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1
마광수 지음 / 해냄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가벼움의 소설미학과 관능적 위월(違越)의 상상력
--- 마광수의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김성수(연세대 교수, 평론가)


1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권태>(1990), <즐거운 사라>(개정판, 1992), <광마일기>(개정판, 1996), <불안>(1996), <자궁 속으로>(1998)에 이은 마광수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로, 이번 신작은 작가가 오랫동안 일관되게 탐구해 온 성 문학의 독특한 미학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피력한 결정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알만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마광수’라는 이름은 ‘성 문학’과 ‘성 담론’을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뚜렷한 상징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마광수가 소설가로 등단한 시기가 이념이 해체되기 시작한 1980년대 말이었다는 점에서 지난 10여 년간 그를 동심원으로 한 다양한 논의들을 반추해 볼 때 그의 ‘성’에 대한 전위적 실험의식과 일관된 탐구는 이제 어떤 형태로든 평가해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마광수는 1977년 박두진 시인에 의해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등 6편의 시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데뷔한 이래,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등의 시선집을 포함한 4권의 시집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 등 7권의 에세이집, 그리고 <사라를 위한 변명>(1994) 등 2권의 문화비평집을 펴낸 바 있다. 또한 그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연재하면서부터 소설가로 등단하여 이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이르기까지 모두 6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하였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지난 10여 년 동안 축적된 마광수 문학의 미학과 철학이 온축된 ‘결정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첫 장편 <권태>가 소설의 묘사 문제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신념과 함께 대상 사물에 대한 심리적 열정이 미학적 등가물로 표현된 페티시즘(fetishism)의 내면세계를 환상적 리얼리즘의 묘사와 서술기법에 의해 그려낸 소설이라면, <즐거운 사라>는 사실주의 기법에 의해 20대 초반의 자유분방한 여대생의 연애 심리와 성에 대한 ‘학습욕구’라는 심리적 메카니즘의 미묘한 떨림을 경쾌한 문체로 그린 일종의 연애 성장소설이다. 또한 <광마일기>에서는 고전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양식적 실험을 통해 현실과 꿈 사이의 분방한 상상을 경쾌한 문체로 형상화하였으며, <불안>은 회화적인 기법을 원용하여 ‘긴 손톱’을 중심 모티프로 삼아 불안의 미학과 사도마조히즘의 이미지에 대한 영상 미학적 형식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성향의 작가가 옛 애인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열정을 배틋한 허무의 정조로 그리면서, 자신의 작품 때문에 사법적 검열과 구속을 당하는 ‘필화 사건’(작가의 실제 체험이기도 한)을 통해 두 개의 ‘자궁 속’ 세계(여기서 ‘자궁 속’이란 여인의 ‘품 속’과 ‘감옥’이라는 중의적 이미지를 함께 갖고 있다)를 형상화한 <자궁 속으로>는 <즐거운 사라>와 함께 일반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사실주의)적 작법을 충실하게 활용한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권태>로부터 장편 에세이 <인간>(1999)에 이르기까지 시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지난 10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온 마광수의 문학적 화두로서의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 미학이 종합적으로 결산되어 나온 작품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이다. 이 소설은 아랍 민중들의 이야기 모음집인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로도 번역되는)의 탁월한 이야기꾼 세헤라자데를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나오는 ‘램프’의 마신(魔神)으로 대체하여, 화자인 ‘나’(혹은 ‘나’의 여러 분신)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서고금의 미인과 에로틱한 ‘여귀(女鬼)’들과 어울려 ‘사도마조히즘’의 환상적 쾌락을 즐기기도 하고, 그녀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느낀 현실과 상상의 허무한 정조를 그린 옴니버스 형식의 이야기이다. 램프의 요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헤라자데와의 교합뿐만 아니라, 그녀의 도움으로 온갖 성적 쾌락과 시공을 넘나들며 꿈과 환상 속에서 겪고 들은 이야기인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낭만적 자유정신에 기반한 52가지의 성적 판타지와 그로테스크 미학이 총천연색의 페티시즘으로 형상화된 옴니버스 스타일의 독특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2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소설 제목에서 금세 우리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우리는 현실중심의 인생관과 육체적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배우게 된다. 서양의 교훈적이고 정신주의적인 문학 작품들에 비하여 이 책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인간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면, 쾌락을 강조하는 것이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그 쾌락이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쾌락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낭만적 공상’으로서의 쾌락이 현실에서 실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곧 인간의 무한한 창조적 상상력과 결부되어 실제적 진보와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실재화(實在化)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과학이 더욱 발달되면 우리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들같이 수많은 미녀 로보트(인간과 똑같이 닮은)들을 부려가며, 손하나 까딱 않고 쾌락만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노동은 절대로 신성한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흑백논리적 맹종에서 비롯되는 ‘전쟁’이 우리 지구촌을 전멸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호전적인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비관적 리얼리즘은 퇴폐적 낭만주의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건전한 쾌락주의와 성 해방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상상적인 환락의 신비경(神秘境)을 실제로 실현시킬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63~65쪽)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아리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여 패러디하고, 거기에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뾰족한 ‘손톱’이나 ‘하이힐’, ‘머리카락’과 ‘장신구’ 페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관능적 판타지를 52개의 짧은 이야기사슬로 구성한 소설이다. 일반적으로 장편소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큰 주제 밑에 부속된 부차적이고 다양한 사건을 겪어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큰 주제를 긴 시간 속에서 해결하는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다. 거기엔 대체로 인과적 개연성과 인물들간의 갈등, 역사철학적 이념이 라는 여러 요소들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이와 비교할 때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장편소설이 갖고 있는 기존의 관행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각 장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짤막한 소품들의 연쇄다발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장편소설처럼 사건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거나 갈등을 축적시켜 해소시키는 과정을 밟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1장부터 52장까지 배열된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이야기나 자유롭게 선택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소설의 시간 구성은 화자가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 나온 시점부터 복권이 되어 다시 학교에 복직하는 때까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인과적 연결성을 그다지 요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처음 이야기인 <아라베스크>로부터 마지막 이야기인 <갈매기의 꿈>에 이르기까지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하여 전능한 조력자인 램프의 요정 ‘세헤라자데’와 함께(없는 경우도 있다) 작품 속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다양한 인물로 변신하고 분신을 만들어 이야기를 만들고 이끌어 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직접 진술이 중간중간 개입하여 ‘작의(作意)’를 설명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소설의 형식을 취했는지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 그래서 나는 옴니버스 스타일의 이 소설을 더 전개해 나가기에 앞서, 우선 흔해 빠진 ‘미녀와 거지’ 스토리를 내 나름대로 각색한 단편소설 하나를 소개하여 이 소설의 재미를 ‘가벼움의 미학’으로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나는 원래 소설을 쓸 때 스토리보다는 쉬운 구어체의 문장(또는 ‘입심’)에 더 신경을 쓰고, 문장 가운데서도 묘사문에 신경을 쓴다. 글이란 결국 ‘문장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재나 주제보다는 ‘어떻게 썼느냐’를 더 중요시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앞의 이야기나 다음에 들려드릴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읽어나가면서, 너무 소재나 주제(거창하게 말하면 ‘사상’)에 집착하지 말아주시기를 독자들께 부탁드리고 싶다.(…)
나는 모든 소설은 결국 스토리나 구성이 재미를 가져다주기보다는, 작가의‘끼’에 의한 ‘반복적 집착’과 ‘입심’이 재미를 가져다준다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본능을 솔직하게 카타르시스(대리배설)시킬 수 있는 얘기를, 내 나름대로 변주(變奏)하여 뻥튀기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심산으로 있다.]
(<‘부마 콤플렉스’ 생각>, 1권, 42~43쪽)

