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 중)

한국 제목의 의미는 뭐지??

그녀는 말한 적이 있다. "시간에 속지 말고 역사 ― 특히 지성사 ― 가 선형적이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그녀는 고결하고 자족적이고 유럽적이었다. 이 말을 쓰다가 멈춘다. 머릿속에서 그녀가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이것은 내가 따르려고 애를 써온 경험칙이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17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우리의 의견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우리의 충동, 욕망, 혐오 ― 간단히 말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것 ― 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우리의 소유나 평판이나 공적 직책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억하라, 본성상 속박하는 것이 자유를 준다거나 네 것이 아닌 것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면 좌절하고 비참해지고 화가 날 것이며 신과 사람 탓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 것만을 네 것이라 생각하고 네 것이 아닌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단 하나도 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적이 없고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해치려 해도 너는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29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일종의 다윈주의로 본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자생존, 물론 이때 다윈이 가장 강한 자, 또는 심지어 가장 영리한 자를 적자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가장 잘 갖춘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생존하거나 우월하거나 군림하는 자는 더 잘 조직되고 더 큰 총을 휘두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죽이는 데 더 유능한 자들이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관념에서는 승리할 수 있지만, 관념은 총구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짜로 이기는 일이 거의 없죠. 그건 한탄할 일인데, 우리 모두 동의하겠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건 태만한 거겠죠.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두 손 놓고 ― 또 뇌도 놓고 앉아 ‘패자의 것은 승자에게로’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건 곧 ‘진실은 승자에게로’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30

"우리는 늘 자기 연민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600년 뒤에 태어나면서 서기 363년 페르시아 사막에서 모든 게 잘못되어 우리한테 불리한 패가 주어졌다고 상상하게 되면 ‘이건 내 탓이 아니에요, 선생님’ 하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따라서 내가 받은 패가 정상이라고 믿는 게 낫죠. 역사적 자기 연민도 개인적 자기 연민과 마찬가지로 매력이 없습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2

나는 가끔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고집을 굽혔지만 그녀는 불화를 피하려고 생각이나 의견을 수정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9

왜 성인을 가르치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호기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일수록 자기 확신이 더 강해요. 그들의 야망은 외부인의 객관적인 눈에는 모호해 보이지만 자신들에게는 선명하고 성취 가능해 보이죠. 반면 성인의 경우…… 일부는 그저 즉흥적으로 등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삶에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와요. 자기가 뭔가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런데 이제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 ―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기회 ― 가 왔다는 느낌. 나는 그게 대단히 감동적이라고 생각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9

"투표로 그 자리에서 쫓아내거나."

"정부를 바꾸면 달라지리라는 건 되풀이되는 망상이에요."

"그건 절망에서 나온 조언이죠."

"아니, 현실주의에서 나온 조언이에요. 내가 절망한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하지만 선생님이 선거 때마다 투표했다는 것도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게 효과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하는 거죠."

"그런데 왜 투표를 하나요?"

"시민의 의무. 그렇게 기대되고 있으니까."

그 지점에서 나는 약간 열을 받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심 쓰는 척하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누구한테?"

"그…… 어, 나머지 유권자한테."

"내가 그들의 희망이나 꿈과 그 이후의 실망을 완전히 공유해야만 한다는 건가요? 정치가의 주요 기능은 실망을 주는 거예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50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경우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7

그냥 논쟁에서 지고 있을 때 모욕에 의존하는 일이 매우 흔하다는 걸 지적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닐은 나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배의 침상 밑에 밀어 넣는 트렁크가 아니에요."

나는 기죽지 않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다. "좋아요, 그럼, 음, 선생님은 페미니스트인가요?"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 ― 나는 여자예요."

그녀와 직선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는가? 아니, 이것도 모욕이다, 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내 말은, 나에게, 또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을 주도하거나, 심지어 동등한 자리에 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느냐는 거다. 그녀가 그걸 교묘하게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 그녀는 내가 만나본 여자 가운데 그런 교묘한 조종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 더 넓게, 다른 지평과 초점으로 사물을 검토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바라건대는, 내가 왜 그녀를 흠모했는지 알게 되었기를 바란다. 또 나는 그녀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사실을 흠모했다. 내가 이런 말을 안나에게 했을 때 ― 딱 그대로 ― 그녀는 나를 지적인 마조히스트라고 불렀다. 나는 그 딱지가 싫지 않았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52

또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중간에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61

남자와 여자. 오해와 오독, 거짓의 또는 게으른 동의, 좋은 의도를 가진 거짓말, 상처를 주는 투명함, 도발 없는 폭발, 감정적 나태를 감추고 있는 신뢰할 만한 다정함. 그리고 기타 등등. 자신의 마음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75

EF의 공책에서.



