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마광수 장편소설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다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마광수 교수님 소설 읽은 것들 중에서 <첫사랑>이 제일 감명 깊었어요.
마 교수님이 어떤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니까 <첫사랑>은 순정 소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설, 정말 너무 재미 있어서 눈을 뗄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마 교수님 소설을 읽으면 어디까지가 현실로 경험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마 교수님께서도 소설은 현실 체험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첫사랑>에 자주 나오는 <바부도> 라는 술집은 실제로 존재 할까요?
마 교수님의 에세이집 <열려라 참깨>라는 책의 제목은 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젊은 애인이 붙여준 것일까요? 그런 여대생 애인이 실제로 존재 할까요?
마 교수님의  <첫사랑>에 나오는 첫사랑 애인 향희 씨는 아직도 (에세이, 소설 등을 읽어본 결과 실존 인물로 판단됩니다만) 살아 계신가?
살아계신다면 아직도 아름다운가? 어떤 일을 하시는가?
소설 속에서 친구가 같이 하자고 권했던 야한 퍼포먼스는 실제로 했던 공연일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 소설의 배경과 사건들이 너무나  재밌습니다.
아직도 읽어 보지 않은 분들은 어서 읽어 보시길........
이 소설 정말 아주 재밌어요.....
<첫사랑>에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나오는데 자신과 남의 심리까지 예측해서 생각하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마광수 교수님이 굉장히 섬세한 성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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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마광수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모든 인문서의 형님이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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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일기 - 마광수 장편소설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마광수 교수의 강의실

1989년,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집이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
으키고 있었을 때 나는 고삼이었다. 당시의 나는 입시의 중압감에 찌들려 있는 모범생이
었고, 내 머릿속에는 어설픈 엘리트주의와 선민의식이 궁핍한 가정 환경과 복잡하게 얽
혀 있었던 것 같다. 소위 ‘베스트셀러’와 ‘대중문화’에 대한 치기어린 거부감 같은
것 때문에 나는 그 책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나는 부산대 치의예과에 3년간 재학했었다), 96
년에 연세대에 입학해 문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마광수 교수의 저작들에 대한 관심은 계
속 연기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 지루한 ‘고전’들과 어렵기 짝이 없는 서양
의 ‘이론서’들을 읽도록 은근히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뭘 모르는 상태에서 가졌던 문
학에 대한 선망과 열정은 한 해 두 해 공부해가면서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문학 수업
이란 ‘밑도 끝도 없는 공부’같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고, 어렵기만한 서양의 문예 이론
들이 내가 처한 현실과는 너무나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재미가 없어졌기 때
문이다. 어느덧 3학년이 되었고,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나는 마광수 교수를 만나게 되었
다.

그의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매우 유쾌하다. 사실 강의실 전체가 ‘유쾌한 대리배설’로
들떠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는 다른 수업에서는 도저히 들어볼 수 없는 말들이 당당하게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또 다른 ‘이면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느낌이 드
는 것은 단순히 마광수 교수가 다루고 있는 주제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들이 발화
(發話)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더 유쾌하게 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되고 있
다는 사실로도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성(性)과 쾌락
의 문제에 대해 입다문 채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 준다. 그가 촉발의 일부분을 담당했
음이 틀림없는, 90년대의 숱한 성담론들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학생으로서의 우리
가 그것들을 단지 ‘읽어보기만’ 했기 때문이고 여전히 강의실에선 그에 관한 아무 것
도 토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혹은 ‘발화의 방식’이 지극히 이론적이고 고상하기만 했
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회 편, <마
광수는 옳다>, 사회평론, 1995.)를 읽어 나가면서, 나는 뒤늦게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
광적이랄 수 있는 수구적 봉건윤리, 지식인 사회의 위선과 이중성, 사법제도의 비민주적
절차와 권력 종속, 황색 저널리즘의 해악 등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 마광수 문학
에 대한 몰이해는 무지(無知)와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급진적인
쪽일 수밖에 없는 그의 철학과 문학관에 대해 그는 여러 권의 에세이집과 문화비평집들에
서 ‘구구절절’ 밝혀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
한 채 문학적으로(의도적으로 ‘가볍게’) 형상화된 텍스트의 일면만을 보고 그를 마녀사
냥 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도저히 깔려있는 이중적 성의식과 ‘성 알레르기’의 심
각한 병적 양태 역시 확인하고 말았다. 그것이 집단적인 것이기에 나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을 터이지만, 적어도 ‘체질 개선’을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사
실 그의 강의실에서 자극 받는 부분은 성과 쾌락에 대한 자유분방한 사고도 사고지만, 우
리 문학계가 버리지 못하고 있는 ‘품위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발견이 더 크다. 그런
풍토 아래서 공부하고 있는 문학도로서, “지하철에서 턱하고 꺼내어 읽는 책의 제목과
작가에 은근히 신경 쓰고 있잖아”라는 꼬집음에 뜨끔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의 꼬집음은 질책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의 형태로 발화되기 때문에, 훈민(訓民)에 의
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점검에 의해서 소화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발화의 방식은 마광수 문학의 매우 특징적인 양식이 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것은 ‘비아냥거림’과 ‘자기 조롱’ 혹은 ‘자기 연민’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는
‘겉포장’을 싫어하는 그의 솔직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상적인(현실적으
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성이론과 실천적 주장의 충격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문학적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그의 두 번째 소설 <광마일기>를
텍스트로 삼아 이러한 교묘한 발화의 방식과 함께 탈장르적 성격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기
로 한다.

