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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장마로 오다』는 장마를 타고 벼락처럼 찾아온 첫사랑을 위해 온갖 갈등을 이겨내며 스스로를 놓지 않았던 한 남자의 마음을 인간 본연의 그리움으로 녹여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지나간 조상들의 아픔까지 거슬러 말하고 있으나, 결코 반목의 시절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느 순간 맞닥뜨렸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며,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의 또 다른 치유법이다.

 

첫사랑 앞에 가로막힌 보이지 않는 갈등과 그리움의 길.

사랑의 계단은 한없이 멀고 높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어린 시절 가슴을 파고든 첫사랑의 감정을 그리움과 순수함으로 이겨낸 한 남자가 있다. 사랑의 감정을 품은 뒤 속속 밝혀지는 고조할아버지부터 맺어졌던 굴곡의 대물림, 식민지를 함께했던 할아버지들의 신의, 징용과 동란에 휩쓸려 치열했던 아버지들, 결국에는 지주와 피해자의 자손인 그녀와 머슴과 가해자의 자손으로 밝혀진 나!

   너무도 엄청난 두 집안의 과거사에 맞닥뜨려야 했던 혹독하고 모진 사랑,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는 나날을 감내하며 사랑을 구걸하다시피 한 구애의 발자국,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겪어야 했던 치열한 사랑의 여정…….

당신은 가슴 시린 사랑의 치열함을 간직하고 있는가. 마음껏 아파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어 인생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찬란했던 시절이 있는가.

   굴곡 많은 시대의 빛바랬지만 결코 무시해버릴 수 없는 뼈아픈 추억, 평생 아물지 않을 상처를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이들의 애환, 격랑의 시대를 살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흩어져버린 무수한 인생의 모습, 그중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의 삶이 아닌 것이 있었을까.

   이 작품은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순간에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한 남자의 마음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며 애달픈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또한 누구도 비껴갈 수 없었던 아픈 첫사랑의 세월을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보게 하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기억까지 아련하게 더듬어보게 한다.

 

                     도서출판 청어 http://www.chungeobook.com

                                        등 록 : 1999년 5월 3일(제22-1541호)

                                        주 소 :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99-10 봉양빌딩 2층

                                        대표전화 : 586-0477

                                        신국판 328면

                                        정 가 : 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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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나에게 늦은 소설쓰기란 추억을 꿰매는 초라한 출발에서 시작되었다. 거울을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고, 내면의 얼룩진 상처와 부서진 조각을 치유하며 극복하는 작업이었다. 첫 장편소설 『끝섬-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움』이 꿈을 기억해야 하는 자조의 할큄이었다면, 『사랑, 장마로 오다』는 자각을 실현하고자 하는 치유의 거울이었다. 또한 상처가 다시 덧나도 좋고, 딱지가 떨어져 지혈되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나만이 볼 수 있는 굴절된 양심을 어루만지고 싶은 작업들이었다.

 

   무릇 중년에 반추하는 유년의 추억은 아름다운 기억만이 착상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잊도록 진화된 인간의 뇌 어느 한구석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무례하게 스스로의 거울을 비추어보며 오랜 세월 봉합시켜 놓았던 상처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집착했다. 기억은 점점 더 명료해졌고, 아픔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돋았다. 기억 속의 아픔은 타인의 아픔이기 이전에 나의 아픔이었고, 어쩌면 내가 치유해야 할 아픔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누군가에게 울고 거듭나기를 소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울고 거듭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들, 감히 또 다른 치유를 구실로 긁적거리려니 내 추억들은 비로소 두려움으로 아우성이다. 아우성치는 미지의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나는 참으로 나약하고, 심장의 깊이는 속절없이 야위어 있다. 더불어 담겨져 있는 그릇의 크기는 보잘것없고, 뜨거운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다. 필부의 가야 할 걸음에 보이지 않는 길은 멀고, 끝은 자욱한 이유이다.

 

   그래서 오늘, 용기를 북돋는 두 번째 장편소설의 채찍에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움츠려진다. 민망함을 위장하려는 부끄러운 마음조차도 기둥 뒤로 빠끔히 숨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과분한 축복인가 싶다. 어디에 숨고, 어디로 도망하여 잠수라도 해야 하는가, 곰곰한 생각이 나를 또 불현듯 일으켜 세우기를 외람되게 갈망해본다. 그 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라도 가야 하고, 가서 행복한, 또 다른 담금질 같은 운명의 길이기에…….

 

   두려움에 나약하고, 심장이 야위었고, 그릇이 보잘것없고,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는 나에게…… 늘 용기를 주는 분들, 세상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고마운 분들, 그리고 아내와 아들과 가족들에게, 여전히 졸필인 이 책을 바친다.

 

                                                                              2013년     봄

                                                                             이         설

  *                                                         *

                                                                                                                                 *

 

 

            *                            <차  례>

 

                                                        사랑, 장마로 오다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첫키스의 향기

                                                        철길이 닿는 바다

                                                        검은 그림자

                                                        굴레의 사슬

                                                        연못둥지과수원

                                                        안개 속의 덫

                                                        뒤틀리는 운명들

                                                        색깔이 다른 피

                                                        성(城)을 떠난 사막

                                                        장남들의 곡예비행

                                                        보이지 않는 길

                                                        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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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사랑, 장마로 오다

 

 

 

「사랑, 장마로 오다」

  지독한 장마가 전국을 강타한 여름, 평화롭던 충주의 시골 마을에 강물이 치밀고 역류했다. 집이 침수되고 마을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떠내려가는 지붕에 매달려 울부짖던 위험한 할아버지를 구한 동갑내기 조정라를 부축하다가, 등 뒤에서 엉겁결에 가슴을 만지게 된 16살짜리 ‘나’는 평소 선망하던 그녀에게 벼락같은 사랑을 품게 되었다.

  장마에 집이 완전히 휩쓸려 애달프게 된 정라의 천막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겼고, 어느 날 천막 안을 훔쳐보다가 들켜버려 가슴 사건의 비밀 유지를 강요받았다. 그녀가 서울로 이사할지도 모른다는 풍문에 신진수를 비롯한 소위 ‘무대뽀삼형제’와의 싸움에서 이겼고, 미친 아저씨가 사는 공터로 끌고 갔다. 적당한 공포 분위기를 앞세워 풋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 황홀한 감정을 확인하게 되었다.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정라의 집에 비록 폐암이라는 시한부의 몸이었지만 한국동란 중 행방불명되었던 정라 큰아버지가 20여 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는 반가운 일이 발생했다. 정라 큰아버지의 소식에 곧바로 마을은 술렁거렸다. 폐에 물이 찬 정라 할아버지가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서 살갗이 거뭇거뭇 매를 맞은 사람처럼 변색되어 가는 이유를 확인한 정라 큰아버지의 분노가 상갓집을 발칵 뒤집었다.

  천막을 기웃거리며 정라를 염탐하려던 나는 정라 큰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나타나 보복하겠다며 울부짖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마을 사내들의 만류로 보복에 실패한 정라 큰아버지의 통곡을 보게 된 와중에도 하얀 소복이 오히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정라에게 매료당하고 말았다.

  차일피일 기회만 엿보던 사이 연락처도 없이 정라는 서울로 이사했고, 하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있었던 소동은 거짓말처럼 수면으로 가라앉아 너무도 빠르게 잊혀갔다.

  그러던 어느 하교 날, 하천 둑에서 유령처럼 정라를 만나 고등학교 시험 전에 큰집에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아득한 그리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폐암으로 석방된 정라 큰아버지는 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기거하는 큰집 장례식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는 기회를 얻어 정라를 만나, 서로 “서울에서 합격하면 연락해.”라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했다. 일순간 뜻밖의 정전기에 소스라쳤고, 그 충격으로 정라가 바가지를 떨어뜨렸다. 더욱이 바가지를 주우려던 그녀의 가슴골을 훔쳐보게 되면서 나는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첫 키스의 향기」

  정라 생각이 앞을 가려 성적이 속절없이 추락한 나는 서울의 야간고등학교에 겨우 들어갔고, 그녀는 우수한 학교에 합격했다. 그녀가 이사한 우이동 주소를 확보해 챙기고, 이문동 이모네 집으로 상경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라를 놀라게 하려고 우이동 주소지에 잠복한 끝에 마침내 그녀를 만났고, 우정과 첫사랑을 탑처럼 쌓아갔다.

  생각에도 없는 미팅에 대타로 엮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미팅을 주관한 녀석과 연락이 두절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엉뚱하게 우이동계곡으로 미팅 장소가 바뀌었고, 계곡에 도착해서는 녀석이 가지고 오기로 한 쌀이 없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꾀를 내어 쌀을 얻으러 정라를 찾아갔다. 부모님이 외출하고 둘만이 있는 집에서 쌀을 봉투에 옮겨 담으려다가 선풍기 바람에 흩어진 쌀 먼지가 그만 그녀의 눈에 들어가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고였고, 깔깔한 눈을 불어달라며 그녀가 얼굴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당황한 나는 눈을 불면서도 연신 그녀의 입술을 훔쳐보다가 용기를 내어 기습적인 키스를 감행했다. 그녀는 주먹으로 암팡지게 가슴을 치며 키스도 비밀로 하라는 앙증한 애교를 부렸다.

 

「철길이 닿는 바다」

  여름방학을 기하여 고향에 머무는 동안, 신진수가 찾아와 무대뽀삼형제와 망상해수욕장으로의 여행을 제의했다. 다양한 추억과 사건을 경험한 바닷가의 마지막 밤, 해변의 별빛에 취하여 무대뽀삼형제 중 음영석에게 정라와의 첫사랑 이야기를 발설하고 말았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영석은 정라 집안과 우리 집안의 얽힌 사건을 알려주었다. 무릇 정라 큰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도끼 사건의 전말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좌익과 우익의 소용돌이에 그녀와 나와 진수의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역동적이었던 정라 큰아버지는 좌익단체에 가담하여 마을 곳곳을 누볐다. 우익이었던 아버지와 진수 아버지는 정라 큰아버지와 격돌했다.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정라 큰아버지는 자취를 감추고 행방불명되었다. 종전 후 정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마을 공회당에 끌려와 우익청년들에게 보복을 당했다. 집단폭행의 보복은 치명적이어서 실신한 부자를 가마니로 대충 덮어 공회당 귀퉁이에 방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누군가가 야음을 틈타 실신한 부자를 피신시켜 겨우 생명을 구했다.

  사건은 봉합된 채 20여 년이 흘렀고, 정라 큰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할아버지의 주검이 변색되면서 다시 불거진 사건이었다. 하물며 미친 아저씨가 정라 큰아버지의 똘마니였고, 공회당의 폭행사건으로 뇌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전해 듣게 되었다.

 

「검은 그림자」

  해수욕장에서 돌아온 뒤풀이로 하천 둑에서 우정을 과시하던 중, 신진수의 집에 불이 났다.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재빠르게 도망치는 두 명의 청년을 목격한다. 다행히 불은 잡혔고, 방화라는 증언이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나는 함구했다. 헛소리를 해대는 미친 아저씨가 범인으로 몰렸으나 입증하지는 못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진수의 여동생 신진영이 ‘나’의 형 석우의 가슴팍에 안겨 공포를 달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나는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튿날 미친 아저씨가 논바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라를 향한 그리운 마음에 우이동 공원으로 쫓아갔다.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의 오빠 정호가 다급하게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행동을 목격했다. 정라에게 정호가 데모를 하다가 고향의 큰집으로 피신한 것을 전해 듣게 되면서 그가 혹시 방화범이 아닐까 하는 것과 미친 아저씨의 죽음과 연루된 의구심이 강하게 솟구쳤다.

