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1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착수 미생 1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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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삶을 리얼하게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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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하여 - 자유와 탄생편
김유정 지음 / 자유정신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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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하여 - 자유와 탄생 편

探我八考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8가지 고찰

 

金有情 지음 / 자유정신사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 같은데 그땐 류시화 씨나 이외수 씨, 달라이라마의 약간 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인도에 한 번 가보길 꿈꾸기도 했고, 낚시도 못하면서 낚싯바늘 호수에 동동 띄우고 마음 편안하게 살아봤으면... 그런 막연한 꿈을 꾸면서 사회가 변화하는 흐름을 타면서 열심히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노력은 했으나 남는 건 없더라. ㅎㅎ 훌훌 털고 무작정 내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안 되더라. ㅎㅎ 그래도 역시 ‘나를 찾는’ 여행은 언제라도 솔깃해진다.

 

이 책은 ‘나에 대하여 - 자유와 탄생 편’으로, 인문 철학 전문 출판사에서 김유정이라는 분이 인간 일반 삶의 개선을 위한 철학에 뜻을 두고 시리즈로 출간 예정인 책 가운데 한 권이다. 일단 나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고 보니 현실을 떠나 산으로 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이 책의 기본구성은 사흘 여정으로 삶의 예지자인 ‘붉게빛남’을 주축으로 저자를 포함하여 나를 찾는 여행에 동참하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산을 오르는 과정 그 자체이다.

 

산 아래 조그만 카페에서 처음에는 예지자와 세 사람이 모였는데,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하나 둘 동참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친구, 정의를 탐구하는 친구, 도덕에 열심인 친구, 예술을 사랑하는 친구, 철학을 공부하는 친구,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 “처음 자유를 위한 연대(連帶) 사람들은 자신들의 숨겨져 있는 [나]를 찾기 위해 붉게빛남과 함께 길을 떠났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그들이 이 모임에 왜 참여하고 있는지 어느 순간 이 모임으로부터 벗어날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붉게빛남을 따라 가고 있으리라.” (158쪽)

 

이야기도 때론 산으로 자주 간 것 같다. 너무도 명료하게 답을 제시해 줄 것만 같은 예지자의 말씀과 책의 구성. 그러나 답은 어디에도 없고 과정만이...

 

어찌 되었건, 철학에서 이론작업 하나를 하더라도 내가 있는 현실의 복닥거리는 삶을 떠나 한 번쯤 산으로 올라가 보는 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또한 산꼭대기에 이르러 앎의 확장을 맛보았다면 반드시 산에서 내려오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어쩐지 산을 오르다가 그대로 길을 잃고만 느낌이다. 사실 이런 느낌은 그리 낯선 느낌은 아니다. 여기저기 철학 공부했다는 분들 강의나 사적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뭔가 명료하게 이야길 하긴 하는데 납득이 안 갈 때가 많았다. 특히 서양철학 쪽이 위대한 몇몇 철학자를 두고 신을 모시듯, 나방이 불을 쫓듯 그렇게 쫓다가 그들의 이론을 줄줄 풀어내는 사람은 여럿 보았다. 서양철학의 약점을 극복하고자 철학을 공부한 바탕 위에 문학이나 여타 예술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군림하는 자세는 변하지 않는 듯했다. ‘나’를 철학에, 신에, 죽어 없어진 철학자에게, 몇몇 위대한 이론 앞에 제물처럼 바쳐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 잃어 버린 [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253쪽) 응? 너무 높이 올라가라고만 하지 말자. 철학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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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 중국사 지성의 상징 죽림칠현, 절대 난세에 답하다
류창 지음, 이영구 외 옮김 / 유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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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중국사 지성의 상징 죽림칠현, 절대 난세에 답하다)

류창(현재 퉁지同濟대학 중문과 부교수) 지음 ㆍ 이영구 외 옮김 / 유유

 

 

 

역사의 회오리바람이 오랜 세월 깊은 땅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2000년경 슬금슬금 깨어나 끝을 모르고 휘몰아칠 것만 같은 분위기다. 물론 욕심 많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우리나라는 지난 20세기 내내 여러 차례 격동의 시기를 겪어왔지만, 지금 깨어난 이 바람은 중국의 삼국 시대 이후 몇백 년에 걸친 대분열기를 예고하는 건 아닌가.