<광마일기> - 비아냥거림과 자기 조롱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언뜻 미국의 영화 감독 우디 앨런이 떠오른다. 스스로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그 특유의 불만에 가득찬 중얼거림으로 대도시 뉴욕
에서의 소시민적 불안감과 컴플렉스를 끊임없이 노출함으로써 그는 당대의 스타일리스트
가 되었다. 이 ‘중얼거림’이 마광수의 경우에도 특징적인 스타일이 될 것인데, 화자와
독자와의 가까운 거리로 인해 그것은 ‘투덜거림’으로 들릴 지경이다. 이러한 투덜거림
이 외부로 향할 때,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비아냥거림의 어조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벌써들 일을 마치고 온다는 게 참으로 신통방통한 노릇이었다. 어떻
게 졸지에 발기가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그토록 삽시간에 삽입과 사정이 이루어졌단 말인
가. 나는 도무지 신기하기만 했다. (215쪽)>

<왜냐하면 아무리 겉으로 점잔빼는 남자라 할지라도 다들 속으로는 야한 차림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여자들이 바로 요즘 흔히 보게 되는 ‘겉만 적당히
야한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들은 솔직한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
지 ‘계산’에 의해서 화장하고, 옷 입고, 멋을 낸다. 그러다보니 옷이나 장신구를 해도
무조건 비싼 것만 찾게 된다. (219쪽)>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을 증오하고 덕지덕지 화장한 얼굴을 혐오하는 요즘 남자들의
심리는, 깨끗하고 귀티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심리라기보다는 그저 재벌의 외동딸처럼 부
티나는 나이 어린 여자만 좋아하는 엉큼하고 염치없는 심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심리
의 밑바닥엔 부자집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비굴한 욕구가 깔려 있다. 여성의 혼
전순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개입돼 있는 건 물론이고. (221-222쪽)>

이 비아냥거림들은 대부분 이중적 성의식이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 위선적 태도
에 관한 것들이다. 여하튼 그에게 ‘겉다르고 속다른’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있
다. 욕망의 본질이 매우 관습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경우는 범상한 시각으로는 그것을 깨
달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리는데, 작가는 그에 대해 일일이 심리 분석을 가함으로써 은폐
된 성욕, 시기심, 질투심, 허영심 등을 드러낸다. 현대의 문학 작품들이 고백하고 있는
인간이란 이미 이성적 의지를 지닌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터이
지만, 마광수의 경우 그런 부정적인 속성들이 이런 저런 구구절절한 묘사를 통해서가 아
니라 ‘직설적’으로 발화되고 있다. 그것이 때로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독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은 철저한 구
어체의 구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비아냥거림이 훨씬 더 자주 내부로 향해, 자기
조롱이나 연민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정말 여자들에겐 ‘정 떨어지는 남자’인 것 같다. 어린애처럼 칭얼
칭얼 보채대는 것까지는 귀엽게 봐 줄 만한데, 여자를 포근히 감싸주면 보호해 주지도 못
하는 주제에 새디즘이 어떻고 매저키즘이 어떻고 해가며 곧 죽어도 남자라고 새디스트짓
을 하려고 드니 말이다. (23쪽)>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외롭게 빌빌거리며 서울 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던 나에게, (117쪽)>

<그래서 후줄그레한 골덴 자켓을 입고 말라비틀어진 몸매를 하고 있는 내가 왠지 초라하
게 느껴졌다. (121쪽)>

<나는 계속 주눅이 든 상태였는데, 호텔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때와는 달라서 내가 호텔
프론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목격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
다. (201쪽)>

<웬놈의 간사요 수다였는지 몰랐다. 꼭 간신(奸臣) 목소리처럼 상냥하고 그윽한 음성이
거침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227쪽)>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는 도중에도 나는 행여 누가 볼세라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가며 눈
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307쪽)>

하일지와 민용태는 <즐거운 사라> 항소심의 공동감정서에서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를 인용하면서 사라를 상향적 인물이 아니라 ‘아이러닉 모드의 주인공’ (하일지·
민용태, <감정서>, 위의 책, 359쪽.)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는데, <광마일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작가 자신과 의도적으로 동일시되어
있는 주인공과의 가까운 거리로 인해 “주인공의 부조리한 생애를 굽어보는 비판적 안
목”을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실 전혀, 작가 자신은 주인공의 삶을
‘부조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사랑과 욕망에 솔직한 삶의 태도를 긍정적으
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러닉 모드의 인물 설정은 스스로의 이중성마저도 솔
직하게 고백하게 함으로써 주인공을 친근하게 만드는 ‘귀여운 일탈’과 ‘반어적 경박
함 ((마광수, ‘작가의 말’, <광마일기>, 사회평론, 1996, 372쪽.)’의 방법론적 채택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가벼움은 사실 매우 전략적인 것이다. 친절하게도 작가 자신이 “나는 <
광마일기>에서 도덕적 코멘트나 작중 인물의 정치·사회관, 또는 형이상학적 갈등 같은
것을 철저히 배제시키려고 애썼다 (마광수, 위의 글, 위의 책, 373쪽)”고 밝혀두고 있
다. 훈민문학(訓民文學)에 대한 반발인 셈인데, 사실 나는 우리 현대문학이 훈민성을 전
혀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매저키즘의 예만 들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한
도 내에서 이제하의 ‘밤의 窓邊’을 떠올릴 수 있고(비록 모호하게 그려져 있긴 하지
만), 잘 알려진 하일지나 장정일의 소설들은 전혀 훈민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문제는
‘가벼운 소설’을 문학적으로 폄하하는 평론계의 반응이라 할 것인데, 그들의 의도적 배
제에 의해서 이상하게도 많이 읽혀지는 소설들이 문학적 평가의 진공 상태에 놓여 있다.
위에 거론한 작가들 중에서 특별히 탐미적이고 낯선 마광수의 작품들은 더더욱 그러한
셈이다.

