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자를 훔친 남자
후안 호세 미야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여기 이 남자를 보라. 텅 빈 공간에 현실 같은 인공세트장을 짓는 남자, 옆집 사내를 질투하고 열망하는 남자,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남자, 그림자를 훔친 남자, 그의 이름은 훌리오. 적당히 소심하고 조금 우스꽝스러우며 미치도록 가련한! 우리는 모두 이 남자를 닮았다. 정이현(소설가) -책 뒤표지에
표지에 그림자를 훔쳐 달아나는 남자의 본래 모습이 거꾸로 보인다. 그림자를 훔쳤을 때는 괜찮아 보이는데 그림자를 훔치지 않았을 때는 여자가 울고 있고 남자 역시 울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휑한 눈만 또렷하게 보인다. 눈만 보고도 이 남자의 표정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 남자! 무표정의 소유자이다. 왠지 공허한 이 느낌은 <그림자를 훔친 남자> 처음 한두 장을 넘기기 전부터 나타난다.
라우라와 훌리오 부부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다. 전화벨이 울리고 아내 라우라가 마누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정신을 못 차린다. 마누엘의 사고 소식은 이들 부부에게 엄청난 공허 그 자체.
"문제는 그 인물이 빠져버리면 그들 부부는 이제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9쪽)
"방금 사고를 당한 마누엘이 이들 부부네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이 년 전이었다. 비록 세 사람이 동갑이긴 하지만 부부는 자신들이 그의 후견인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왔다. 세 사람이 처음 알게 된 것은 훌리오가 자기 집 벽이 축축해진 것을 발견하고 옆집 문을 노크한 날이었다." (9-10쪽)
벌써부터 조금 짐작되는 점도 있지만 - 아내가 다른 남자의 죽음에 그토록 충격을 받는다는 건? 남편 훌리오가 그림자를 훔치지 않고 배기겠는가! 물론 누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순환논법에 버금가는 것이고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 확실히 초반부터 독자를 강렬하게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소설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한 스페인어권 작가의 미묘한 문학 세계라 할 수 있고, 좀 더 우리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산업시대 이후에 이어진 가족 해체와 그로 인한 소외, 공허, 허무와 같은 소모적인 감정의 만연이다. 워낙 악성 종양처럼 널리 퍼져 있긴 하지만 이것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IMF 초창기 시절, 우리집 막내가 식구들에게 준 스트레스는 참으로 막강했다. 서비스직 특성상 아침엔 조금 늦게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고객 응대에 바쁜 아이였는데 집에만 오면 사람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무관심을 가장한 거드름을 그렇게 피워댔다. 그걸 알면 다행인데 잘 모르는지 한 번은 자기보다 약간 직급이 높은 직원이 자신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호소하더라면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런 식이다. 대충 들어보니까 식구들이 겪는 것과 비슷했다.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네가 조금 관심 가지고 대응해 주고 그래"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이러한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무관심과 거드름, 소외, 공허, 허무를 직접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 더 쉽게 빠져들 수 있고 공포 소설이 아님에도 기괴한 느낌까지 들 수 있다.
영화 세트 제작자인 훌리오와 물리치료사인 라우라 부부의 엄청난 공허와 쓰여진 작품은 없지만 아무튼 작가였던 이웃집 남자. 그리고 나머지...
주택 개조 사업을 하는 훌리오의 아버지와 훌리오의 새엄마 루이사,
루이사의 딸이자 훌리오와는 배다른 동생 아만다, 아만다는 아이와 혼자 살고 있다.
훌리오와 라우라 부부가 살고 있는 안뜰이 있는 공간, 옆집과 붙어 있는 창문이 없는 욕실...등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들 부부의 삶을 부연해 주고 음산함을 더하는 보조 역할과 같았다. 어떻게 보면 억지 설정 같기도 한 부분이 참 많다. 진짜와 가짜,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남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남과 여, 잎담배를 피워대는 어른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 거울 속으로, 이도 저도 아닌 코마 상태[[coma, 뇌사 상태], 인터넷 메일로 주고받는 사랑의 언어 등 어쩐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평론가들이 이러쿵저러쿵 할 만한 이야기는 엄청 많을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대칭 구조, 이분법, 진짜와 가짜 같은 사람을 가지고 놀며 속이는 듯한 느낌, 일부 서양 사람들이 지니는 거북한 느낌이 들 정도의 개방적인 태도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 소설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공허함에 시달리는 현대인들, 한 가지에 진득하니 만족하지 못하고 정반대의 다른 것을 욕망하는 시선, 진짜와 가짜를 의심하게 만드는 인터넷 공간에서의 삶, 어른들의 잘못인 입양 · 이혼 · 외도 때문에 정체성의 미로를 헤매는 아이들, 자유를 추구한다면서 무분별하게 훌러덩 난처한 모습들, 진정한 줏대가 뭔지도 모르고 물렁한(우유부단한) 이 시대의 남과 여... '흔들리는 자신을 무엇으로 진정시킬 것인가' 이 소설은 묻고 있다.
훌리오와 라우라는 함께 산다.
너와 나는 함께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