  정라가 집으로 쫓아가고,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혼자 골목을 내려올 즈음 도망치듯 뛰어 내려오는 정호와 울며 뒤따라오는 정라와 맞닥뜨렸다. 공교롭게도 정호의 길을 막아선 꼴이 되었을 때 눈치 빠른 정호에게 정라와 사귀는 것이 들켜버렸다. 정호는 나에게 서로 원수지간임을 알고도 사귀느냐는 것을 힐책하며 차후 근접을 못하게 못을 박았고, 정라에게 왜 두 집안이 원수지간인지 확인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쫓기는 몸으로 강제 입영의 길로 떠났다.

 

「굴레의 사슬」

  정라가 소식도 없이 이사 간 사실을 알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행적을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형을 붙잡고 정라와 나의 집이 원수지간이 된 좀 더 정확한 과거사를 캐물었다.

  70여 년 전, 양반집 지주였던 정라 고조부와 머슴들인 우리 고조부와 진수 고조부가 있었다.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마을이 모조리 불태워지고, 충격을 받고 앓던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라 할아버지는 고작 네 살이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토지마저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친일파가 어린 할아버지의 지장을 받아가면서 일순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멸문의 길로 추락한 정라 할아버지는 고향을 버려야 했다.

  할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객지인 충주로 나올 때 머슴의 후손이었던 진수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가 신의를 받들었다. 훗날, 정라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보국대에 끌려갔다. 그곳 다리 건설 현장에서 교각의 옹벽이 무너져 급류에 휩쓸려간 우리 아버지를 정라 아버지가 구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모두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마르크스에 심취한 정라 큰아버지의 좌익과 마을 구장을 주축으로 한 우익이 생겨났다. 전쟁이 터지자 정라 큰아버지는 행적을 감추었고, 마을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 휴전이 되었지만 정라 큰아버지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는 공회당에서의 집단폭행 사건이 터졌고, 인사불성이 된 정라 할아버지와 정라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가 야음을 틈타 몰래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 석우로부터 얽히고설킨 조상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오랜 동안 열병을 앓았다. 더구나 석우가 신진영의 몸에 손을 댔다는 소문으로 마을을 떠나 연못둥지과수원으로 이사하게 되는 일련의 사태가 터졌다. 머슴의 큰아들인 형은 머슴과 가해자의 딸인 진영을, 머슴의 작은아들인 나는 지주와 피해자의 딸 정라를 사랑했다. 하물며 진영은 정라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였다.

  정라와의 연락은 요원한 채 희망조차 없이 3학년이 되던 어느 날, 그녀의 학교 앞에서 잠복하면 된다는 묘안을 비로소 생각해냈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 나는 며칠째가 되어서야 겨우 정라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신내동으로 이사한 사실을 확인하고, 조상들의 과거로 촉발된 반목임을 알게 되었어도 애원하듯 설득하여 겨우 편지 연락만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점점 비참해지는 집안 사정으로 대학마저 포기하게 된 그녀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훗날 결혼을 운운하는 편지로 근접조차 차단당하는 결별의 길로 다시 들어서고 말았다.

 

「연못둥지과수원」

  나는 공부를 게을리한 탓으로 대학을 포기하여 낙향했고, 정라를 향한 그리움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과수원 일에 관심 없는 형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던 어느 날, 동갑내기 고종사촌 여동생이 혜진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과수원에 찾아왔다. 까칠한 정라에 비해 요염하고 상냥한 혜진에게 은근히 끌리는 감정을 느낄 즈음, 혜진이 나와의 데이트를 목적으로 방문한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일주일 후, 군 입대를 자원했다는 신진수가 무대뽀삼형제와 예고 없이 찾아와 월악산으로 버섯을 따러 간 탓에 혜진의 방문 맞이를 펑크내고 말았다. 마침 군에서 휴가 나온 석우가 혜진을 대신 응대해주었다는 소식과, 함께 동행한 신진영을 보고 석우의 교제가 공식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석우가 귀대한 다음 날, 나는 정라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정라와 편지를 주고받던 신내동 주소에서 온종일 잠복하던 중, 그녀의 할머니가 막 돌아가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되돌렸다.

  이튿날 다시 정라의 집으로 향하던 중, 문병 왔다가 돌아가던 정라의 고향 동창과 언덕에서 맞닥뜨렸다. 동창에게서, 그동안 할머니의 치매로 인해 힘겨운 날들을 감내했던 정라의 참혹한 가정 현실을 듣고, 가슴이 에이고 부끄러워 정라 앞에 나서기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 다행히 동창에게 이끌려 집으로 올라가 적잖이 놀라는 정라를 잠깐 본 사이, 정호에게 발각되어 접근조차 못하도록 차단을 당하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정라가 뒤쫓아 와, 마음이 복잡하고 너무 힘들어서 연락을 못했다며 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한참을 보듬고 훌쩍이는 재회에 성공했다.

  정라는 다시 편지를 과수원으로 보내며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겨울, 폭설 같은 첫눈이 온 날, 그녀가 느닷없이 연못둥지과수원에 찾아왔다. 과수원을 한 바퀴 구경하며 강제 입영된 정호가 사고를 쳐 결국 말뚝까지 박게 되었다는 언짢은 가족 소식을 전하면서도, 과수원의 풍광에 매료되어 감탄하는 그녀의 무구함은 내 마음을 한층 달뜨게 하였다.

  나름 어머니의 환대를 받고, 유년의 추억이 깃든 탄금대로 데이트를 떠났다. 소복하고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며 소박한 유년의 추억을 반추했다. 패전한 신립 장군이 투신했다는 열두대에 올라 고향의 정취에 흠뻑 취한 데이트였다.

   상경할 고속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정라의 손을 잡고 끌다가 와락 미끄러지며 꼬꾸라지는 사태가 터졌다. 미동도 할 수 없는 아찔한 공포가 스친 순간,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누가 작심하고 저지른 입맞춤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고, 거친 숨소리에 섞인 입술의 감촉에 마취되었다.

 

「안개 속의 덫」

  일 년 동안 정라는 두 차례 과수원을 방문했고, 나는 입대를 했다. 8주의 보병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골짜기 보병대대 차트병으로 배속되어 상황실의 모든 자료를 재정비했고, 팀스피리트 훈련에 차출되었다. 훈련캠프에서 혹사당한 몸을 추스르려 의무막사에 쓰러져 있던 중, 부상병을 이끌고 온 신진수와 운명처럼 맞닥뜨렸다.

  진수와의 대화에서 정호가 같은 사단 교육대 장기하사이며, 유독 자신을 갈구고, 진수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 정호로 의심된다는 푸념을 들었다. 정호와 진수, 정라와 나, 석우와 진영…… 철저하게 맞물고 돌아가는 엉킴에 나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외면했다.

  첫 휴가를 나와 정라에게 줄 정표로 금반지 하나를 사서 상경했다. 그러나 아직 어려 받을 수 없다는 핑계로 거절당하고, 더구나 실쭉하여 술에 만취되어 강제로 입맞춤을 시도하려다가 저지당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는 그녀가 이모 집까지 데려다 준 사실을 알고 후회했으나, 통화도 하지 못한 채 귀대하고 말았다.

  진정으로 사과하면서, 면회라도 왔으면 하고 종용하는 애원의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 그러던 차에 거짓말처럼 그녀가 부대로 면회를 왔다. 하물며 외출을 얻어 부대를 벗어나 낙산해수욕장까지 구경하게 되는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정라는 속초에서 곧바로 상경하지 않고, 굳이 부대가 있는 소도시에서 버스를 타겠노라며 다시 부대 근처까지 동행해주었다. 그러나 동절기와 하절기의 버스시간 수정 착오로 차를 놓치게 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민 끝에 부대 앞 구멍가게에 그녀를 맡기고 외박을 신청했으나 인근 부대의 삼청교육대 폭동으로 비상이 걸려 나오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상이 종료된 이튿날, 다시 외출을 나와 밤을 꼬박 밝혀 하루 사이에 퀭해진 그녀를 못내 아쉬워하며 마중했다.

 

「뒤틀리는 운명들」

  상병이 된 어느 날, 맹장염에 걸려 군단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 위로를 명분으로 석우가 면회를 왔다. 석우는 이미 아이를 가진 신진영과의 구체적인 결혼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신진수가 총으로 자해를 해 불명예스러운 제대를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진수는 삼청교육대 교관으로 있었는데,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하다가 저지른 자해후유증으로 턱이 날아가 너덜거리고 혀가 마모되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정라가 면회를 왔을 때 걸린 비상과, 사건의 배후에 정호가 연관되었다는 의구심을 석우 앞에서 철저히 함구해야 했다.

  서둘러 퇴원을 자청하고 위로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진수를 찾아갔다. 조준점이 없는 단순한 시선, 어떤 물체의 움직임에도 반응이 없는 무정형의 눈동자, 일그러지고 떨어져나가 너덜대는 턱관절의 언저리…… 오지 말았어야 할 자리에 온 것 같아 눈물에 앞서 소름이 돋았다.

  그가 쓰고 내가 말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의사소통은 빨리 죽고 싶다는 마음과, 진수의 집에 불을 지른 범인이 정호 같다는 짐작과, 나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과, 형수가 될 신진영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였다.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돌아 나오는 길에 진영과 마주쳤다. 단순한 인사만으로 헤어진 진영을 뒤로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정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사기혐의에 연루되어 유치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정라를 만나지 못한 채 귀대했다. 시간이 흘러 제대 하루 전, 작전중사가 만취한 나를 선술집으로 끌고 나가 여자를 넣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다행히 동정을 지켰지만 처음 알몸으로 여자와 함께 잔 수치심에 괴로웠다. 정라에게 스스로 전화도 하지 못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안 석우의 결혼식이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식장에 나타난 진수를 겨우 찾았으나 손을 맞잡은 것 외에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피로연에서 진수가 혀에 설암에 생겨 시한부를 통보받았다는 무대뽀들의 말을 듣고는 대책 없이 가슴이 조여 왔다.

  신혼부부가 여행을 떠난 이튿날, 진수는 결국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분명 자살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심증만으로 사건을 발설한다는 것이 위험한 발상이고, 결과를 알게 된다손 치더라도 무의미하다는 판단으로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사돈이 된 아버지는 진수를 연못둥지과수원에 묻을 것을 제의했고, 다음 날 진수는 곧바로 과수원에 묻혔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진영의 슬픔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세월 앞에 탈선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희석시킨 나는 정라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 하지만 이미 혼기가 차오른 정라가 낯선 사내와 선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질투심이 폭발하여 폭음과 집착을 부렸다. “이런 게, 고작 이런 게 니 사랑이었어?” 맹랑하게 토라져 밖으로 나가는 정라를 잡지 못한 나의 궁색한 사랑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색깔이 다른 피」

  정라의 노여움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나 또한 가축사육을 비롯한 온갖 일을 벌여놓고도 나날이 되풀이되는 석우의 태만에 갈수록 염증이 높아만 갔다. 결국 석우와 충돌했고, 강력한 항의를 하다가 뺨을 맞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석우는 집을 뛰쳐나갔고, 그가 돌아오지 않는 밤을 뒤척이다가 된통 열이 오른 조카를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진영을 자전거에 태워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꼴이 되었다. 다행히 경기까지 하던 조카의 열은 잦아졌고, 진영이 심증이 간다는 연못둥지술집으로 석우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접대부가 된 혜진과 술집에서 맞닥뜨렸다. 혜진은 그녀를 바람맞힌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는 푸념을 쏟아내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월악산으로 버섯을 따러 간 사이 과수원을 방문했을 때 맞상대를 해준 석우를 유혹했을 혜진을 무시했고, 술에 만신창이가 된 석우를 병원으로 데려다주고는 내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배변을 흩뿌릴 정도로 지독한 노환을 겪고 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까지 감내해야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는 아예 과수원을 떠나 서울로의 상경을 결심했다. 그 사이 혜진이 타락한 연유가 궁금하여 동갑내기 사촌을 만났지만, 제대 전날 만났던 술집여자와 사연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동정심을 접었다. 마침내 나는 연못둥지과수원을 떠나 상경했다.