서사학의 바이블로 평가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결국 비극의 선적(線的) ‘구성(plot)’에 관한 것이며, 프라이탁(Freytag)의 ‘피라밋단계론’을 모태로 하는 전통적 구성도 인과적 개연성에 기초를 둔 사건의 점진적 발전과 해결을 독자나 관객의 심리적 추이에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이론이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이 발전·파국의 구성단계론과 스토리텔링의 형식에 별로 구애받지 않고 ‘가벼움의 미학’과 ‘구어체 문장’으로 자유롭게 인물과 배경과 부분의 치밀한 ‘묘사’에 주력하겠다는 것이 이 소설의 창작방법임을 작가는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 전체를 통어하는 방법과 형식은 ‘옴니버스(omnibus)’ 스타일과 구어체의 문장, 그리고 대상에 대한 치밀한 세부 묘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옴니버스 스타일이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짜서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8~13세기 아라비아의 익조티시즘(exoticism)과 육체적 쾌락(하렘의 여인인 ‘오달리스크’나 배꼽춤인 ‘벨리댄스’)의 무애(無碍)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 <아라비안 나이트>의 분위기를 주조음으로 하고, 거기에다 에로틱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램프’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의 야하디야한 관능적 상상을 마음껏 발산해 내는 형식의 소설이다. 특히 첫 이야기인 ‘아라베스크’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얼개와 무늬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라비아 풍의 공예품이나 건축 장식 등에 쓰인 기하학적 무늬를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하는데,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신기한 램프’가 연기처럼 뿜어내는 아라베스크적 경향의 에로틱한 상상들의 직조(織造)에 의해 작품 전편의 분위기가 흘러간다. 아라베스크 소설은 시적이며 몽환에 가까운 산문들로 주로 신비의 세계와 공상에 가까운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라고 할 때, 화자인 ‘나’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인물들(<황진이>, <색희(色姬)와 양귀비>, <다시 육림(肉林) 속으로>, <쾌락의 별궁에서> 등)을 만난다거나, 비현실적 시공간(<아라베스크>, <즐거운 왕국>, <그림 속에서>, <서기 3000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샹그릴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을 넘나들며 벌이는 사랑의 몽환경이야말로 이 소설의 이야기 내용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는 ‘가벼움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 우리 나라의 현대 소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거움의 미학’으로만 일관해 왔다. 나는 교훈주의를 바탕에 깐 경건주의가 우리 나라 현대 소설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거운 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벼운 소설’을 경시하거나 폄하하면서 ‘무거운 소설’만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사라를 위한 변명>, 138쪽)

