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일기 - 마광수 장편소설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마광수 교수의 강의실

1989년,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집이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
으키고 있었을 때 나는 고삼이었다. 당시의 나는 입시의 중압감에 찌들려 있는 모범생이
었고, 내 머릿속에는 어설픈 엘리트주의와 선민의식이 궁핍한 가정 환경과 복잡하게 얽
혀 있었던 것 같다. 소위 ‘베스트셀러’와 ‘대중문화’에 대한 치기어린 거부감 같은
것 때문에 나는 그 책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나는 부산대 치의예과에 3년간 재학했었다), 96
년에 연세대에 입학해 문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마광수 교수의 저작들에 대한 관심은 계
속 연기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 지루한 ‘고전’들과 어렵기 짝이 없는 서양
의 ‘이론서’들을 읽도록 은근히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뭘 모르는 상태에서 가졌던 문
학에 대한 선망과 열정은 한 해 두 해 공부해가면서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문학 수업
이란 ‘밑도 끝도 없는 공부’같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고, 어렵기만한 서양의 문예 이론
들이 내가 처한 현실과는 너무나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재미가 없어졌기 때
문이다. 어느덧 3학년이 되었고,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나는 마광수 교수를 만나게 되었
다.

그의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매우 유쾌하다. 사실 강의실 전체가 ‘유쾌한 대리배설’로
들떠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는 다른 수업에서는 도저히 들어볼 수 없는 말들이 당당하게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또 다른 ‘이면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느낌이 드
는 것은 단순히 마광수 교수가 다루고 있는 주제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들이 발화
(發話)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더 유쾌하게 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되고 있
다는 사실로도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성(性)과 쾌락
의 문제에 대해 입다문 채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 준다. 그가 촉발의 일부분을 담당했
음이 틀림없는, 90년대의 숱한 성담론들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학생으로서의 우리
가 그것들을 단지 ‘읽어보기만’ 했기 때문이고 여전히 강의실에선 그에 관한 아무 것
도 토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혹은 ‘발화의 방식’이 지극히 이론적이고 고상하기만 했
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회 편, <마
광수는 옳다>, 사회평론, 1995.)를 읽어 나가면서, 나는 뒤늦게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
광적이랄 수 있는 수구적 봉건윤리, 지식인 사회의 위선과 이중성, 사법제도의 비민주적
절차와 권력 종속, 황색 저널리즘의 해악 등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 마광수 문학
에 대한 몰이해는 무지(無知)와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급진적인
쪽일 수밖에 없는 그의 철학과 문학관에 대해 그는 여러 권의 에세이집과 문화비평집들에
서 ‘구구절절’ 밝혀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
한 채 문학적으로(의도적으로 ‘가볍게’) 형상화된 텍스트의 일면만을 보고 그를 마녀사
냥 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도저히 깔려있는 이중적 성의식과 ‘성 알레르기’의 심
각한 병적 양태 역시 확인하고 말았다. 그것이 집단적인 것이기에 나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을 터이지만, 적어도 ‘체질 개선’을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사
실 그의 강의실에서 자극 받는 부분은 성과 쾌락에 대한 자유분방한 사고도 사고지만, 우
리 문학계가 버리지 못하고 있는 ‘품위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발견이 더 크다. 그런
풍토 아래서 공부하고 있는 문학도로서, “지하철에서 턱하고 꺼내어 읽는 책의 제목과
작가에 은근히 신경 쓰고 있잖아”라는 꼬집음에 뜨끔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의 꼬집음은 질책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의 형태로 발화되기 때문에, 훈민(訓民)에 의
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점검에 의해서 소화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발화의 방식은 마광수 문학의 매우 특징적인 양식이 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것은 ‘비아냥거림’과 ‘자기 조롱’ 혹은 ‘자기 연민’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는
‘겉포장’을 싫어하는 그의 솔직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상적인(현실적으
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성이론과 실천적 주장의 충격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문학적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그의 두 번째 소설 <광마일기>를
텍스트로 삼아 이러한 교묘한 발화의 방식과 함께 탈장르적 성격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기
로 한다.

