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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야
마광수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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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죄의식 -- 마광수 소설집 "나는 너야"를 읽고 / 이지혜 




작가는 연세대학교의 국문학과 교수로, “야한 여자가 좋다”와 “가자! 장미여관” 등 성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동시에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명성과 지탄을 동시에 받아왔던 인물이다. 2015년도에 발간된 “나는 너야”는 마광수 교수의 따끈따끈한 신작으로, 서시를 포함해 단편, 중편소설 25 작품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서시가 서문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 서시에서 작가의 한과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가슴 속에 엉긴 핏덩이를 소낙비로 씻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붉고 꾸덕꾸덕하게 엉겨있는 죽은 핏덩어리 떠올리게 한다. 아마 그 핏덩이란 작가 본인의 문학관으로 인해 수십년간 핍박과 수난을 받으며 쌓인 한이라고 생각된다. 이 핏덩이를 씻어낼 수 있는 소나기란 “뒤섞여 흘러가는 물”은 곧 보편적인 패러다임을 따라 흘러가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과 말 등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그 흐름, 보편적으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윤리적, 종교적 성애관에 순응하지 않고 성과 쾌락이라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직접적으로 꼬집었기에 사회에서 지탄받았다. 그 보편적인 흐름에서 떨어져있기에 고독하고, 이미 떨어져 나왔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두려워하고 서러워하는” 내면을 위안한다. 그의 희망과 절망이 못생긴 까닭은 그것들이 미화되지 않고, 포장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 “나는 너야”는 작품들 전체에 걸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나는 너야”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1인칭 시점으로 남자 주인공의 자신의 경험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가 사랑하고 욕망하는 여성들에 대한 그의 심리와 상황에 대한 설명이 마치 경험담을 읽는 것처럼 담담하고도 유쾌하게 전달되고 있다. 특히 주인공의 사상이 마치 작가 본인의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일관성이 있어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본인을 모델로 소설을 설정하여 현실의 사실(real fact)와 소설적 허구(fiction)을 교묘하게 꼬매어 놓음으로서, 독자는 주인공 “나”와 마교수를 동일시하며 소설에 몰입하게 된다.
1인칭 시점과 “나는 너야”라는 제목은 곧 소설의 화자는 곧 작가 본인 이기도 하고, 또 소설의 독자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누구나 마음속에는 마광수가 있다. 즉 소설 속의 “나”의 심리와 욕구에 너도 사실은 공감하지 않느냐. 이제 그만 너도 솔직하게 내면의 목소리를 인정하라는 은근한 압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가 그의 문학세계에서 초반부터 현재까지 줄곧 주장해오던 바이기도 하다.

“나는 너야”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현실과 문학세계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이들보다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단순히 성적인 성향과 묘사에서 뿐 아니라, 이성에게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언제가 서운했고 언제가 허무했으며 언제가 불안했는지, 자신의 기분과 충동에 대해서 마치 유리병처럼 투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윤리적으로 포장하려고 하지도,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고백할 뿐이다. 이러한 심리묘사와 내러티브를 통해 독자는 화자의 감정선을 생생하게 따라가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방어기제나 합리화가 담기지 않은 감정에는 판단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화자가 유부녀에게 욕정을 느낀다고 해서, 독자가 이를 윤리적으로 옳은지, 합리적인지 판단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그냥 그런 것이지, 맞거나 틀리거나, 혹은 착하거나 나쁘거나 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가 왜 그렇게 느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는 곧 소설의 “심리주의 분석”의 시작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적인 비평이 아닌 감상의 단계에서는, 그저 화자에게 이입하여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며 그의 감정선을 따라갈 뿐이다. 이렇게 감정고백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서 성에 대한 판단(judging)과 성에 대한 감정(feeling)을 분리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렇게 성에 대한 도덕적, 논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보다 솔직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성담론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보수적인 (아마도 실제 의견보다 더 과장하여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대중문화 곳곳에서 코드화된 성적 욕망들을 소비하면서도, 막상 욕망 그 자체는 부정하도록 사회화 되어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는 아주 오래된 신화(myth)에서부터 학습되어온 전통이기도 하다. 작가가 또 다른 저작 “문학과 성”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동양의 음양관에서 양이 곧 남성과 삶을 뜻한다면, 성과 여성, 죽음은 음의 영역에 속한다. 서양에서도 이브가 사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추방당했듯, 여자는 유혹에 약한 죄의 근원이자 부도덕의 원천이었다. 음란한 여자와 쾌락추구, 그리고 타락은 항상 한 묶음으로서 분류되어왔고, 지탄과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 되는 칸트의 합리주의에서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하다”는 명제가 성립했으며, 에릭 프롬은 “정신적인 사랑이 육체적, 감정적 사랑에 우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회적 명제, “정신적인 가치가 욕구충족과 쾌락에 우월하다.”에 부응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초자아(super ego)에 깊숙히 새겨져 있다.
작가의 오랜 지론은 소설의 재미는 감상과, 퇴폐로부터 나오며, 문학의 가치는 배설이라는 것이다. 문학의 가치가 오로지 배설이라는 명제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문학적 카타르시스의 과정은, 사실 섹스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과정과 비슷하고 생각한다.

