스, <바디 워칭>, <마광수문학론집> 12쪽에서 재인용.)
손톱 페티시가 갖는 미학적 측면과 자궁회귀본능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현실주의 시인인 프랑스의 로트레아몽(Lautreamont)도 <말도로르의 노래 (Les Chants de Maldoror)>에서 날카로운 긴 손톱의 가학적 이미지를 표현했듯이, 마광수의 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날카롭고 긴 손톱은 권력욕구의 심층심리인 자궁회귀본능의 미학적 상징물로 기능하는 페티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권태>뿐만 아니라 <광마일기>나 <즐거운 사라>에서 여성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손톱 페티시는 이 작품들 이전에도 작가 자신에 의해 추구되었던 미학적 상징물로서 손톱이나 그 여자의 손톱 등 그의 장·단편(掌·短篇)소설에 등장한 바 있다. 다음 대목을 보자.
<그녀의 번쩍이는 손톱. 나는 다시 손톱을 보자마자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다시 손톱이 생각이 난다. 자꾸 지워 버리려 해도 머리 속에선 계속 길고 번쩍이는 손톱이 오락거린다. 크레오파트라의 발밑에 엎드린 노예, 노예, 그리고 손끝에서 5센티미터나 나와 있는 아주 길게 매니큐어한 손톱. 육체파 배우 스텔라 스티븐스의 긴 손톱 ……. > (단편 <손톱>(1967) 가운데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 수록)
그의 손톱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1967년에 쓴 단편 <손톱>에서부터 나타나 있다. 그는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손톱’에 집착하여 그것의 상징성을 파헤쳐 나갔고, 그 결과 손톱의 상징은 그의 논문 <미의식의 원천으로서 자궁회귀본능에 대하여>에서 ‘자궁회귀본능’, ‘권력욕’,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 ‘미의식’의 심리적 추이체계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자궁 속의 태아가 되기도 하고 양성적 존재가 되기도 하고 또 삶과 죽음의 중간적 입장에 서기도 하는데,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 올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해방감과 함께 적극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태아나 무생물처럼 ‘권태로운 아름다움’의 상징인 ‘긴 손톱’이다. 긴 손톱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에 의해 우리는 ‘자연미’의 환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창조를 이룰 수 있고, 그러한 ‘인공미’의 창조는 과학발달에 따른 ‘상상의 실제화’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것이 대체로 마광수적 사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권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이와 같은 페티시들이 단순히 손톱, 발톱, 긴 머리카락, 구두, 장신구 등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페티시의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만화경 속의 신비로운 색채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자.
<저 여자의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을 다섯 다발로 나누어 빨강, 노랑, 초록, 보라색 등 오색물감으로 염색을 한다면 얼마나 더 멋있을까. 희뿌연 조명을 받아 더욱 신비로운 호박빛으로 빛나는 맥주를 한 모금 입 속에 털어 넣고 혓바닥으로 질금거리면서, 나는 부질없는 공상에 잠겨보았다.(…)그것은 담황색(淡黃色)이 약간 섞인 불그스레한 색조였다. 지금 저 여자의 머리카락 색깔이 내 눈엔 짙은 브라운 빛깔로 보이긴 하지만 여늬 때 보던 보통 여자들의 흔하디흔한 브라운 빛깔 머리카락은 아닌 것 같다. 조금 청동색 비슷한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고나 할까.(…)그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언젠가 어느 여자와 함께 데이트를 하다가 차를 타고 남산 터널을 통과할 때, 터널 천정에서 떨어지는 오렌지색 불빛을 받아 그 여자 손톱의 빨간색 매니큐어가 보라색으로 변해 보여 신기해 했던 기억이 스치며 지나갔다.(…) 가만있자…… 초록색 조명과 붉은색 조명이 합쳐지면 무슨 빛으로 변하더라. 그래 맞아, 그러면 노란빛이 되지. 그럼 푸른 빛과 붉은 빛이 합쳐지면? (…) 그래 그래, 그건 복숭아 빛이었지…… 그럼 붉은 갈색의 무대의상에 청록색(靑綠色) 조명을 때리면? …… 그건 …… 그건 …… 아마도 갈색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그녀의 머리색은 푸른빛이 약간 감도는 짙은 갈색이다. 얼른 보면 칙칙한 빨강색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실내조명은 담황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것…….(…) 무대에서 암적색으로 보이는 경우는 초록색 의상이나 소도구 등에 붉은 빛 조명을 비췄을 경우다. 그러면 저 여자의 본래 머리빛깔, 아니 염색한 머리 빛깔이 초록색이란 말일까?(…) 아야야……, 아야야…… 초록색 머리카락이라니! …… 그것도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권태>, 38-41쪽)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권태>의 몇 장면만 들춰보아도 여러 가지 색채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화려하게 나타나고 있다. 