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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 마광수 소설집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마광수 소설집 <사랑의 학교> 작품 해설
<사랑의 학교> 를 읽는 다섯 가지 코드
김성수(문학평론가)
1. 문학은 인공적 길몽이다
<사랑의 학교>는 유미주의 미학의 상상력이 공급하는 성적 판타지와 에로티시즘의 극한(極限) 양상을 자유분방하고 경쾌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흥미로운 중·단편소설집이다.
모두 29편의 단편소설들을 수록하고 있는 <사랑의 학교>에서 작가인 마광수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애틋한 관능의 이야기들(<초상화>, <일인이역>, <벽과 카메라>)로부터, 인생살이의 우연성과 허무를 극적 반전(反轉)의 구성형식으로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들(<어이없는 이별>, <인생살이>, <유다>), 그리고 하이힐과 손톱 페티시(fetish)로 촉발되는 페티시즘의 만화경과 사도마조히즘, 복장도착 등의 심리를 성적 판타지로 보여주고 있다.
문학과 성에 대한 마광수의 핵심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에세이(수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문학관이나 성 묘사 및 표현에 대한 입장을 여러 에세이집이나 문화비평집에 상세하게 피력해놓고 있다.
그의 에세이를 보면 그가 왜 온갖 비판과 사법적 심판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토록 집요하게 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들을 찾을 수 있다. 마광수가 피력하고 있는 문학이란 무엇이고, 그 목적은 무엇이며, 표현형식이나 문장은 어떠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주재자로서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 그의 에세이집을 보면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소설과 작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 작가는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할 권리를 가진다.
■ 작가는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픽션)이며,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문학작품이란 그가 강조하고 있듯이 인공적(人工的)으로 만들어내는 길몽(吉夢)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꿈속에서 살인을 하거나 근친상간의 섹스를 하더라도 현실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듯이, 작가는 인공적 길몽인 문학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자유롭게 표출해낼 수 있다. 현실의 억압이나 부정적 요인을 꿈속의 비현실적인 일들이 오히려 적절하게 해소해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방화나 살인처럼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해서는 안될 일들을 소설적 현실 안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거짓말이 많이 섞인 사소설(私小說)’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남주인공 이 꽃의 요정과 연애하기도 하고 고려 때 죽은 처녀귀신과 연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전기적(傳奇的) 성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더라도, 남주인공이 친구부부와 부부교환의 정사를 벌이거나, 또는 극장에서 자살을 기도한 정체불명의 여성과 연애하는 등 거의가 허구적 스토리로 되어 있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 <사라를 위한 변명>, 264쪽)]
<광마일기>나 <광마잡담> 등의 현대판 전기(傳奇)소설이나 <즐거운 사라>에서 마광수가 시도한 허구적 상황 속에서의 성희장면이나 기이한 이야기 설정은 ‘문학은 인공적 길몽이다’는 그 자신의 명제로부터 접근하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29편의 이야기들 또한 이런 전제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2. 문학은 창조적 불복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광수의 성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는 문학과 예술의 존재방식과 표현형식에 대한 그 자신의 뚜렷한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우리 사회가 성에 대해 열린 태도로 논의하고 활발하게 소통함으로써 성에 대한 이중성을 극복해가기를 주장해왔다. 이 점에 대해 강준만은 마광수 문학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마광수의 주장은 섹스가 소비의 대상이 된 현실을 직시하자는 요청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섹스를 모든 금기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즐길 것을 제안함으로써 그간 우리 사회에 존재해온 섹스에 대한 이중성을 타파하고자 한다. 그는 섹스가 육체와 정신의 자연스러운 욕구에 부응하는 ‘소비행위’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성의 신성화’라고 하는 우리 시대의 뿌리 깊은 위선과 기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 <마광수 살리기>, 173~174쪽)]