1) 첫째, 과거의 경험에서 형성된 성격과 가치관에 기반한 개인적인 취향이 존재한다.
심리학의 유명한 논제인 유전이냐 환경이냐(Nature vs. nurture)의 논란은 논외로 치더라도, 문학적 취향이 개인의 가치관, 성격과 크게 맞닿아 있음은 부인의 여지가 없다. 사회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참여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독자는 리얼리즘 소설이나 문제의식을 담은 문학을 선호할 것이고, 인간의 내면에 관심이 높은 독자는 심리적 묘사가 탁월한 문학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지적 탐구의 꼭지점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와 같으며, 이러한 취향은 개인의 성격이 형성된 과정과 그 맥을 같이할 것이다.
성적 취향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처음으로 경험한 강력한 성적인 기억이 이후의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친다. 남성 동성애자 중에서는 소년기에 남성에게 성적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비율이 높으며, 여성 동성애자중에서는 어린 시절 남성에게 폭력이나 추행, 혹은 버림받은 기억 등의 상처를 당한 일화가 많다. 또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 등의 “변태성욕”을 취향으로 하는 경우에도 이와 관련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충분한 전희가 있을 때 최고조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잘 짜여진 소설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climax로 오르는 과정에서 개연성 있는 스토리 뼈대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에 생생하게 묘사되었을 독자는 최고로 몰입하고 캐릭터에 공감하게 되고, 가장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이는 climax로 유도하기 위한 작가의 섬세한 설계로 이루어진다.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충분한 전희와 능숙한 애무에 의해서 흥분이 고조된다. 이는 곧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발기”에 있다고 단언한 작가의 사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10계단 올라가면 1 미터 높이에 있을 뿐이지만, 30계단을 올라가면 3 미터 높이에 있을 수 있다.

3) 오르가슴과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는 마치 묶은 찌꺼기가 내려가는 느낌과 같다. 이를 “배설”이라고 표현하며 관장도 “카타르시스”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메커니즘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효과로서 “카타르시스”를 강조한 이래 예술의 치료 효과로서 카타르시스가 논의되어왔다. 우울할 때 슬픈 영화를 보며 펑펑 울고 나면 기분이 한참 나아지는 것처럼 한껏 고조되었다가 해소되는 감정은 묵은 감정을 배출시키는 정서적 치유효과가 있다.
오르가슴이나 사정 또한 이와 비슷한 매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오르가즘이나 사정을 통해 정체된 성욕을 배출시킴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보다 활기차고 말끔한 기분을 느낀다.

4) 정서적 교감이 없는 결론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작가의 문학을 읽었을 때, 어렴풋이 느끼던 기분,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해 낸 것을 발견했을 때, 독자는 정신적인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정서적으로 “공명”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며, 정서적 오르가슴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지적, 정서적 충만함은 독자가 작가와 충분히 소통하여 공명한다고 느낄 때 얻을 수 있다.
섹스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소위 “영혼 없는 섹스”는 자위행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신뢰에 기반한 애정이든, 쾌락을 추구하는 여정에 있어서의 동지애든, 파트너와의 정서적 교감, 소통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쾌락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충만한 만족감, 뿌듯함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본능"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동물적인 감각, 성욕과 쾌락 수식어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영어권에서 본능은 전자를 뜻하는 instinct이거나 "human nature"이라 번역된다. “nature”란 본질이자 곧 자연스러움이다. 물론 물욕이 절도로 연결되어서는 안되며 분노가 살인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되듯, 성욕이 성범죄로 연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욕구 그 자체에는 죄가 없다. 윤리적, 도덕적 담론을 벗어나,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를 다스리는 법 또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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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인생이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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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소설 <별것도 아닌 인생이> 독후감 / 유아리


별것도 아닌 인생이라는 제목과 밝은 색감이지만 무엇인가 어둡고 무거운 느낌의 표지 삽화처럼 이 책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주가 되어 있다. 책의 뒷면에는 하나의 시가 써 있는데 인생과 사랑, 돈, 섹스, 시, 똥을 모두 별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별것도 아닌 것이 어렵고 힘들고 잘 안되어서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는 듯 하다. 책을 읽기 전에는 저것들을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얘기하는 것이 반어법일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책이 사랑과 돈, 섹스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은 정말로 많은 것이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은 인생이란 그저 우연히 내던져진 것, 이라는 문구가 함축하고 있듯이 인생은 누군가가 어쩔 수도 없는 것이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건조하고 관조적으로 인생 자체를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건조하고 냉소ㅅ적인 문장으로 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말하자면 뚜렷한 메시지도 없고 드라마틱한 줄거리고 없는, 그런 가운데 이 시대의 삶을 어느 한 면에서나마 객관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의 소설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다. 작가의 말과 같이 누가 이 책에 대해 물어본다면 줄거리는 무엇이라고 딱 집어서 얘기 할 수 없다.