 

「성(城)을 떠난 사막」

  서울로 상경한 나는 곧바로 정라를 찾아가 잠복한 끝에 때마침 외출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에게 상경 사실을 알리고는, 당시에는 술에 취해서 집착을 부렸다며 진정으로 사과하는 자세를 보였다. 나를 조금은 용서한 그녀는 약속이 있다며 겨우 이튿날의 데이트를 허락했다.

  정라와의 데이트,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정호의 제대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가족의 성화에 떠밀려 또 선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솟구치는 질투를 참아내는 인내를 보였다.

  저녁을 마치고 정라를 배웅해주던 길에 대학 구내식당의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그녀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어머니는 의아해하며 서로 연애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였다. 그렇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내 욕심과는 달리, 정라는 단순한 시골 동창이라서 만났다는 말을 굳이 못 박았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내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의심을 접었다.

  쉽사리 취직이 안 되어 고심하던 터에 동창에게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다이어리를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창피하고 알량했지만 정라에게 취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데이트를 신청했으나 제대하여 외국계회사에 취직한 정호와 함께 온 가족이 고향 선산에 가기로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비로소 정호의 전면적인 등장의 신호탄이었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열심히 했다. 특근이 결정된 크리스마스이브에 잠깐 정라를 만나 스카프를 선물했다. 그녀에게서 정호의 정치적 소신에 대한 불만과 점점 큰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에 대한 푸념을 들었다. 정호는 의외로 자신을 학대하는 일을 일삼았는데, 술에 만신창이가 되어 차로 한가운데 널브러져 즉사할 뻔했던 일까지 저질렀다며 하소연까지 했다. 정라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음을 공장장에게 통보받았다.

 

「장남들의 곡예비행」

  아르바이트 일을 마무리하고 정식 직원으로 출근하기 전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조카에게 줄 종합선물세트까지 사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과수원을 찾았으나 분위기는 의외로 썰렁했다. 진영의 입을 통하여 들은 사건의 전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석우가 시비에 휩쓸려 상대의 이빨을 부러뜨려 소송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합의금 마련을 위해 키우던 가축을 모두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폭행 사건의 진위에는 혜진과 연못둥지술집이 개입되어 있었다.

  때마침 피해자와 합의를 매듭짓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석우에 관한 두 가지 비밀 이야기를 들었다. 장녀가 있었는데 어릴 때 죽어 석우가 장남이 아니며, 갓난아이 때 큰 사고가 있어 후유증으로 어떤 일이든 벌여만놓고 방관하는 모양이라는 회한이었다. 금시초문의 과거사였다.

  그날 밤, 석우는 돌아오지 않은 채 마루에서 요강에 소변을 보던 조카가 부엉이 소리에 놀라 나자빠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연못둥지과수원이 폐가로 가는 여러 징조들을 아버지로부터 비로소 들었다. 진수 무덤을 과수원에 잘못 썼다는 아버지의 후회, 한밤에 전 서방을 부르는 목소리에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 걸어 나갔던 석우, 4대를 내리 출산일에 죽은 어미 개……. 그 밤, 마침내 술 취한 석우와 함께 과수원까지 혜진이 찾아왔다. 혜진은 석우가 너무 취해서 동행했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진영과 한바탕 충돌했다. 혜진과 진영이 동시에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진영은 새벽에 조카와 함께 가출해버렸다.

  나는 술집을 찾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석우를 놓아주라는 엄포를 남겼고, 처음 혜진을 과수원으로 끌고 온 사촌을 만나 혜진을 설득해서 황당한 관계를 중단시키라는 강력한 주문을 했다. 다행히 진영은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추락의 길로 점철된 연못둥지과수원을 두고 상경하여 정라에게 더욱 집착했다. 

  진영의 아이는 유산되었다. 혜진은 중절수술로 아이의 생명을 끊어냈고, 석우는 시내에 두유대리점을 내는 일을 저질렀으며, 그의 술버릇은 날로 심해진다는 소식이 서울로 속속 당도했다. 그러던 중 무작정 과수원으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새벽 버스로 고향으로 향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과수원에 도착할 즈음, 개울에 빠져 인사불성이 된 석우를 리어카에 태우려 텀벙거리며 질퍽이는 진영과 맞닥뜨렸다. 진흙탕에서 실성한 징조를 보이는 진영을 발견하고 둘을 리어카에 싣고 과수원으로 끌고 오던 길에, 뒤따라 들어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석우가 낸 두유대리점이 망하고, 혜진이 있는 술집에서 놀음까지 벌여 과수원이 날아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하물며 석우는 혼자 죽겠다고 술을 먹고 연못으로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것을 혜진에 소리쳐 겨우 살리기까지 했다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다며, 과수원에 귀신이 씌었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사과를 판 약간의 돈으로 우선 서울에 방 한 칸의 전세라도 얻어놓으라는 이유 때문에 연락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때마침 소나기가 뽀얀 물안개를 뿜어내어, 정라가 그토록 살고 싶다며 감탄하던 연못둥지과수원이 스모그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온 가족의 상경 길에 석우와 진영은 없었다. 석우는 놀음으로 사기를 친 패거리들과 해결할 일이 남았다며 충주에 잔류했고, 비 오는 날 진수의 무덤가에서 웃고 울고 손뼉을 치며 끝내 실성한 진영은 친정에 넘겨졌다. 하물며 진영은 혜진의 술집에 불을 질렀다는 신고로 경찰에 잡혀갔으나 아버지의 노력으로 풀려나왔다. 반파된 술집은 철거되어 동네에서는 앓던 이가 빠졌다며 반겼고, 혜진은 종적을 감추어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정라의 집안 또한 편하지만은 않았다. 정호가 술에 취해 동료와 넘어지면서 뇌출혈이 진행되어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문병을 결심했다. 병원에서 마주친 정호, 그는 의외로 예전의 독기가 꺾여 있었다. 정호와의 독대에서 진수 집에 불을 지른 당사자가 정호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가 그렇게 변한 배경에는 빨갱이라고 하면서 자행되었던 석우로부터의 집단폭행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호는 진수가 그렇게 된 것을 후회하는 고뇌와, 무식하지만 우직했던 진수의 회한으로 자괴심까지 노출시켰지만, 나는 가장 큰 걸림돌로 떠오른 형 석우를 원망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길」

  설날 이후, 결혼을 종용하는 집안의 성화에 밀린 정라가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며 나의 방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과수원에 일어났던 그간의 내역을 처음으로 밝히고는 이제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죄인처럼 머리를 떨어뜨렸다.

  정라의 집 방문은 공교롭게도 회사의 야유회 날과 겹친 시련의 시험대였다. 어머니의 엉뚱한 연락으로 모든 친척이 모인 줄도 모르고 야유회 차림 그대로 찾아간 후줄근한 모양새부터가 촌극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같은 고향 사람이고 오랫동안 사귀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물론 정호와 하물며 큰아버지의 유복자까지도 이유를 다는 반대는 없었다. 아마도 정라의 결정 앞에 반대는 무의미하리라는 현실을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린 결과인 듯싶었다.

  그러나 벽은 엉뚱한 곳에서 돌출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석우와 진영의 결혼 사실을 듣고 놀라며 강력한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원수이며 나이도 어린 신진영의 아랫동서로 보낼 수 없다는, 딸 가진 어머니의 근심이 이유였다.

  정라는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비례하여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반전을 보였다.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일까, 그녀는 우리 집까지 밀고 들어오는 용단을 단행했다. 정라는 어머니의 당연한 환대를 받았다. 물론 정라 아버지와 서로의 목숨을 주고받은 아버지의 호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와 중랑천 둑을 걸었다. 그러나 기껏 자리를 피해 피신했던 석우와 조카, 진영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병이 다소 완화되어 상경한 진영은 그녀도 알아보지 못하고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반응이었다. 정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의문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여, 진영이 넋을 놓은 경위와 과정을 가감 없이 풀어놓았다. 정라는 실성까지 한 진영을 보고 적잖이 놀라서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진영의 실성까지 알게 된 정라의 가족은 반대 입장으로 선회하였고, 정라 어머니는 더더욱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빈곤의 대물림을 원치 않으려는 의지에, 실성한 원수 집안의 진영이라는 장벽이 덧대어졌다. 그 와중에 여동생 양희가 중대 선언을 했다. 평소 마음에 두었던 서울 사람을 만났느니 빚이라도 얻어서 결혼을 강행하겠다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가족의 도리로 예식 비용에 보태기 위해 나는 매달 일정금액을 제하는 조건으로 저당 잡힌 마이너스 인생의 길로 더욱 추락했다. 내게는 봉급을 잘라 갚아야 하는 채무만이 남겨졌다.

  여름은 더디게 흐르고, 정라는 나를 두고 버티는 한계점이 좁아지고 있었다. 결국 용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끝까지 소유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으니 이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를 만나 마침내 이별할 것을 통보했다. 그녀는 내 가슴팍에 눈물을 묻었다.

  그녀의 제의로 이별 연습을 위해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애잔한 바다에서 그녀가 싸온 김밥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훌훌 날아서 자유롭게 떠나라는 이별 이야기를 거듭 꺼낸 사람은 나였고, 정라는 그동안 자신을 안고 싶었던 생각은 없었냐는 당황스러운 물음까지 던졌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취하기 위해 억지로 술을 쏟아 부었다. 폭음을 하면서, 빈털터리인 나를 버리고 풍족한 미래를 선택할 것을 거듭 종용하며 이별을 강요했다. 영원한 이별은 공식화되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다가 꼬꾸라졌다. 나 또한 꼬꾸라진 그녀 옆에 널브러져 깊은 암흑으로 스러져버렸다.

 

「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

  눈을 뜬 새벽, 여전히 풀풀거리며 알코올의 잔량을 밖으로 뿜어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정라를 선택하기로 나는 비로소 굳게 결심했다. 고조할아버지부터 맺어졌던 굴곡의 대물림, 식민지를 함께했던 할아버지들의 신의, 징용과 동란에 휩쓸려 치열했던 아버지들, 그리고 그녀와 나!

  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아니하면 날지 못한다는 비익조(比翼鳥)같은 운명,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서 하나의 몸이 된 연리지(連理枝)같은 운명.

  마침내 하나가 된 서로의 몸을 통해 과거의 사슬과 아픔의 상처는 걷히고, 화해와 용서와 미래의 희망이 새살처럼 돋았다. 긴 어둠을 밀어낸 먼동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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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끝        섬

                                  EDGE ISLAND

 

소몰이 소년




  얼음 끝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바람이 쏜살같이 얼굴로 달려왔다. 바람은 한바탕 내 볼따구니를 할퀴며 어깨를 타고 등 뒤로 미끄러졌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바람은 흙먼지를 안고 뒹굴며 땅바닥을 핥아 유린했다. 오늘은 황소마저 게걸스럽게 울지 않았다. 놈이 내뿜는 콧김이 허공에 뒹굴었다. 콧김은 곧 뿌옇게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벙어리장갑을 꼈어도 고삐 잡은 손은 시리고 아렸다. 손끝은 이미 얼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서 걸어가는 민기는 우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행인들은 코트 깃을 끌어올려 귀밑까지 덮고는 바삐 걸었다. 그들의 움츠러진 어깨와 총총걸음이 수년 만에 찾아온 추위를 실감케 했다. 충주 우시장으로 연결되는 길로 들어서니 소전(牛市場)으로 향하는 소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어미와 생이별한 송아지의 애절한 울음소리와 놀부 심통 같은 황소의 울음소리가 제법 우시장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허리를 젖혀 등을 곧게 폈다.