‘낯설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가 가진 성관념은 봉건적 유교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
리 사회에서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90년대 들어 이나마 성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된 것도 한 쪽에서 그가 에세이를 통해 줄기차게 발언을 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프로
이트적 ‘변태’ 개념의 폐기, 남근중심주의와 삽입성교 위주의 성관행 비판, 새도-매저
키즘 (Sado-Masochism), 페티시즘(Fetishism) 등의 탐미적 활용, 인공미의 강조 등은 대
단히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지만 ‘성 알레르기’에 걸려 있는 체질에 곧바로 적용하기에
는 무리가 있는 것들이다(체질 개선은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 혹은 전혀 체질 개선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실 <광마일기>에 삽입된 에피소드들을 통해 작가
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여기 이 땅에서는 지나치게 진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K씨의 행복한 생애]에서 얼핏 보이는 유치증(幼稚症, hebephilia)이나, [
속궁합, 겉궁합]에서의 부부교환의 에피소드, [달가고 해가면]에서 그 전기성(傳奇性)에
힘입어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시간(屍姦) 장면 등은 그 자체로는 대단히 급진적인 성적
취향들인 셈이다. 그러나 <광마일기>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아이러닉 모드의 주인공 설
정, 자기 조롱의 투덜거림, 완벽한 구어체의 구사, 특유의 위트 활용, 전기소설적(傳奇小
說的) 양식의 도입 등으로 한결 ‘가벼워져서’ 거의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있게 읽힌
다.

말하자면 <광마일기>는 작가의 철학과 이론들이 문학적으로 매우 치밀한 계산 하에 형상
화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음란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유쾌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단체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검열 기관인 <간행물윤리위원
회>에서는 90년 7월 26일자로 이 작품에 ‘음란성을 이유로 경고’ 결정을 내렸다. 그 몰
지각한 모럴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지나간 일로 치부할 일이 아닌 듯하다. 공윤의 사전 검
열제가 폐지된 이 시점에서도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요지부동으로 칼날을 휘둘러대고 있
을 터이기 때문이다.

<광마일기>의 탈장르성

<광마일기>는 열 편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K씨의 행복한 생애], [꿈길에
서], [겉궁합, 속궁합] 세 편을 제외한 일곱 편은 ‘나’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다. 작가
자신은 “열 편의 에피소드를 연작 형태로 연결하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서로간에 유기
적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마광수, 위의 글, 위의 책, 361쪽)” 배려했다고 밝히고 있으
나 각 에피소드들이 그렇게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들이 모두 연
애담이라는 것과 ‘나’라는 화자가 항상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각 편들은 여인
이 죽거나, 한국을 떠나거나, 연애가 파국을 맞는 형태로 완결되어 있다. 앞서 나왔던 에
피소드의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든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든지, 미완의 사건을 다시
진행시킨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다.

특히, 상대 여인이 자살하거나 죽는 경우가 많은데
(<대학 시절>, <꽃과 같이>, , <서울 야곡>, <달가고 해가면>으로 6편이나 된다),
이러한 결말들은 다음 에피소드로의 진행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낭만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플롯상의 애틋함과 비애감이 감정의 과다노출, 재기발
랄한 화법 등과 뒤섞여 개성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상의 특징은 ‘사소설(私小說)적 기법’과 ‘전기소설(傳
奇小說)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화자인 ‘나’는 작가 자신과 동일시되도록 강하게 의
도되어 있고, 심지어는 작품 속에서 ‘광수’라는 작가의 본명을 노출시키기까지 한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의도적인 작법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작가의 자전적
서술이고, 어떤 부분이 허구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과
인물은 허구적인 것으로 봐야 하겠지만, 의도된 자전적 분위기가 실제 작가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있다는 독자의 관음증(觀淫症)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의 ‘쾌락적 효
용’을 중시하는 작가의 문학적 입장과 꼭 들어맞는 것이다.

<꽃과 같이>, <꿈길에서>, <달가고 해가면>의 세 편은 동양의 전통적인 전기소설의 형식
을 빈 것인데, 물론 전기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영웅적 서사나 권선징악적 결말은 없
다. 말하자면 그것의 에로티시즘적 측면만 부각시켜 오늘을 배경으로 녹여놓은 셈인데,
‘이것은 완전한 허구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작가는 개연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작품을 더없이 환상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보르헤스
식의 ‘가짜 사실주의(pseudo-realism)’는 있어서,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으로 실제를
상정하고 있다. <꽃과 같이>의 경우 설악산 백담사, <꿈길에서>의 경우 한국 전쟁, <달가
고 해가면>의 경우 연세대 뒷산인 무악산 등이 그것이다. <꿈길에서>에서는 작가 자신의
전기적(傳記的) 사실을 허구의 인물인 ‘몽선’(그는 선녀의 아들이다)과 뒤섞어놓는 능
청까지 떤다. ‘상상적 현실’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권태>에서도 그랬지만, <광마일기>에서도 에세이적 논평은 심심찮
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간간이 삽입되어 있는 전문(全文)의 시(이미 발표된 시도 있고, 새
로 지어 넣은 것도 있다), 대중가요, 크리스마스 캐롤, 영화나 문학작품에 대한 논평 등
과 함께 이 작품을 탈장르화하고 있다. <속궁합, 겉궁합>에서 5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소개라든지, “그때의 내 심정이 어땠으리라는 것을 독자 여러분
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106쪽)의 경우처럼 독자를 직접 호출함으로써 ‘형식의 투명
함’을 파괴하는 방식은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소설’을 거부하는 소설 작법이
라 할 수 있다.

