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말한 적이 있다. "시간에 속지 말고 역사 ― 특히 지성사 ― 가 선형적이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그녀는 고결하고 자족적이고 유럽적이었다. 이 말을 쓰다가 멈춘다. 머릿속에서 그녀가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이것은 내가 따르려고 애를 써온 경험칙이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17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우리의 의견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우리의 충동, 욕망, 혐오 ― 간단히 말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것 ― 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우리의 소유나 평판이나 공적 직책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억하라, 본성상 속박하는 것이 자유를 준다거나 네 것이 아닌 것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면 좌절하고 비참해지고 화가 날 것이며 신과 사람 탓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 것만을 네 것이라 생각하고 네 것이 아닌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단 하나도 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적이 없고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해치려 해도 너는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29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일종의 다윈주의로 본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자생존, 물론 이때 다윈이 가장 강한 자, 또는 심지어 가장 영리한 자를 적자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가장 잘 갖춘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생존하거나 우월하거나 군림하는 자는 더 잘 조직되고 더 큰 총을 휘두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죽이는 데 더 유능한 자들이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관념에서는 승리할 수 있지만, 관념은 총구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짜로 이기는 일이 거의 없죠. 그건 한탄할 일인데, 우리 모두 동의하겠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건 태만한 거겠죠.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두 손 놓고 ― 또 뇌도 놓고 앉아 ‘패자의 것은 승자에게로’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건 곧 ‘진실은 승자에게로’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30
"우리는 늘 자기 연민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600년 뒤에 태어나면서 서기 363년 페르시아 사막에서 모든 게 잘못되어 우리한테 불리한 패가 주어졌다고 상상하게 되면 ‘이건 내 탓이 아니에요, 선생님’ 하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따라서 내가 받은 패가 정상이라고 믿는 게 낫죠. 역사적 자기 연민도 개인적 자기 연민과 마찬가지로 매력이 없습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2
나는 가끔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고집을 굽혔지만 그녀는 불화를 피하려고 생각이나 의견을 수정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9
왜 성인을 가르치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호기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일수록 자기 확신이 더 강해요. 그들의 야망은 외부인의 객관적인 눈에는 모호해 보이지만 자신들에게는 선명하고 성취 가능해 보이죠. 반면 성인의 경우…… 일부는 그저 즉흥적으로 등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삶에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와요. 자기가 뭔가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런데 이제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 ―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기회 ― 가 왔다는 느낌. 나는 그게 대단히 감동적이라고 생각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9
"투표로 그 자리에서 쫓아내거나."
"정부를 바꾸면 달라지리라는 건 되풀이되는 망상이에요."
"그건 절망에서 나온 조언이죠."
"아니, 현실주의에서 나온 조언이에요. 내가 절망한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하지만 선생님이 선거 때마다 투표했다는 것도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게 효과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하는 거죠."
"그런데 왜 투표를 하나요?"
"시민의 의무. 그렇게 기대되고 있으니까."
그 지점에서 나는 약간 열을 받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심 쓰는 척하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누구한테?"
"그…… 어, 나머지 유권자한테."
"내가 그들의 희망이나 꿈과 그 이후의 실망을 완전히 공유해야만 한다는 건가요? 정치가의 주요 기능은 실망을 주는 거예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50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경우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47
그냥 논쟁에서 지고 있을 때 모욕에 의존하는 일이 매우 흔하다는 걸 지적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닐은 나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배의 침상 밑에 밀어 넣는 트렁크가 아니에요."
나는 기죽지 않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다. "좋아요, 그럼, 음, 선생님은 페미니스트인가요?"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 ― 나는 여자예요."