소설을 ‘그럴듯한 거짓말’이나 ‘허구적 스토리’로 보는 한에서 마광수는 작가란 모름지기 창조적 불복종, 창조적 반항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한마디로 말해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고, 당대(當代)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계몽서도 아니다. 문학은 언제나 기성도덕에 대한 도전이어야 하고,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 (…)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逸脫)이다. 문학은 인간내부에 잠재해 있는 본능적 욕구들을 리얼하게 드러내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참된 가치를 지닌다. (<마광쉬즘>, 인물과사상사, 36~39쪽)]
마광수 문학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 강요하는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불온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며, 문학은 항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고 가치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그래서 문학은 사회적 통념에 대한 반란으로서 “우리를 억압하고 순치(馴致)시키는 / 권력과 윤리에 대한 / 끊임없는 조소”(<본질적으로 문학은 불온하다>, <야하디 얄라숑>)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온한 문학은 시대와 불화하고, 작가는 시대와 사회가 부과하는 금제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인간의 내적 체험의 소산인 금기와 위반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리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들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금기와 관계하는 근본적인 것들로 ‘죽음’과 ‘성’을 들면서(<에로티즘>), 금기의 구심력과 위반의 원심력 사이에서 억압된 본능을 현시하며 사회적 금기를 간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탈주시키는 계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불온성’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광수 문학 역시 바타이유의 견해와 맥락을 공유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섹슈얼리티는 ‘윤리’와 ‘정상(正常)’을 거부하는 ‘창조적 불복종’에 있기 때문이다. (<마광쉬즘>, 115쪽) 이렇게 보면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초상화>, <일인이역>, <벽과 카메라>, <인생살이> 등에서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미녀들과 성에 대한 일탈행위를 하는 장면도 작가의 이런 신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몇몇 장면들을 읽어보자.
[남자는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뜻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感知)해낼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우면서도 사악한 열정에 대한 일탈(逸脫)욕구가 그의 호기심을 한껏 부채질해주고 있었다.(…)/그 순간 남자는 “악”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그림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 바로 그림 속에서와 같이 속살을 훤히 비치는 흰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그의 목을 어루만지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애타게 갈망하는 듯한 눈길로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초상화>15~16쪽)]
[사진 속의 그녀는 여전히 싱싱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걸 때마다 그녀는 무언(無言)의 텔레파시로 화답해주었다. 그는 사진 속의 리나를 사랑했고, 사진 속의 리나 역시 그를 사랑했다. 리나와 함께 그는 공상 속의 정사를 즐겼고, 그때마다 황홀한 엑스터시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일인이역>, 30쪽)]
[조금 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느새 벽화 속에 들어가 있었다./주변을 둘러보니 호화의 극을 달리는 궁전들이 온갖 보석에 싸여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하늘한, 속살이 훤히 다 비치는 옷을 입고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특히 그의 마음을 흔들흔들 어지럽게 만든 것은, 여인들의 코에 끼어져 있는 커다란 코걸이와 손가락 발가락마다 끼어져 있는 번쩍거리는 반지 발가락찌 등이었다. (<벽과 카메라>, 160쪽)]
이처럼 마광수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에 관심을 두고 작품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은 문학의 ‘창조적 반항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인간이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정도 다 사디스트이고, 그런 사디스틱한 공격욕이 인간실존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반항정신에 대하여>,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324쪽)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디즘을 실제의 현실 안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작가가 ‘창조적 반항’이나 ‘창조적 공격욕구’를 예술적 장치를 통해서 허구화시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때, ‘그럴듯한 거짓말’로서 문학작품이라는 허구적 장치 안에서 창조적으로 묘사하는 사디즘의 이야기 내용 자체가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나쁜 사안은 결코 아니라는 데 있다.