동양문학의 문체나 주제는 무거운 사상성을 위주로 하는 서구 문학의 분위기와는 달리 ‘가벼운 소설’에 그 정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 가령 <흥부전>과 <춘향전> 등에서 보이는 걸직한 육담이나 해학적 표현, 그리고 김유정이나 채만식 등의 소설에서 보이는 골계미나 풍자는 바로 내용적인 면에서 현실의 억압과 구속을 형식적으로나마 극복해보려고 하는 데서 나온 서사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같은 전기소설에서 보이는 몽환적 세계의 유현한 분위기 또한 무거운 현실을 가벼움의 소설 형식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볼 때, 작가가 말하는 ‘가벼운 소설’은 현실적 질곡의 무거운 무게를 가상적 현실 속에서나마 극복하고 풀어내려는 서사미학적 요청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가 <광마일기>나 이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전기소설적 형식을 원용한 의도는, 오늘의 한국문학적 풍토가 지나치게 이념 일변도의 ‘무거운 주제’만을 ‘무겁게’ 다루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동 의식의 실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문학이론에 대한 입장, 즉 동양문학론에 기초한 문학의 이해방식과 대체로 일치한다. 말하자면 마광수는 자신의 문학이론서인 <상징시학>에서, ‘재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보다는 ‘표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을 강조한 바 있는데, 그와 같은 이론과 논리가 소설창작 과정에서도 ‘가벼움의 미학’이라는 방법론을 생성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가벼운 소설’은 또한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된다. ‘무거운 소설’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가벼운 소설’은 다소 위악적(僞惡的)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거운 소설은 작가가 철학자나 사제(司祭) 같은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요, 가벼운 소설은 작가가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위의 책, 138쪽)

앞서도 말한 것처럼 문학이 독자들에게 진리나 교훈을 주지 않더라도 미적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개연성 있고 박진감 있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가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을 ‘무거운 소설’의 범주에 넣고, ‘작가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을 ‘가벼운 소설’로 분류하고 있는 태도는 현대적 관점에서 재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가벼움이 경박함이나 천박함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할 때 고전소설, 특히 전기소설 속에 나타나는 문체나 주제의 ‘가벼움’을 그가 이미 <광마일기>에서 활용한 바 있고, 이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여러 편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이런 미학에 근거한 것이다.
작가가 모든 문학 작품을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를 둔 ‘인공적인 꿈’이라고 보는 한에서, 우리는 앞의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소설 미학적 진술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인공적인 꿈’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장치들이 구성의 절묘함과 함께 소설 전체의 유쾌한 재미성을 받쳐 주고 있는 것이다. 서구 문학이론의 눈으로 마광수의 소설을 볼 때, 구성의 입체성이나 갈등의 양상이 아예 없거나 약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동양문학의 전통과 작가의 독특한 소설 미학적 관심에 바탕을 둔 소설 양식을 의도적으로 실험하려는 데서 나온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여러 편을 읽어보아도 동양적 소설미학에 서구적 묘사법을 가미하여 동서양 문학의 상승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어 훨씬 폭넓은 재미와 박진감을 자아내고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작가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현실과 상상 속을 넘나들며 <아라비안 나이트> 같이 다양한 성희(性戱)의 즐거움을 묘사하여 쾌락주의적 인생관을 강조하는 한편, 그 이면에는 죽어도 죽어지지 않는 인생을 시니컬하게 조망하거나(<X의 이야기>), 무섭고 불투명한 인생의 비참한 운명(<인생살이>)과 권태롭고 허무한 인생(<개미>)을 그리고, 거기에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다소 가미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관능적 상상이라고 해서 꼭 ‘쾌락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한 가지 덧붙일 말은, ‘관능적 상상’이란 반드시 즐겁고 쾌락한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관능적 상상은 곧 ‘야(野)한 상상’이므로 슬픈 것이 들어갈 수도 있다. 야(野)한 자연(自然) 속에서는 언제나 쾌락과 고통이 엇갈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생각>, 1권 63쪽)