분량이 짧은 글이 아니지만 보통 소설을 읽고 분석하는 중심 사건도, 복선도, 인물의 심리 변화나 관계 변화도 없어서 긴장감이나 극적인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로라를 비롯한 여성 등장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와 칭송, 그리고 여러 평범한 남자들의 비현실적이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 속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패배주의적이고 무력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 조차도 스스로에 대해 늙었다, 지쳤다는 말로 표현을 한다. 이 책에서 빛나는 사람은 오직 ‘로라’뿐이다.

로라는 ‘나’가 꿈꾸는 소위 말하는 야한 여자이다. 외국 부호와 결혼을 하여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고 그 돈으로 자신이 꿈꾸던 야한 공간을 만들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간다. 미스코리아 출신답게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테스크하게 자신을 꾸민다. 로라의 꾸밈에서 작가의 특이한 취향을 알 수 있다. 자연미를 칭송하고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하여 노력하는 현 시대와 달리 작가는 극단적인 인공미를 추구한다. 물건을 집기도 어려울 정도로 긴 손톱, 바닥에 끌리는 긴 머리카락, 걷기 힘들 정도로 높은 힐과 그런 힐을 신어야 걸을 수 있는 긴 발톱, 형형색색의 화장과 수 많은 액세서리 등이 로라의 치장에 등장하고 작가와 등장인물은 이것들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비현실적이고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징그럽기까지 한 이런 극단적인 인공미를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책에서는 오로지 여성의 미에 대해서만 표현하고 있다. 남자 인물에 대해서는 성적인 매력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여성보다 매력적인 남성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다운 남자, 남자의 몸에 대해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아 여성의 외모와 치장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표현은 극도의 여성성을 강조하고, 추앙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여자만 하는 화장과 매니큐어와 패디큐어, 많은 액세서리와 높은 힐 등에서 오는 여성적인 매력에 대해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다들 키가 커 보이기 위하여 하이힐을 신고 얼굴이 예뻐 보이기 위하여 화장을 한다. 그러면서 자연미가 최고라고 칭송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순을 꼬집고 솔직하게 여성의 꾸며진 아름다움을 높게 치는 솔직함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스스로 항상 자유인으로 살아가며 ‘이중적 위선’에 맞서 싸우는 문화운동가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인공적인 방법을 취하며 자연스러움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중적인 위선을 극단적인 인공미를 칭송하므로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로라를 중심으로 한 남자들의 관계 또한 일반적인 시각과는 다르다. 남자 등장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로라를 마음에 품고 가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남자들은 서로 아는 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통의 소설과 영화와는 달리 삼각관계, 질투, 치정관계 등으로 비춰지지 않고 그저 사랑 (이 사랑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으로 비춰지고 있다. 한 사람은 한 사람과의 관계만 유지해야 하고, 여럿을 사랑하면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 또한 비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감정과 현재에 충실한 모습이 더욱 순수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작가의 많은 작품이 글을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이 작가와 거의 동일시 되어 있다. 글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항상 남자인데 소위 말하는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외소하고 늙었으며 여성에 대해 확고한 취향과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책 속에서는 항상 화려하고 야한 여자가 등장하고 남자들은 그 여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남자들은 모두 평범하고 화려하지 않다. 또한 여자 등장인물들은 항상 남자에게 존댓말을 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하대를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작가, 그리고 글의 주인공은 당당하고 야한 여자를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여자를 정복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 특히 남자의 심리임을 알 수 있다. 사랑과 인생에 대해 당당하고 독립적이며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있고 본인을 꾸밀 줄 아는 여자가 자신을 위해서는 말을 높이고 고분고분히 굴며 잠자리에서도 봉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남자로, 그리고 작가로 하여금 정복욕과 쾌감을 선사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과, 그것 또한 숨기고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중적 위선에 맞서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로는 ‘정력’보다는 ‘정열’이 중요하다는 부분이 있다. 로라가 천민에게 하는 말인데 천민은 로라에 이 발언에 대해 세련되게 남자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여자라고 평가 한다. 여기에서 현대 남자들이 정력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는 항상 삽입성교 보다는 구강성교를 선호하고 삽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의무적인 삽입 후 사정이라는 과정에 대해 비난하고 섹스는 즐거움의 대상이여야 함을 말해준다. ‘정력’에 대한 부담감에서 탈피하여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섹스를 추구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작가의 틀에 박히고 전형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식과 삶의 쾌락과 즐거움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상 깊은 구절은 “그런 의문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로라가 아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는 증거야. 진짜로 삶에 지치고 절박해지면 운명이고 뭐고 따지고 자실 겨를이 없어져. 그저 순간적으로 동물적인 생존욕구만 느껴지지. 그런 생존욕구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살하게 되는 거고”라는 부분이다. 인물들은 사치와 유흥을 즐기고 그 안의 매너리즘에 빠져 담담한 태도를 취하는 듯해도 돈,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번뇌 자체도 주인공의 말 마따마 사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허영심과 물질이나 사랑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결국 모든 것이 부질없고 별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시를 쓰면서 시란 결국 가벼운 수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수음같이 가볍고 허탈한 모습을 띠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서 작가는 삶에 대한 고뇌와 집착, 욕심에서 벗어나서 결국 인생은 내던져진 것, 그저 그날그날을 때워 나가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등장인물을 예술가로 설정하고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사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을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개방적으로 자유로운 사랑의 다양한 모습과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 본인의 작품세계가 억압 받고 비난 받았던 사회의 풍토를 비난하는 것이다.