당혹감 또는 해방감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광마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담으로 일관하면서도, 형
식적으로는 가벼운 구어체, 사소설적 기법, 전기적 양식, 시·논평의 삽입, 낯설게하기
등과 같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다양한 양식은 자칫 지루한 사변
적 연애담의 나열이 될 수도 있는 이 작품의 내용을 형식적으로 다채롭게 보완해주는 문
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마일기>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다채롭고, 자유분
방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때때로 그의 소설들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문학적 표현의 영
역”에서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부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당혹감은 대중문화적 요소의 대담한 차용이나 적나라한 일상어 자체에서(지금까지 우
리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른 것이 좋다고 교육받았으므로), 또는 작중화자의 지나친 감탄
과 감정 배설에서(작가는 배후에 숨는 것이 훌륭하다고 교육받았으므로), 또는 다양한 성
행위의 묘사에서(오럴 섹스 장면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갑작스레 솟는다. 그것
들이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면, 이 당혹감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가 지금 우리 문학의 당
면한 숙제일 수 있다. 일단 혹자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고, 혹자는 신선한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나는 이쪽이다). 그러나 ‘진지한 문학 작품이 아니다’라는 식의 무조건적 거부
는 우리 문학의 입지를 한없이 좁히는 옹졸한 서생의 대응방식이다.

우리는 이미 <광마일기>가 치밀한 의도하에 축조된 문학적 구조물이며, 작가의 철학과 인
간관이 효과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그의 소설들을 놓고 진행되
는 논쟁들이 문학의 영역에서든, 사회의 영역에서든 당혹감에서 비롯된 악의가 아니라면
충분히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것이다. 마광수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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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 마광수 소설집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마광수 소설집 <사랑의 학교> 작품 해설

<사랑의 학교> 를 읽는 다섯 가지 코드
                                                        김성수(문학평론가)

1. 문학은 인공적 길몽이다


<사랑의 학교>는 유미주의 미학의 상상력이 공급하는 성적 판타지와 에로티시즘의 극한(極限) 양상을 자유분방하고 경쾌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흥미로운 중·단편소설집이다.
모두 29편의 단편소설들을 수록하고 있는 <사랑의 학교>에서 작가인 마광수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애틋한 관능의 이야기들(<초상화>, <일인이역>, <벽과 카메라>)로부터, 인생살이의 우연성과 허무를 극적 반전(反轉)의 구성형식으로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들(<어이없는 이별>, <인생살이>, <유다>), 그리고 하이힐과 손톱 페티시(fetish)로 촉발되는 페티시즘의 만화경과 사도마조히즘, 복장도착 등의 심리를 성적 판타지로 보여주고 있다.
문학과 성에 대한 마광수의 핵심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에세이(수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문학관이나 성 묘사 및 표현에 대한 입장을 여러 에세이집이나 문화비평집에 상세하게 피력해놓고 있다.

그의 에세이를 보면 그가 왜 온갖 비판과 사법적 심판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토록 집요하게 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들을 찾을 수 있다. 마광수가 피력하고 있는 문학이란 무엇이고, 그 목적은 무엇이며, 표현형식이나 문장은 어떠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주재자로서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 그의 에세이집을 보면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소설과 작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 작가는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할 권리를 가진다.
    ■ 작가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픽션)이며,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문학작품이란 그가 강조하고 있듯이 인공적(人工的)으로 만들어내는 길몽(吉夢)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꿈속에서 살인을 하거나 근친상간의 섹스를 하더라도 현실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듯이, 작가는 인공적 길몽인 문학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자유롭게 표출해낼 수 있다. 현실의 억압이나 부정적 요인을 꿈속의 비현실적인 일들이 오히려 적절하게 해소해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방화나 살인처럼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해서는 안될 일들을 소설적 현실 안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거짓말이 많이 섞인 사소설(私小說)’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남주인공  이 꽃의 요정과 연애하기도 하고 고려 때 죽은 처녀귀신과 연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전기적(傳奇的) 성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더라도, 남주인공이 친구부부와 부부교환의 정사를 벌이거나, 또는 극장에서 자살을 기도한 정체불명의 여성과 연애하는 등 거의가 허구적 스토리로 되어 있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 <사라를 위한 변명>, 264쪽)]

<광마일기>나 <광마잡담> 등의 현대판 전기(傳奇)소설이나 <즐거운 사라>에서 마광수가 시도한 허구적 상황 속에서의 성희장면이나 기이한 이야기 설정은 ‘문학은 인공적 길몽이다’는 그 자신의 명제로부터 접근하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29편의 이야기들 또한 이런 전제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2. 문학은 창조적 불복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광수의 성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는 문학과 예술의 존재방식과 표현형식에 대한 그 자신의 뚜렷한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우리 사회가 성에 대해 열린 태도로 논의하고 활발하게 소통함으로써 성에 대한 이중성을 극복해가기를 주장해왔다. 이 점에 대해 강준만은 마광수 문학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마광수의 주장은 섹스가 소비의 대상이 된 현실을 직시하자는 요청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섹스를 모든 금기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즐길 것을 제안함으로써 그간 우리 사회에 존재해온 섹스에 대한 이중성을 타파하고자 한다. 그는 섹스가 육체와 정신의 자연스러운 욕구에 부응하는 ‘소비행위’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성의 신성화’라고 하는 우리 시대의 뿌리 깊은 위선과 기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 <마광수 살리기>, 173~174쪽)] 

소설을 ‘그럴듯한 거짓말’이나 ‘허구적 스토리’로 보는 한에서 마광수는 작가란 모름지기 창조적 불복종, 창조적 반항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한마디로 말해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고, 당대(當代)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계몽서도 아니다. 문학은 언제나 기성도덕에 대한 도전이어야 하고,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 (…)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逸脫)이다. 문학은 인간내부에 잠재해 있는 본능적 욕구들을 리얼하게 드러내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참된 가치를 지닌다. (<마광쉬즘>, 인물과사상사, 36~39쪽)]