<권태>를 비롯하여 <광마일기>와 <즐거운 사라>는 물론,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인물로, 우리 근대소설의 인물들과 비교할 때 유니크한 특징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인물 창조는 작가의 문학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문학의 근본적 창작 동기를 ‘판타지의 창조’에 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념지향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실비판과 전망의 제시보다, 낭만적 환상에 바탕을 둔 소설의 분위기를 추구한다. 사실 이 점이 그의 소설을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꼭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고 하는 말에도 나는 찬동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학작품은 다 <리얼>한 것이다. 낭만적 환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 수법은 환상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해 내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물론 요즘 주장되는 리얼리즘은 <묘사론>적 기법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긴 하지만, 아무튼 인간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든, 환타지에 의한 공상에 의한 것이든─을 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와 별차이가 없다고 본다.]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권태> 후기)

[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그것이 ‘관능적 상상력’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상상은 언제나 실제화(實際化)되게 마련이고, 그래서 과학의 발달이나 인권신장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관능적 상상력을 모티프로 한 시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가는 내 손으로 새로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얘기 를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얻는 것이로로말 모든 인간의 궁극적 소원이요, 갈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달픈 현실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마음대로 못하면서, 숨소리조차 죽여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기에 딱했다. 그리고 상상을 단죄하기까지하는 이 나라의 참담한 현실에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해서, 소설로나마 그들을 위로해주고 나 또한 대리만족(또는 대리배설)의 효과를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다시금 정독해 나가는 동안, 요술 램프를 얻는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 이야기의 기본 모티프는 물론 바보 같은 ‘부마 콤플렉스’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알라딘이 요술램프를 얻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만큼은, 우리가 돈·섹스·명예 등 실제적인 행복과, 나아가서는 인권신장과 분배정의(分配正義)의 실현, 또는 진짜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를 성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생각>, 1권, 59~60쪽)

그는 이념적 지향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그것은 앞서 밝힌 바 있듯이 자신의 소설적 입장에 대한 뚜렷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묘사적’ 기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매우 적극적 입장을 취한다. 그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심리적·외면적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묘사’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사가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 의도 속에서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아울러 파악해야만 한다.


3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핵심 모티프 가운데 하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현란한 머리카락, 송곳처럼 뾰족한 하이힐, 육체를 치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장신구가 연출하는 그로테스크의 미(美)에 화자인 ‘나’가 ‘페티시즘’의 심리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페티시즘이란 말하자면 그로테스크 미의 상징적 극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페티시즘의 대상은 예외 없이 비현실적이고, 괴기스럽고, 유현미(幽玄美) 넘치는 관능적 심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페티시즘의 미적 승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61쪽). 첫 장편 <권태>와 마찬가지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도 상상의 램프를 마찰시켜 온갖 종류의 페티쉬(fetish:미적 고착 심리의 대상)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페티시즘에 관한 교과서라고도 부제를 붙일만한 소설이다. 특히 이 소설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손톱’ 취향을 축으로 해서 온갖 성적 페티쉬의 환상을 체험하는 작가의 심리와 행위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페티시즘의 심리를 단순히 작가 자신의 성적 기벽(奇癖) 취미로만 이해해서는 이 소설의 본의(本意)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거기에는 보다 심층적인 인간 심리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 개입되어 있다.
소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복잡한 심리를 예술적으로 복원해내어 이해하려는 노력의 한 가지 소산으로, 작가는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를 프리즘으로 하여 여러 가공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구현하는 성적 취향과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를 페티쉬를 통해 그리고 있다. 따라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페티시즘의 문제는 작중인물, 특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심리와 여성 인물들의 심리문제와 관련지어 함께 생각할 때 이해될 수 있다.