<광마일기> - 비아냥거림과 자기 조롱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언뜻 미국의 영화 감독 우디 앨런이 떠오른다. 스스로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그 특유의 불만에 가득찬 중얼거림으로 대도시 뉴욕
에서의 소시민적 불안감과 컴플렉스를 끊임없이 노출함으로써 그는 당대의 스타일리스트
가 되었다. 이 ‘중얼거림’이 마광수의 경우에도 특징적인 스타일이 될 것인데, 화자와
독자와의 가까운 거리로 인해 그것은 ‘투덜거림’으로 들릴 지경이다. 이러한 투덜거림
이 외부로 향할 때,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비아냥거림의 어조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벌써들 일을 마치고 온다는 게 참으로 신통방통한 노릇이었다. 어떻
게 졸지에 발기가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그토록 삽시간에 삽입과 사정이 이루어졌단 말인
가. 나는 도무지 신기하기만 했다. (215쪽)>

<왜냐하면 아무리 겉으로 점잔빼는 남자라 할지라도 다들 속으로는 야한 차림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여자들이 바로 요즘 흔히 보게 되는 ‘겉만 적당히
야한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들은 솔직한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
지 ‘계산’에 의해서 화장하고, 옷 입고, 멋을 낸다. 그러다보니 옷이나 장신구를 해도
무조건 비싼 것만 찾게 된다. (219쪽)>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을 증오하고 덕지덕지 화장한 얼굴을 혐오하는 요즘 남자들의
심리는, 깨끗하고 귀티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심리라기보다는 그저 재벌의 외동딸처럼 부
티나는 나이 어린 여자만 좋아하는 엉큼하고 염치없는 심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심리
의 밑바닥엔 부자집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비굴한 욕구가 깔려 있다. 여성의 혼
전순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개입돼 있는 건 물론이고. (221-222쪽)>

이 비아냥거림들은 대부분 이중적 성의식이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 위선적 태도
에 관한 것들이다. 여하튼 그에게 ‘겉다르고 속다른’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있
다. 욕망의 본질이 매우 관습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경우는 범상한 시각으로는 그것을 깨
달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리는데, 작가는 그에 대해 일일이 심리 분석을 가함으로써 은폐
된 성욕, 시기심, 질투심, 허영심 등을 드러낸다. 현대의 문학 작품들이 고백하고 있는
인간이란 이미 이성적 의지를 지닌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터이
지만, 마광수의 경우 그런 부정적인 속성들이 이런 저런 구구절절한 묘사를 통해서가 아
니라 ‘직설적’으로 발화되고 있다. 그것이 때로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독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은 철저한 구
어체의 구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비아냥거림이 훨씬 더 자주 내부로 향해, 자기
조롱이나 연민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정말 여자들에겐 ‘정 떨어지는 남자’인 것 같다. 어린애처럼 칭얼
칭얼 보채대는 것까지는 귀엽게 봐 줄 만한데, 여자를 포근히 감싸주면 보호해 주지도 못
하는 주제에 새디즘이 어떻고 매저키즘이 어떻고 해가며 곧 죽어도 남자라고 새디스트짓
을 하려고 드니 말이다. (23쪽)>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외롭게 빌빌거리며 서울 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던 나에게, (117쪽)>

<그래서 후줄그레한 골덴 자켓을 입고 말라비틀어진 몸매를 하고 있는 내가 왠지 초라하
게 느껴졌다. (121쪽)>

<나는 계속 주눅이 든 상태였는데, 호텔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때와는 달라서 내가 호텔
프론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목격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
다. (201쪽)>

<웬놈의 간사요 수다였는지 몰랐다. 꼭 간신(奸臣) 목소리처럼 상냥하고 그윽한 음성이
거침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227쪽)>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는 도중에도 나는 행여 누가 볼세라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가며 눈
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307쪽)>