삶의 무료함과 고독, 상실감에 대해 얘기하고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은 사랑이 중요하고 우리의 삶은 달래 줄 수 있는 ‘놀이’는 사랑뿐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사랑을 고귀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이 아닌 ‘놀이’라고 표현 한 것에 대해 위선적이고 점잖은 척 하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의식을 알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을 배설할 도구나 장(場)이 필요하다. 작가는 이를 글을 통하여 하고 있고 글 속의 또 다른 자신은 이것을 사랑을 통하여 하고 있다. 틀에 박힌 점잖은 위선을 벗어나는 것이 비난받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 대해 솔직한 것이 자연스러워 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을, 대단하고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고 관조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비현실적이지만 깊게 보면 너무나도 현실적인 우리의 이야기이며 뚜렷한 메시지가 없다고 말하지만 여러 메시지를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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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 마광수 소설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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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소설 <청 춘>을 읽고......  (sappho01 씀)

 


마광수의 소설 <청춘>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암울하다. 더구나 과거에 작가가 보여주던 섹스에 대한 낙관적 찬양은 이 소설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섹스 예찬에 대한 기대감에서). 그러나 이 소설을 작가의 변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세월의 풍파에 지쳐 자포자기한 늙은 투사의 체념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나도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고 전체적으로 새로운 주제가 등장함을 알 수 있었다. 작가는 그동안 그의 소설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자살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놓고 이 소설을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 자체가 희극과 비극의 공존이라고 하지만, 사실을 따지고 보면 인간은 태어난 것 그 자체가 비극이다. 작가의 시 <자살자를 위하여>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죽지 말라는 강요를 받으면서 참고 살아가야 한다는 무언의 최면에 걸려서 살아갈 뿐이다. 삶의 목적을 억지로 만들어가며, 그 목적이 휘두르는 채찍질을 받으면서 살아갈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마광수 작가의 이번 소설 <청춘>은 특이하다. 전과는 다르게 자살을 주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구성에 있어서도 기존에 에세이 형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던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녹여내고 있고, 과거에 자주 언급했던 이야기들을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해 놓고 있다. 애독자라면 다소 지루한 면이 없지 않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더 실화같이 느껴진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 소설은 작가의 대학시절을 그리고 있다. 문학서클 동인회에서 다미라는 여성을 만나 그녀와 연애하면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줄거리로 된 자서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청춘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다미라는 여성의 삶을 통해 인간의 무미건조한 삶과 삶의 권태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뛰어나게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한 여성을, 남주인공이 유미주의적 시각으로 한없이 동경하는 모습을 조망자적 입장에서 서술한 이 소설은, 남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말했듯이 사랑이 전적으로 에로스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작가가 이 소설 중간 부분에서 말했듯이 에로스(성애)는 필로스(우애)와 같은 말이기에, 남주인공은 여주인공 다미에게 탐미적 경탄의 시선을보내면서 그녀와의 진지한 사랑을 이어나간다. 이것은 작가의 애정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다미와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음을 밝힌다).

이 소설은 다미가 자살하기 전까지 이어진 두 사람의 사랑을, 남주인공 화자의 추억담을 중심으로 그림같이 선명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작가가 살았을 당시의 시대배경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회고담이다. 그러기에 소설은 전체적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제 노년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는 작가의 추억담이며, 과거에 대한 그리운 향수이기도 하다. 다미는 작가의 분신인 남주인공를 만나 그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가난하지만 진지한 사랑을 나누었고 (그녀가 부호의 애첩(愛妾)의 딸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퇴폐적 향락을 결코 포기하지못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남주인공에게는 새롭고 낯선 환희와 경탄이지만, 다미에게는 그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누려왔던 지루한 사랑과 삶의 연속일 뿐이었다. 아마도 남주인공은 다미가 그동안 사귀어왔던 수많은 남자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두 사랑에게 있어 청춘이란 말의 뜻은 서로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남주인공이 갖는 현재의 삶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 (종국에 가서는 우리도 죽는다) 와, 다미가 갖는 과거 시점의 태도 (삶은 권태로움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죽는다) 는 서로 맞닿아 있다.그러기에 이 소설은 작가의 청춘시절 회고담이고, 다미는 이른 나이에 자살해버려 현재까지도 그때 청춘시절의 싱싱한 모습으로 정지돼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미와 북한강변의 주막에 가서 듣게되는 대학생 또래의 청년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잘 나타나 있다.