작가가 이 단편집의 <오럴섹스 만세!>, <왕>, <신난다, 젠타이 페티시즘!>, <잊혀지지 않는 여인들>, <내일이면 늦으리> 등에서 설정해놓은 사도마조히즘의 양상들은 작가의 문학에 대한 기본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변태는 없다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을 읽으면서 먼저 떠오른 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밝혀놓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나는 섹스한다. 고로 존재한다.(…) (마광수, <마광쉬즘>, 46쪽)]
위의 문장 다음에 이어지는 “그래서 나는 핥고 빤다.”는 문장은 마광수 문학을 구성하는 내적 동인(動因)에 대한 신념을 삼단논법식의 명제 전개로 나타내고 있다.
<사랑의 학교>에 대해 논의하면서 마광수 문학을 구성하는 핵심명제로서 이 선언적 문장을 거론하는 것은 이번 작품집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이야기들이 ‘나/그(녀)’의 성(性)에 대한 질문과 탐구, 그리고 성의식에 대한 작가의 소신과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지니고 있는 신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 한가지는 성묘사와 성담론에서 ‘변태는 없다’는 인식이다.
내게 사랑이 오면, 온종일을
그녀와 함께 신나게 변태적으로 보내리
그녀는 고양이 되고, 나는 멍멍개 되어
꽃처럼, 불처럼, 아메바처럼, 송충이처럼
끈적끈적 무시무시 음탕음탕 섹시섹시
서로 물고 빨고 할퀴고 뜯어 온갖 시름 잊으리
사랑은 순간, 사랑은 변덕, 사랑은 오직 꿈!
오오 변태는 즐거워라, 사랑이 오면.
---- 마광수, <변태> 전문
사랑의 감정이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듯이, 진정한 성애 또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교환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때 정상(正常)이 아닌 성욕 및 이상(異常) 행위로서 규정되는 변태가 서로에게 즐거운 행위로서 수용된다면 더이상 변태가 되지 않는다.(“서로가 변태라면 더이상 변태는 아니다.”, <나는 왜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214쪽)
나아가 작가는 “오럴섹스를 위주로 하는 비생식적(非生殖的) 섹스의 형태가 오히려 우리들을 부담 없는 쾌감, 정력의 낭비 없는 쾌감, 항상 에로틱한 상상력에 빠져 끊임없는 판타지를 즐길 수 있는 신비스런 쾌감으로 인도해준다.”(<오럴섹스>, <나는 헤픈 여자가좋다>, 227~228쪽)고 말한다.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섹스에서는 삽입성교가 불안한 반면, 쾌락과 유희를 전제로 서로 합의된 섹스에서는 “역시 ‘오럴섹스’가 최고”(<오럴섹스 만세!>, 80쪽)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 통념에 의해 규정되는 변태라는 규정은 마광수의 신념 속에서는 사회적 인습과 통념으로서 ‘창조적 반항’의 대상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의 목표가 된다. “남을 해치지 않는 한 변태니 퇴폐니 부도덕이니 하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숨겨진 진실>, 87쪽)기 때문이다.