하일지와 민용태는 <즐거운 사라> 항소심의 공동감정서에서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를 인용하면서 사라를 상향적 인물이 아니라 ‘아이러닉 모드의 주인공’ (하일지·
민용태, <감정서>, 위의 책, 359쪽.)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는데, <광마일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작가 자신과 의도적으로 동일시되어
있는 주인공과의 가까운 거리로 인해 “주인공의 부조리한 생애를 굽어보는 비판적 안
목”을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실 전혀, 작가 자신은 주인공의 삶을
‘부조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사랑과 욕망에 솔직한 삶의 태도를 긍정적으
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러닉 모드의 인물 설정은 스스로의 이중성마저도 솔
직하게 고백하게 함으로써 주인공을 친근하게 만드는 ‘귀여운 일탈’과 ‘반어적 경박
함 ((마광수, ‘작가의 말’, <광마일기>, 사회평론, 1996, 372쪽.)’의 방법론적 채택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가벼움은 사실 매우 전략적인 것이다. 친절하게도 작가 자신이 “나는 <
광마일기>에서 도덕적 코멘트나 작중 인물의 정치·사회관, 또는 형이상학적 갈등 같은
것을 철저히 배제시키려고 애썼다 (마광수, 위의 글, 위의 책, 373쪽)”고 밝혀두고 있
다. 훈민문학(訓民文學)에 대한 반발인 셈인데, 사실 나는 우리 현대문학이 훈민성을 전
혀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매저키즘의 예만 들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한
도 내에서 이제하의 ‘밤의 窓邊’을 떠올릴 수 있고(비록 모호하게 그려져 있긴 하지
만), 잘 알려진 하일지나 장정일의 소설들은 전혀 훈민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문제는
‘가벼운 소설’을 문학적으로 폄하하는 평론계의 반응이라 할 것인데, 그들의 의도적 배
제에 의해서 이상하게도 많이 읽혀지는 소설들이 문학적 평가의 진공 상태에 놓여 있다.
위에 거론한 작가들 중에서 특별히 탐미적이고 낯선 마광수의 작품들은 더더욱 그러한
셈이다.

‘낯설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가 가진 성관념은 봉건적 유교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
리 사회에서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90년대 들어 이나마 성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된 것도 한 쪽에서 그가 에세이를 통해 줄기차게 발언을 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프로
이트적 ‘변태’ 개념의 폐기, 남근중심주의와 삽입성교 위주의 성관행 비판, 새도-매저
키즘 (Sado-Masochism), 페티시즘(Fetishism) 등의 탐미적 활용, 인공미의 강조 등은 대
단히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지만 ‘성 알레르기’에 걸려 있는 체질에 곧바로 적용하기에
는 무리가 있는 것들이다(체질 개선은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 혹은 전혀 체질 개선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실 <광마일기>에 삽입된 에피소드들을 통해 작가
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여기 이 땅에서는 지나치게 진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K씨의 행복한 생애]에서 얼핏 보이는 유치증(幼稚症, hebephilia)이나, [
속궁합, 겉궁합]에서의 부부교환의 에피소드, [달가고 해가면]에서 그 전기성(傳奇性)에
힘입어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시간(屍姦) 장면 등은 그 자체로는 대단히 급진적인 성적
취향들인 셈이다. 그러나 <광마일기>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아이러닉 모드의 주인공 설
정, 자기 조롱의 투덜거림, 완벽한 구어체의 구사, 특유의 위트 활용, 전기소설적(傳奇小
說的) 양식의 도입 등으로 한결 ‘가벼워져서’ 거의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있게 읽힌
다.

말하자면 <광마일기>는 작가의 철학과 이론들이 문학적으로 매우 치밀한 계산 하에 형상
화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음란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유쾌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단체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검열 기관인 <간행물윤리위원
회>에서는 90년 7월 26일자로 이 작품에 ‘음란성을 이유로 경고’ 결정을 내렸다. 그 몰
지각한 모럴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지나간 일로 치부할 일이 아닌 듯하다. 공윤의 사전 검
열제가 폐지된 이 시점에서도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요지부동으로 칼날을 휘둘러대고 있
을 터이기 때문이다.

<광마일기>의 탈장르성

<광마일기>는 열 편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K씨의 행복한 생애], [꿈길에
서], [겉궁합, 속궁합] 세 편을 제외한 일곱 편은 ‘나’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다. 작가
자신은 “열 편의 에피소드를 연작 형태로 연결하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서로간에 유기
적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마광수, 위의 글, 위의 책, 361쪽)” 배려했다고 밝히고 있으
나 각 에피소드들이 그렇게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들이 모두 연
애담이라는 것과 ‘나’라는 화자가 항상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각 편들은 여인
이 죽거나, 한국을 떠나거나, 연애가 파국을 맞는 형태로 완결되어 있다. 앞서 나왔던 에
피소드의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든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든지, 미완의 사건을 다시
진행시킨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다.