 

 

 

205년, 죽림칠현의 맏형 산도가 태어났다.

305년, 죽림칠현의 막내 왕융이 세상을 떠났다.

이 일곱 인물의 등장과 퇴장까지의 세월은 더 뺄 것도, 더 보탤 것도 없이 정확히 백 년이다.

그 백 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갔을까? 번영과 쇠퇴, 기쁨과 슬픔이 끝없이 반복되고 순환되었으리라.

백 년은 어쩌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일 뿐이지만, 진정한 풍류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19쪽)

 

 

그렇다면 먼저 죽림칠현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그룹 내에서의 중요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다.

 

1. 혜강嵇康(223~262) : 자는 숙야叔夜, 초국譙國 질銍(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수계濉溪. 숙현宿縣이라는 설도 있음) 태생.

2. 완적阮籍(210~263) : 자는 사종嗣宗. 진류陳留 울씨尉氏(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 속함) 태생.

3. 산도山濤(205~283) : 자는 거원巨源. 하내河內 회현懷縣(지금의 하남성 무척武陟) 태생.

4. 유영劉伶 : 자는 백륜伯倫. 패국沛國(지금의 안휘성 회북淮北) 태생. 생졸년 미상. 나이는 완적과 혜강 사이.

5. 상수向秀(227?~272) : 자는 자기子期. 하내 회현 태생. 산도와 동향.

6. 완함阮咸 : 자는 중용仲容. 진류 울씨 태생. 완적의 조카이며 생졸년 미상. 나이는 상수보다 약간 어렸음.

7. 왕융王戎(234~305) : 자는 준충浚沖. 낭야琅琊 임기臨沂(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속함) 태생. 왕융은 칠현 중에서 가장 어려서 산도보다 29세, 완적보다 24세, 혜강보다 10세 가까이 연하였음.

 

이상이 죽림칠현의 명단이다. 혜강, 완적, 산도가 핵심 인물이고 나머지 네 명은 보조 인물이다. (28쪽)

 

 

그렇다. 이 책에서 만나볼 ‘죽림칠현竹林七賢’은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위진 시대를 살아냈던 문인 그룹을 이르며, 이들 사후 거대한 나라 중국은 아주 오랜 기간 욕심 많은 자들의 손에 의해 분열기를 겪는다. 사실 학창 시절, ‘죽림칠현’을 언뜻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뭐하는 자들인지 뚜렷하지는 않고 한세상 유유자적 살다 갔다는 흐릿한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접할 때처럼 역사서를 읽는 재미가 우선이긴 했지만, 책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죽림칠현과 지식인이 과연 어떻게 연관 지어질까’ 하는 호기심도 크게 자리 잡았다.

 

