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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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20세기 초, 숫자상으로 한 세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는 온통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잠깐 밋밋하게 배우고 마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아주 참혹한 전쟁이다. 이 전쟁이 끝나고 그야말로 확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프랑스의 한 문인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7편 중 첫 권이 새 번역본(김희영 옮김)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전7편이라 함은 총 3천 페이지, 권당 400~500페이지에 달하는 대하(大河)소설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난 1998년 국일미디어의 완역본(김창석 옮김)은 전7편 11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니 일단 분량면에서 책 한 권 진득하게 읽기 힘든 현대인이 이 책을 선뜻 집어들 수 없게 한다. 정작 문제는 내용과 형식, 문체, 이 작품을 둘러싼 논의들에 있다. 굉장히 어렵게 돌려서 얘기한 셈인데, 쉽게 얘기하자.

 

먼저, 내용면에서 이 작품의 줄거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게 좀 애매해진다. 이렇게(간략하게 한 줄로 가령 “작가지망생의 고뇌”라든가) 얘기해도 맞고, 저렇게(엄청 장황하게 구구절절) 얘기해도 맞고. 무엇보다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작품읽기가 그렇게 수월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프루스트의 글 쓰는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는데, ‘의식의 흐름’기법이라고 해서 미리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 의거하여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주인공 ‘나’의 의식이 노니는 대로 문장이란 건 반드시 적당한 시점에 명료한 마침표를 찍어주어야 한다는 걸 잊은 듯 하나의 문장을 오래도록 붙잡고 늘어진다. 그럴수록 작품 속 ‘나’와 독자의 의식은 묘연해진다.

 

이쯤 1권의 시작을 알리는 게 좋겠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는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이 작품의 주제다.)

 

19세기 말, 평생 따로 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아니 작가가 되고 싶어 하기 이전에 프루스트 9세 무렵, 천식 발작이 먼저일는지 모른다. 어느 한 사람의 신체적 결함은 그 자신이 본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가기도 하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철학적이고 무한한 의미를 지닌 주제를 찾으려고만 하면, 금세 내 머리는 작동하기를 멈추고 내 주의력 앞에는 허공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내게 재능이 없거나, 뭔가 뇌에 병이 생겨 재능이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299쪽)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의 야유, 스스로 절감하는 문학적 재능부재로 인한 실망이 이 작품의 배경에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코르크를 바른 방에 틀어박힌 채 집필에만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긁적이는 첫 구절이 바로 저 위의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잠자리키스를 그렇게 갈구하던 침대공간으로 들어가 그 당시 콩브레에서의 ‘나’의 침대공간을 떠올린 것이다. 어른이 된 ‘나(독자)’가 작품에서 어리광쟁이 마마보이 ‘나’와 마주치니(1권 83쪽까지) 이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어리둥절해진다. 마치 ‘내가 이런 유치한 얘기나 듣자고 계속해서 이걸 봐야겠냐는 듯.’ 세간에 잘 알려진 마들렌 이야기는 이제 나올 참이다. 그리고 끓는 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나’에게 건네주었던 레오니 아주머니와 콩브레 주변 두 산책길 - 메제글리즈 쪽(스완네 집 쪽)과 게르망트 쪽. 산사 꽃 향기 짙게 풍기는 첫사랑 질베르트, 음악가 뱅퇴유의 쓸쓸한 죽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전7편의 중요한 가지들을 쓱쓱 스케치한 이 첫 권은 화자의 회상공간 현관 문턱에 해당된다. 자서전은 아님에도 자서전적 요소를 아니 생각할 수 없으며, 화자의 의식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나드는 온갖 실존인물과 허구적 요소가 마구 넘실거리면서 19세기 전후 유럽의 역사와 다양한 문화ㆍ예술분야(회화, 음악, 건축, 신화, 문학, 고전극 따위), 철학, 심지어 민감한 정치적 사안까지 욕심껏 끌어안기 때문에 이미 국내외 수많은 석박사 학위자들이 프루스트와 이 작품을 주제로 논문을 써냈으며, 쓰고 있다고 알고 있다. 주의할 점은 여기에 휘말리면 이 작품과 나만의 관계를 제대로 일구어낼 수 없다. 프루스트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고 독립된 존재로 그 자신의 두 발로 바로 섰을 때 비로소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해갈 수 있었듯 우리가 이 작품 한 번 만나보자고 코르크를 바른 방에서 칩거할 수만은 없지만, 되도록이면 주변 잡음을 제거하고 온전히 이 작품하고만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렇게 해서 이 작품은 상상ㆍ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는 ‘소설’이라는 문학 양식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머리가 꽤 찼다고 자부하는 지적인 독자들의 이성과 감성을 힘차게 펌프질해줄 것이다. 특히 이성을 맹신하던 시대가 종말을 고한지 한참 되었건만, 감성이 지나치게 외적인 요소들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 시대에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내면 깊은 감성의 영역을 이성(과학)이라는 베이킹파우더로 잘 버무려서 한 인간의 자아가 얼마나 깊고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지나간 시간은 이미 완전히 지나간 거야. 죽은 거야. 과거 따위.’

 

이 말에 깊게 동감하는 독자가 있다면 프루스트라는 한 인간이 도대체 어떠한 마술을 부려서 죽었다고 생각한 시간을 정말로, 진실하게 되살려냈는지 깊게 침잠하고, 깊게 끌어올리면서 완독을 시도해볼 일이다.

 

한 인간의 삶은 참말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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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년 7월 10일 파리 출생 ~ 1922년 11월 18일 향년 51세

 

1903년(32세) 11월 26일 아버지(69세) 사망

1905년(34세) 9월 26일 어머니(56세) 사망

 

1909년(38세, 집필착수) 프티트 마들렌 과자의 경험

 

1

『스완네 집 쪽으로』

1913년(42세) 어렵사리 출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약 4년 4개월) 제1차 세계대전

전쟁 경험은 프루스트에게 새로운 고뇌와 성숙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2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공쿠르상 수상

1919년(48세) 출간

3

『게르망트 쪽』

1920년(49세) 출간

애초 집필을 착수할 당시 전3편으로 끝낼 예정이었다고 한다.

4

『소돔과 고모라』

1922년(51세) 출간

『갇힌 여인』을 퇴고하다가 극심한 피로로 호흡 곤란을 일으켜 사망

『스완네 집 쪽으로』출간 이후, 약 10년(1913~1922, 프루스트의 40대)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작품완성에만 몰두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3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쓰는 작가라면 10년 이상 한 작품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프루스트와 같이 자기 생의 촛불이 ‘훅’ 꺼지기 전까지

- 특히 생애 마지막 몇 년이 가히 예술이다 - 온몸을 불사르며 쓰는 경우는?

세상에 프루스트 말고 없지 않나 싶다.

5

『갇힌 여인』

1923년(사후) 출간

6

『사라진 알베르틴』(일명 달아난 여인)

1925년(사후) 출간

7

『되찾은 시간』

1927년(사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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