  소전 가는 길목에 있는 국밥집에서 해장국 끓는 냄새가 스미어 나와 코끝에 닿았다. 반쯤 열린 미닫이문으로 주릅(우시장에서 소개를 붙여주고 구전을 받는 중개인)들과 사내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다. 리어카 엿장수는 여느 때처럼 왼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양말과 나일론 점퍼를 떨이하는 낯익은 보따리상인도 우리를 알아보고는 눈웃음을 보냈다.

  우시장은 늘 시끌벅적하고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추운 날씨에도 닷새 만에 열리는 장날이라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소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전쟁나팔 소리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비로소 소전 안으로 소를 몰았다. 소장수는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소를 넘겨받은 소장수는 고삐를 말뚝에 맸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손바닥을 마주쳐 먼지를 털었다.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훑어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소들의 울음소리와 사내들이 한데 어울려 왁자지껄한 그곳에서 열네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기라도 하듯…….

 

 

   내가 열네 살이던 그해 겨울엔 눈이 많이 내렸다. 개학을 앞두고 사흘 동안 전국적으로 폭설이 쏟아졌다. 라디오에서는 수십 년만의 폭설로 일부 학교에서는 개학이 늦춰질 것이라는 보도를 냈다. 그날 아버지는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한 채 폭설을 뚫고 소전에서 돌아왔다. 그리고는 쇳소리가 나는 딸꾹질을 하며 절규하듯 이야기했다.

   “노수야, 애빈 백정 같은 쇠장수여. 니 눔은 그 가생이두 가지 말아야 혀어. 쇠장수두 올가미가 있어야 하는 벱이여. 니 눔은 애비처럼 쇠가죽 먹구 살아선 안 되어. 니 눔은 면서기래두 혀야 헌단 말여. 무슨 일이 있어두, 니 대루 가야 내 꼴이 안 나는 게여!”

  아버지는 숨소리를 짧게 끊어내며 힘겹게 토해냈다.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은 4년 전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 부터였다. 어머니의 가출 이후부터 거의 매일 술로 식사를 대신했던 아버지는 점점 야위었고, 몰골은 병색이 완연하게 보일 정도로 초췌해졌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단지 찾지 않는 것이 좋으니 찾지 말라는 말만 강조했다.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커다란 원망만이 가득 배어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잠든 사이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일체의 소식을 남기지 않고 나 혼자만 남겨둔 채 영원히 떠나버렸다. 나에게는 어머니를 찾아갈 아무런 단서도 없었으므로 세상에 내던져진 고아가 된 셈이었다. 나는 슬픔이 북받치고 눈물이 앞을 가려 주위를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려진 눈앞에 아버지는 웅크리고 누운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넋 나간 채 하루를 보냈다.

  생전의 아버지 친구인 소장수 몇몇과 마을 사람들이 장례는 3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초라하게 마련된 빈소에 바위처럼 앉아 그저 흘러내리는 초의 눈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냄새는 오랫동안 코끝을 맴돌았다. 코끝이 매웠다.

  상여 나가는 날엔 잠시 그쳤던 눈이 또 내렸다. 메기꾼들의 종소리에 맞춰 상여가 일어서자 나는 받침대에 손톱자국을 만들고 눈 위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하늘 끝에서는 주먹만 한 눈송이가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눈송이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입과 얼굴에 마구 내려앉아 눈물로 녹아버렸다. 녹아내린 눈물과 함께 어머니도 아버지도 녹아내렸다.

   그날 뒷산에는 없던 무덤이 하나 생겼다. 친구들의 발에 심장이 밟히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눌리고 눌려……. 무덤은 생전의 아버지처럼 작고 보잘것없이 초라했다. 봉분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저 눈으로 하얗게 덮여가는 아버지의 무덤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제기럴, 눈 한번 찢어지게 퍼붓는구먼.”

  안장을 끝내고 무덤가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아버지의 친구들 중 누군가가 투덜댔다. 그러나 막걸리만 마실 뿐 그 누구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 한마디라도 덧붙인다면 곧 흐느낌으로 이어질 듯한 음산한 분위기였다. 참으로 찢어지게 침통하고 을씨년스러운 함박눈이었다. 그러나 함박눈은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하얀 순백이었다. 아버지 무덤도 순백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그 스산한 저녁부터 병이 나 사흘을 내리 앓았다. 그렇게 그해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담임선생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했고, 그해부터 아버지 친구인 소장수 정 씨를 따라 소몰이 소년이 되었다. 소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늘 마음에 걸렸지만 도리가 없었다. 소전 일에 익숙해지려면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배워야 했다. 이웃 마을에 서는 장을 찾아다니며 몰이소를 부탁받아 그 품삯으로 생활했다.

  정 씨는 풋내기 소장수였던 아버지와 식당 노처녀였던 어머니가 어찌어찌하여 결혼까지  했는지 마치 옛날 영화를 보듯이 내 앞에서 풀어놓곤 했다. 아버지는 소를 사고파는 중개인 일을 막 시작한 참이었고 어머니는 우시장 입구의 국밥집에서 일하던 종업원이라 둘 다 궁색한 처지였다. 그러다 내가 생기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바로 살림을 차렸다는 게 정 씨의 설명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 정 씨의 입에 가볍게 오르내리는 게 몹시 못마땅했지만 도리가 없어 묵묵히 듣기만 했다. 혹시라도 정 씨에게서 어머니의 행적에 대한 작은 소식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던 정 씨는 나의 소몰이생활이 채 1년이 되기도 전, 소전에서 자취를 감췄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큰 금전사고를 치고 야반도주를 했다고 했다. 그래도 딴에는 정 씨를 의지했던지라 아버지를 잃었을 때만큼 허전했다. 하지만 소몰이생활을 익숙하게 만든 3년이라는 세월은 나의 기억에서 정 씨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할아버지와 살며 소몰이를 하던 민기를 만나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외로움은 한결 덜어졌다. 마침내 정 씨의 얼굴은 잔상으로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아련한 시간 속에 흘러가버렸다.

 

 

  찬바람이 불던 아침과는 달리 제법 따사로운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오후가 되었다. 잔치국수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나는 양지쪽 담장 위에 터를 잡았다. 한겨울의 해바라기는 추위와는 상관없이 나른한 피곤을 몰고 왔다. 팔짱을 끼자 긴 하품이 절로 올라왔다. 소몰이  소년 몇몇이 동전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담장 아래로 보였다. 어떤 때는 낮잠을 자고, 어떤 때는 시내로 가서 동시상영영화를 보고, 또 어떤 때는 동전치기를 하는 것 외에는 우시장이 끝날 무렵 몰이소를 부탁받기 전까지는 할 일도 없고 갈 곳은 더욱 없는 소몰이 소년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은 담 밑에 작은 구멍을 파고 동전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구멍에 돌을 던져 누가 더 가까이 던졌는지 선후를 가린 다음 동전을 때려 맞추기를 했다. 그들의 손에 오고가는 때 묻은 동전은 돌에 맞아 찌그러진 것이 대다수였다.

   “노수야, 너두 할려?”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비루먹은 송아지처럼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진 더벅머리에 부스럼이 말라붙어 있는 녀석에게 메스꺼움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녀석의 머리는 언젠가 발로 까서 먹고 버린 지저분한 밤송이를 닮았다. 낡은 담벼락, 마음대로 휘갈겨진 낙서들,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여럿이서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술래가 된 아이가 그림자를 밟으려고 뒤따르고, 다른 아이들은  온갖 재주로 요리조리 구멍을 빠져 다니며 도망을 다녔다. 그러다가 그림자를 밟히고는 재미있다는 양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 눔은 열아홉 장만 혀!”

  유독 큰 사내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소리 나는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녀석들은 동전 따먹기를 계속했다.

  마치 고향 생각이라도 하듯이 멍하니 서 있던 소가 질겁하여 말뚝 주위를 맴돌았다. 맴도는 걸음마다 뒷발굽에 찍히는 땅바닥 위로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그러나 여지없이 주릅에게 고삐가 잡혔다. 고삐를 잡혀 뒤뚱거리는 소의 양쪽 코에서 콧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입에서 흐른 타액은 턱수염에 걸려 있었다. 매매 도중에는 으레 주릅들의 기 싸움이 시작되는 줄 뻔히 아는데도, 돌연 소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외치는 소리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술에 취해 쇳소리를 뱉어내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때는 무척이나 놀라서 며칠을 불안에 떨기도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소장수가 놀란 소를 달래려 등을 긁어주었다. 소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다른 주릅이 소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그리고 아가리 속으로 손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육질이 튼실한 소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이빨이 돋아난 숫자를 헤아리는 모양이었다. 소의 머리는 다시 하늘로 치켜졌고 중심을 잃고 허둥대는 발밑에 뽀얀 먼지가 일었다.

  “에이, 이 녀석이 밋 살인데 그려, 열아홉 장은 말두 안 돼! 한 장만 더 쓰지 그려!”

  소의 턱이 더욱 곧추세워지자 소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 뒤뚱거렸다. 그때 뒤에 있던 주릅이 소의 사타구니를 훑어버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누런 털이 한 움큼 뽑혀 나왔다.

  “살찐 걸 보니 믹이긴 실하게 믹였군 그려.”

  사내가 손바닥을 펴고 입김을 훅 불었다. 누런 털이 너풀너풀 허공으로 흩어져 곤두박질치며 겨울 햇살과 함께 은빛으로 내려앉았다. 햇살에 반사되는 털은 마치 떨어지는 꽃잎과도 같이 사뿐했다. 나는 양쪽 손을 슬그머니 사타구니로 밀어 넣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짧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온몸에 전해졌다. 긴 호흡은 목젖을 타고 배 속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소변을 본 다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멀리서 양손을 주머니 깊숙이 찌르고 소전으로 들어오는 빨간 코트의 소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들만이 수두룩한 소전에서 그것도 소녀처럼 보이는 여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색다른 광경이었다. 동전치기 하던 녀석들이 소녀를 힐끔 훑어보았다. 그러나 금세  녀석들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동전치기를 계속했다. 소녀는 타박타박 걸어서 사내들이 모여 있는 틈을 비집고 소장수 유 씨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유 씨에게 건네주었다. 유 씨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소녀는 내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돌담 위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소녀를 훔쳐보던 것을 들킨 것 같아 놀랐지만, 순간적으로 소녀가 참 예쁘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언젠가 동시상영영화에서 보았던 영화 속 여주인공이 뇌리에 스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 씨의 손가락 방향을 확인한 소녀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리고 얼마 후였다.

  “저어… 아버지가 우리 집까지 소 좀 몰아다 주래요.”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발끝에 그림자를 들이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소녀였다. 나는 하마터면 담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소녀를 훔쳐본 것을 진짜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사타구니에서 미처 손을 빼지 못한 것이 더욱 창피했다.

  나는 급하게 담에서 뛰어 내렸지만, 소녀는 이미 등을 돌려 유 씨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맥없이 소녀의 발자국을 밟으며 뒤따랐다. 화끈하여 붉어진 얼굴로 유 씨에게 다가가자 유 씨가 고삐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놈을 집에까지 몰아다 주고 오게!”