역시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재미는 물론 모 중문학과 교수님을 만나 베일에 가려졌던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듯 귀담아들어 볼만한 이야기가 풍부했다. 역사서란 많이 알수록 재미나고 반대로 전혀 알지 못하면 가십거리조차 되지 않는 법인데, 이 책은 적절한 재미와 전문성 두 개 다 갖추었다. 그 이유는 이 책 앞날개에 쓰여진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2010년 10월 중국 CCTV 교양 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죽림칠현’을 주제로 강의했다. (...) 그에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세상을 살았던 죽림칠현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다원화된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제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전에 중국 CCTV 학술 교양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강의한 '현장 서유기' 36편을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낸 <현장 서유기>를 참 유익하고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 책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최근 다방면으로 급부상하려는 조짐을 보이는 중국답게 역사에 있어서도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화에 힘쓰는 모습이 부럽기조차 하다. 덕분에 천성적으로 권력의 추악함을 멀리하고 자유를 동경했던 그 옛날 배웠다는 사람들 즉 어떤 지식인 한무리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시기에 어떻게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어떤 끝을 보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단순 재미만을 위한 역사인물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지금 유유자적 대나무 숲에서 술이나 마시며 놀았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을지 모르는 ‘죽림칠현’이라는 한 시대의 인물들을 연구자의 해석까지 곁들여서 뼈아프게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 특히 가장 곧은 인물이었던 혜강의 길이 정말 옳았던 건지, 우리는 어떠한 관점으로 어떠한 해석을 해야 할는지... 핑계가 되겠지만 우리의 역사는 도무지 아무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혜강의 죽음이 삶의 가치와 존엄성을 높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앞으로는 혜강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기를, 그리고 혜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암울한 시대가 결코 반복되지 않기를.”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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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가야노 도시히토 지음, 임지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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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원제 : 暴力はいけないことだと誰もがいうけれど)

가야노 도시히토(파리 제10대학 대학원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 즈다쥬크 대학 국제관계학과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철학을 강의 중) / 임지현 옮김 / 삼화 / 187쪽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자유’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만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남은 생(生)은 상황과 여력이 되는 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내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작게는 강압적인 타인의 요구가 만만치 않음이요, 크게는 성폭행, 묻지마 살인, 협박 등 엄청난 공포심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이 개인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개인은 자유를 원하고 논하기 이전에 직ㆍ간접적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껏 배워온 바로는 폭력은 무조건 나쁘고 어떤 상황에서든 주먹을 휘두른다는 건 안 좋은 거 아닌가?

- 이 책에서는 단호하게 말한다. 폭력이 나쁘다고? 아니. 폭력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야.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폭력을 바탕으로 성립되었지.

 

이와 같이 음식이나 신체의 안전, 권력 등이 모두 폭력을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폭력은 사라질 수 없다. (21쪽)

 

그럼에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뭔가가 걸려서 폭력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일찌감치 이런 글을 남긴다.

 

우리가 실제로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상,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무의미할 뿐 아니라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왜 무책임하다는 것일까.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의롭게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폭력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안 된다’고 하면서 현실을 기피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포기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절대 안 돼”라든지 “용납 못 해”라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일수록 폭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표명하는 데에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22쪽)

 

정말 그랬다. 어떤 네티즌 한 명이 요즘 애들은 반공의식이 없다면서 국가안보를 부르짖는 글을 올렸는데 글 자체도 황당했지만, 댓글을 보아하니 자기는 그냥 도덕적으로 그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 부르르짖는 거였다. 대책은 더 대책 없다.

 

 

 

 

지금까지 종교(좋은 것)를 빙자해서 저질러온 수많은 악행, 전쟁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운데, 아직도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말끔하게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이처럼 폭력은 인간 존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임을 밝히며,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에 대해 매우 비중 있게 다루면서, 폭력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으므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자는 글로 마무리한다. 물론 푸코, 스피노자의 철학적 고찰을 함께 소개하긴 하지만 철학적 고찰이란 게 그렇듯 현실적으로 쏙 와 닿는 대책은 아니다.

 

아무쪼록 국가의 역할과 그 폭력의 제어가 굉장히 중요한 시점인 것만은 분명한데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지기만 할 뿐, 죄짓지 않고 사는 우리의 자유를 그다지 허용해주지 못하고 있다. 강제적으로 세금만 걷어갔지 우리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게 문제다.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책의 저자 가야노 도시히토는 몇 번을 깜짝깜짝 놀라게 일침을 가한다.

 

국가나 야쿠자 양쪽 모두 복종을 하면 보호를 해준다는 식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128쪽)

세금에는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 숨어 있다(118쪽)

폭력은 권력을 낳는다. (...) 왜 국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로부터 돈을 징수하는 것일까.