[모든 변태는 즐겁다. 이상성욕(異常性慾)이란 말은 옳지 않다. ‘개성적 성욕’이라고 불러야 한다. 변태는 기존 윤리에 대한 반항이다. 반항은 언제나 즐겁다. ‘창조적 불복종’이기 때문이다. (<마광쉬즘>, 105~106쪽)]
문학 속의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벌이는 사건들을 현실적 논리에 의해 재단하고 평가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작가가 문학 속에서 상상적으로 그리는 상황에 대해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문학과 예술에 관한 논의에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의가 설득력을 얻는다.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따질 때 우리가 먼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외설’이 왜 나쁘냐 하는 점일 것이다.(…)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듯 성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 중의 하나요, 인간이 마땅히 쾌락으로 누릴 자유를 갖고 있는 ‘행복추구’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약방에 가면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약품들이 정부의 허가하에 제조되어 정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고, 성전문병원에 가면 불감증 환자의 치료를 위해 제작된 에로틱한 내용의 비디오들이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외설은 없다>, <모든 사랑에 불륜을 없다>, 213~214쪽)]
<권태>를 비롯하여 <즐거운 사라>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광마잡담> <유혹> 그리고 최근의 <발랄한 라라>와 이번 작품집 <사랑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마광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물창조는 문학의 근본적 창작동기를 ‘판타지의 창조’에 두는 그의 문학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념지향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실비판과 전망제시보다, 낭만적 환상에 바탕을 둔 소설의 분위기를 추구한다. 사실 이 점이 많은 평자들로부터 그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광수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낭만적 환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 수법은 환상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해내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창조의 원천으로서의 권태>;, <권태> 후기)는 관점에서 묘사적 기법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마광수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인물의 심리적·외면적 묘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묘사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있다. 가령 <발랄한 라라>에 수록된 <어느 여대생의 자위행위>는 작품 전체가 ‘자위행위’를 하는 여성인물의 심리와 여성 성기에 대한 세부묘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의 학교>의 여러 작품들을 관통하며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의 사도마조히즘, 페티시즘, 복장도착(transvestism) 심리와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나는 즐거운 페티시스트이다
마광수 문학에서 페티시즘은 유미적 쾌락주의의 한 형태로 성(性)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에서 중요한 심리적 요인을 형성한다. 그 가운데 ‘하이힐’과 ‘손톱’은 페티시의 상징적 표상으로서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요소이다.
마광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형형색색의 현란한 머리카락, 송곳처럼 뾰족한 하이힐, 육체를 치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장신구와 그로테스크의 미(美)에 탐닉된 강력한 페티시스트로 설정되어 있다. 마광수의 첫 장편 <권태>를 비롯하여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불안>, <광마잡담>, <유혹> 등의 장편소설들을 포함하여, 최근의 <발랄한 라라>와 이번 작품집 <사랑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하이힐’과 ‘손톱’ 취향을 기본 축으로 그는 다양한 성적 페티시즘의 환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런 페티시즘 심리를 단순히 작가자신의 성적 기벽(奇癖)이나 취미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그의 문학적 본의(本意)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여기에는 인간심리에 대한 작가자신의 심층적인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여왕의 식사와 섹스>, <왕>, <신난다, 젠타이 페티시즘!> 등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페티시즘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해석해낼 수 있다. 마광수는 첫 에세이집인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서 자신의 손톱 페티시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관능적 상상력을 키워준 것은 언제나 ‘손톱’의 이미지였다. 특히, 나는 여인의 긴 손톱을 너무나 사랑한다. 손톱은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일종의 가학적 무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여인의 긴 손톱은 사디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학적인 용도로 쓰이던 손톱이 이제 화사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변했다는 점, 그로테스크한 관능미의 심벌로 변했다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밝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희망적인 예감을 얻는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책머리에>)]
페티시즘은 원래 물신숭배(物神崇拜)나 주물숭배(呪物崇拜) 또는 고착성욕 등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특히 어떤 물건에 집착하면서 쾌감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든가, 어른들이 이성의 특정한 장신구나 의복 또는 신체부위 등에 특별히 집착하는 현상 역시 페티시즘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페티시즘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페티시즘은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아닌 상태’로서의 중성적 존재를 찾는 심리인데, 그러한 중성적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손톱’이다. 작가는 수많은 페티시 가운데서 특히 ‘긴 손톱’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를, 물질과 생명 양자를 포용하는 의미와 유미적 실용주의 및 평화주의, 그리고 양성적 의미에서 찾고 있다.
마광수는 우리 사회에서 성문학에 대한 논의는 자기취향에 맞는 성적 환상을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건강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사회에서 성의 문제가 지금보다 더 개방되고 논의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서기 3000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에서 화자가 실용적 쾌락주의와 과학기술이 연결된 즐거운 지상낙원을 꿈꾸고 있는 장면도 이와 같은 작가의 상상이 반영된 것이다.