  나는 유 씨에게서 몰이소를 건네받고 나서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다시 말없이 앞서 가는 소녀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소를 몰았다. 소녀는 나의 부끄러운 마음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묵묵히 걸었다. 소녀가 갑자기 뒤돌아보기라도 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느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렸던 고삐 잡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사타구니의 민망함을 은근슬쩍 모면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말을 꺼내려고 하니 얼굴이 훅훅 달아올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턱턱 막히는 숨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올라왔다.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제발 소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니면 소녀가 돌아보기라도 해주길……. 그런데  불쑥, 정말 불쑥 소녀의 목소리가 나의 앞이마에 꽂혔다.

   “……빨리 좀 오세요.”

  갑작스러운 소녀의 말에 나는 몹시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뱉어 버렸다.  

  “여잔, 여기 잘 안 와유.”

  내 말에 소녀는 힐끗 나를 돌아봤다. 눈동자는 맑고 순진해 보였다. 나는 곧 후회했다.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소의 뒷발굽만을 애꿎게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또 얼마를 걸었을까!

  “나도, 여기는 오기 싫은 곳이에요.”

  소녀의 두 번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버지가 돈을 가져 오래서 할 수 없이 온 거예요.”

  다행히 소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

  “돈은 왜유?”

  내가 촌스럽게 물었다.

  “소 살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유 씨 아저씨 말여유?”

 “우리 아버질 아세요?”

  “그럼유! 소장수 아저씨들은 전부 다 알지유!”

  말하고 보니 큰 자랑이라도 한 것 같아 겸연쩍은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앞서 가는 소녀를 바짝 따라가 곁눈질로 살짝 얼굴을 훔쳐보았다. 다시 봐도 역시, 시내 영화관에서 본  영화의 여주인공 마냥 동그랗고 예쁜 얼굴이었다.

  “아가씬, 학교에 안 다니나유?”

  나는 소녀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고등학교에 다닐 정도의 얼굴로 보였지만, ‘아가씨’ 말고 달리 부를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가씨’란 말에 소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소녀는 더 이상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경계심을 풀어버린 눈빛이 순하디순한 어린 송아지 눈빛처럼 선하게 보였다. 

  “재작년에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대학은 안 가구유?”

  “안 간 게 아니구 못 갔어요.”

   “…….”

  “학교 다니세요?”

  소녀가 되물었다. 불안했던 내 마음도 어느새 편안해졌다.

   “아뉴, 고등학교 붙었는데 못 갔어유.”

  “왜요?”

  “그해 아부지가 돌아가셨거든유.”

  아버지의 쇳소리 같던 음색이 들려오는 듯했다.

  “오래된 모양이죠?”

  “하마, 4년 되었지유.”

  “어머닌요?”

  이번에는 어머니의 흐느낌이 떠올랐다.

  “어머니도 없어유.”

  “돌아가셨나요?”

  “아뇨, 어딘가 살아 있을 거래유.”

  “같이 안사나 보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오래전, 집을 나갔지유. 그 후 아버진 술 때문에 먼저 가시구…….”

  “그럼, 혹시 이름이 노수?”

  “야아. 맞어유. 어떻게 알지유?”

  “언젠가 아버지가 거기 이야기를 했어요.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오셔서는…….”

  “…….”

   처음 본 소녀 앞에서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던 나는 할 말이 사라졌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버지 장례 때 유 씨를 언뜻 본 것 같았다. 함박눈 한 번 찢어지게 퍼붓는다고 푸념하던 이가 유 씨 아니던가! 그땐 어리기도 했고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에 아버지의 장례를 도와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못했다.

  집나간 어머니와 술독에 빠져 죽은 아버지를 둔 내 사연은 소장수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소녀까지 알고 있다니 기분이 야릇해졌다. 그러면서도 소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소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지금은 어디 살아요?”

  “민기라는 애랑 있지유. 할아버지하구 사는 녀석인데, 1년 됐어유.”

  “다행이네요.”

  소녀는 고운 얼굴에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무심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날씨는 차고 바람은 매서웠다.

  소녀가 다시 물었다.

  “소몰이 생활이 즐거우세요?”

  나는 아뉴, 하고 대꾸하고는 실쭉 웃었다. 그리고는 눈으로 소녀의 답을 재촉했다.

  “나도 그래요, 우시장엔 이번이 벌써 네 번째예요.”

   “…….”

   “서울로 올라가 무언가 해보고 싶은데 아버지가 보내주질 않아요. 난 졸업해서 간호전문학교라도 가려고 했지만 계집애가 배워서 뭣에 쓰겠냐는 식이죠. 여자가 많이 배우면 버릇만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냥 식육점에 있으면서 고기나 팔고, 그러다가 시집이나 가라고  하세요. 정말이지 답답하고 신경질이 나요!”

  소녀는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고는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나는 소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소녀의 하소연도 하소연이지만, 봇물 터진 듯 쏟아내는 달변에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서울에 있어요. 광고대행사에 다닌대요. 나보고 언제든지 서울 오면 자기가 책임진다고 했어요. 근데 그게 쉽게 안  되네요. 여자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죠. 서울 가려고 여러 번 결심도 했는데, 마지막엔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소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시내 신작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소녀의 구둣발 소리와 소 발굽 소리가 리듬처럼 묘한 조화를 이뤘다. 아스팔트가 깔린 신작로는 타악기처럼 규칙적인 소리를 만들어냈다. 소녀의 목소리 또한 끊임없이 터져 나와 신작로를 뒹굴었다.

  “오늘 아버지가 우시장으로 돈을 가져오라고 전화했을 때도 그 돈을 가지고 서울로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 눈치를 살폈는데 엄마가 아무 의심 없이 돈을 건네주는 거예요. 돼지고기 썰던 기름 낀 손으로요. 차마 못 떠나겠더라고요. 힘들어서 숨을 몰아쉬면서  빨리 갔다 오라고 하는 엄마 얼굴 보고 그만 또 포기해 버렸어요.”

   소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눅눅한 습기가 배어 있었다. 그 뒤로도 소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아마 소가 길 위에 배설물을 흩뿌리지만 않았어도, 이야기는 한참 더 계속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쇠똥은 한 군데가 아니라 소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길 위에 쇠똥 그림을 남겼다. 금방 떨어진 쇠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쇠똥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찬바람과 마찰을 일으키며 하늘을 향해 춤을 추었다. 찐빵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처럼.

  “조심혀, 아스팔트에선 벌금을 낸다는 소문도 있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민기에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쇠똥 때문에 벌금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당황한 나는 금방 화롯불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소녀가 쳐다봤다. 나의 시선과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오늘, 세수도 안 한 모양이네요.”

  소녀는 실눈을 예쁘게 흘기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골목으로 동동동 사라져버렸다. 나는 쇠똥을 치울 일보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춘 소는 앞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고삐 잡은 손을 세게 틀어쥐었다. 발버둥 치던 녀석이 뒤뚱대며 균형을 잡았다. 그렇게 소와 씨름하며 한참의 시간을 보낸 뒤였다. 소녀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던 그림자처럼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비료를 담았던 비닐 포대와 작은 삽이 들려있었다. 소녀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그냥, 이거나 들구 있어요!”

  충주비료공장 상호가 새겨진 요소비료포대를 내 앞으로 획 던졌다.

  “근처 아는 집에서 빌렸어요. 어서 주둥이 벌려요!”

  주위를 지나는 행인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구겨진 비료포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쇠똥을 쓸어 담는 소녀를 쳐다보며 엉거주춤 비닐의 주둥이를 벌리고 서 있었다.

   “아, 아가씨… 미, 미안혀유…….”

   나는 소녀를 또 ‘아가씨’라고 불렀다.

   “난 아가씨가 아니구 유정숙, 유정숙이에요.”

  소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복숭아 솜털같이 보송보송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탐스러운 구슬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참으로 이상하게도 송글송글한 그 땀방울이 나의 눈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가슴까지 밀고 들어와 심장을 흔들기 시작했다.  내 심장 속에 탐스러운 구슬들이 마구 뛰어다녔다.

 

 

  한낮의 욕망을 먹어치운 포만한 태양은 벌써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노을의 힘조차 미치지 못해 오색으로 물들지도 못한 구름은 손가락을 대면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듯 힘겹게 걸려있었다. 태양은 제 할 도리를 다한 듯 비스듬히 서쪽 산꼭대기에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나와 민기는 그렇게 스러지는 겨울 석양을 등지고 맥없이 걸었다. 우리의 그림자는 언덕에 이르러 더욱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는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줄곧 꽁무니를 따라붙었다. 

  오늘은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족히 서너 마리는 몰이소를 부탁받았다. 그러나 오늘은 우시장이 거의 끝날 때까지 몰이소를 얻지 못했다. 막바지에 이르러 가까스로 얻은 소는 코도 뚫지 않은 암송아지 한 마리뿐이었다. 게다가 비루 때문에 털까지 듬성듬성 뽑혀나간 메마른 놈이었다. 놈은 게으른 시골 농부가 마지못해 키우던 복 없는 송아지임이 틀림없었다.

  “한 사날 잘 믹여야 혀!”

   송아지를 부탁한 주인은 이미 술이 얼큰하게 취한 유정숙의 아버지 유 씨였다.

  “이 눔두, 빨리 코를 뚫어야 지랄을 않겠구나!”

  민기가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송아지의 난동을 제지하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고삐의 끝자락을 잡았지만 삼부자가 달려들어도 못 당한다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놈은 억셌다. 놈과의 힘겨루기는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졌다. 송아지는 제 힘을 믿고 공중으로 날뛰다가 고삐에 걸려 팽이처럼 빙그르 돌았다. 그렇게 몇 차례 요동치던 송아지는 결국 우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송아지의 코를 어째서 꼭 뚫어야 할까? 왜 멍에를 씌우고 고삐를 매야 할까?’

 참으로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다 큰 송아지의 코를 뚫지 않으면 다루기가 힘들다는 것은 소를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람이 소를 제압하기 위하여 코뚜레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코뚜레는 송아지에게 평생의 멍에를 씌우는 일이 아닌가. 유정숙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내 마음을 괴롭혔듯 송아지 또한 몹시 나대며 멍에처럼 나를 괴롭혔다.

  “민기야!”

  “응?”

  “넌… 소몰이생활이 즐겁니?”

 유정숙이 나에게 물었듯이 나도 민기에게 물었다. 민기는 힘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할아버지가 있고 그런대로 문제없이 사는 민기에 비하면 나는 턱없이 외로운 입장이었다. 그에게서 강한 긍정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몰이생활을 이토록 내켜하지 않는 줄은 몰랐다.

   “왜?”

  “그냥, 싫어! 할아버지 덕에 야간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짓을 계속 해야 할까?”

   “우리, 이 짓 안 하면 안 될까?”

   “뭐? 그럼, 뭐하게?”

  “서울로 가문…….”

   “서울?”

   “그려, 서울!”

   “…안 돼. 할아부지 두고 갈 순 없어. 하나 있는 아들 서울에서 잃구 이리로 온 거야. 연탄 때지 않는 시골만 살았어두 아들 며느리 한꺼번에 잃지 않았을 거라구, 술 취하면 늘 울면서 말했어.”

   민기의 단호한 어조에 속마음만 들킨 것 같아 할 말을 닫았다. 민기의 할아버지는 10년 전 민기만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외아들과 며느리를 연탄가스에 잃고 낙향하여 어린 민기를 혼자 키워온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 것만큼은 한사코 고집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를 잊고 민기에게 속내를 드러낸 것이 무안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넘어 ‘마즈막재’ 언덕 끝에 이르렀다. 이곳을 지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왼쪽의 계명산과 오른쪽의 남산은 이미 어둠이 깔려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어지럽게 엉켜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와 겨울의 쓸쓸함, 여기저기 녹지 않은 지저분한 눈, 작은 계곡으로 흐르는 힘없는 물줄기를 따라 늘어선 얼음 조각들, 어느 것 하나 오늘 같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만한 것은 없었다.

