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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소중한 것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만났다. 하루키!
그렇다고 젊은 날 하루키의 작품들에 그렇게 열광했던 나는 아니다. 별다른 주관 없이(세상이 어떤 곳인지 몰라 관망하면서 내 소중한 주관을 싹도 틔워보지 못하고 가슴 깊이 감추어 두었던 듯)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여 너무 튀면 안 되니까 적당히... 책 재미를 느낀 것도 비교적 늦은 나이여서 하루키를 만났을 때는 한참 하루키 책광고가 판치던 시대가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왜냐하면, 말했다시피 나는 책을 발굴해서 읽을 정도의 독자가 아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하루키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참 음산하고 우울했다. 그러니까 당시 우리나라의 팔팔한 젊은이들은 유행 소설에 푹 빠져서 각자의 굴을 파고 자기 고독을 야금야금 맛보았다고 하면? 한참 즐겨놓고 이제 와서 '병 주고 약도 안 주는 꼴'이 돼 버리는 걸까.
잔말이 많다. 이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승리보다 소중한 것>, 책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폴짝 뛴다. 뭐 하고 지냈느냐는 내 물음에 친구는 약 3주 정도 시드니에 올림픽을 관람하러 갔었다고 한다. 올림픽은 정말 지루했단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기자 관람석에 앉아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철인 3종 경기, 포환던지기, 야구, 하키, 축구 등을 보다가 지겨워지면 나와서 맥주나 핫도그를 먹고 잘 때쯤 맥주 바에 들러...
이쯤 해서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스리슬쩍 자리를 뜰 것이다. 총 337쪽에 달하는 이 책의 겉핥기 내용이 바로 위와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책을 앞쪽 조금 읽다가 자리를 뜨고 싶었다. 특히 스포츠를 썩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더더욱.-이 시대에 솔직한 젊은이들이 많다지만 실상은 솔직하되, 감출 건 확실히 감추고 포장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게 안 된다. 참말 문제다, 문제..
그렇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독후감을 근사하게 쓰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 집필태도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한참 즐겨놓고 이제 와서 '병 주고 약도 안 주는 꼴'이 될까 살짝 조심스럽다.
하루키 씨는 편안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유명 원로배우가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서민들은 깜짝 놀라고 '나랑 정말 다른 세계 사람이구나'라며 반감 내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버리는 상황과 흡사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예전 그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복잡하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뭔가 시대의 허무를 흡수한 듯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는다. 조금 가볍고 경쾌한 편이다. 일본 소설의 특징인 짧고 토막진 문장 안에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개성-나쁘게 말하면 편견, 그저 그렇게 얘기하면 그만의 관점이 묻어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작가의 연세가 51세니까 그 나이 분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를 몸소 알려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거침이 없으시다. 영국, 호주, 북한, 심지어 자신의 나라 일본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신다. 덕분에 일본인들이 호주에 가는 이유가 코알라를 안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금지하자 관광객이 줄었다는 이야기와 작가가 풀어내는 거침없는 호주의 역사 부분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코알라는 신경이 예민한 동물이어서 쉽게 트라우마를 겪는다.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껴안고 쓰다듬고 떠들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사회 복귀'가 힘들어진다. (...) 이 법률이 통과되기 전에는 코알라 한 마리가 한 시간에 200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안겼다고 한다. 이건 정말 심한 듯. 나라도 미쳐 버렸을 것 같다." (143쪽)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어려운 올림픽을 직접 관람하면서 느낀 하루키의 기록은 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일정 시간 이상씩(때론 온종일) 텔레비전이라는 신과 마주 보고 산다. 네모난 사무실, 네모난 방, 네모난 텔레비전... 지구는 둥글고 우주까지는 방사형으로 쭉 쭉 뻗어가는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작고 네모지다. 올림픽이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얘기는 넘어가서 그러면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경기를 치르는가(경쟁하는가)? 텔레비전은 답해주지 못한다.
"시드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본문에 자세히 썼으니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말해 둘 게 있다. 도쿄로 돌아와 올림픽 녹화 중계를 보니 전혀 다르게 보였다는 것이다. 똑같은 게임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게임처럼 보인 것이다. 나는 TV 보는 일을 즉시 중단했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너무 혼란스러워질 것 같아서." (저자 후기 중에서)
진짜 생방송! 텔레비전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적인 감동을 주는 진정한 스포츠의 순간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고속 타수로 만나보자. 비록 요즘 아마추어 젊은이들의 글처럼 유쾌 발랄한 재미난 여행기도 아니고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 해설서도 아니며 복잡한 의미를 나름대로 담아보고자 노력한 소설도 아니지만 <승리보다 소중한 것>에는 '넘치는 이야기'가 있다.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승리에 대한 불타는 욕심으로 초긴장한 선수가 대개 실전에서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예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듯 보이는 하루키의 이번 작품은 현실의 짐을 잔뜩 짊어진 독자와 한결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