마광수 문학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 강요하는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불온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며, 문학은 항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고 가치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그래서 문학은 사회적 통념에 대한 반란으로서 “우리를 억압하고 순치(馴致)시키는 / 권력과 윤리에 대한 / 끊임없는 조소”(<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다>, <야하디 얄라숑>)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온한 문학은 시대와 불화하고, 작가는 시대와 사회가 부과하는 금제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인간의 내적 체험의 소산인 금기와 위반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리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들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금기와 관계하는 근본적인 것들로 ‘죽음’과 ‘성’을 들면서(<에로티즘>), 금기의 구심력과 위반의 원심력 사이에서 억압된 본능을 현시하며 사회적 금기를 간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탈주시키는 계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불온성’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광수 문학 역시 바타이유의 견해와 맥락을 공유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섹슈얼리티는 ‘윤리’와 ‘정상(正常)’을 거부하는 ‘창조적 불복종’에 있기 때문이다. (<마광쉬즘>, 115쪽) 이렇게 보면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초상화>, <일인이역>, <벽과 카메라>, <인생살이> 등에서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미녀들과 성에 대한 일탈행위를 하는 장면도 작가의 이런 신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몇몇 장면들을 읽어보자.

     [남자는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뜻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感知)해낼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우면서도 사악한 열정에 대한 일탈(逸脫)욕구가 그의 호기심을 한껏 부채질해주고 있었다.(…)/그 순간 남자는 “악”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그림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 바로 그림 속에서와 같이 속살을 훤히 비치는 흰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그의 목을 어루만지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애타게 갈망하는 듯한 눈길로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초상화>15~16쪽)]

     [사진 속의 그녀는 여전히 싱싱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걸 때마다 그녀는 무언(無言)의 텔레파시로 화답해주었다. 그는 사진 속의 리나를 사랑했고, 사진 속의 리나 역시 그를 사랑했다. 리나와 함께 그는 공상 속의 정사를 즐겼고, 그때마다 황홀한 엑스터시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일인이역>, 30쪽)]

     [조금 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느새 벽화 속에 들어가 있었다./주변을 둘러보니 호화의 극을 달리는 궁전들이 온갖 보석에 싸여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하늘한, 속살이 훤히 다 비치는 옷을 입고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특히 그의 마음을 흔들흔들 어지럽게 만든 것은, 여인들의 코에 끼어져 있는 커다란 코걸이와 손가락 발가락마다 끼어져 있는 번쩍거리는 반지 발가락찌 등이었다. (<벽과 카메라>, 160쪽)] 

이처럼 마광수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에 관심을 두고 작품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은 문학의 ‘창조적 반항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인간이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정도 다 사디스트이고, 그런 사디스틱한 공격욕이 인간실존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반항정신에 대하여>,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324쪽)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디즘을 실제의 현실 안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작가가 ‘창조적 반항’이나 ‘창조적 공격욕구’를 예술적 장치를 통해서 허구화시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때, ‘그럴듯한 거짓말’로서 문학작품이라는 허구적 장치 안에서 창조적으로 묘사하는 사디즘의 이야기 내용 자체가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나쁜 사안은 결코 아니라는 데 있다.
작가가 이 단편집의 <오럴섹스 만세!>, <왕>, <신난다, 젠타이 페티시즘!>, <잊혀지지 않는 여인들>, <내일이면 늦으리> 등에서 설정해놓은 사도마조히즘의 양상들은 작가의 문학에 대한 기본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변태는 없다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을 읽으면서 먼저 떠오른 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밝혀놓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나는 섹스한다. 고로 존재한다.(…) (마광수, <마광쉬즘>, 46쪽)]

위의 문장 다음에 이어지는 “그래서 나는 핥고 빤다.”는 문장은 마광수 문학을 구성하는  내적 동인(動因)에 대한 신념을 삼단논법식의 명제 전개로 나타내고 있다.
<사랑의 학교>에 대해 논의하면서 마광수 문학을 구성하는 핵심명제로서 이 선언적 문장을 거론하는 것은 이번 작품집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이야기들이 ‘나/그(녀)’의 성(性)에 대한 질문과 탐구, 그리고 성의식에 대한 작가의 소신과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지니고 있는 신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 한가지는 성묘사와 성담론에서 ‘변태는 없다’는 인식이다.

    내게 사랑이 오면, 온종일을
    그녀와 함께 신나게 변태적으로 보내리
    그녀는 고양이 되고, 나는 멍멍개 되어
    꽃처럼, 불처럼, 아메바처럼, 송충이처럼
    끈적끈적 무시무시 음탕음탕 섹시섹시
    서로 물고 빨고 할퀴고 뜯어 온갖 시름 잊으리
    사랑은 순간, 사랑은 변덕, 사랑은 오직 꿈!
    오오 변태는 즐거워라, 사랑이 오면.
    ---- 마광수, <변태> 전문

사랑의 감정이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듯이, 진정한 성애 또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교환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때 정상(正常)이 아닌 성욕 및 이상(異常) 행위로서 규정되는 변태가 서로에게 즐거운 행위로서 수용된다면 더이상 변태가 되지 않는다.(“서로가 변태라면 더이상 변태는 아니다.”, <나는 왜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214쪽)

나아가 작가는 “오럴섹스를 위주로 하는 비생식적(非生殖的) 섹스의 형태가 오히려 우리들을 부담 없는 쾌감, 정력의 낭비 없는 쾌감, 항상 에로틱한 상상력에 빠져 끊임없는 판타지를 즐길 수 있는 신비스런 쾌감으로 인도해준다.”(<오럴섹스>, <나는 헤픈 여자가좋다>, 227~228쪽)고 말한다.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섹스에서는 삽입성교가 불안한 반면, 쾌락과 유희를 전제로 서로 합의된 섹스에서는 “역시 ‘오럴섹스’가 최고”(<오럴섹스 만세!>, 80쪽)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 통념에 의해 규정되는 변태라는 규정은 마광수의 신념 속에서는 사회적 인습과 통념으로서 ‘창조적 반항’의 대상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의 목표가 된다. “남을 해치지 않는 한 변태니 퇴폐니 부도덕이니 하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숨겨진 진실>, 87쪽)기 때문이다.

