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 물건을 버린 후 찾아온 12가지 놀라운 인생의 변화
사사키 후미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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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물질과 과도한 경쟁사회가 유발한 항시적 불안이
이제 소비와 욕망에 대한 서민들의 보이콧을 유발하고 있음.
결국 더이상은 무리임을 삶에 대한 사유와 스타일을 내세워 이야기함.
이제 충분히 그럴만한 시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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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지지 않는 마음
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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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나간 문화 속 인간관계가 가지는 미덕이 있었다.
가정, 가문, 마을.. 혈연에서 출발해서 연고로 이어지는 관계의 돈독함과 안정감.

개인의 정체성이 타고난 육체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운명성.

 

하지만 지나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수 없다.

 

그게 정말 언제부터인지는 모호하나
인간에게 자아라는 정체감이 생겨난 이후로
인간은 언제나 정신을 지향해 오고 정진해 왔다. 역사가 그러하다.

 

언제나 정신지향적으로 움직여왔고 지금도 그러하기에
언제나 틈만 나면 탈육체성을 비약시켰고
기계화, 자동화라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며,
개인이 가져야할 좀더 많은 자유와 선택과 권리라는 것도
운명적인 신체와 물질에서 조금이라도 덜 속박지워지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제 어떤 과학분야에선 정신을 육체에서 추출(?)해서 따로 영생하는 방법을 연구한다고도

한다.(?)

우리의 정신은 처음부터 지금껏 언제나 신체에 종속되는 걸 불편해 온듯 싶다.


하지만 정신지향적인 사회는
저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물질없이 부유하는 것이어서 불안하고 쉬이 피로해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름의 장단을 지닌 이야기일뿐
각 시대에 종속된 인간은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알 수도 없고 그냥 그 흐름위에 태어난

대로 살아갈 수 밖엔 없다.

예전 사람들도 그런 혈연지연으로 이루어지는 안정감과 종속감이 좋아서 그리 살았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그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리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운명이겠거니 하며 살았던 삶들이 모두 좋은 면만 있었던 건 아니지 않나.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겠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하게' 잡도록 해주는 것들은
이미 낡은 시대의 돌이킬 수 없는 방식들이고
나머지 방법들도 좀 막연한 이야기들로 느껴진다.
그래서 책이 뒤로 갈 수록 방향을 못잡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결국 핵가족화되고 개인이 파편화되면서 생겨나는
사회문화적 현상들은 저자에게도 도리가 없는 난해한 이야기들인듯 싶다.

이미 이렇게 된 상황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좀더 다른 관점으로 현대인의 부유하는 마음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나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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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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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 작가는 책 처음에 이야기 한다

 

'귀향'을 읽은 후 막연히 그 책의 작가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만나려면 그가 이끄는 알타이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알타이로 가야만하고
알타이로 가려는 이유는 귀향을 쓴 작가때문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까지 드는 이유는 좀 막연하다고.

 

책의 말미에 가면 좀 더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읽었다.
하지만 책이 다 끝나도록
배수아 작가가 갈잔 치낙이라는 작가를 만나러
알타이를 배회하는 여정에 오르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나와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그 이유라는 것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게 되었고 이 책의 독자에겐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생각지도 않은 무모한듯한 여행길,
알타이로 가게 된건  순전히 그곳에 사는 갈잔 치낙이라는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서였지만
책 내내 작가가 이야기 하는 것은
그곳에서 만난 갈잔 치낙 보다는
알타이와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풍광이 그려내는 삶과 죽음의 이미지, 또는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어떤 무엇에 대해서, 또는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정서적 교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독한 독백일 수도 있겠다.

 

'귀향'이라는 책을 모르기 때문에
그 책의 무엇이 작가를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알타이가, 그 땅의 '정령'이
'귀향'이라는 책을 통해서, 갈잔 치낙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배수아 작가를 그 곳으로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하하....;

 

*
도심의 광장에서 축제를 즐기는 그곳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젊은이란 어떤 장소,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생명의 반대편에 있는 것에 의해 충동되어 이곳으로 날아온 나는 그들에게서 냉담하게 시선을 돌렸다.'고 한다.