  “노수야!”

  “왜!”

  “넌 서울 가구 싶니?”

  내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한 것이 미안했던지 민기가 물었다.

  “…….”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아부지 돌아가실 때 소전에는 가생이두 가지 말라구 했다지.  소장수도 올가미가 있어야 한다구.”

  “쇳소리 나는 목소리였어…….”

  “넌 아니?”

  “뭘?”

  “올가미!”

  “아니…….”

  민기는 더 묻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버지가 말하던 올가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쇳소리가 나던 아버지의 절규가 귓전에 맴돌며 나를 괴롭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몰이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늘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굳이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계곡의 얼음 조각들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침묵은 한참 더 이어졌다. 유정숙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민기야, 이 고삐 좀 잡구 있으려?”

 “왜?”

 “나, 낯 좀 씻구 올게.”

  “물이 찰 텐데…….”

  “그래도 오늘은 낯 씻고 싶어!”

  “그래 알았어.”

  나는 민기에게 고삐를 건네준 다음, 마치 무협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팔을 휘두르며 계곡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밑의 얼음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졌다. 조각난 얼음 틈으로 흐르는  물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물속에 손을 담그니 얼굴은 여러 조각으로 나눠지며 일그러졌다. 손을 거두면 얼굴은 돌아오고 다시 손을 넣으면 일그러지고……. 그렇게 몇 번 손을 넣어 물장난을 쳐보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떨쳐내고 싶었다. 양손을 모아 물을 담아 얼굴에 뿌렸다. 머릿속 깊숙한 곳까지 냉기가 느껴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덜미 밑으로 들어간 얼음알갱이가 가슴팍을 타고 아랫배까지 녹아 흘렀다.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세수를 끝내고 언덕을 올라오며 말했다.

  “민기야, 너두 낯 씻을려?”

  “안 추워?”

  “응, 시원해!”

   민기가 잡고 있던 고삐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는 나처럼 계곡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민기를 쳐다보며 내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송아지가 순간적으로 날뛰어 하마터면 고삐를 놓칠 뻔했다. 놈의 힘은 상상외로 억셌지만, 나는 그만한 일로 두려워할 풋내기는 아니었다. 놈의 반항이 심하면 심할수록 제압하는 여러 가지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놈과 겨루면서 순간순간 유정숙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참으로 못 견딜 일이었다. 아버지의 쇳소리 나는 절규, 유정숙의 습기 찬 목소리. 이게 다 뭐란 말인가! 나도 모르게 고삐를 잡았던 손의 힘을 풀며 놈이 달아나길 바라는 모험을 감행했다. 놈이 뛰었다. 고삐 풀린 송아지는 뿔난 엉덩이를 요동치며 천방지축 날뛰더니 이내 달음박질쳐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야아! 물이 시원하다드니 얼음이잖어!”

  세수를 끝낸 민기가 계곡 아래에서 얼굴을 빠끔히 내밀며 나타났다. 내게는 시원했던 물이 민기에게는 얼음처럼 차가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민기는 순간 멀리 도망치는 송아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야! 너 뭐 해? 송아지 달아나잖아!”

  그는 놀란 눈으로 달아나는 송아지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하지만 송아지를 뒤쫓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있는 나를 보고는 사태를 짐작했는지 재빨리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송아지를 잡으려 내쳐 뛰기 시작했다. 나는 쏜살같이 달리는 민기를 뒤쫓아 팔을 움켜쥐었다.

   “야! 너 미쳤어?”

  민기가 내 팔을 우악스럽게 뿌리쳤다.

  “소몰이가 싫다구 했잖여!”

 “지랄하지 마아!”

  민기가 울부짖으며 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 둬. 민기야아…….”

  순간 민기의 주먹이 내 얼굴에 날아와 꽂혔다.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그래도 민기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민기는 내가 붙잡은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나는 땅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쓰러진 나를 향해 민기의 주먹이 날아왔고, 민기와 나는  뒤엉켜 한참을 뒹굴었다. 마구 날아오는 민기의 주먹에 이내 코피가 터져 나왔다. 찝찔한 코피가 입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냥, 도망가게 두란 말이야!”

  민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절규하고 소리 지르고 마구 흔들며 울었다. 마침내 떨어지지 않는 민기를 힘껏 걷어찼다. 민기는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는 더는 싸울 힘이 없는지 그대로 누워버렸다. 나 또한 힘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알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올라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었다. 대책 없이 솟구치는 눈물 밑으로 어머니의 잔영이, 유정숙의 땀방울이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엉엉 울었을까. 기척조차 없는 민기가 궁금해진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였다. 일어나 민기를 돌아보니 그의 뒤통수 아래로 붉은 피가 흥건하고 흙바닥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없었다. 민기가 죽은 건 아닌지 겁에 질린 나는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정신없이 뛰었다. 그림자는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마즈막재를 완전히 넘어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도 민기가 일어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미 산등성이를 덮어버린 검은 어둠만이 달음질치고 있는 나의 뒤를 쏜살같이 쫓아오며 엉겨 붙으려 안달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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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도시




  내가 마지막 승객인 듯싶었다.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황급히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에 올라선 후로도 가쁜 숨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열차의 연결통로에 숨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흙먼지를 털었다. 열차는 어둠을 헤집고 평행선을 더듬으며 서서히 충주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모조리 나만 쏘아보는 것 같아 불안했다. 열차 안 어스름한 귀퉁이에 몸을 감췄다. 그리고 승객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살쾡이처럼 할퀴어버릴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눈빛은 공포에 질린 야행성 동물처럼 번뜩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라리 모른 체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여유로운 척 팔짱을 껴보고 이리저리 몸도 비틀었다. 시선은 창밖으로 돌렸다. 도시의 끝을 지나는 열차의 차창으로 쏜살같은 불빛이 눈동자를 할퀴고 지나갔다.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뒤죽박죽된 생각을 듬성듬성, 조심스럽게 되새김질해보았다.

  ‘민기는 죽은 것일까? 달아난 송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송아지 주인인 유정숙의 아버지 유 씨는 어찌하나…….’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간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나를 괴롭혔다.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 해도 헤어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공포였다. 그 공포는 떨쳐버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생생해졌다.       

   밤이 깊어지자 승객들은 너저분하게 흩어진 채로 추위와 선잠으로 꿈틀댔다. 터널을 지나는 듯 덜컹거리는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밤의 무게를 가르고 열차는 달렸다.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에 빠져들다 보니 무심한 열차에 버려져 있는 것을 겨우  알았다.

  얼마를 달렸을까? 나에게도 추위가 찾아왔다. 정신은 흐릿해지고 온몸의 맥이 풀려 마치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곤두세웠던 신경은 이내 지치고 눈꺼풀까지 가물가물 내려앉았다. 졸음이 장맛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래도 애써 참으며 얼마를 더 버텼는지 모른다.

  “이봐, 내려야지!”

  어깨를 툭툭 치는 웬 사내의 고함에 놀라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술 밑을 혀로 훑으니 쓴 맛이 느껴졌다. 

  내가 골아 떨어져 있는 동안 열차는 종착역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흐릿한 조명으로 어두컴컴한 것을 겨우 모면한 철길 사이로 승객들이 줄지어 내렸다. 피난민 행렬과도 같은 그들 틈에 끼어 열차 밖으로 빠져 나왔다. ‘조치원’이라는 역명이 아스라이 시야에 박혔다. 분명 용산 행 열차표를 구입했는데 조치원에서 모든 사람들이 내리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승객들은 대합실로 들어가지도 않고 열차 주변에 쪼그리고 앉거나 삼삼오오 서서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민기가 죽어서 그 범인을 잡으려고 열차를 세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포는 또 다시 내 몸을 살쾡이처럼 도사리게 만들었다. 때마침 먼발치에서 정복 차림의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인 듯싶었다. 훤칠한 키의 사내는 요란하게 호각까지 불어대며 깃발을 흔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사내를 보니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사내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사람들 틈바구니로 슬금슬금 숨었다. 턱이 덜덜 떨려 위아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길게 호흡을 삼켰다. 차디찬 냉기에 콧구멍이 얼어 버릴 것처럼 코털에 엉겨 붙었다.

  다행히 사내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이었다. 역무원이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다. 번개처럼 나타난 열차의 세찬 바람이 온몸을 강타해왔다. 열차가 몰고 온 차디찬 바람은 사람들의 몸을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열차가 멈추자 추위에 무방비상태였던 승객들이 벌떼처럼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엉겁결에 그들 속에 휩쓸려 열차에 올라탔다. 비로소 열차가 멈춘 이유를 알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열차는 출발했다. 조치원에서 갈아탄 열차는 다시 어둠을 뚫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나는 여전히 구석에 처박혀 눈빛을 번뜩이다가 또 잠이 들고 말았다.

  “이봐, 종점이야!”

  종점을 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입안은 추위에 바짝 메말라 있었다. 침을 모아 간신히 삼켰다. 쓴 맛이 목구멍을 타고 힘겹게 넘어갔다. 푸석푸석해진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목소리의 사내와 일행인 것처럼 위장하며 열차에서 내렸다. 그의 꽁무니에 붙어 서울에 처음 온 두려움을 모면해 볼 심산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두웠다. 바람조차 바짓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추위를 피하려 파고드는, 참으로 찢어지게 추운 겨울새벽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고층건물과 네온사인 불빛에 어리둥절 놀란 나를 ‘용산역’이라는 수은등이 새벽잠이 덜 깬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차에서부터 뒤따르던 사내와 광장을 지났다. 발끝까지 덮은 긴 코트를 걸친 여자들이 두 손을 겨드랑이에 깊숙이 넣고 서 있었다. 광장 여기저기에서 서성이던 여자들은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추운데 쉬었다 가요. 통행금지 안 풀렸어요.”

  대부분의 사내들은 여자들을 힐끗 흘겨볼 뿐 대꾸조차 없이 지나쳤다. 한둘의 사내가 주변을 휭 하니 둘러보고는 못 이기는 척 여자들에게 한쪽 팔을 빼앗긴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여자들이 건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들이 말하는 곳에는 따듯한 방이 있는 모양이려니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뒤따르는 사내에게는 그 어떤 여자도 말을 걸지 않았다. 사내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일순간 일어난 일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사내를 실쭉 외면했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엷은 미소를 띠우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를 뒤따른 내 계획은 일단 성공이었다.

  사내를 따라 큰길로 나왔고 육교를 건넜다. 그사이 통행금지가 해제된 모양이었다. 정류장에는 정갈한 교복의 여학생과 행인 한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움츠러진 어깨로 얼어붙어 희미해진 가로등을 떠받들고 있었다. 사내가 정류장 가까이 도착하자 마침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택시는 사내를 꿀꺽 삼긴 채 번개처럼 내 시야에서 달아났다. 택시가 사라진 뒤에는 곧이어 버스가 꽁무니를 물고 도착했다. 곧이어 버스의 찬바람이 나의 얼굴에 나뒹굴었고, 학생과 행인이 사라진 정류장에는 에나멜이 벗겨진 양철 표지판만이 뎅그렇게 남아있었다.

  나는 어디랄 것도 없이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도시의 짓눌리는 위압감과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면서 계속 걸었다. 골목을 끼고 모퉁이를 돌았다. 또 골목을 끼고 모퉁이를 돌았다. 걷는 일에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울의 아스팔트에 점을 찍었다. 아스팔트에 찍힌 점처럼 서울에서의 나는 보잘것없는 작은 점이었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던 차들이 긴 행렬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미 수없이 쏟아져 나와 거리는 번잡해졌다. 나는 자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하릴없이 이것저것을 살피며 걷기만 했다. 음식점이나 중국집에 들어가는 것은 겁이 나 포기하고, 호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 빵과 우유로 아침을 대신했다.