     [모든 변태는 즐겁다. 이상성욕(異常性慾)이란 말은 옳지 않다. ‘개성적 성욕’이라고 불러야 한다. 변태는 기존 윤리에 대한 반항이다. 반항은 언제나 즐겁다. ‘창조적 불복종’이기 때문이다. (<마광쉬즘>, 105~106쪽)]

문학 속의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벌이는 사건들을 현실적 논리에 의해 재단하고 평가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작가가 문학 속에서 상상적으로 그리는 상황에 대해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문학과 예술에 관한 논의에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의가 설득력을 얻는다.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따질 때 우리가 먼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외설’이 왜 나쁘냐 하는 점일 것이다.(…)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듯 성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 중의 하나요, 인간이 마땅히 쾌락으로 누릴 자유를 갖고 있는 ‘행복추구’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약방에 가면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약품들이 정부의 허가하에 제조되어 정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고, 성전문병원에 가면 불감증 환자의 치료를 위해 제작된 에로틱한 내용의 비디오들이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외설은 없다>, <모든 사랑에 불륜을 없다>, 213~214쪽)]

<권태>를 비롯하여 <즐거운 사라>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광마잡담> <유혹> 그리고 최근의 <발랄한 라라>와 이번 작품집 <사랑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마광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물창조는 문학의 근본적 창작동기를 ‘판타지의 창조’에 두는 그의 문학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념지향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실비판과 전망제시보다, 낭만적 환상에 바탕을 둔 소설의 분위기를 추구한다. 사실 이 점이 많은 평자들로부터 그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낭만적 환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 수법은 환상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해내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권태> 후기)는 관점에서 묘사적 기법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마광수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심리적·외면적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묘사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있다. 가령 <발랄한 라라>에 수록된 <어느 여대생의 자위행위>는 작품 전체가 ‘자위행위’를 하는 여성인물의 심리와 여성 성기에 대한 세부묘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의 학교>의 여러 작품들을 관통하며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의 사도마조히즘, 페티시즘, 복장도착(transvestism) 심리와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나는 즐거운 페티시스트이다

마광수 문학에서 페티시즘은 유미적 쾌락주의의 한 형태로 성(性)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에서 중요한 심리적 요인을 형성한다. 그 가운데 ‘하이힐’과 ‘손톱’은 페티시의 상징적 표상으로서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요소이다.
마광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형형색색의 현란한 머리카락, 송곳처럼 뾰족한 하이힐, 육체를 치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장신구와 그로테스크의 미(美)에 탐닉된 강력한 페티시스트로 설정되어 있다. 마광수의 첫 장편 <권태>를 비롯하여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불안>, <광마잡담>, <유혹> 등의 장편소설들을 포함하여, 최근의 <발랄한 라라>와 이번 작품집 <사랑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하이힐’과 ‘손톱’ 취향을 기본 축으로 그는 다양한 성적 페티시즘의 환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런 페티시즘 심리를 단순히 작가자신의 성적 기벽(奇癖)이나 취미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그의 문학적 본의(本意)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여기에는 인간심리에 대한 작가자신의 심층적인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여왕의 식사와 섹스>, <왕>, <신난다, 젠타이 페티시즘!> 등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페티시즘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해석해낼 수 있다. 마광수는 첫 에세이집인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서 자신의 손톱 페티시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워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사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벌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페티시즘은 원래 물신숭배(物神崇拜)나 주물숭배(呪物崇拜) 또는 고착성욕 등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특히 어떤 물건에 집착하면서 쾌감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든가, 어른들이 이성의 특정한 장신구나 의복 또는 신체부위 등에 특별히 집착하는 현상 역시 페티시즘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페티시즘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페티시즘은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닌 상태’로서의 중성적 존재를 찾는 심리인데, 그러한 중성적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손톱’이다. 작가는 수많은 페티시 가운데서 특히 ‘긴 손톱’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를, 물질과 생명 양자를 포용하는 의미와 유미적 실용주의 및 평화주의, 그리고 양성적 의미에서 찾고 있다.

마광수는 우리 사회에서 성문학에 대한 논의는 자기취향에 맞는 성적 환상을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건강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사회에서 성의 문제가 지금보다 더 개방되고 논의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서기 3000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에서 화자가 실용적 쾌락주의와 과학기술이 연결된 즐거운 지상낙원을 꿈꾸고 있는 장면도 이와 같은 작가의 상상이 반영된 것이다.