 

대신 그녀는 그 이후로 매일 만나게 되는
알타이의 '척박한 원시성'을 지닌 그 황량하고 외로운 풍광들
'수없이 많은 세월을 살아낸 늙은 암석과 허무한 시간의 자갈들, 그리고 차가운 흰빛의 커다란 뼈들로 이루어진 장소'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마치 비현실적이고 끝 모를 그곳의 모습은 때때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잊게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렇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 이후로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는
'암석과 뼈, 돌과 먼지의 석회빛 풍경'이 빚어내는 죽음같은 음울한 시공간에서
하지만 오히려
'생의 어느 순간보다 더욱 많이 살아' 있음을 느꼈고
'얼마나 큰 선물인가,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준다.


어느 때인가는 그런 삭막한 풍경들도 가지고 있었을 생명의 '온기'는 옛날에 사그라지고
이제는 메마르고 차가운 모습으로 적막하게 그곳에 그냥 존재할뿐인 물질들.

 

배수아 작가가 이야기해주는 그곳의 모습들은
영혼이 증발해버린 물질이 지니는 차갑지만 순수한 무엇을 연상시킨다.
작가가 그곳에서 '기계'를 연상한 것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태곳적 모습.
아마도 그것은 영혼이 존재하기 이전의 모습일 것이다.
순수한 물질의 모습.

언제고 때가 오면 모든 자아와 정념을 내려놓고 돌아가야할 모습.

 

그래서 작가는
그런 척박하고 황량한 곳에서 왠지모를 '자유롭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돌의 어머니, 쇠의 아버지'라고 표현할 만큼.

 

시작과 끝의 모습으로 그저 조용히 존재할 뿐인 존재들.물질들.
그곳에선 영혼을 지닌 자들 조차도 조용히 존재한다.

 

*

사노 요코의 책에서 읽었다.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었다고.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눈이라고. 그것은 숙명적이라고.

 

숙명적인 자의식.
이곳의 도시는 자의식이 넘쳐난다.
영혼이 없는 사물 조차도 마치 자의식을 지닌것처럼 보일만큼
무특정 다수에게 보여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치장되어 진다.

 

그러나 우리는 소란스런 욕망의 기운이 아닌 죽음의 기운에서
오히려 여기 살아있음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고 한다.
근원적인 슬픔이긴 하지만
지금 이곳을 더욱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누구인지 하는 상념에 빠지는 건 인간뿐이다.
결국엔 그런 자의식 마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힘을 잃을 것이지만
내가 지니는 영혼도, 삶의 기운도 희미해질 것이고 결국엔 사라질 것이지만
정신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한 물질이 남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결말적이고 본연적인 모습일 것이다.
차갑지만 순수한 물질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서로 구분되지 못하는 허공 속 빛의 입자처럼
나라고 구분되어지는 모든 것들은 사라진 채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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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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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사노 요코는 이야기 한다.

내 시대는 끝났다.
나도 끝났다... 라고.

 

나는 그녀를 상상해 본다.


전후의 너도나도 가난했던 시절
여자형제와 남자형제들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끼니를 떼우고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자라나는 어린아이에서
"가장 비참한 것 속에 익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릴만큼
철이 들어가고 있는 그녀를 상상해 본다.


젊은 시절의 사노 요코를 상상해 본다.
도쿄로 상경한 젊은 아가씨였을 그녀.
옷은 초라하게 입었어도 어린 사람들만이 지니는 특유의 생기발랄함으로
도쿄의 도심을 경쾌하게 걷고 있는 그녀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지나 
침대에 누운채 발가락으로 커튼을 열어젖히며 시큰둥하게 하루를 맞이하는 그녀를 상상해 본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끼니때를 해결하기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고 혼자서 먹고
가끔 이런저런 생각과 상념에 잠긴 그녀를 상상해 본다.