  그렇게 어디인지도 모를 길을 얼마나 더 걸었을까? 오후가 되자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어 골목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자리 잡은 골목에는 건물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손바닥 크기의 햇살이 따사로이 멈춰 있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잠깐씩 햇살을 가렸다가 돌려주는 일이 계속됐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숱한 행인들을 나 또한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무기력한 나의 움직임처럼 시간도 공간도 멈춰버린 것 같았다.

  얼마를 더 버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결국 온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 천길 수렁으로 추락하는 듯 아무것도 부여잡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나는 회색 도시에 팽개쳐져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회색 도시의 지독한 무관심에 나는 점으로 버려졌다. 

 

 

  어머니는 내게 바다의 울음소리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춤추는 파도가 가득한 남쪽 섬마을이 고향이라던 어머니는 파도소리가 속삭이는 음률에 가깝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설명으로 그림으로만 보았을 뿐 바다의 음률을 듣진 못했지만, 아랫동네의 머슴애에게 늘 자랑삼아 얘기했다. 녀석이 비웃기에 한 번은 녀석을 실컷 패주었다. 녀석은 코피가 나는데도 울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바다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어머니는 떠나고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떠난 것도 모르고 천장을 향해 벌렁 누운 채 어머니를 기다렸다. 때 묻은 벽지에 그려져 있는 낙서들, 뚫어진 문구멍을 때운 85점짜리 시험지, 반쯤 찢겨진 채 대들보에 힘겹게 붙어 있는 부적, 박쥐처럼 메주가 열린 서까래, 다락을 통하는 비밀스런 통로를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났다. 나는 어느 이름 모를 바닷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포말이 바윗돌에 달려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하얗게 날아갔다. 나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포말 가까이 돌을 던지는 일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돌연  바닷물 위를 땅위를 걷듯 하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유유히 바다 위를 걸어 점점 더 먼 바다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모습은 작아지거나 멀어지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꾸만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한없이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로 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어머니는 갑자기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순간이었다. 바다는 다시 끝없는 수평선이 되었다. 목이 터지도록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문지방의 걸린 어린애의 발처럼 입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어머니처럼 바다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라진 지점에서는 깊은 바닷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숨을 쉬고 있었고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기까지 했다. 바다 속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바로 내 눈앞에서 물고기로 변해 헤엄을 쳤다. 어머니 주위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풀숲 사이를 헤치며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큰 소리로 “어머니!” 하고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꼬리를  덥석 물었다. 비로소 뒤를 돌아본  어머니는 그러나 어머니가 아니었다. 거대한 이빨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기겁해서 사방을 둘러봤지만, 주위에서 평화롭게 노닐던 물고기들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는 나를 노려봤다.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손발은 무질서하게 허공을 헤맬 뿐 물위로 떠오르거나 놈들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내 목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고, 그 순간 코와 입으로 바닷물이  사정없이 헤집고 들어왔다. 숨이 턱턱 막혔고 정신은 혼미했다.

  “자아식, 또 새우잠이군!”

  그때 아버지의 까칠한 손바닥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엄청난 가위에 눌려 고생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우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술에 절어 있었다.  나는 콧등에 잔주름을 만들며 눈두덩을 비볐다. 그때까지도 꿈이 덜 깬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부지, 엄마 왔어유?”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방 안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그 어디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잠깐 기다리거라. 오늘부턴 내가 하마…….”

  슬며시 자리를 피하는 아버지에게 꿈 얘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꿈이지만 음률의 바다가 공포의 바다로 나타난 것은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암시인지도 몰랐다. 며칠 전 잠결에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놈이 누구냐며 다그쳤었다. 어머니는 그런 일이 없다며 오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밤새 계속되었다. 어머니의 흐느낌 또한 밤새 이어졌다. 내가 아랫동네 머슴애를  실컷 패주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없었다. 밤새 흐느껴 울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어머니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끈질기게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너무 완강했다. 어머니가 잘못을 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한 엄청난 노여움이 아버지의 마음에 켜켜이 쌓여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주량이 늘수록 몸도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했다. 걱정은 됐지만 아버지를 말릴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우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술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중개인 중 누군가를 지칭하며 욕설을 퍼붓고 원망하며 술주정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와 연루된 사람이 우시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의문을 가슴속에 품은 채 입을 꼭꼭 다물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우시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의문 중 어느 것 하나 밝혀내거나 주워듣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어머니의 따듯한 품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바닷가, 바다의 음률이 너무도 그리웠다.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의 바다는 놀라운 깊이를 지닌 채 그리움으로, 서러움으로 또는 슬픔으로 나의 마음을 출렁이게 하곤 했는데…….

 

 

   눈을 떴다. 짧지만 단꿈이었다. 눈언저리에는 촉촉한 물기가 흘러 있었다. 그 물기는 차디찬 겨울바람과 마찰을 일으켜 한기를 가져왔다. 입천장은 말라붙어 입안의 씁쓸함이 목구멍까지 길게 맴돌았다.

   “저런, 나이도 젊은 사람이…….”

  할머니가 나를 보고는 딱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거리에 쓰러져 잠들었던 주정꾼처럼 민망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마를 더 버티고 서서 무엇을 해야 할까? 도대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막막하고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엄청난 피로와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벌써 서울에서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버린 시간만큼 두려움도 무뎌지는 걸까?

   그런데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잠깐씩 훔쳐가는 햇살의 아쉬움이 아니었다. 점심을 걸렀어도 배고프지 않은, 알 수 없는 배 속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었다. 길 건너 간판 ‘휘문인쇄소’에서 나를 훔쳐보는 교복 입은 여학생 때문이었다. 여학생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드나들면서 쉴 새 없이 나를 확인하는 행동이 몹시 신경 쓰였다. 더구나 드르륵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을 드나들 때마다 몇 번이고 마주치는 시선에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비록 신경은 쓰여도 그런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은 것은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는 교복 때문이었다. 하루 사이에 걸인이 된 듯한 나와는 대조적인 단정함이 한껏 정갈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다시 한동안의 시간이 지났다. 잠시 후 휘문인쇄소 여학생 때문에 거의 주저앉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 드르륵 미닫이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그 여학생이려니 생각하고는 눈길을 피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저 무심한 척 골목 어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틈에 길을 건너왔는지 단발머리의 그 여학생이 코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돼버렸다.

  “가출한 거 맞지요?”

  “…….”

  나는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장님이 좀 오래요!”

  여학생에게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는 무슨 죄인이라도 된 양 여학생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미닫이문을 열자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운 난로 열기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하루 종일 추운 곳에서 얼어버린 얼굴이 갑자기 아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책상에 쪼그리고 앉아 일하던 두세 명의 시선까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여학생이 사장인 듯싶은 사람에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이에요.”

  나는 사장에게 거의 반절을 하다시피 인사를 했다. 코가 땅에 닿을 듯이 구부정하게 허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여학생이 가져다주는 의자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은애 얘기를 듣자니 아침부터 있었다고 하던데, 가출했냐?”

  사장은 은애라고 불리는 여학생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물었다. 인물이 썩 잘난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졌다. 멋쩍고 민망한 얼굴은 난로 열기로 계속 후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예에.”

   내 목소리는 작고 지쳐 있었다. 사장은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고향, 가족관계, 나이, 학력, 취미, 아침부터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이유까지 궁금한 사항 모두를 비교적 상세히 물어왔다. 나는 애써 정확하게 말하려고 더듬거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찌 대답했는지 곧 기억나지 않았다.

  사장이 말했다.

  “너 그림 좀 그리냐? 도안(圖案)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니?”

  나는 도안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어느 곳이든 당장 눈 비 가리고 몸뚱이 하나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입장이었다.

  “도안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할 게유!”

  “허허, 고향 사투리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용기가 맘에 들었어. 그럼 어디 한번 근무해 보자. 은애가 이 친구 잘 가르쳐 줘라.”

  사장이 말하자 은애는 내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나는 사장에게 수십 번 절하듯 인사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은애를 뒤따라가면서도 또 뒤돌아보며 사장에게 인사를 했다.

  은애로부터 곧바로 사무실의 모든 상황을 안내받았다. 휘문인쇄소는 20여 명의 직원과 1·2층에 다양한 인쇄보조설비를 갖춘 비교적 큰 인쇄소라고 했다. 인쇄용 필름을 다루는 제판이라는 기계시설이 있는 2층에는 다락이 꾸며져 있었다. 가끔 철야를 하는 직원이 수면을 취하도록 만들어진 그곳이 나의 숙소라며 알려주었다. 은애는 때마침 다락에 기거하며 도안을 배우던 보조도안사가 군대에 가는 바람에 취직되는 행운을 얻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사장과 같은 고향 출신이어서 이런 행운을 얻었는지 모른다며 그녀의 생각까지 덧붙여 주었다.

  “난 열아홉이에요. 이제 여고 1학년이지만…….”

 은애는 주간에는 인쇄소에 다니고 늦은 나이에 야간전수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은애가 학교에 가는 오후 3시 이후에는 은애의 일을 내가 대신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은애는 참으로 친절하면서도 상냥하고 열심히 사는 여학생인 듯싶었다. 내가 취직하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천운 같은 일이었다.

  “돈은 좀 가지고 왔어요? 한 달 정도 생활할 정도는…….”

  은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색한 변명이겠지만 소몰이를 하는 동안 돈을 모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루하루 생활하기도 벅찬 빈곤의 연속이었던 것이 창피했다. 창피한 마음에 한없이 주눅이 들었다. 은애는 사장에게 건의하여 가불 명목으로 약간의 돈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장에게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장과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울컥해졌다.