[내 나이 아직 어렸을 때에/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 어른만 되면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러나 나는 지금 꿈을 이룰 수 없네/ 나는 이미 어른이기에/ 안쓰럽게 푸른 새싹으로 올라와/ 한스럽게 다 자란 싹으로 피어났던 /애닯고 허무했던 나의 희망이여/
어쨌든 내겐 아직 희망이 필요하지만/ 이 얄미운 목숨을 지탱하기 위한/ 멍텅구리 같은 희망이라도 필요하지만/ 나는 이제 자라나는 나무가 아니라/ 점점 죽어가는 나무이기에 /나는 벌써 어른이기에/ 뒤섞인 나날 속에 지쳐 누운 추억의 그림자/ 초라한 기억 속에서 안간힘 쓰며 꿈틀대는/ 이 사랑, 이 욕정, 이 본능/ 그러나 나는 사랑을 이룰 수 없네/아 나는 어른이기에/ 절망보다 오히려 더 두려운 희망을 믿기엔 /이미 너무나 똑똑해져 버린/ 서글픈 어른이기에.]

다미는 청년의 노래가 끝나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미 그녀는 어른이 다 되어버렸기에, 정신적으로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간의 이러한 감정의 대칭은, 작가의 현재 시점과 다미의 과거 시점이 종국에서 가서 만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남주인공은 이 노래를 듣고서, 이 노래는 대학생이 아닌 늙은 사람이 부르는 게 더 제격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미는 노래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고 있기에 오히려 서로를 이해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미의 자살 이후 남주인공은 마음의 아픔을 겪고서, 자살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다미가 쓴 <자살자를 위하여>라는 시를 보자.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마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마라 /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마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마라/ 바람이 부른 것은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마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마라/ 그는 가장 솔직한 자/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자]

다미의 자살과 남주인공이 노년에 가서 느끼는 죽음에 대한 생각의 귀착점은 서로 이렇게 맞닿아 있다. 남주인공은 결국 노년에 들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다미가 자살하게 된 심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살에 대한 긍정이요 죽음에 대한 긍정이며, 삶의 권태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자살을 실존적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한 개인이 자살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나중에 가서 다미의 자살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사실 작가 마광수의 삶에 대한 회의론적 시각과 인간 육체에 대한 유미적인 시각은 그동안 그의 모든 저작들에서 끊임없이 보여주었던 주제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작가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살에 대한 태도를 새롭게 조명한 것인데, 이것도 일부 시(詩)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소설  장르에서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소설 형식으로 그러한 주제를 한 매혹적인 여자의 삶에 투영시켜 서술해 나갔기에, 이 소설을 독자가 받아들이기에는 꽤나 충격적일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남주인공이 다미의 친구에게서 다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울었다는 것으로 끝나며, 그동안 작가에게 보내왔던 다미의 시들을 부록으로소개하고 있다.

분명 마광수의 기존 성애소설과는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주제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오히려 부각되는 참신한 스타일의 소설이라서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이 읽기 좋았다. 특히 <자살자를 위하여>라는 시가 소설을 통해 등장하여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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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를 읽다 - 마광수 인생론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마광수 산문집 <멘토를 읽다> 독후감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태어난 시점부터 주어지는 길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차례로 나오며 부모, 학교,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장 올바른 길, 가장 최선의 길을 어긋남 없이 수행하기를 기대 받는다. 이것이 왜 어떠한 방식으로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모두가 걷고 있는 그 길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완주 하는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요청이 있을 뿐이다. 나 또한 그 길을 걸었다. 나름대로 이러한 사회 구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자라왔다고 생각해지만 사실 나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의문 없이 대학에 왔고 아무런 준비 없이 사회에 떨어졌다. 20살이란 참 신기한 나이이다.