‒ "세상의 질서는 형편없다. 하느님이 혼자 창조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친구 몇 명과 상의를 했어야 한다 . 한 친구와는 첫째 날, 다른 친구와는 다섯째 날, 또 다른 친구와는 일곱째 날. 그랬다면 세상은 완벽했을 것이다." AC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77

‒ "여자에게 정절은 미덕이지만 남자에게는 노력이다." AC. 아, 남성적 경구의 익살맞음이란. 여기에 나라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 여자에게 사랑은 역사적으로 소유와 그에 뒤따르는 희생의 문제였다. 즉 소유되고 그런 다음 희생하는 문제. 지금도 계속된다, 전 세계에서. 위장도 더 잘되어 있고 ‘보상’도 커졌지만 늘 존재한다. 내 세대는 이에 항거했다(어느 모로 보나 첫 번째 항거는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 아주머니, 할머니를 보았고, 여자들이 결혼(또는 비혼)의 시점에 규정된다는 것 ― 또 스스로 규정한다는 것 ― 을 알았다. 몇몇은 이것에 대담하게 저항했지만 대부분은 여생 동안 굴복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원칙에도 불구하고 나도 면제된 게 아님을 인정한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80

‒ 공격의 한 형태로서의 연민. 연민을 주의하라, 정말로.

‒ 물론, 나 같은 종류의 여자는 유행에 뒤떨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유행을 따르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실제로 따른 적도 없지만. 내가 바란 것은 오히려 지속 가능성이다.

‒ 오, 사람들은 말한다, 저 여자는 결혼한 적이 없어. 하나의 삶을 묘사하고 포괄하는 그런 환원적인 방식.

‒ 나는 필요한 만큼 많은 친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가 내 인생에서 실제보다 더 중심에 있다고 상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고.

‒ 관계가 깨질 때면 여자 탓을 하는 경우가 늘 많았다. 남자가 달아나면 여자에게 그를 붙들어 둘 기술이 없다고 했다. 여자가 달아나면 여자가 변덕이 심하거나 타협을 모르거나 버티는 힘이 부족하다고 했다. 실제로는 아마도 지루해서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 "에마가 나쁜 어머니이기 때문에" 『보바리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무척이나 진지하게 나한테 말한 여학생. 맙소사.

‒ 내가 외로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나는 혼자이고,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혼자인 것은 강점이고 외로운 것은 약점이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치료책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MM이 지적한 적이 있는 것처럼.

‒ 나는 듣지 않아도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있다. "오, 저 여자는 일이 제대로 안 풀렸구나. 왜인지 궁금해. 아마도 너무 굽힐 줄 모르거나 타협할 줄 몰랐겠지." 그들이 뭘 알까? 그런데 도대체, 나는 종종 궁금하다, 흔히 말하는 이 "풀린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말로 하지 않는 생각과 겁먹은 화해로 이루어진 공동의 삶. 마음 한편에서는 자기 옆에서 자기만족적으로 코를 고는 그의 목에 빵칼을 들이대고 싶은데도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82

"‘사랑은 늘 본능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혼합이에요. 물론 우리는 이론적인 건 본능적인 것만큼 인식하지 못하죠. 그게 역사와 친족관계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거예요. 물론 나는 그 말을 가장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가장 인위적인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형태고, 또 가장 파괴적인 형태죠.’"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177

‘이제 사랑이 모두 과거에 속하게 되니 그걸 더 잘 이해하게 돼요, 그 선명함도 그 착란도.’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178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추천의 말 김연수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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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개정증보판 줄리언 반스 베스트 컬렉션 : 기억의 파노라마
줄리언 반스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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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속에 왜곡된 젊은 시절의 치기에 대한 이불킥을 이렇게 현학적? 지적으로 묘사한다고?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에 휘둘려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함을 이렇게까지 이야기 한다고? 로 마무리 …

# 한때의 이해와 감정이 전부일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

# 곱씹으며 읽으면 맛이 다른 글…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70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71

삶이 물처럼 흘러갔다. 한 영국인이 결혼이란 처음에는 푸딩이 나오지만 그다음부턴 맛없는 음식만 나오는 식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85

함께 휴가를 보내자는 말이 한두 번 오갔지만, 아무래도 둘 다 상대 쪽에서 계획을 짜고 티켓과 호텔을 예매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87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88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95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23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25

변호사 과정을 밟았지만 환멸을 느낀 나머지 결코 일선에 뛰어들지 않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길 변호사가 되겠다고 허비한 세월에서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더는 법도 변호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했었다. 이런 경우는 주위에서 꽤 흔한 편이잖은가.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26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 - 살아남은 우리 - 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33

여자는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절의 헤어스타일을 늙어서까지도 고수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과감히 쳐내는 게 두렵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더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에 줄곧 매달리는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넘나 뜨끔한 구절이다…) - P138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41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43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 -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들을 잃었다. 아내의 사랑을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50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몇 년전 영국의 자동차 운전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설문에 참여한 운전자 구십오퍼센트가 스스로 ‘평균 수준보다 양호한’ 운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마음은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

평균치란 말이 메아리쳐 울려퍼졌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베로니카가 보인 첫 반응은 내 머리숱이 줄어들었다는 지적이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51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57