[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 워 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새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볼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인간의 가학성이 미의식과 합치되어 아름다운 환타지로 승화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류의 평화, 전쟁이 없는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감정과 사상, 관념과 사물의 대립을 지양하고 그것을 생동력 있게 통일시킬 수 있는 근원적 에너지가 바로 ‘환타지’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관념적 사랑이 아닌 성애적(性愛的) 사랑이 합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당당한 쾌락추구에 기초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이나 높은 뾰족구두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등, 서양식 페티시즘(fetishism)에 대한 동경이 남달리 강했다. 나는 한복을 입은 여자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앞가리마를 타고 곱게 쪽을 찐 머리에 오이 씨 같은 버선, 그리고 흰 목이 날렵하게 드러나는 저고리의 동정 선(線) 등을 통해 페티시즘적 감흥에 빠져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황진이>, 1권 195쪽)

페티시즘은 원래 물신숭배(物神崇拜)나 주물숭배(呪物崇拜) 또는 고착성욕 등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특히 어떤 물건에 집착하면서 쾌감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든가, 어른들이 이성의 특정한 장신구나 의복 또는 신체 부위 등에 특별히 집착하는 현상 역시 페티시즘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페티시즘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심리를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실적 삶의 고통에 의해 야기되는 인간의 퇴행욕구는 어떤 영원한 물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원초적 소망을 갖게 하며,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강력한 긍정을 하게 만든다. 페티시즘은 그래서 ‘죽음에의 욕구’와 통해 있으며, 따라서 마조히즘과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전환이며, 곧 ‘생물체’에서 ‘무생물체’로의 존재전이이다. 가령, 벤야민적 관점에서 자살은 “비유기적인 사물에의 궁극적 감정이입”(유진 런,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이라고 할 때, 그것은 페티시즘의 극치를 이루는 심리적 양상의 한 형태를 구성한다. 타자에 의해 물질적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무생물로 돌아가 영원히 안주하고 싶어하는 심리, 즉 살아있는 육체가 아닌 무생물적 물질에 대한 집착이 페티시즘이다. 더 나아가 페티시즘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혐오감’이나 ‘무생물에의 동경’에서 비롯된 ‘중성지향적 심리’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생물은 삶과 죽음의 중간입장에 서 있는데, 그것은 곧 남성과 여성의 차별성을 벗어난 ‘행복한 통합’의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남녀양성(hermaphrodite)처럼 남성과 여성이 한 몸 안에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면 인간의 이성(異性)에 대한 욕구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무스(Animus)’나 ‘아니마(Anima)’는 그런 심리 현상의 근원을 잘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12장 <어떤 만남>에 진술되어 있는 것처럼, “내 잠재의식 깊숙이 숨어 있던 여성다움에 대한 동경”(1권, 246쪽)인 ‘아니마(Anima)’ 같은 것도 남녀양성이나 중성지향 심리의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성(異性)에 대한 집착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인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은 우선 정신보다는 육체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에 대한 욕망은 ‘잃어버린 육체적 완전성’에 대한 회복의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성심리는 중성적 혹은 양성적 심리를 궁극적인 지향목표로 삼게 된다. 페티시즘은 바로 이와 같은 심리에 대한 대안적 욕망인 것이다.
또한 화자는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닌 상태’로서의 중성적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중성적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손톱’이다. 작가는 수많은 페티쉬 가운데서 특히 ‘긴 손톱’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를, 물질과 생명 양자를 포용하는 의미와 유미적 실용주의 및 평화주의, 그리고 양성적 의미로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옆의 남자가 설명해주기를, 탐미적 에로티시즘만큼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것은 없다는 거야. 남자건 여자건 머리를 짧게 깎아놓으면 다들 마음이 전투적으로 된다는 거지. 그리고 손톱을 길게 기르고 정성껏 가구는 사람은, 손톱이 부러지는 게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남을 할퀴지 않는다는 거야. 듣던 중 꽤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지.”]
(<너 죽어봤니?>, 1권 340쪽)