특히, 상대 여인이 자살하거나 죽는 경우가 많은데
(<대학 시절>, <꽃과 같이>, , <서울 야곡>, <달가고 해가면>으로 6편이나 된다),
이러한 결말들은 다음 에피소드로의 진행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낭만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플롯상의 애틋함과 비애감이 감정의 과다노출, 재기발
랄한 화법 등과 뒤섞여 개성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상의 특징은 ‘사소설(私小說)적 기법’과 ‘전기소설(傳
奇小說)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화자인 ‘나’는 작가 자신과 동일시되도록 강하게 의
도되어 있고, 심지어는 작품 속에서 ‘광수’라는 작가의 본명을 노출시키기까지 한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의도적인 작법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작가의 자전적
서술이고, 어떤 부분이 허구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과
인물은 허구적인 것으로 봐야 하겠지만, 의도된 자전적 분위기가 실제 작가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있다는 독자의 관음증(觀淫症)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의 ‘쾌락적 효
용’을 중시하는 작가의 문학적 입장과 꼭 들어맞는 것이다.

<꽃과 같이>, <꿈길에서>, <달가고 해가면>의 세 편은 동양의 전통적인 전기소설의 형식
을 빈 것인데, 물론 전기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영웅적 서사나 권선징악적 결말은 없
다. 말하자면 그것의 에로티시즘적 측면만 부각시켜 오늘을 배경으로 녹여놓은 셈인데,
‘이것은 완전한 허구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작가는 개연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작품을 더없이 환상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보르헤스
식의 ‘가짜 사실주의(pseudo-realism)’는 있어서,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으로 실제를
상정하고 있다. <꽃과 같이>의 경우 설악산 백담사, <꿈길에서>의 경우 한국 전쟁, <달가
고 해가면>의 경우 연세대 뒷산인 무악산 등이 그것이다. <꿈길에서>에서는 작가 자신의
전기적(傳記的) 사실을 허구의 인물인 ‘몽선’(그는 선녀의 아들이다)과 뒤섞어놓는 능
청까지 떤다. ‘상상적 현실’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권태>에서도 그랬지만, <광마일기>에서도 에세이적 논평은 심심찮
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간간이 삽입되어 있는 전문(全文)의 시(이미 발표된 시도 있고, 새
로 지어 넣은 것도 있다), 대중가요, 크리스마스 캐롤, 영화나 문학작품에 대한 논평 등
과 함께 이 작품을 탈장르화하고 있다. <속궁합, 겉궁합>에서 5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소개라든지, “그때의 내 심정이 어땠으리라는 것을 독자 여러분
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106쪽)의 경우처럼 독자를 직접 호출함으로써 ‘형식의 투명
함’을 파괴하는 방식은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소설’을 거부하는 소설 작법이
라 할 수 있다.

당혹감 또는 해방감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광마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담으로 일관하면서도, 형
식적으로는 가벼운 구어체, 사소설적 기법, 전기적 양식, 시·논평의 삽입, 낯설게하기
등과 같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다양한 양식은 자칫 지루한 사변
적 연애담의 나열이 될 수도 있는 이 작품의 내용을 형식적으로 다채롭게 보완해주는 문
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마일기>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다채롭고, 자유분
방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때때로 그의 소설들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문학적 표현의 영
역”에서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부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당혹감은 대중문화적 요소의 대담한 차용이나 적나라한 일상어 자체에서(지금까지 우
리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른 것이 좋다고 교육받았으므로), 또는 작중화자의 지나친 감탄
과 감정 배설에서(작가는 배후에 숨는 것이 훌륭하다고 교육받았으므로), 또는 다양한 성
행위의 묘사에서(오럴 섹스 장면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갑작스레 솟는다. 그것
들이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면, 이 당혹감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가 지금 우리 문학의 당
면한 숙제일 수 있다. 일단 혹자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고, 혹자는 신선한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나는 이쪽이다). 그러나 ‘진지한 문학 작품이 아니다’라는 식의 무조건적 거부
는 우리 문학의 입지를 한없이 좁히는 옹졸한 서생의 대응방식이다.

우리는 이미 <광마일기>가 치밀한 의도하에 축조된 문학적 구조물이며, 작가의 철학과 인
간관이 효과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그의 소설들을 놓고 진행되
는 논쟁들이 문학의 영역에서든, 사회의 영역에서든 당혹감에서 비롯된 악의가 아니라면
충분히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것이다. 마광수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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