     [저희들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랍니다. 말하자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생물학적 로봇이지요. 우리는 마조히스트로서 즐겁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이곳 ‘야해라’ 별의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선생님이 이곳에서 경험하신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실용적 쾌락주의의 보급과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이지요. 아마 지구는 서기 3000년 정도에 가면 그때서야 모든 이데올로기와 정신적 엄숙주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이곳 야해라 별처럼 실용적 쾌락주의와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즐거운 지상낙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에요.(96쪽)] 

5. 문학은 사회적 통념에 대한 도전이다

<사랑의 학교>에는 세밀한 성행위와 성기에 대한 묘사, 그리고 노골적이고 상스럽기까지 한 문장 언어가 직접 노출되어 표현되고 있다. 사회적 통념상 작품 속에서 성기에 대해 직접 지칭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금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작가는 <사랑의 학교>의 여러 작품들에서 성기에 대한 명칭을 은유적으로 사용하거나 비유적으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않다. 그런  예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여왕이 손짓으로 미소년 세 명을 지목하자 그들이 여왕의 몸뚱어리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 명은 자지를 여왕의 보지에 넣고 또 한 명은 자지를 여왕의 항문에 꼽는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여왕의 입속에 자신의 자지를 박는다.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여왕의 오르가슴에 겨운 신음소리……비명소리…… (<여왕의 식사와 섹스>, 140쪽)]

     [“이 똥갈보 같은 년아, 지금까지 몇놈하고 붙어먹었니?
     “어서 개처럼 컹컹 짖으란 말야. 알았어? 이 걸레만도 못한 년 같으니라구…….” (<내일이면 늦으리>, 228쪽)]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오럴섹스를 나누다가 늦은 시각에 헤어졌다. 나는 그녀의 보지를 빨아주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 우선 그녀의 젖꼭지와 귓불, 목, 입술 등을 꽤 공들여 핥고 빨아주었다. (<사랑의 학교>, 254쪽)] 

작가가 성기를 ‘페니스’로 쓰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직접 노출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언어적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떤 심리적 효과, 다시 말해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교양주의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전복해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언어적 모욕을 가하는 주체의 사디즘 심리와, 모욕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또 다른 주체의 마조히즘 심리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사도마조히즘적 심리를 생생한 비속어의 활용을 통해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어적 모욕은 참으로 달콤한 마조히즘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강아지 새끼처럼 콩콩콩 짖어댄다. 정말 내가 한 마리 애완용 개가 된 기분이다. 사디즘도 좋지만 역시 여자에겐 마조히즘이 더 재밌다. 성기의 구조가 움푹 들어가 있어 수동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내일이면 늦으리>, 228쪽)]

그렇다면 소설 문체에서 언어의 천박함, 상스러움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상스러운 비속어의 사용은 우선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 자신의 허위적 교양주의를 위악적으로 비판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온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상스러운 비속어를 읽는 독자들의 심리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광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 받을 것을 잘 알면서도 상스러운 언어를 그대로 노출시켜 표현하는 의도 가운데 하나는 교양주의 소설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서(<교양주의의 극복>,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비속어의 직접 노출을 통해 사회적 금기(禁忌)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유성호, <탐미적 관능과 낭만적 허무의 세계 --- 마광수의 시>, <야하디 얄라숑>, 512쪽) 마광수 문학의 언어사용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다음의 글은 이 점을 잘 설명해준다.

     [나는 <즐거운 사라>를 읽으면서 처음엔 언어의 천박함에 놀랐다. 그러나 당시 마교수의 구속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내가 마교수에 대해 의외로 무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문학평론을 잘 쓰는 마교수가 <즐거운 사라>에 좀 어려운 말 몇마디 집어넣거나 말을 이리저리 비비 꼬고 돌리는 따위의 수사법을 사용해 좀더 철저하게 문학을 위장하지 않았던지 나는 뒤늦게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 마교수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천박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상스러운 언어를 시종일관 사용하면서 ‘야한’ 것에만 집착했던 이유는 한국의 일부 문인들이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는 ‘문학 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강준만, <소설을 뭘로 아는가>, <인물과 사상1>, 117쪽)] 

이와 함께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29편의 이야기들에 대해 소설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 소설집에 280매 분량의 중편소설 한 편과 120매로부터 20매 정도의 단편소설들을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는데, 전체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의 길이에 따른 명칭, 다시 말해 ‘장편/중편/단편/콩트’ 등으로 분류되는 소설의 세부명칭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학개론’ 책자에서 구별하곤 하는 중편소설과 단편소설, 단편소설과 콩트의 명칭이 잘 생각해보면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 발달한 짤막한 단편소설의 일종으로 알려진 ‘콩트conte’가 이야기, 꾸민 이야기, 터무니없는 이야기, 단편소설, 소화(小話), 장편(掌篇) 등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명칭이라고 보면 원고지 분량으로 100~120장은 단편소설이고 20~30장은 장편(掌篇)이라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인생의 현상을 너무 리얼하게 묘하는 것을 피하고 기지와 풍자로써 인생의 어떤 측면을 경묘(輕妙)하게 비판하는 맛을 담는 것이 특징”(<세계문학대사전>, 교육출판공사)인 콩트는 발자크의 <해학기담집>(Contes Drolatiques)이나 플로베르의 <세 개의 짧은 이야기>(Trois Contes)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야기 길이나 원고분량으로 명칭을 형식화하여 사용한 것은 유용한 분류가 아니다.

이 점은 작가인 마광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150장 이하의 분량이든 20장 정도의 분량이든 모두 단편소설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다양한 길이의 작품들은 단편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소설의 길이와 명칭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소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지나치게 스케일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몇 권으로 된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이 너무도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또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만이 역량 있는 작가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문학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다원주의이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기초하는 수필적 소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필연성 없이 무작정 권수만 늘리는 대하소설은 필요 없다. 또 장편소설이라 해도 꼭 원고지 1천 장 이상이 돼야 할 필요가 없고 5백 장 내외로도 충분한 것이다. 수필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짧은 장편소설이면서 높은 완성도를 가진 소설이 많이 씌어져야 한다.(…) 단편소설도 마찬가지다. 1백 장 내외가 될 필요가 없다. 30장 내외로도 얼마든지 우수한 단편이 씌어질 수 있는데, 거기에 수필적 요소를 가미하면 더욱 친근감 있는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수필과 소설>,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266쪽)]