<권태>의 ‘나’와 ‘희수’, <광마일기>의 주인공 ‘나’와 ‘요정(妖精)들’, 그리고 <즐거운 사라>의 한지섭 교수와 ‘사라’,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나오는 세헤라자데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모두 지독한 페티시스트들로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페티시즘적 소망(그의 페티쉬는 길고 뾰족한 ‘손톱’이다)이 작품 속에 반영된 흔적들이다. 작가는 여성의 미의식과 ‘치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러워하며 사회제도로 강요된 남녀의 변별성을 거부하고 양성적 나르시시즘을 꿈꾼다. 화자는 <즐거운 왕국>, <남근석(男根石)의 최후>,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에서 앞으로의 사회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게 될 지도 모른다며 남성의 위축과 몰락을 에측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 지금까지의 사회제도는 남성들을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이 아름다움을 가꿀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여성 같은 화사한 몸매를 갖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여장남성(女裝男性)들의 수효가 급증하는 추세에 있는데, 이는‘남성해방운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반드시 용감해야 하고, 투박한 육체를 가져야 하고, 힘이 세야 한다는 사실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황진이>, 1권 221쪽)

이처럼 화자와 소설 속의 여성들이 모두 페티시스트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유미적 평화주의와 여성적 ‘인공미’에 대한 열망이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열망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삶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심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은 일상사에서 고독이나 불안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거나, 더 포괄적으로는 권태감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독이나 불안, 권태는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여과과정을 거쳐 성적 페티쉬와 판타지에 대한 발랄한 상상력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이 마광수의 소설을 기존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변별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손톱 페티쉬가 갖는 미학적 측면과 자궁회귀본능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현실주의 시인인 프랑스의 로트레아몽(Lautreamont)도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에서 날카로운 긴 손톱의 가학적 이미지를 표현했듯이, 마광수의 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날카롭고 긴 손톱은 권력욕구의 심층심리인 자궁회귀본능의 미학적 상징물로 기능하는 페티쉬라고 할 수 있다. <권태>뿐만 아니라 <광마일기>나 <즐거운 사라>를 거쳐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나’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여성 인물이 치장하고 있는 손톱 페티쉬는 이 작품들 이전에도 작가 자신에 의해 추구되었던 미학적 상징물로서 <손톱>에 잘 그려져 있다.
그의 손톱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1967년에 쓴 단편 <손톱>에서부터 나타난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50장 <손톱>에도 그려져 있듯이 그는 오랫동안 ‘손톱’에 집착하여 그것의 상징성을 파헤쳐 나갔고, 그 결과 손톱의 상징은 그의 논문 <미의식의 원천으로서 자궁회귀본능에 대하여>에서 ‘자궁회귀본능’, ‘권력욕’,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미의식’의 심리적 추이체계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이와 같은 페티쉬들이 단순히 손톱, 발톱, 긴 머리카락, 구두, 장신구 등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 이미지를 통해 재차 환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페티쉬의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만화경 속의 신비로운 색채적 환상을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근대소설이 이와 같은 색채묘사에 의외로 둔감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작품에 보이는 색채묘사는 넓은 의미에서 리얼리즘의 묘사적 구체성을 진지하게 확보한 것으로 보아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색채의 연금술적 마술 같은 묘사가 대상사물로서의 페티쉬에 채색됨으로써 비생명적인 대상에 육신을 불어넣으려는 듯한 작가의 상상력은, 이 작품을 ‘읽는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보는 소설’로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묘사의 가능치를 매우 적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서술적 기능보다는 회화적 장면묘사나 그림에 더 치중하고 있다. 23장 <그림 속에서>나 24장 <초상화>에서 현실과 그림 속의 비현실을 중첩시켜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현실을 초월한 몽상적 판타지와 황홀한 로맨스를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 그려진 다양하고 감각적인 페티쉬 묘사는 묘사 그 자체를 넘어서 독자들에게 회화적 만화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매우 유니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로 평가할 수 있다.