 

평탄하게 잘 굴러갈 줄 알았던 인생에 진짜 ‘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과 이별을 하며 의미 없이 봐왔던 전공 서적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지금껏 참아왔던, 아니 참아왔다고 느껴지지 조차 못했던 ‘하고 싶은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갑자기 물밀 듯이 찾아드는, 지금까지 스스로가 설정해온 자신과 다른 진짜 ‘나’의 모습에 난 적잖아 당황하고 방황했다. ‘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할수록 그 괴리는 더 커졌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릴 적 나는 오히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고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책 읽는 것을 즐기던 어린아이, 누구보다 백일장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20살의 나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다. 그런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평범함과 하찮음을 깨달아가면서 지금껏 강요받아 온 ‘걸어야만 하는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항상 무의식 언저리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을 걷고 싶지 않다고 말할 용기조차 없었다. 겉으로는 “이게 내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어. 정말 사법고시를 봐야만 하는 걸까? 난 다른 것을 하고 싶어” 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안주했다. 주어진 일은 하고 싶지 않으나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는 없는 가장 한심한 단계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내 나이 20살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인생에 큰 목표를 갖지 마라 그것은 오히려 절망을 불러오게 된다. 비관적인 태도로 삶에 임하고 노력보다는 정열을 과거보다는 미래를 현실보다는 상상을 사랑보다는 섹스를 도덕보다는 본능을 중시하라 고 말해주는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진짜 ‘멘토’를 읽었더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아주 짧은 말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이 주된 목적이고, ‘결혼’은 권태일뿐이며, ‘우정’은 파괴되기 쉽다. 또한 ‘종교’는 믿지 않고, ‘행복’또한 3개의 욕구 즉 성욕, 식욕, 수면욕을 일컬으며 ‘일과 놀이’는 서로 융합되어야 한다. ‘정치’는 우리가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알아야하고, ‘죽음’이란 자고로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단촐한 요약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책에서 역설하고 있는 명제 하나하나는 마치 잔잔한 수면위에 날아드는 총알처럼 날카롭고 충격적이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불필요한 수식 어구는 최대한 줄인 단정적인 문장만으로 진행되는 이 짧은 책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단정적이지도 짧지도 않다. 문장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내가 너무나 어리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무게감 있는 역설들이 주를 이뤘다.

 

책의 시작은 이러하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 가지않아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을 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그야말로 무 자체이다.’ 이는 즉 동물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이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 불손하다고 설명되어 진다. 시작부터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이 책은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상을 전제로 깔고 있다.

 

사람들은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대의명분을 중요시 여기고 무의미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 인식한다. 나 또한 그러한 사람들에 포함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의미 있는 행동인가. 무의미한 무언가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머릿속에 되뇌이며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그것을 되뇌이는 시간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 체 말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게 되는 이러한 행동 패턴들, 대의명분을 찾으려 든다거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 인 것처럼 거들먹거린다거나 인간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몇 세기를 걸쳐 논쟁하고 토론한다거나 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덮으려는 화려한 보호막이 아닌가. 그 껍질 뒤에 가려진 위선과 가식들을 제외하고 나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어쩌면 그저 우리가 사실적으로 직면하고 마주하게 되는 본능이 남지 않을 것인가.

 

사랑이라는 허울 뒤에 가려진 육체적 쾌락을 향한 본능, 우정이라는 허울 뒤에 가려진 타인을 이기고 싶어 하는 경쟁 욕, 정치라는 허울 뒤에 가려진 독재. 이렇게 아마 사회적 관념이나 도덕적 규약을 떠났을 때 떠오르는 인간 내면의 야생적인 본능 그 자체가 남을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단순한 사실이지만 가장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들을 꼬집어준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마치 사회라는 무거운 갑옷을 평생도록 입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입고 있는 그 갑옷은 사실 아무것도 막아줄 수 없으며 그것을 벗었을 때 비로소 인생의 홀가분함을 느낄 것이다 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다.

 