  내 몰골이 흉했던지 은애가 목욕탕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입장이라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목욕탕에 갔다. 기껏해야 여름철 개여울에서 물장구치며 몸을 씻는 것 외는 겨울 내내 목욕 한 번 할 수 없었던 나였다. 늦봄부터 물가에 가면 겨울동안 낀 때가 복숭아 뼈에 모래알처럼 박혀있던 처지였으니……. 그래도 동네에서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목욕탕의 따뜻한 물은 사치스럽고 낯설게 느껴졌다.  알몸으로 여기저기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들의 당당한 모습을 쳐다보기도 민망했지만, 벌거벗은 내 아랫도리가 더 민망했다. 나는 한참을 탕 속에 숨어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았다. 온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하면서 벌레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했다. 몸을 긁을 수밖에 없었다. 가려워진 곳을 긁을 때마다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시골의 때가 물위로 떠올랐다. 둥둥 떠다니는 그것은 내 몸에서 기생하던 찌꺼기였다. 군더더기처럼 나를 괴롭히던 찌꺼기가 서울의 목욕탕에서 떨어져 물위를 떠다녔다. 떠다니는 찌꺼기를 입으로 불어 물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사람들이 조금 뜸해진 틈을 타 대충 몸을 씻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군에 간 전임 도안사의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꼭 맞는 추리닝은 나를 제법 도시적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어둡고 궁색한 다락도 내게는 최고로 훌륭한 둥지라 생각했다.  다락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임 도안사가 보다가 구석에 처박아 놓은 성인잡지 ‘선데이서울’을 정리하는데 얼굴이 붉어졌다. 가릴 곳만 겨우 가린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행여 잡지가 은애의 눈에 뜨여 오해를 받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되도록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숨겨 버렸다.  그러나 맨살의 여자들이 예쁘기도 할 뿐만 아니라 호기심까지 자극하여 한 번 더 훔쳐 본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마침내 자리에 누웠다. 길게 심호흡을 삼키자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곧 천길 바닥으로 가라앉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고향이 보였다. 어머니가 보였다.  아버지가, 민기가, 유정숙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깊은 잠에, 서울에서의 첫 번째 밤에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눈을 떴다. 서울에서의 첫날밤인데도 그런대로 단잠을 잤다.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숨에 잠을 잔 결정적 이유는 아마 극도로 지친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침을 해결하기 이전에 간밤에 제판실 직원이 일러 준대로, 서둘러 사무실 청소부터 했다.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하고 이윽고 은애가 출근했다. 사무실 청소가 말끔히 된 것을 눈치 챈 은애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소개한 것이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은애가 각 부서의 직원들과 첫인사를 시켜주었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다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학벌이 좋은 사람은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소박하고 욕심 없는 사람들이니 적응하기 쉬울 것이라며 은애는 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서울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집단생활의 요령도 모르고 경험도 없던 탓인지 하루하루가 언제 지났는지 모를 만큼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 청소를 시작으로 쉴 새 없는 심부름으로 이어지는 오전 시간을 보내면, 난롯불에  라면을 끓여먹는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점심을 해결했다 싶으면 이내 하루는 저물어 있었다. 더욱이 은애가 학교에  가는 오후 무렵에는 그녀의 몫까지 대신 일해야 했으므로 나는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비록 은애가 하는 일보다 단순한 일들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돈은 겨우 보름 정도의 끼니를 챙길 수 있을 뿐 무엇 하나 다른 곳에 쓸 형편은 못됐다. 최소한의 생활조차도 벅찬 궁색한 금액이었다. 그것도 점심을 늘 라면으로 해결해야만 보름을 견딜 수 있는 액수에 불과했다. 야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남은 반찬으로 다음날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래도 다른 인쇄소에 비하면 급료가 후한 편이라서 박봉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기술을 습득하는 동안에는 일체의 보수가 없는 곳이 대다수였다. 고작 야식 한 끼만을 보조해 주면서 야간에 기술을 배워야 하는 열악한 곳도 꽤 많았다. 그들은 야간 팀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주간 팀으로 옮겨야만 비로소 나만큼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회사에 종이를 납품하는 지업사에서 재단기술을 배우는 내 또래의 사내는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잘 곳이 없어서 재단된 파지더미 속에 들어가 파지를 이불 삼아 덮고 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에 비하면 나의 푸념은 사치에 불과했다. 정말로 막막하기만 했던  용산역의 새벽에 비하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사무실 분위기에 빨리 익숙해지려 애썼고 선배들에게 인정받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정신없고 춥기만 했던 석 달의 겨울이 번개처럼 흘렀다. 선선한 바람을 앞세우고 봄의 계절은 어김없이 내 코앞에 와 있었다. 길게 심호흡을 삼킬 때마다 제법 향긋한 봄 냄새가 코털을 간질이는 봄이었다. 서울의 봄 냄새는 고향의 봄 냄새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사장이 퇴근하고 난 저녁이면 기계실 직원들과 어울려 화투놀이를 했다. 나는 그들의 유혹도 뒤로 하고 선배의 어깨너머로 훔쳐본 그림을 도안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그려 놓고 보면 멋대로 휘갈긴 낙서 같아서 찢고 또 찢기를 반복해야 했다. 도안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끈기와 소질이 요구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도안을  하기에 적합한 섬세한 성격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것에 의미를 두어야 했다. 다시 얼마동안 글자 레터링을 되풀이했다. 지독한 습작의 연속이었다. 나는 점차 나만의 방법과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또 몇 달이 지났다. 사무실은 평소보다 많이 바빠졌다. 선배는 일이 넘쳐났다. 일이 벅찬 선배는 비교적 간단한 디자인을 나에게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순조롭게 작업을 성공시켰고 나는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봄이 지나 일이 뜸한 여름이 되었다. 어느덧 서울에 온 지도 일 년을 훌쩍 넘기고 반년이 더 지나 있었다. 점심메뉴는 라면에서 자장면이나 볶음밥으로 바뀌었다. 일요일이면 시골이 고향인 몇몇 동료들과 서울나들이를 다녔다.  남산과 고궁은 물론 북한산이며 남한산성 등 비교적 서울과 가까운 여러 곳을 어울려 구경했다. 그리고 술도 배웠다.

  그즈음 버릇이 하나 생겼다. 무료할 때면, 다락 깊숙이 묻어두었던 비키니 여자들을 간간히 꺼내보는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염려되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걱정은 무뎌졌다. 끝내는 ‘선데이서울’의 신간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구입한 ‘선데이서울’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선데이서울’의 치정에 얽힌 기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해 묘한 흥분을 가져왔다. 기사 속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던 욕구를 자극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랫도리에 불쑥불쑥 힘이 실리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엉뚱하게도 유정숙과 결혼하는 상상을 하거나 은애와 데이트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공상도 했다. 은애를 보면서 유정숙을 떠올리는 것은 또 다른 내면의 비밀이 되었다. 유정숙에 대한 비밀은 아련하게 간직되어 고착되어 갔다.

  시간은 그녀들에 대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시간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정숙의 얼굴을 가물가물 흐려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기에 대한 궁금증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또한 점차 잊게 만들었다. 불쑥 민기와의 그날이 떠올라 자책하기도 했지만 고향을 찾아 생사를 알기 전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안타깝게 세월의 강물은 그렇게 흐르고 또 흘렀다.

  다시 가을이 왔다. 사보의 마지막 수정자를 쳐서 편집을 끝내야만 한 달이 마무리되는 바쁜 월말이었다. 스카라 극장에서 이소룡 영화를 본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원고를 가지고 사진식자 집을 찾았다. 거래처 사람들로 북적이는 틈에 평소 안면이 있던 ‘태평양기획’의 임 실장이 보였다. 나는 임 실장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 많이 바쁘신가 보네유?”

  태평양기획은 휘문인쇄소에 인쇄를 의뢰하는 거래처 중 제법 비중이 큰 곳이었다.

   “어, 강 군! 어때, 요즘 할만 해?”

   “예, 그럭저럭요.”

  “허허, 제법이야. 적응력 빠른데. 이젠 사투리도 많이 안 쓰네.”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나의 서울 생활을 낱낱이 알고 있는 임 실장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다. 임 실장은 고학력을 앞세워 우쭐하는 일이 많았다. 자신감이 몸에 밴 그는 가끔  영화감독과 여배우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곤 했다. 그는 나에겐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강 군, 마침 할 말도 있고 한데 우리 차나 한잔 할까?”

  “저하구유?”  

 “으음, 중요한 얘기야.”

  나는 임 실장에게 끌리듯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위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우리 회사에 퇴사하는 디자이너 녀석이 있어. 그놈 대신으로 디자이너를 구하는데, 혹시 생각이 있나 해서 보자고 한 거야. 추천하고 싶어서…….”

 내가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태평양기획은 한미합작회사로서 업계에서는 선망이 되는 종합광고대행사로 명성이 대단한 회사였다. 하지만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실장님, 생각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도 그렇겠지. 그럼 며칠 고민하고 결정해서 알려줘.”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방을 나왔다. 불현듯 그동안의 서울생활이 떠올랐다. 조치원역의 공포와 용산역의 두려움이 한꺼번에 겹쳐왔다. 목욕탕의  궁상과 밀폐된 다락의 비밀스러움이 또한 겹쳐왔다. 오랜 기간의 라면이, 자장면이, 볶음밥이 겹쳐왔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살기 위해 버틴 서러움이 차올라 목젖을 적셨다. 태평양기획의 책임자급인 임 실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나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임 실장의 제안은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주었다. 그러나 은인과도 같은 사장님과 은애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며칠 후 나는 임 실장을 거래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어떻게 생각해 봤어?”

  나는 또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임 실장은 내 마음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임 실장은 이미 그의 목표를 정해놓고 있는 듯했다.

  “사장에게 말하기 곤란하면 내가 대신 얘기하면 어떨까?”

  나는 또 침묵했다. 임 실장은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사장에게 직접 말하겠다며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 임 실장을 만류하지도 못했다. 그날 저녁 나는 사장에게 불려갔다.

 “임 실장에게 얘기 들었다. 네가 부탁한 거니?”

  사장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잔뜩 섞여 있었다. 무작정 상경한 형편없던 나를 거두어 준 결과가 배신으로 돌아왔다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사장은 내가 은애의 눈에 띈 것은 운명이었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했던 자신을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사장이 은애를 그토록 신뢰하는 것은 그녀가 성실하다는 것 이전에 둘 사이의 혈연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으로 그 상황을 버텼다. 어떤 이유에서든 할 말이 없었다. 염치가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헛… 이제 좀 쓸 만하게 되었다 했더니, 딴 놈이 채 가는구먼 그려! 젠장…….”

   사장의 푸념에는 임 실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도 담겨 있었다. 태평양기획에서 넘어오는 일이 휘문인쇄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임 실장의 입김이 셀 수밖에.

 “어떻게 할 것인지 며칠 생각해 보자!”

  사장은 풀이 죽은 내가 측은했던지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사장실을 나오자 동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몹시 궁금해 하는 그들을 뿌리치고 어두운 다락에 처박혔다. 다락에 처박혀 저녁도 거르고 두문불출했다.

  이튿날 소식을 들은 직원들은 나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준 걸 뻔히 아는 동료들은 아무도 내 행동을 좋게 받아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변명을 꾸밀 줄도 모르는 나는 그 상황이 가시방석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선배는 가슴이 시릴 정도의 따끔한 핀잔을 주었다.

  “…정말, 가고 싶으세요?”

   은애가 동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은애로 인해 취직을 하게 된 걸 생각하면 누구보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구차한 변명이 될 것 같아 내 독단적인 의지가 아니었음을 말하지도 않았다.

 “나에겐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난 이해해요.” 

  어느덧 졸업반이 된 은애는 제법 어른스럽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녀의 단발머리는 그동안 긴 머리로 변해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교복 대신 사복을 즐겨 입는, 숙녀 티가 물씬 풍기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성격에 늘 단정한 은애는 교탁 앞의 여선생님 같았다. 그녀는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아득히 날아오르는 나비였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서 사장은 다시 나를 불렀다.

  “미스터 강, 도안사와 의논했는데 자네를 보내기로 했네. 태평양기획과의 인연도 있고 미스터 강한테 그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하게. 우리가 바쁠 때 전화하면 저녁이나 일요일에 가끔 와서 도와주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저 사장의 넓은 마음이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회사 입장에서는 나를 태평양기획에 심어놓는 것만큼 두 회사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판단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나를 스파이로 태평양기획에 보낸다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계산이 깔린 것인지도 몰랐다.

   사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핀잔을 주던 선배는 처음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선배는 오랜 실무경험에서 우러나온 기술적 문제까지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태평양기획에 대한 정보와 임 실장의 성격까지 말하며 오히려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며칠 동안 소원했던 기계실과 제판실 동료들의 분위기도 반전되었다. 그들은 함께 축하해 주었고 이제는 거래처 고객이 되었다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송별회 자리에서 동료들은 나에게 과하게 술을 권했다. 나는 그들의 채근에 못 이겨 ‘울고 넘는 박달재’를 서투르게 불렀고, 정말이지 꿀꺽 눈물까지 삼켰다. 어머니가, 유정숙이, 그리고 은애가 마음속에서 눈물로 뒤엉켜 흘렀다. 쉽게 보일 수 없는 마음속의 눈물은 회색 도시에 내던져졌던 지난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분명 파도 같은 눈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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