4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의 본류는 주인공이 램프의 요정 세헤라자데를 매개로 시공을 넘나들며 몽환적 에로티시즘의 다양한 진경을 음미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렌즈의 초점을 조금 먼 곳에 맞춰 조망해 보면 이 소설은 작가가 체험한 현실의 비이성적 폭력에 대해서도 풍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장 <아라베스크>에 나타나 있듯이,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지나치게 야하다(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형사범 취급을 받고 급기야 현행범으로 구속되어 감옥 생활까지 하게 된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광수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궁 속으로>에서도, 작품이 야하다는 이유로 주인공(이 작품에서 주인공 ‘박민우’는 곧 작가 자신이다)인 작가를 반 국가사범으로 기소하여 구속하는 사법 당국의 반 성적 문화탄압과 작가의 상상력을 억누르는 우리 사회의 위선적 이중 구조에 대해 희화적으로 풍자한 바 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제일 바깥 동심원에서 작가가 작품을 응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사법기관의 음험한 시선이나 유교 이데올로기를 전범(典範)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의 보이지 않는 감시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다소 격앙된 어조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과 상황은 “당시 언론의 하이에나 같은 작태와 꽉 막힌 지식인들의 비이성적 마녀사냥”(1권 13쪽)이다. 사법부의 황당한 법 집행과, 그로 인해 자신이 일하던 직장에서 해직되고, 사회에서조차 버림받는 등 교권과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한 데 대한 울화가 이 소설의 창작 동인이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의 심리적 대리배설은 <아라베스크> 이외에도 <램프의 요정> 등 작품 곳곳에서 화자의 우울한 정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전편을 통해서 작가의 그런 심리가 가장 역설적으로 풍자되고 있는 곳은 13장 <심각해 씨의 비극>이다. 작가가 직설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런 심리적 정황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 <즐거운 사라>가 형법상의 유죄라고 판결한 법원의 판결문 가운데는, 사라가 여자 친구와 재미삼아 동성애적 애무를 한번 연습해 보는 장면을 묘사한 몇 줄이 유죄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사라가 오럴 섹스나 자위행위를 하는 장면조차 유죄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라잉게임> 같은 동성애 영화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같은 항문성교 영화는 수입을 허가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자위행위나 오럴섹스조차 안 된다는 판결은 아무래도 기막힌 아이러니요 난센스였다. 도대체가 형평성도 없고 기준도 없었다. 권위주의적 강제(强制)와 비합리적 획일주의만 난무하는 것이 바로 이 땅의 현실이었다. 성문제에 대한 논란 이전에 인권보장이나 자유권 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합리적 지성’이 부재(不在)하는 윤리적 전제(專制) 시대의 질곡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심각해 씨의 비극>, 1권 249-250쪽)