때문에 인간들의 사회적 성향에서 비롯되는 종교, 직업, 정치, 그리고 경쟁은 사실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종교는 다만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나약함의 발현이며 단지 몇 마디 명언을 남기고간 평범한 인간을 신으로 만든 인간의 허상이다. 정치 역시 종교와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메시아니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표현인데 사실 정치란 것은 쾌락의 추구를 향한 아귀다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정치의 기본적 성향을 이해하는 것이 정치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해결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쟁에 대한 시각 또한 신선하다. 태어날 때부터 경쟁 속에 던져지는 현대인들은 항상 타인과 앞뒤를 다투며 살아간다. 앞서 말했듯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길을 걷고 매 순간 순간이 누가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 있는 가의 다툼이다. 하지만 책에서 묻는다. 과연 1등이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최선인가? 결론은 그렇지 않다 이다. 오히려 경쟁이라는 구도 속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찾아올 수 도 , 나락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기다려라, 그리고 마음을 비워라!’ 인생을 스릴 넘치는 긴 거리의 마라톤 경주이다.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 듯 책 또한 죽음으로 맺음지어진다. 구체적으로 죽음이 어떤 것이다라는 설명은 없다. 다만 책에서 보여 지는 전반적인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죽음은 끝도 시작도 아니다. 다만 긴 인생의 여정에서의 휴식이고 죽음은 ‘죽음’ 그자체이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대비할수록 언젠가 갑자기 찾아올 지도 모르는 죽음을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인생을 살아갈 뿐이고, 순간순간에 충실하여 살아가는 시간의 마지막을 맞이하였을 때 오히려 인간의 삶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방황하는 20대들은 생각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어쩌면 방황하는 20대라는 말이 조금 생소할 지도 모르겠다. 뉴스나 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논쟁은 ‘방황’ 이라는 말을 10대들의 소유물로 한정짓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2차 성징이며 ‘사춘기’ 라고들 한다. 하지만 방황은 10대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부모는 왜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는가 에 대해서 고민하고 호르몬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육체적 혼란을 겪는다면 오히려 20대 30대 나아가 40대 그 이상의 사람들은 그들이 갑작스럽게 맞이하게 되는 사회적 상황에 휩쓸리고, 모든 것의 기준이 흐릿해지는 혼란 속에서 ‘옳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라나는 과정에서 도덕적, 유교적 사상에 바탕 한 규율을 배워왔다. 정직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국가에 충을 다하라, 학문에 정진하라.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그 명제들이 과연 절대적인 ‘정’의 입장에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에 따르면 사회는 정 과 반이 만나 합이 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고 했는데, 과연 정은 무엇이고 반은 무엇인가. 어른이 된 20대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그 누구도 기준을 정의 내려 주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준은 스스로가 겪어 나가며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회는 변화지 않고 시간은 흘러간다. 변하는 것은 상황도, 사회도 아닌 사람이다. 인간이 변하고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가 변한다. 우리가 ‘정’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반’이 되어 있기도 하고 ‘반’이라 생각했던 것이 ‘합’이 되어있기도 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적이라 일컬어지는 것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제된 정체성을 갖는 다는 것은 어쩌면 이 책에서 역설하고 있듯 인간은 어떠하다, 인생은 어떠하다 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무(無)’를 인정하고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내면과 본능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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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시 오르가즘
마광수 지음 / 아트블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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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장편소설 <페티시 오르가즘>을 읽고



<페티시 오르가즘>을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뒤, 책을 덮으며 나는 마치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몽환적이고 뭔가 뿌옇게 흐려진 창문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었으며 모호하기까지 했다. 플롯이나 사건의 개연성은 이 작품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있었다. 둘은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둘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 외의 것, 두 사람이 왜 만났는지 혹은 왜 서로 좋아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보다 ‘어떻게’에 중점을 두고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저자의 설명처럼, 이 작품은 사건의 개연성이나 스토리를 풀어가는 것은 지면 낭비라는 듯,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만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책의 표지를 넘기자마자 펼쳐지는 벌거벗은 여자의 외양과 화장하고 옷을 입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마치 머릿속에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영상을 틀어놓은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또한, 소설 중간중간 나오는 여자와 남자의 꿈에 관한 이야기는 환각적인 영상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프로이트가 꿈은 무의식적 소망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이 작품 전체가 저자의 무의식적 소망을(아니, 의식적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환각을 이용해 성취해낸 하나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여자와 남자(물론,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이 여자와 남자의 이름마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는 상당히 상반된 인물이다. 화려하고 대담하고 노골적이기까지 한 여자의 외양에 비해 남자의 외양은 볼품없고 초라하다. 저자의 남성적인 시선이 이 책에서는 그대로 묻어나는 데,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어덜트 비디오(AV)의 여자주인공 역할은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쁜 여배우들이 주로 도맡아 하는데 비해서 남자주인공 역할로는 뚱뚱하거나 못생긴 남배우들도 상당수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남자배우를 써야 그 비디오를 시청하는 보통의 평범한 남성층이 더 쉽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평범한 남배우인 편이 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시키기 쉬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저자의 성적 환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작품에서 여자에 비해 남자의 외양 묘사가 간결하고 극히 평범한 것은 말 그대로 남성 저자의 시선에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여성 독자를 위해 쓰여진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이 완벽한 왕자님인 반면, 여자주인공은 초라하고 평범한 여자로 그려지는 것과도 같다.