이는 스스로 노동하거나 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보다 폭력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노동의 성과를 거둬들이는 편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134쪽)

세금의 용도에 대해서도 국가가 세금으로서 거둬들인 돈은 반드시 민중을 위해서만, 공공을 위해서만 쓰이지는 않는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정치가나 공무원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민중이 선거나 여론을 통해 세금의 용도에 관여할 수 있게 된 것도 국가의 역사상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129쪽)

 

세금이 국민 다수의 삶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데 쓰일 것이란(또는 쓰여야 한다는) 생각은 “폭력은 나빠” 못지않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감상에 젖어서 또는 개인의 가치판단(저거 좋아, 이건 나빠, 이러지 마, 저래야 해 등등)만으로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세상일망정 그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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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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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20세기 초, 숫자상으로 한 세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는 온통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잠깐 밋밋하게 배우고 마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아주 참혹한 전쟁이다. 이 전쟁이 끝나고 그야말로 확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프랑스의 한 문인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7편 중 첫 권이 새 번역본(김희영 옮김)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전7편이라 함은 총 3천 페이지, 권당 400~500페이지에 달하는 대하(大河)소설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난 1998년 국일미디어의 완역본(김창석 옮김)은 전7편 11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니 일단 분량면에서 책 한 권 진득하게 읽기 힘든 현대인이 이 책을 선뜻 집어들 수 없게 한다. 정작 문제는 내용과 형식, 문체, 이 작품을 둘러싼 논의들에 있다. 굉장히 어렵게 돌려서 얘기한 셈인데, 쉽게 얘기하자.

 

먼저, 내용면에서 이 작품의 줄거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게 좀 애매해진다. 이렇게(간략하게 한 줄로 가령 “작가지망생의 고뇌”라든가) 얘기해도 맞고, 저렇게(엄청 장황하게 구구절절) 얘기해도 맞고. 무엇보다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작품읽기가 그렇게 수월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프루스트의 글 쓰는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는데, ‘의식의 흐름’기법이라고 해서 미리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 의거하여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주인공 ‘나’의 의식이 노니는 대로 문장이란 건 반드시 적당한 시점에 명료한 마침표를 찍어주어야 한다는 걸 잊은 듯 하나의 문장을 오래도록 붙잡고 늘어진다. 그럴수록 작품 속 ‘나’와 독자의 의식은 묘연해진다.

 

이쯤 1권의 시작을 알리는 게 좋겠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는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이 작품의 주제다.)

 