<심각해 씨의 비극>은 현재가 아니라 22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실화에 대해 세헤라자데가 주인인 ‘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나’(주인님, 즉 작가 자신)와 정반대의 상황에서 고초를 겪은 대학 교수의 이야기이다. 20세기 말의 M교수 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한 성 개방이 이루어져 정신적 섹스와 육체적 섹스를 분리하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혀는 식사 및 섹스에 있어 동일한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결코 변태가 아니라 일반적 통념으로 인정된 사회에서 Y대학 성과학대학(性科學大學) 용설학과(用舌學科) 교수인 ‘심각해’가 <이성(理性)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 책의 내용은 정신으로서의 이성적 사랑과 성행위 시 혀를 사용하는 육체적 사랑을 분리하는 이론, 즉 “섹스행위 때 사용되는 혀는 먹는 행위 때 사용되는 혀와는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섹스행위 때 사용되는 혀에는 반드시 정신적 사랑, 즉 다시 말해서 ‘이성적 합일(合一)로서의 사랑이 심리적 동인(動因)으로 추가된다.”(1권, 252쪽)는 것이다. 자신의 새로운 학설 때문에 기성 학계나 권력층, 그리고 일부 독자들의 분노를 사는 한편, 풍속을 심각하게 위협할 사회의 암적 존재로 지목되고, 결국 ‘사회의 안위를 해치는 불온한 사고방식의 유포’에 해당되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는 이야기이다. 이런 설정은 ‘심각해 교수’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즐거운 사라>에서 묘사했다는 이유로 1992년 사법 당국에 의해 실제로 구속되기까지 했던 작가의 실제 체험을 180도 뒤집어 풍자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결국, 심각해 교수와는 정반대의 죄명으로 정죄당한 작가 자신의 뼈저린 체험과 울화와 우울이 역설적으로 풍자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심각해 씨의 비극>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법(法)’에 대한 풍자는 19장 <색희(色姬)와 양귀비>와 20장 <X의 이야기>에서도 계속된다. 죄업이 워낙 커 좋은 곳에 환생하지 못하고 아프리카의 우간다에 다시 태어날 운명에 처한 양귀비가 ‘나’와 즐기기 위해 태어날 날짜를 연기시키면서까지 호송을 맡은 귀졸(鬼卒)을 돈으로 매수한다. 죽어서도 뇌물이 통하고 명부(冥府)의 염라대왕조차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풍자를 화자는 전생의 일을 5대(代)까지 기억하고 있는 친구 X를 통해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친구 X의 이야기에 의하면, 공평무사해야 할 저승의 염라대왕은 물론이거니와 <색희와 양귀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법을 집행하는 ‘귀졸’조차도 뇌물을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과 독단에 쏠리고, 돈 있고 힘 있는 자에겐 관대하고 힘없는 자에겐 사디스틱한 게 바로 법관이요 염라대왕”(2권 11~12쪽)이라는 것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법의 여신 ‘디케’가 온전하게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양손에 ‘저울’과 ‘칼’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울은 내려놓고 서슬 푸른 칼만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을 작가는 저승의 염라대왕과 귀졸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 물론 작가가 정의를 수호하는 법의 숭고한 정신에 대해 무조건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양심과 표현의 자유에까지 권력 기관의 하수인이 되어 칼날을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르는 법의 남용과 월권이다.
이 소설에서 풍자하고 있는 것은 비단 ‘법’만이 아니다. <남근석(男根石)의 최후>에서는 SF판타지의 만화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여자는 고위층이나 자본가들이 사육하는 애완동물”이 돼 버린 황량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남자도 여자의 자궁에서 나온 이상 미래는 여성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함으로써 남성(男性)을 상징하는 ‘남근석’의 몰락을 통해 자본주의와 성(性) 사이의 관계를 냉소적으로 풍자한다. 43장 <신선이 되기까지>에서는 젊은 수도자와 늙은 수도자가 신선이 되기 위해 마지막 관문인 육욕(肉慾)의 시험에 들게 된다. 젊은 수도자는 육욕을 못 이겨 파계를 각오하고 여인과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신선이 된 반면, 육욕의 시험을 참고 이겨 낸 늙은 수도자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늙은 수도자는 젊은 수도자의 도움으로 겨우 반쪽만의 신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육욕을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표출하는 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요컨대 작가는 늙은 수도자의 경우를 모티프로 삼아 위선적 금욕주의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5

마광수의 소설은 이른바 ‘허구성’과 ‘개연성’을 기본 원리로 채택하여 자유롭고 낭만적인 상상을 통해 인간과 성의 문제를 주로 다양한 성 심리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벼움의 미학’에 토대를 둔 ‘묘사적’ 리얼리즘 기법과, 만화적 상상력과 낭만적 판타지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리얼리즘의 미학과는 다른 독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그가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 대신 ‘묘사적’ 기법의 리얼리즘으로 인물이나 대상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인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이성적인 것이든 판타지에 의한 공상에 속하는 것이든 모두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그와 같은 생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한 상황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광수 소설의 창작 정신과 방법론은 관능적 상상력에 토대를 둔 낭만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히 상징적 상상력의 실제적 효용과 문학적 카타르시스(대리배설)의 구체적 적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마광수의 문학관과 소설세계는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소설의 리얼리즘적 전통 속에서는 아웃사이더로 평가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소설세계는 의외로 동양적 문학 전통, 특히 우리의 고전소설 전통인 전기성(傳奇性)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소설 전통에 근접해 있다는 점을 여러 모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인간의 근본 심리를 기본 모티프로 하여 다양하고 현란한 페티시즘의 묘사를 통해 낭만적 판타지를 능란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을 억압하는 법과 도덕과 문화의 위선적 이중구조를 풍자하고 있다. 이전 작품에서도 그랬듯이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에서 작가가 특히 강조하여 묘사하고 있는 페티시즘의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구의 근대 소설적 전통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인 세계를 일구어 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작 장편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성적 대상물로서의 페티시를 단순하게 제시하거나 나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치밀한 형체 묘사와 색채 묘사를 덧붙여 사도마조히즘이라는 심리와 연결시키고 있어, 실로 회화적 묘사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 낸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권태>와 <광마일기>를 포함하여 이번에 내놓은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는 마광수 문학의 형식과 정신을 선명하게 압축하여 보여주는 조감도이자 결산서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의 시공간을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즐거운 사라>나 <자궁 속으로>에서처럼 ‘현실’을 배경으로 했을 때 관능적 위월(違越)의 상상력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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