     [도대체가 요즘의 우리나라 소설들은 그 길이가 너무 길다. 걸핏하면 대여섯 권짜리 대하소설이요, 단편도 100매가 넘는 게 보통이다. 단편은 30매에서 50매 정도가 제일 적당한 분량인데, 30매 정도는 아예 ‘콩트’로 여겨 우습게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역시 교양주의 소설의 유행과 짝을 이루는 작가들의 ‘물량주의(物量主義)’ 선호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교양주의의 극복>,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194쪽)]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작품집의 표제인 ‘사랑의 학교’에 대해서 언급해두어야할 것 같다. 표제의 의미는 ‘사랑을 배우는 학교’ 혹은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육체적·정신적 현상을 가로지르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주고받기 위한 기술과 마음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의 주장을 빌어서 말하자면 ‘야(野)한’ 마음이나 정신을 의미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한편, ‘학교’라는 공간이 부정적 의미를 규율과 훈육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마광수의 ‘성 문학’과 관련시켜서 말한다면 한국사회라는 학교가 규율하고 통제하고 있는 매우 엄격한 이미지의 공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마광수가 오랜 시간 동안 주장하고 작품을 통해서 형상화해온 자유로운 성 관념과 의식으로 환산(換算)하여 이해한다면 문학작품이라는 ‘알라딘의 램프’ 안에서 어떠한 성적 상상이 구현되더라도 어느 누구나 기관으로부터 감시당하거나 처벌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 자신만의 성적 유토피아가 구현되는 상상의 ‘학습 공간’, 그것을 ‘사랑의 학교’의 의미로 해석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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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펄프픽션 5
마광수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마광수 --- <귀 족> 사유와 문학

"왜 이런 책을 읽어요?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려는데 사서가 물었다. 괜한 참견은 아니었다. 한 2년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으려니까 어느새 도서관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나는 사서에게서 이러저러한 것을 얻어먹는 처지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사서 입장에서는 뭐라고 한마디 할 수 있었으리라. 게다가 항상 무언가 있어보이는 책만 빌려오던 나의 이미지도 있었으니. 나 역시 책의 겉표지가 조금은 야하게 그려져 있었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이라니, 나는 사서의 질문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만 했고 아, 제가 실은 색골이란 게 결국은 들키고 말았군요 허허 하면서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질문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짜증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만 농담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의 평정이 흔들리고 말았다.

"문학에는... 거짓이... 없어요."

나는 쓸데없이 이런 아리까리한 말을 하고 말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내가 그 상황에 적합한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네."

사서는 뚱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물론 약간은 재수없어하는 표정도 섞여있었다

문학에는 거짓이 없다라... 나는 이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학은 삶의 총체적 표현이며,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부단한 대화 끝에서 마침내 끌어올려지는 신비한 전언이자 영혼의 단말기라는 등등의 고리타분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마광수의 소설이 문학이어야만 나는 방금했던 나의 말이 헛것이자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은 문학이 아닐지도 모를 마광수의 소설을 변호하기 위해서 문학에는 거짓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그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지 않은가. 하여간 나는 부끄럼쟁이라서 이런 이상한 문제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찾아내곤 막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읽어 본 마광수의 소설은 이 아저씨 참 귀여우신데에서 시작해서 오호라 놀라워라에서 이건 문학이 맞군에서 끝이 났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이처럼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계시다니 후후. 소설은 갓 대학에 올라온 가난뱅이 청년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묘사하면서 시작되고 있다. 이 청년은 신분제가 무너진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세상은 귀족들의 세상이며 돈을 가진 자 귀족 그렇지 못한 자 천민이라는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는 비록 수도권이긴 하나 SKY에도 못드는 대학을 나와 고만고만한 월급쟁이의 운명으로 귀결할 바에야 몸을 팔아 돈을 벌기로 작정한다. 그는 자신의 손톱 페티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손톱을 길게 기르기 시작하며 머리도 기르고 피어싱도 뻥뻥 뚫는다.

이 청년은 남창으로 살면서 여러 여자들을 겪게 되고 세상은 여전히 귀족들의 세상이지만 돈만으로는 귀족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지적이며 정신적인 요소를 찾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이 청년의 사고 방식은 그런 거다. 소크라테스가 잘생겼다면 그렇게 똑똑해지려고 노력을 했을까. 그가 남부럽지 않은 외모였다면 느닷없는 진리탐구에 열정적으로 몸을 바치려 했을까.

그는 오히려 극한의 육체적인 아름다움. 귀골로 태어난 것은 기본이요, 극한의 부로 치장한 귀부인을 만나 난생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이 소설의 제목인 귀족은 바로 그러한 사람을 일컫는다. 귀부인이 자신의 사랑을 거절하자 그는 귀부인의 개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데 그 상상의 장면이 가히 압권이다.

어떤 작품이 문학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은 까다롭다. 넓게 보면 그냥 글로 씌어진 텍스트 일반이 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글은 뛰어나다며 존경과 상을 헌사하고, 어떤 글은 생까인다. 여기서 좋음과 미의 가치에 대한 기준은 불분명하다. 시대의 보편적 기준이라 해봐야 그런 것 역시 역사의 구성물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미의 기준이 상대적이긴 하지만 미를 판단하는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상대적이건 회의적이건 씨저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하고 나는 태연과 카호짱의 빠가 되는 일이 여전히 발생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문학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작품에서 미학을 느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말은 내게도 애매하게 들리는데 미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도저히 간명하게 말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작품 귀족을 통해 얼마간의 즐거움을 체험했다. 그것은 색골에게만 통용되는 수준을 넘어 어떤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있다는 체험에 기인한다. 탐미주의자 마광수 아저씨는 인간의 육체성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사색에 있어 읽어볼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이 야하다는둥 어쩐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조르주 바타유나 무라카미 류의 토파즈 정도는 읽으면서 자신의 감각을 다스렸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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