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광수 장편소설 <페티시 오르가즘>을 읽고
<페티시 오르가즘>을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뒤, 책을 덮으며 나는 마치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몽환적이고 뭔가 뿌옇게 흐려진 창문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었으며 모호하기까지 했다. 플롯이나 사건의 개연성은 이 작품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있었다. 둘은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둘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 외의 것, 두 사람이 왜 만났는지 혹은 왜 서로 좋아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보다 ‘어떻게’에 중점을 두고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저자의 설명처럼, 이 작품은 사건의 개연성이나 스토리를 풀어가는 것은 지면 낭비라는 듯,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만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책의 표지를 넘기자마자 펼쳐지는 벌거벗은 여자의 외양과 화장하고 옷을 입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마치 머릿속에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영상을 틀어놓은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또한, 소설 중간중간 나오는 여자와 남자의 꿈에 관한 이야기는 환각적인 영상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프로이트가 꿈은 무의식적 소망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이 작품 전체가 저자의 무의식적 소망을(아니, 의식적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환각을 이용해 성취해낸 하나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여자와 남자(물론,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이 여자와 남자의 이름마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는 상당히 상반된 인물이다. 화려하고 대담하고 노골적이기까지 한 여자의 외양에 비해 남자의 외양은 볼품없고 초라하다. 저자의 남성적인 시선이 이 책에서는 그대로 묻어나는 데,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어덜트 비디오(AV)의 여자주인공 역할은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쁜 여배우들이 주로 도맡아 하는데 비해서 남자주인공 역할로는 뚱뚱하거나 못생긴 남배우들도 상당수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남자배우를 써야 그 비디오를 시청하는 보통의 평범한 남성층이 더 쉽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평범한 남배우인 편이 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시키기 쉬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저자의 성적 환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작품에서 여자에 비해 남자의 외양 묘사가 간결하고 극히 평범한 것은 말 그대로 남성 저자의 시선에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여성 독자를 위해 쓰여진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이 완벽한 왕자님인 반면, 여자주인공은 초라하고 평범한 여자로 그려지는 것과도 같다.
한편, 작가든 화가든 평생 무엇인가를 쫓는 ‘광적인 집착’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허용돼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작품 속 여자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남자의 외양은 너무 당연했다. 저자의 ‘광적인 집착’의 대상은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작품을 읽으며 파악한 저자의 집착, 즉 페티시즘은 가장 대표적인 페티시인 손톱 페티시부터 해서 송곳같이 뾰족한 하이힐페티시, 귀걸이와 코걸이, 목걸이, 젖꼭지걸이, 허벅지찌 등 장신구페티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나는 이를 크게 불안함에 기인한 미(美)와 그로테스크한 인공미로 구별해 볼 수 있었다. 불안함에 기인한 미(美)란, 손톱이나 하이힐의 묘사에서 볼 수 있었다. 작품 속 여자는 늘 10cm이상의 손톱을 기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여자는 손을 이용할 때 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하게 움직인다. 작품 속 화자는 여자가 문을 잠글 때나 열쇠를 꺼내는 등의 일상적인 동작을 행할 때마저도 얼마나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지를 끊임없이 묘사한다. 또한 여자가 늘 신는 하이힐은 굽이 18cm이상이고 송곳같이 가늘고 뾰족한 힐이어서 걷는 모습이 뒤뚱뒤뚱 불안정하다. 힐은 늘 발등위로 얇은 줄 하나만 지나가는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 같이 불안한 힐이고, 여자는 그렇지 않아도 걷기 힘든 힐을 신고도 부족한지 두 발을 족쇄처럼 이어주는 장신구까지 즐겨 착용한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그런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화자는 이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미학’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둘째로, 그로테스크한 인공미는 색색깔의 손톱과 진한 색조 화장, 높게 치솟거나 과하게 부풀려진 머리, 알록달록하게 염색된 머리나 음모, 거의 알몸에 가까운 가릴 곳만 겨우 가린 옷차림 등이 어우러져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그로테스크’인데 이는 그 만큼 저자가 그로테스크함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작품 속 남자는 여자의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인공미에 ‘선망을 넘어선 질투’마저 느낀다. 