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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앤드루 포터의 데뷔 단편집인 이 작품은 미국 문단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미니멀리즘과 앤 비티의 감수성을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미국 교외의 중산층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들은 극적인 사건보다는 사건이 지나간 후 남겨진 '잔상'과 '침묵', 그리고 기억의 왜곡을 다룬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 중 상당수는 성인이 된 화자가 과거(주로 청소년기나 20대)의 특정 시점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자들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것"과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평온해 보이는 교외의 삶 이면에 도사린 불안, 알코올 의존, 불륜, 그리고 소통의 부재를 주 소재로 한다. 인물들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정서적으로는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왜 지나간 빛을 복기하는가
어떤 소설은 사건을 기록하고, 어떤 소설은 사건이 남긴 파문을 기록한다. 『빛과 물질에 대한 이론』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책의 표지처럼, 이 소설집 안에서는 비명을 지르거나 가슴을 치는 통곡이 들리지 않는다. 대신 방금 무언가가 깨졌음을 직감한 사람이 깨진 조각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그 조용한 찰나의 정적만이 감돈다. 작가는 인간의 고독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은 채 물리학자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냉정하고도 섬세하게 관측한다.
우리는 왜 지나간 일을 복기하는가. 과거를 수정하기 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지나간 시간을 회고한다. 그들은 현재의 안정된 삶-혹은 그렇게 보이는 삶- 속에서,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끊임없이 뒤돌아본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은 대체로 과거를 회상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판초콜릿을 똑똑 잘라내듯이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녹은 초콜릿을 부으면 끊기지 않고 이어지듯이 이어져있다. 결국 현재의 내 슬픔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그 좌표를 확인하고 싶다면, 과거를 더듬는 수밖에 없다. 내가 겪는 고통의 출처를 정확히 아는 것이 슬픔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보다는 이유를 아는 고통을 견디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하다.
앤드류 포터의 문장은 아름답다. 다만 상처를 장식하거나 고통을 미화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감정을 서술하기보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의 풍경을 묘사한다. 텅 빈 수영장, 늦은 밤의 현관 불빛, 눈 덮인 도로 같은 이미지들은 인물들의 내면보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우리는 흔히 문학이 우리를 위로해주기를 바란다.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해피엔딩을 약속해주기를. 그러나 『빛과 물질에 대한 이론』은 그런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삶은 원래 불완전하며, 우리의 선택은 대부분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었고,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지난날을, 내가 놓쳐버린 손들을, 내가 외면했던 구멍들을 정직하게 응시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과거라는 실험실에서 실패한 실험들이다. 우리는 빛을 꿈꿨으나 물질에 갇혔고, 영원을 맹세했으나 찰나에 무너졌다. 그러나 그 실패의 기록들이 모여 비로소 한 인간의 인생이라는 이론을 완성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실패에 대한 기록이자, 실패함으로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진실에 대한 헌사다.
그 진실은 우리를 구원하지도, 파멸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를 조금 더 깊은 사람으로, 타인의 침묵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 불확실한 빛과 무거운 물질의 세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