에이드리언이 죽은 건 부럽지 않지만, 그 삶의 명징성은 부럽다. 그가 비단 우리보다 명징하게 보았고, 생각했고, 느꼈고, 행동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도 그럴 수 있었기 때문에 부럽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58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58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59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61

최후의 여행 - 터덜거리는 차에 실려 화장터의 커튼을 헤치고 가는 길 - 이 임박했을 때, 생을 접기 전에 그보다 좀 더 광범위한 과정을 밟아선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날 원망하지 말기를, 날 좋게 기억해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했다고, 날 사랑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이중 해당되는 경우가 단 하나도 없다 한들, 부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63

젊었을 땐 - 내 얘기이다 - 자신의 감정이 책에서 읽고 접한 감정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감정이 삶을 전복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현실을 규정해주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면, 그 감정이 좀 더 무뎌지고, 좀 더 실리적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런 감정이 지금 그대로의 삶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응원해주길 바란다. 자신이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이런 심정에 일말이라도 그릇된 것이 있을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66

누가 말했던가? 살면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 P195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건 이 길지 않은 분량에 담겨 있는 만만치 않은 사유의 무게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 P226

우리의 기억은, 아니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고 농락하는가. 그런 기억에 의존해 진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성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안이한가. 올더스 헉슬리는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라고 말했다. 헉슬리는 기억을 통해 인간은 역능적으로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고 설파하려 했겠지만, 반스는 그 ‘문학’이 자기본위적인 기만, 망상적인 허구일 수도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 P228

왜곡이 본질인 기억과 우연과 무상성이 본질인 시간의 담합이 만들어낸 파국이 아닐 수 없다. 경제현상에서 말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의 공포문학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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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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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현상의 짜집기가 소설이 되는구나 …

‘이거 나만 이상해?’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거창한 계획이나 사상 이전에, 그냥 세상이 이해가 안 돼서 참을 수 없는 거죠.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로나 우리의 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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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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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허를 찔린 기분이다. 이런 사랑 이야기일줄이야 …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이르자, 한아는 떠나버린 예전의 경민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28

항상성이란 견고해 보여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40

경민은 한아만큼 한아의 신념을 사랑했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50

중요한 결정을 언제나 한아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불안한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인 것도. 흔한 방식으로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방향으로는 걷지 않게 될 걸 알았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53

"너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해준 거 알아. 고맙게 생각해."

"미안해. 한도가 작은 남자라. 더 한도가 큰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다. 뭔지 모를 외계인이긴 하지만."

엑스는 정말로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덧붙였다.

"그때 내 자리와 모든 걸 넘기고 떠난 건, 짐작처럼 이기적인 행동은 아니었어. 언제나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던 걸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티를 낸 건 아니지만, 티를 내지 않아서 더 신경쓰였거든. 너무 애쓰고 있는 것 같아서."

"애썼지. 확실히 그때의 난 지나치게 애를 쓰고 있었어."

한아는 거의 전생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되짚어보았다.

"이젠 그러지 않니?"

"응. 따지고 보면 전혀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닌데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대화가 끊이질 않아. 매일 소리 내어 웃고, 서로를 할퀴지 않아. 경민이의 한도는 어디까진지 모르겠어."

언젠가 그의 것이었던 이름에 엑스의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힘겹게 부탁했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79

"다음번에는 속하게 된 곳을 더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함께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여기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지만, 다음번에는 꼭.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84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88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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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을 세상에 얼마나 더 줘야 할까. 이것은 투자와 수익의 문제일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롤링 선더 러브 중에서 - P34

적어도 오지랖쟁이들은 그녀를 아직 애정 시장의 자원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아무도 소개를 제안하지 않을 때가 오겠지. 연애나 결혼, 육아 같은 화두가 테이블에 오르면 쉬쉬하면서 내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눈치조차도 보지 않고 나는 원래 상관없는 존재라는 듯, 무슨 신선처럼 취급하면서. 그때가 오면 더 행복할까. 자원이냐 신선이냐. 다 싫은데.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롤링 선더 러브 중에서 - P35

이를테면 그 블로그는 섣불리 사버린 선물과 수신인을 잃어버린 편지, 고장난 장난감과 짝을 잃은 액세서리의 수납함, 고대의 맹희가 건축하고 현대의 맹희가 낙서하는 사적인 유적지였다. 행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스스로도 완전히는 기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에서 - P37

혼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둘이서 행복할 수는 없다는 전언에 맹희도 동의했다. 혼자를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 것. 적극적으로 혼자 됨을 실천할 것.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

"하지만 나 조맹희. 혼자가 아닌 적이 있었나."

혼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멀리 떠났다가도 돌아와 몸을 눕히게 되는 침대처럼, 있는 힘껏 뛰어올라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중력처럼 혼자 됨이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이미 혼자인데 어떻게 더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혼자는 다른 혼자보다 더 완성된 것일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에서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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