[저희들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랍니다. 말하자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생물학적 로봇이지요. 우리는 마조히스트로서 즐겁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이곳 ‘야해라’ 별의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선생님이 이곳에서 경험하신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실용적 쾌락주의의 보급과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이지요. 아마 지구는 서기 3000년 정도에 가면 그때서야 모든 이데올로기와 정신적 엄숙주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이곳 야해라 별처럼 실용적 쾌락주의와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즐거운 지상낙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에요.(96쪽)]
5. 문학은 사회적 통념에 대한 도전이다
<사랑의 학교>에는 세밀한 성행위와 성기에 대한 묘사, 그리고 노골적이고 상스럽기까지 한 문장 언어가 직접 노출되어 표현되고 있다. 사회적 통념상 작품 속에서 성기에 대해 직접 지칭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금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작가는 <사랑의 학교>의 여러 작품들에서 성기에 대한 명칭을 은유적으로 사용하거나 비유적으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않다. 그런 예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여왕이 손짓으로 미소년 세 명을 지목하자 그들이 여왕의 몸뚱어리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 명은 자지를 여왕의 보지에 넣고 또 한 명은 자지를 여왕의 항문에 꼽는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여왕의 입속에 자신의 자지를 박는다.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여왕의 오르가슴에 겨운 신음소리……비명소리…… (<여왕의 식사와 섹스>, 140쪽)]
[“이 똥갈보 같은 년아, 지금까지 몇놈하고 붙어먹었니?
“어서 개처럼 컹컹 짖으란 말야. 알았어? 이 걸레만도 못한 년 같으니라구…….” (<내일이면 늦으리>, 228쪽)]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오럴섹스를 나누다가 늦은 시각에 헤어졌다. 나는 그녀의 보지를 빨아주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 우선 그녀의 젖꼭지와 귓불, 목, 입술 등을 꽤 공들여 핥고 빨아주었다. (<사랑의 학교>, 254쪽)]
작가가 성기를 ‘페니스’로 쓰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직접 노출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언어적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떤 심리적 효과, 다시 말해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교양주의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전복해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언어적 모욕을 가하는 주체의 사디즘 심리와, 모욕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또 다른 주체의 마조히즘 심리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사도마조히즘적 심리를 생생한 비속어의 활용을 통해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어적 모욕은 참으로 달콤한 마조히즘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강아지 새끼처럼 콩콩콩 짖어댄다. 정말 내가 한 마리 애완용 개가 된 기분이다. 사디즘도 좋지만 역시 여자에겐 마조히즘이 더 재밌다. 성기의 구조가 움푹 들어가 있어 수동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내일이면 늦으리>, 228쪽)]
그렇다면 소설 문체에서 언어의 천박함, 상스러움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상스러운 비속어의 사용은 우선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 자신의 허위적 교양주의를 위악적으로 비판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온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상스러운 비속어를 읽는 독자들의 심리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광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 받을 것을 잘 알면서도 상스러운 언어를 그대로 노출시켜 표현하는 의도 가운데 하나는 교양주의 소설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서(<교양주의의 극복>,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비속어의 직접 노출을 통해 사회적 금기(禁忌)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유성호, <탐미적 관능과 낭만적 허무의 세계 --- 마광수의 시>, <야하디 얄라숑>, 512쪽) 마광수 문학의 언어사용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다음의 글은 이 점을 잘 설명해준다.