그녀와 직선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는가? 아니, 이것도 모욕이다, 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내 말은, 나에게, 또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을 주도하거나, 심지어 동등한 자리에 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느냐는 거다. 그녀가 그걸 교묘하게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 그녀는 내가 만나본 여자 가운데 그런 교묘한 조종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 더 넓게, 다른 지평과 초점으로 사물을 검토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바라건대는, 내가 왜 그녀를 흠모했는지 알게 되었기를 바란다. 또 나는 그녀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사실을 흠모했다. 내가 이런 말을 안나에게 했을 때 ― 딱 그대로 ― 그녀는 나를 지적인 마조히스트라고 불렀다. 나는 그 딱지가 싫지 않았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52
또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중간에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61
남자와 여자. 오해와 오독, 거짓의 또는 게으른 동의, 좋은 의도를 가진 거짓말, 상처를 주는 투명함, 도발 없는 폭발, 감정적 나태를 감추고 있는 신뢰할 만한 다정함. 그리고 기타 등등. 자신의 마음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75
EF의 공책에서.
‒ "세상의 질서는 형편없다. 하느님이 혼자 창조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친구 몇 명과 상의를 했어야 한다 . 한 친구와는 첫째 날, 다른 친구와는 다섯째 날, 또 다른 친구와는 일곱째 날. 그랬다면 세상은 완벽했을 것이다." AC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77
‒ "여자에게 정절은 미덕이지만 남자에게는 노력이다." AC. 아, 남성적 경구의 익살맞음이란. 여기에 나라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 여자에게 사랑은 역사적으로 소유와 그에 뒤따르는 희생의 문제였다. 즉 소유되고 그런 다음 희생하는 문제. 지금도 계속된다, 전 세계에서. 위장도 더 잘되어 있고 ‘보상’도 커졌지만 늘 존재한다. 내 세대는 이에 항거했다(어느 모로 보나 첫 번째 항거는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 아주머니, 할머니를 보았고, 여자들이 결혼(또는 비혼)의 시점에 규정된다는 것 ― 또 스스로 규정한다는 것 ― 을 알았다. 몇몇은 이것에 대담하게 저항했지만 대부분은 여생 동안 굴복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원칙에도 불구하고 나도 면제된 게 아님을 인정한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80
‒ 공격의 한 형태로서의 연민. 연민을 주의하라, 정말로.
‒ 물론, 나 같은 종류의 여자는 유행에 뒤떨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유행을 따르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실제로 따른 적도 없지만. 내가 바란 것은 오히려 지속 가능성이다.
‒ 오, 사람들은 말한다, 저 여자는 결혼한 적이 없어. 하나의 삶을 묘사하고 포괄하는 그런 환원적인 방식.
‒ 나는 필요한 만큼 많은 친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가 내 인생에서 실제보다 더 중심에 있다고 상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고.
‒ 관계가 깨질 때면 여자 탓을 하는 경우가 늘 많았다. 남자가 달아나면 여자에게 그를 붙들어 둘 기술이 없다고 했다. 여자가 달아나면 여자가 변덕이 심하거나 타협을 모르거나 버티는 힘이 부족하다고 했다. 실제로는 아마도 지루해서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 "에마가 나쁜 어머니이기 때문에" 『보바리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무척이나 진지하게 나한테 말한 여학생. 맙소사.
‒ 내가 외로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나는 혼자이고,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혼자인 것은 강점이고 외로운 것은 약점이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치료책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MM이 지적한 적이 있는 것처럼.
‒ 나는 듣지 않아도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있다. "오, 저 여자는 일이 제대로 안 풀렸구나. 왜인지 궁금해. 아마도 너무 굽힐 줄 모르거나 타협할 줄 몰랐겠지." 그들이 뭘 알까? 그런데 도대체, 나는 종종 궁금하다, 흔히 말하는 이 "풀린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말로 하지 않는 생각과 겁먹은 화해로 이루어진 공동의 삶. 마음 한편에서는 자기 옆에서 자기만족적으로 코를 고는 그의 목에 빵칼을 들이대고 싶은데도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82
"‘사랑은 늘 본능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혼합이에요. 물론 우리는 이론적인 건 본능적인 것만큼 인식하지 못하죠. 그게 역사와 친족관계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거예요. 물론 나는 그 말을 가장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가장 인위적인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형태고, 또 가장 파괴적인 형태죠.’"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177
‘이제 사랑이 모두 과거에 속하게 되니 그걸 더 잘 이해하게 돼요, 그 선명함도 그 착란도.’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 P178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추천의 말 김연수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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