 

그녀를 상상해 본다.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욘사마에 빠져 티비앞에 붙어 있는 그녀를 상상해 본다.
봐도봐도 끝이 없는 한류드라마를 뒤로 한채
엄마가 계시는 요양원으로 향하는 복잡한 마음의 그녀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제
나를 상상해 본다.
노년의 나를 상상해 본다.
늙고 노쇠해지는 육체 속에 갖혀가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젊은 시절 젊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느낄 수 없는 것이지만
당연한 게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는 낯설은 시간들이 언젠가는 오게 되고
그럼에도 여전히
눈떠지는 아침을 맞이하며
일상을 하루를 살아내야만 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분명 그것은 유쾌한 일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그녀처럼 홀가분하게 살아 내고 싶어진다.

 

젊음이 사라지고 그 번잡하고 소란스럽던 전성기를 살아낸 이에게 주어지는 시간.
육체도 마음도 더 이상 욕망과 번뇌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어지는 나이.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그 홀가분함은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보고 싶어진다.

 

"세상이 싫다"고 "넌더리가 난다"고 이야기 하는 그녀.
"남자의 생식기쯤은 마음대로 쓰도록 내버려"둬도 될만큼 별볼일 없는 것 아니겠냐고
시큰둥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할머니.
그녀는 이승과 장수에 대한 구질한 미련이나 욕망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홀가분해 보인다.

 

기약 없는 일상에서
기약이 생긴 시간을 반기는 그녀.
더 이상 돌을 언덕 위로 굴릴 필요없는 해방과 자유의 시간을 기쁘게 기다리는 그녀.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시대는 끝났다.
그녀도 끝났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나도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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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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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자인하는 것처럼 '먹물'다운 방식으로
함께 했던 이의 죽음을 애도해 주려 해요.

당신이 선택한 죽음을 존중한다고.

 

철학? 인지신경학? 진화심리학? 생물학? 행동발달학? 역사속 인물들?
'먹물'로써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끌어모아
이제는 아무말 할 수 없는 이를 위해 변명해 주려 해요.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고 싶어한 당신을 이해한다고.


*
역사적으로 볼때 암살을 당하면 당했지
자살을 선택한 대통령은 드물다.
그것도 가장 젊고 막 임기를 무난하게 끝마친.
그때부터 대선의 결과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쇼킹과 대박사건의 연속이었지만
이꼴저꼴별꼴을 반평생 경험해온 저자 정도 연배의 사람에겐,
대선을 '여섯번'이나 치러 본 사람에겐
그렇게까지 낯선 일들은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
그것은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호송되는 버스를
고속도로 위에서 헬기로 경박스럽게 생중계하던.
오전 댓바람부터.
정규방송들을 취소하고.

 

마치 개목에 목줄을 채워 질질 끌고 다니는 듯한.
어리둥절한 모욕과 비현실적인 치욕.

 

결과적으로
자기자신과 스스로가 지키고 픈 이들을
죽어서 살렸다.
아마도 유일한 방법.

 

정말 무서운 동네다. 그곳은.
그런 곳에서 배바지들은 오늘은
어제보다 더 당당히
이쑤시며 잘 살고 있다.

 

*
저자는 이제 좀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한다.
자의반타의반으로 지운 압박과 책임에서 벗어나
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한다.

 

소위 386 세대들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그 도덕적 감수성을 존중한다.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철지난 감성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실천가가 좋다.

 

그것이 타고난 세대적 성향인건지
힘들었던 시대적 상황이나 요구 때문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대적으로 막연한 부채감을 느낀다면 닭살일까.

 

뒤돌아 보았을때 삶의 스토리가 있는 저자. 
저자의 바람대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살아온 날들 보다는
좀더 삶을 향유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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