[나는 <즐거운 사라>를 읽으면서 처음엔 언어의 천박함에 놀랐다. 그러나 당시 마교수의 구속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내가 마교수에 대해 의외로 무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문학평론을 잘 쓰는 마교수가 <즐거운 사라>에 좀 어려운 말 몇마디 집어넣거나 말을 이리저리 비비 꼬고 돌리는 따위의 수사법을 사용해 좀더 철저하게 문학을 위장하지 않았던지 나는 뒤늦게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 마교수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천박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상스러운 언어를 시종일관 사용하면서 ‘야한’ 것에만 집착했던 이유는 한국의 일부 문인들이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는 ‘문학 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강준만, <소설을 뭘로 아는가>, <인물과 사상1>, 117쪽)]
이와 함께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29편의 이야기들에 대해 소설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 소설집에 280매 분량의 중편소설 한 편과 120매로부터 20매 정도의 단편소설들을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는데, 전체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의 길이에 따른 명칭, 다시 말해 ‘장편/중편/단편/콩트’ 등으로 분류되는 소설의 세부명칭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학개론’ 책자에서 구별하곤 하는 중편소설과 단편소설, 단편소설과 콩트의 명칭이 잘 생각해보면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 발달한 짤막한 단편소설의 일종으로 알려진 ‘콩트conte’가 이야기, 꾸민 이야기, 터무니없는 이야기, 단편소설, 소화(小話), 장편(掌篇) 등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명칭이라고 보면 원고지 분량으로 100~120장은 단편소설이고 20~30장은 장편(掌篇)이라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인생의 현상을 너무 리얼하게 묘하는 것을 피하고 기지와 풍자로써 인생의 어떤 측면을 경묘(輕妙)하게 비판하는 맛을 담는 것이 특징”(<세계문학대사전>, 교육출판공사)인 콩트는 발자크의 <해학기담집>(Contes Drolatiques)이나 플로베르의 <세 개의 짧은 이야기>(Trois Contes)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야기 길이나 원고분량으로 명칭을 형식화하여 사용한 것은 유용한 분류가 아니다.
이 점은 작가인 마광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150장 이하의 분량이든 20장 정도의 분량이든 모두 단편소설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학교>에 수록된 다양한 길이의 작품들은 단편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소설의 길이와 명칭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소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지나치게 스케일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몇 권으로 된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이 너무도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또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만이 역량 있는 작가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문학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다원주의이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기초하는 수필적 소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필연성 없이 무작정 권수만 늘리는 대하소설은 필요 없다. 또 장편소설이라 해도 꼭 원고지 1천 장 이상이 돼야 할 필요가 없고 5백 장 내외로도 충분한 것이다. 수필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짧은 장편소설이면서 높은 완성도를 가진 소설이 많이 씌어져야 한다.(…) 단편소설도 마찬가지다. 1백 장 내외가 될 필요가 없다. 30장 내외로도 얼마든지 우수한 단편이 씌어질 수 있는데, 거기에 수필적 요소를 가미하면 더욱 친근감 있는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수필과 소설>,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266쪽)]
[도대체가 요즘의 우리나라 소설들은 그 길이가 너무 길다. 걸핏하면 대여섯 권짜리 대하소설이요, 단편도 100매가 넘는 게 보통이다. 단편은 30매에서 50매 정도가 제일 적당한 분량인데, 30매 정도는 아예 ‘콩트’로 여겨 우습게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역시 교양주의 소설의 유행과 짝을 이루는 작가들의 ‘물량주의(物量主義)’ 선호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교양주의의 극복>,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194쪽)]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작품집의 표제인 ‘사랑의 학교’에 대해서 언급해두어야할 것 같다. 표제의 의미는 ‘사랑을 배우는 학교’ 혹은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육체적·정신적 현상을 가로지르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주고받기 위한 기술과 마음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의 주장을 빌어서 말하자면 ‘야(野)한’ 마음이나 정신을 의미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한편, ‘학교’라는 공간이 부정적 의미를 규율과 훈육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마광수의 ‘성 문학’과 관련시켜서 말한다면 한국사회라는 학교가 규율하고 통제하고 있는 매우 엄격한 이미지의 공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마광수가 오랜 시간 동안 주장하고 작품을 통해서 형상화해온 자유로운 성 관념과 의식으로 환산(換算)하여 이해한다면 문학작품이라는 ‘알라딘의 램프’ 안에서 어떠한 성적 상상이 구현되더라도 어느 누구나 기관으로부터 감시당하거나 처벌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 자신만의 성적 유토피아가 구현되는 상상의 ‘학습 공간’, 그것을 ‘사랑의 학교’의 의미로 해석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