한편, 작가든 화가든 평생 무엇인가를 쫓는 ‘광적인 집착’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허용돼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작품 속 여자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남자의 외양은 너무 당연했다. 저자의 ‘광적인 집착’의 대상은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작품을 읽으며 파악한 저자의 집착, 즉 페티시즘은 가장 대표적인 페티시인 손톱 페티시부터 해서 송곳같이 뾰족한 하이힐페티시, 귀걸이와 코걸이, 목걸이, 젖꼭지걸이, 허벅지찌 등 장신구페티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나는 이를 크게 불안함에 기인한 미(美)와 그로테스크한 인공미로 구별해 볼 수 있었다. 불안함에 기인한 미(美)란, 손톱이나 하이힐의 묘사에서 볼 수 있었다. 작품 속 여자는 늘 10cm이상의 손톱을 기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여자는 손을 이용할 때 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하게 움직인다. 작품 속 화자는 여자가 문을 잠글 때나 열쇠를 꺼내는 등의 일상적인 동작을 행할 때마저도 얼마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지를 끊임없이 묘사한다. 또한 여자가 늘 신는 하이힐은 굽이 18cm이상이고 송곳같이 가늘고 뾰족한 힐이어서 걷는 모습이 뒤뚱뒤뚱 불안정하다. 힐은 늘 발등위로 얇은 줄 하나만 지나가는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 같이 불안한 힐이고, 여자는 그렇지 않아도 걷기 힘든 힐을 신고도 부족한지 두 발을 족쇄처럼 이어주는 장신구까지 즐겨 착용한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그런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화자는 이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미학’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둘째로, 그로테스크한 인공미는 색색깔의 손톱과 진한 색조 화장, 높게 치솟거나 과하게 부풀려진 머리, 알록달록하게 염색된 머리나 음모, 거의 알몸에 가까운 가릴 곳만 겨우 가린 옷차림 등이 어우러져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그로테스크’인데 이는 그 만큼 저자가 그로테스크함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작품 속 남자는 여자의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인공미에 ‘선망을 넘어선 질투’마저 느낀다. 이 작품에서는 여자의 자연적인 생김새보다도 인공적인 차림새 묘사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데(이 작품에서, 여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묘사되어 지지 않고 있다), 예쁜 여자가 예쁜 것이 아니라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여자가 예쁘다는 식이다. 어쩌면 남자가 여자의 이러한 과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인공미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아니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품 속에서의 불확실하고 모호한 배경과 사건의 전개(그것을 사건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또한 그것이 전개되어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의문스럽지만 마땅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비현실적인 여자의 외양 묘사에서 나는 어쩌면 여자가 소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설 속 여자는 소설 속 남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일 지도 모른다. 아니, 패션쇼까지가 진짜고 나머지는 남자의 상상일 수도 있고, 물론 전부 진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그만두었다.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있어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 작품에는 중간중간 시가 삽입되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밤 주막에서 한 청년이 부른 노래인 「늙어가는 노래」였다. 이 시는 저자가 서른 즈음에 쓴 시인데, 작품 속에서 남자는 이 노래를 듣고 ‘너무 엄살은 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저자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대학생인 나는 그 시에서 말하는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한참 어리다. 그래서 아직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희망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지만, 그 시의 애틋하고 쓸쓸한 느낌은 잔잔히 내 마음을 울렸다. 또한,「모든 것이 불안하다」라는 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불안함에 기인한 미학을 확인시켜주었다. 기린의 긴 목으로 비유되어진 여자의 손톱과 하이힐 뒷굽, 그리고 코뿔소의 뿔로 비유되어진 남성의 성기. 비유는 기발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뿔의 공격을 받을까봐 불안하다’고 표현한 부분은, 삽입 직전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 같아 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관능에만은 권태가 없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그런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되풀이되는 크게 다를 것 없는 반복적인 행위와 자극에도 사람들은 반응하고 정복당하며 이를 갈구한다. 여자의 차림새와 화장 등만 바뀌고 만나는 장소만 바뀔 뿐, 아무런 논리적 개연성이나 우연성마저 배제된 채 계속 관계를 맺는 작품 속 남자와 여자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일 지도 모른다. 대학교 근처나 번화가에서는 언제나 쉽게 모텔촌을 발견할 수 있고, 모텔촌은 언제나 호황이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직업이 무엇이든 남녀는 모텔을 드나들고, 낮이든 밤이든 그들은 모텔을 드나든다. 관능에만은 권태가 없기 때문이다. 모텔촌에 드나드는 남녀가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그 곳까지 오게 되었는 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어쩌면 그 어떤 소설보다도 리얼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수험생 시절, 수능을 위해 소설을 읽던 시절에는, 소설을 읽고 나면 기계적으로 제일 먼저 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찾고 스토리를 사건 별로 분석하고 인물을 파악하곤 했다. 우리는 소설의 구성 요소가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 배웠고 소설의 3요소가 주제, 구성, 문체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했으며,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도덕적이고 정의에 가까울수록 혹은 비판적일수록 좋은 소설인 양 배워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런 고정관념을 깨부시고 싶었던 것 같다.

저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보기’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거나 비판 의식을 고취시키거나 작품이 전달하려는 주제를 파악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저 탐미하게 만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묘사가 몽환적이고 모호하게 이루어져서 독자들에게 한편의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나는 생각했다. 소설의 구성 요소 같은 건 누가 정했고, 소설의 3요소가 갖추어져야만 소설이라고 보는 시각은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끊임없이 갈구해도 권태롭지 않은 관능적 쾌락에의 탐닉이야 말로 소설이 갖추어야할 요소가 아닐까.

이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꿈도 없는 잠, 그저 피곤하기만 한 잠, 재미없는 잠이다. 그가 살고 있는 나라,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도 같은 그런 죽어 있는 잠이다’라고. 이 말이 나는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계속 생각이 났다.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개성과 관능적 쾌락을 억압하고 금기시하는 재미없고 죽어 있는 세계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이런 작품이 의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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