이 작품에서는 여자의 자연적인 생김새보다도 인공적인 차림새 묘사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데(이 작품에서, 여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묘사되어 지지 않고 있다), 예쁜 여자가 예쁜 것이 아니라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여자가 예쁘다는 식이다. 어쩌면 남자가 여자의 이러한 과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인공미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아니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품 속에서의 불확실하고 모호한 배경과 사건의 전개(그것을 사건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또한 그것이 전개되어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의문스럽지만 마땅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비현실적인 여자의 외양 묘사에서 나는 어쩌면 여자가 소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설 속 여자는 소설 속 남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일 지도 모른다. 아니, 패션쇼까지가 진짜고 나머지는 남자의 상상일 수도 있고, 물론 전부 진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그만두었다.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있어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 작품에는 중간중간 시가 삽입되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밤 주막에서 한 청년이 부른 노래인 「늙어가는 노래」였다. 이 시는 저자가 서른 즈음에 쓴 시인데, 작품 속에서 남자는 이 노래를 듣고 ‘너무 엄살은 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저자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대학생인 나는 그 시에서 말하는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한참 어리다. 그래서 아직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희망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지만, 그 시의 애틋하고 쓸쓸한 느낌은 잔잔히 내 마음을 울렸다. 또한,「모든 것이 불안하다」라는 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불안함에 기인한 미학을 확인시켜주었다. 기린의 긴 목으로 비유되어진 여자의 손톱과 하이힐 뒷굽, 그리고 코뿔소의 뿔로 비유되어진 남성의 성기. 비유는 기발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뿔의 공격을 받을까봐 불안하다’고 표현한 부분은, 삽입 직전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 같아 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관능에만은 권태가 없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그런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되풀이되는 크게 다를 것 없는 반복적인 행위와 자극에도 사람들은 반응하고 정복당하며 이를 갈구한다. 여자의 차림새와 화장 등만 바뀌고 만나는 장소만 바뀔 뿐, 아무런 논리적 개연성이나 우연성마저 배제된 채 계속 관계를 맺는 작품 속 남자와 여자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일 지도 모른다. 대학교 근처나 번화가에서는 언제나 쉽게 모텔촌을 발견할 수 있고, 모텔촌은 언제나 호황이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직업이 무엇이든 남녀는 모텔을 드나들고, 낮이든 밤이든 그들은 모텔을 드나든다. 관능에만은 권태가 없기 때문이다. 모텔촌에 드나드는 남녀가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그 곳까지 오게 되었는 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어쩌면 그 어떤 소설보다도 리얼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수험생 시절, 수능을 위해 소설을 읽던 시절에는, 소설을 읽고 나면 기계적으로 제일 먼저 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찾고 스토리를 사건 별로 분석하고 인물을 파악하곤 했다. 우리는 소설의 구성 요소가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 배웠고 소설의 3요소가 주제, 구성, 문체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했으며,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도덕적이고 정의에 가까울수록 혹은 비판적일수록 좋은 소설인 양 배워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런 고정관념을 깨부시고 싶었던 것 같다.
저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보기’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거나 비판 의식을 고취시키거나 작품이 전달하려는 주제를 파악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저 탐미하게 만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묘사가 몽환적이고 모호하게 이루어져서 독자들에게 한편의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나는 생각했다. 소설의 구성 요소 같은 건 누가 정했고, 소설의 3요소가 갖추어져야만 소설이라고 보는 시각은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끊임없이 갈구해도 권태롭지 않은 관능적 쾌락에의 탐닉이야 말로 소설이 갖추어야할 요소가 아닐까.
이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꿈도 없는 잠, 그저 피곤하기만 한 잠, 재미없는 잠이다. 그가 살고 있는 나라,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도 같은 그런 죽어 있는 잠이다’라고. 이 말이 나는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계속 생각이 났다.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개성과 관능적 쾌락을 억압하고 금기시하는 재미없고 죽어 있는 세계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이런 작품이 의미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