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나에게 늦은 소설쓰기란 추억을 꿰매는 초라한 출발에서 시작되었다. 거울을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고, 내면의 얼룩진 상처와 부서진 조각을 치유하며 극복하는 작업이었다. 첫 장편소설 『끝섬-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움』이 꿈을 기억해야 하는 자조의 할큄이었다면, 『사랑, 장마로 오다』는 자각을 실현하고자 하는 치유의 거울이었다. 또한 상처가 다시 덧나도 좋고, 딱지가 떨어져 지혈되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나만이 볼 수 있는 굴절된 양심을 어루만지고 싶은 작업들이었다.
무릇 중년에 반추하는 유년의 추억은 아름다운 기억만이 착상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잊도록 진화된 인간의 뇌 어느 한구석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무례하게 스스로의 거울을 비추어보며 오랜 세월 봉합시켜 놓았던 상처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집착했다. 기억은 점점 더 명료해졌고, 아픔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돋았다. 기억 속의 아픔은 타인의 아픔이기 이전에 나의 아픔이었고, 어쩌면 내가 치유해야 할 아픔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누군가에게 울고 거듭나기를 소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울고 거듭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들, 감히 또 다른 치유를 구실로 긁적거리려니 내 추억들은 비로소 두려움으로 아우성이다. 아우성치는 미지의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나는 참으로 나약하고, 심장의 깊이는 속절없이 야위어 있다. 더불어 담겨져 있는 그릇의 크기는 보잘것없고, 뜨거운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다. 필부의 가야 할 걸음에 보이지 않는 길은 멀고, 끝은 자욱한 이유이다.
그래서 오늘, 용기를 북돋는 두 번째 장편소설의 채찍에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움츠려진다. 민망함을 위장하려는 부끄러운 마음조차도 기둥 뒤로 빠끔히 숨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과분한 축복인가 싶다. 어디에 숨고, 어디로 도망하여 잠수라도 해야 하는가, 곰곰한 생각이 나를 또 불현듯 일으켜 세우기를 외람되게 갈망해본다. 그 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라도 가야 하고, 가서 행복한, 또 다른 담금질 같은 운명의 길이기에…….
두려움에 나약하고, 심장이 야위었고, 그릇이 보잘것없고,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는 나에게…… 늘 용기를 주는 분들, 세상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고마운 분들, 그리고 아내와 아들과 가족들에게, 여전히 졸필인 이 책을 바친다.
2013년 봄
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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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
사랑, 장마로 오다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첫키스의 향기
철길이 닿는 바다
검은 그림자
굴레의 사슬
연못둥지과수원
안개 속의 덫
뒤틀리는 운명들
색깔이 다른 피
성(城)을 떠난 사막
장남들의 곡예비행
보이지 않는 길
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