19세기 말, 평생 따로 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아니 작가가 되고 싶어 하기 이전에 프루스트 9세 무렵, 천식 발작이 먼저일는지 모른다. 어느 한 사람의 신체적 결함은 그 자신이 본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가기도 하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철학적이고 무한한 의미를 지닌 주제를 찾으려고만 하면, 금세 내 머리는 작동하기를 멈추고 내 주의력 앞에는 허공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내게 재능이 없거나, 뭔가 뇌에 병이 생겨 재능이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299쪽)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의 야유, 스스로 절감하는 문학적 재능부재로 인한 실망이 이 작품의 배경에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코르크를 바른 방에 틀어박힌 채 집필에만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긁적이는 첫 구절이 바로 저 위의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잠자리키스를 그렇게 갈구하던 침대공간으로 들어가 그 당시 콩브레에서의 ‘나’의 침대공간을 떠올린 것이다. 어른이 된 ‘나(독자)’가 작품에서 어리광쟁이 마마보이 ‘나’와 마주치니(1권 83쪽까지) 이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어리둥절해진다. 마치 ‘내가 이런 유치한 얘기나 듣자고 계속해서 이걸 봐야겠냐는 듯.’ 세간에 잘 알려진 마들렌 이야기는 이제 나올 참이다. 그리고 끓는 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나’에게 건네주었던 레오니 아주머니와 콩브레 주변 두 산책길 - 메제글리즈 쪽(스완네 집 쪽)과 게르망트 쪽. 산사 꽃 향기 짙게 풍기는 첫사랑 질베르트, 음악가 뱅퇴유의 쓸쓸한 죽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전7편의 중요한 가지들을 쓱쓱 스케치한 이 첫 권은 화자의 회상공간 현관 문턱에 해당된다. 자서전은 아님에도 자서전적 요소를 아니 생각할 수 없으며, 화자의 의식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나드는 온갖 실존인물과 허구적 요소가 마구 넘실거리면서 19세기 전후 유럽의 역사와 다양한 문화ㆍ예술분야(회화, 음악, 건축, 신화, 문학, 고전극 따위), 철학, 심지어 민감한 정치적 사안까지 욕심껏 끌어안기 때문에 이미 국내외 수많은 석박사 학위자들이 프루스트와 이 작품을 주제로 논문을 써냈으며, 쓰고 있다고 알고 있다. 주의할 점은 여기에 휘말리면 이 작품과 나만의 관계를 제대로 일구어낼 수 없다. 프루스트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고 독립된 존재로 그 자신의 두 발로 바로 섰을 때 비로소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해갈 수 있었듯 우리가 이 작품 한 번 만나보자고 코르크를 바른 방에서 칩거할 수만은 없지만, 되도록이면 주변 잡음을 제거하고 온전히 이 작품하고만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렇게 해서 이 작품은 상상ㆍ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는 ‘소설’이라는 문학 양식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머리가 꽤 찼다고 자부하는 지적인 독자들의 이성과 감성을 힘차게 펌프질해줄 것이다. 특히 이성을 맹신하던 시대가 종말을 고한지 한참 되었건만, 감성이 지나치게 외적인 요소들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 시대에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내면 깊은 감성의 영역을 이성(과학)이라는 베이킹파우더로 잘 버무려서 한 인간의 자아가 얼마나 깊고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지나간 시간은 이미 완전히 지나간 거야. 죽은 거야. 과거 따위.’

 

이 말에 깊게 동감하는 독자가 있다면 프루스트라는 한 인간이 도대체 어떠한 마술을 부려서 죽었다고 생각한 시간을 정말로, 진실하게 되살려냈는지 깊게 침잠하고, 깊게 끌어올리면서 완독을 시도해볼 일이다.

 

한 인간의 삶은 참말 예술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년 7월 10일 파리 출생 ~ 1922년 11월 18일 향년 51세

 

1903년(32세) 11월 26일 아버지(69세) 사망

1905년(34세) 9월 26일 어머니(56세) 사망

 

1909년(38세, 집필착수) 프티트 마들렌 과자의 경험

 

1

『스완네 집 쪽으로』

1913년(42세) 어렵사리 출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약 4년 4개월) 제1차 세계대전

전쟁 경험은 프루스트에게 새로운 고뇌와 성숙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2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공쿠르상 수상

1919년(48세) 출간

3

『게르망트 쪽』

1920년(49세) 출간

애초 집필을 착수할 당시 전3편으로 끝낼 예정이었다고 한다.

4

『소돔과 고모라』

1922년(51세) 출간

『갇힌 여인』을 퇴고하다가 극심한 피로로 호흡 곤란을 일으켜 사망

『스완네 집 쪽으로』출간 이후, 약 10년(1913~1922, 프루스트의 40대)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작품완성에만 몰두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3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쓰는 작가라면 10년 이상 한 작품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프루스트와 같이 자기 생의 촛불이 ‘훅’ 꺼지기 전까지

- 특히 생애 마지막 몇 년이 가히 예술이다 - 온몸을 불사르며 쓰는 경우는?

세상에 프루스트 말고 없지 않나 싶다.

5

『갇힌 여인』

1923년(사후) 출간

6

『사라진 알베르틴』(일명 달아난 여인)

1925년(사후) 출간

7

『되찾은 시간』

1927년(사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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