빨강, 노랑, 초록, 보라색 등 기본 색깔 이외에도 호박빛, 담황색, 청동색, 오렌지색, 복숭아 빛, 청록색, 암갈색, 암적색, 커피색, 분홍색, 황금색 등 시각적 쾌감을 줄 수 있는 색깔의 구체적 이미지를 페티시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이 미술의 색감과 연극의 조명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섬세한 관찰력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시각적 사실성을 보다 선명하게 확보케 하려는 작가의 섬세한 배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근대소설이 이와 같은 색채묘사에 의외로 둔감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묘사는 넓은 의미에서 리얼리즘의 묘사적 구체성을 진지하게 확보한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색채의 연금술적 마술 같은 묘사가 대상사물로서의 페티시에 채색됨으로써 비생명적인 대상에 육신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의 상상력은, 이 작품을 ‘읽는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보는 소설’로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스탕달의 <적과 흑> 제목에 나타난 색채가 그 정신적 고취와 그 시대의 유혹 사이의 긴장 (아지자 외 공저, <문학의 상징·주제 사전>, 청하, 1989, 129쪽.)을 나타내 주는 주제로 읽혀지는 것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묘사의 가능치를 매우 적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서술적 기능보다는 회화적 장면묘사에 더 역점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작품이다. 비단 색채 묘사뿐만 아니라 구두와 의상, 화장술 등에 관한 묘사에서도 그의 이런 노력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리얼리즘의 원래적 의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태』에서 그려진 페티시에 대한 다양하고 감각적인 묘사는 묘사 자체를 넘어서 독자들에게 회화적 만화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의 유미적 낭만성과 상상적 일탈을 통한 대리배설 효과를 무시한 채, 무조건 현실적 도덕과 당위의 잣대만 가지고 마광수의 문학세계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용환 교수 역시 이 점을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권태>는 시인이며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비추어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중인물의 거의 몰염치스럽다 할만치 외잡스런 일상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다루어지고 있는 경험 자체는 분명 몰염치스럽고 외잡스런 것이지만 그러나 <권태>는 몰염치스럽고 외잡스런 문학적 현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의 본격소설이 고수해 온 어떤 전통인 스토이시즘이랄까 도덕주의의 전통에 <권태>는 충격을 가하고 있지만, 그같은 전통이야말로 한국소설의 정체와 답보의 한 가지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해야 될 것이다. 고착된 도덕주의는 도덕이 가장 나쁘게 자리잡은 모습일는지 모른다. 문학적 사고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에 준엄하고 경건한 온갖 역할, 심지어 혁명가와 사제의 역할까지를 요구하는 완강한 이데올로기에 권위적으로 지배되고 있는 우리의 근래 문학풍토는 자칫 문학적 상상력의 활기있는 실천을 위축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온갖 박해와 고난을 무릅쓰면서 우리시대의 문학적 신념은 의심할 바 없이 정당성을 확립해 냈다. 그러나 이 이념이 <권태>와 같이 외잡스럽지만 대담하고 용기 있는 문학적 현상을 그것이 퇴폐하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이유로 박해하는 또 다른 권위가 되어서는 안되리라 믿는다.> (<중앙일보>, 1989. 9. 24, <이달의 소설>)
결국 마광수는 <권태>를 통해서, ‘죽음에의 공포’와 ‘죽음에의 욕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머물며 체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간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적 판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현란한 에로티시즘을 통해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작가들이 ‘권태’를 대개 부정적 의미로 수용한데 반하여, 마광수는 그것을 ‘창조적 판타지의 원천’의 의미로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소설을 크게 돋보이게 하는 점인데, 그러면서도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이 ‘창가를 맴돌다 결국 탈출에 실패하는 나방’의 답답하고 우울한 상징처리로 끝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창조적 판타지를 이해 못하고 현실의 우리 안에만 갇혀있는 한국문화의 답답한 폐쇄성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였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권태>의 독창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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