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9
헤르만 헤세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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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부터 1942년, 무려 11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한 노력과 열정에 대한 보상으로 세계는 그에게 괴테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주기에 이른다...

요제프 크네히트... 유리알 유희는 이 '명인'에 대한 전기문에 가까운 형식과 내용을 취하고 있다. 베롤핑엔의 라틴어 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음악명인을 만남으로써 영재학교로의 편입학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다시 카스탈리엔이라는 최고권위의 종단으로 가서 유리알 유희의 명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여정... 그것은 크네히트에게 잠재되어 있던 '작은혁명'에 대한 의지를 부추길만한 충분한 여건이 되어 주었고 또한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그를 성숙하게 해준 기억들이었다.

'작은혁명'이라는 말을 크네히트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원성'이라는 개념으로 환언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아니 같은 개념이라 생각해도 좋다. 바로 그러한 이원적인 마음속 갈등은 (소설에서 언급하다시피) 크네히트를 내세와 속세를 초월한 최고의 '명인'으로써 인정받도록 해준 고마운 방황이며 고통이었고 깨달음이었기 때문에 헷세가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를 뒷받침함에 있어(어쩌면 '주제'가 될 수도 있는...)아주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영재학교와 카스탈리엔을 거쳐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 되면서 자기 마음속에서 던져지는 끝없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철저한 정신적 성찰과 학문적 업적에만 매진하는 카스탈리엔의 보수성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과 자신이 항상 호감을 가졌던 속세와의 조화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크네히트에겐 언제부턴가 카스탈리엔과 성직제도, 그리고 교육주와 종단 모두는 너무도 속세와 동떨어진 가치에 대한 맹종을 하고 있으며 몰아적인 상태로의 자아형성을 권장하고 육성하는 전문기관으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빵과 학문연구를 위한 비용과 여건이 속세의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부터 얻어진다는 사실을 도외시한체 무작정 속세에 대한 반감과 반항으로 점철되어진 염세적인 사상으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크네히트는 심한 모순점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속세로의 탈출로 이끌게 한 것이다.

그는 속세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어린 한 소년의 가정교사가 되어 내세와 속세의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진정한 '명인'을 키워내는 일이었다. 그러한 그의 바램은 데시뇨리의 외아들 '티토'를 맡게 됨으로써 현실화 되었고 그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가늠해 보기도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어렸을 때 은혜를 입었 던 그 음악의 명인에 대한 보답이었고 의무였기 때문에 티토를 보살피게 된 그의 현재는 너무도 황홀했을 것이다...

티토와 단 둘이 별장에서 마지막 대업을 위한 시작을 알리는 아침을 맞이했을 때였다. 그는 일출과 동시에 시작된 티토의 고요한 춤동작에 매료되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복받침과 감동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이 선 그자리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마치 너무도 따스하게 온몸을 감싸오는 태양빛과 한 소년의 춤의 언어가 자신에게 어떤 진리를 속삭이기라도 하는듯이 말이다.. 이어진 소년의 입수에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따르게 되는 크네히트...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은사였던 음악의 명인의 부름이었을까? 아니면 야코부스 신부의 뿌리치지 못할 유혹의 손짓이었을까? 그는 그렇게 그 호수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티토는 자신이 크네히틑 죽인것이라 자책하며 멍하니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다...

우린 갑작스런 이 마지막 사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카스탈리엔이라는 전형적인 보수적 유럽문화의 왕국에서 깨달음을 얻고 속세로의 전향을 꾀한 크네히트... 그 선구적인 혁명가의 최후는 내세에도 속세에도 귀의하지 않는 영혼의 자유와 삶의 무의미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을 향한 힘찬 날개짓이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단순한 나만의 관점일 따름이고 소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상의 여지는 고스란히 남겨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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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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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대표하는 천재시인 괴테! 이 소설에서도 역시 괴테만의 타고난 시적인 표현과 감성이 문장 곳곳에서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독일 문단의 한 축을 이루었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쓰여진만큼 조금은 극단적이고 비도덕적인 소설 내용은 평론가들로부터 적잖은 비난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요소이기도 하다.(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젊은 괴테의 슬픔'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리만큼 그의 실제경험담을 토대로 쓰여진 그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괴테가 25세 되던 해(1774년)에 불과 14주만에 쓰여진 '초스피드'소설이기도 하다. 유부남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한 자신의 친구 예루살램의 운명에서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 완성한 비극의 소설이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테르=괴테의 공식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괴테의 자전적 소설인 본 소설의 주요 내용은 이미 약혼녀가 있는 '로테'(실제로 괴테가 사랑했던 샤로테 부프에서 따온 이름이리라)에게 첫눈에 반한 순간 이성과 자제력을 상실해 버린 자신의 모든것을 바치게 되는 '베르테르'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이야기이다.

소설의 문체는 '서간체'로써 베르테르의 절친한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소식과 어머님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형식으로 시작하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온몸을 마비시킬정도로 매력적인 여인 로테를 만나면서 편지 내용의 대부분을 '상사병'에 시달리는 자신의 혼란스러움과 부자연스러운 일상에 대한 회의에 할애하게 된다.

괴테는 이러한 베르테르의 절실한 편지지의 공백을 활용하여 당시의 귀족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냉소적 풍자를 펼치고 직업의식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며 사랑의 가치와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와 도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다소 복잡한) 자신의 생각을 시시때때로 펼쳐보이기도 한다. 결국 해답은 칸트식의 '도덕율'에 부합하는 사회규범앞에 베르테르가 무릎을 꿇으며 끝이 나지만 괴테는 여전히 그러한 물음에 대한 뉘앙스를 남긴체 펜을 놓는다...

불륜과 사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불륜과 사랑이 동의어로 사용될 수 밖에 없는 다소 '비윤리적'인 진리를 무리없이 소화해 내고 있다. 알베르트라는 유능하고 건장한 한 남자의 약혼녀였던 로테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한 젊은이의 끝이 없는 정신적 혼란과 내적 방황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나 역시 베르테르의 절실함에 공감을 하게 된다.

에로스도 역시 신인것을... 신의 뜻에 따라 한 여인을 눈물겹도록 사랑하고 또 사랑했을 뿐인데, 신은 베르테르에게 죽음을 선물한다. 나는 마지막 결말이 오히려 더 '비윤리적'이라 생각한다. 도덕적 규범, 도덕적 가치라는 것도 결국은 나약한 인간이 뚜렷한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설정과 힘을 얻기위한 인위적 방편일 뿐이 아니던가! 그러한 너무도 인간적인 관념에 신의 뜻이 무릎을 꿇었음은 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수치인 것을... 베르테르의 운명은 어찌 이리도 부조리하단 말인가!

안타까운 베르테르의 죽음을 통하여 괴테는 그래도 현실적인 도덕적 가치의 손을 들어주며 (샤로테 부프에 대한)자신의 감정이 떳떳하지도 실현가능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샤로테에 대한 사랑을 접게 된다. 괴테자신은 베르테르(나 예루살램)처럼 자살로써 불륜을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질 않은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써 마감되지만 그 고귀한 사랑과 희생의 미덕은 오늘날의 젊은이에게도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너무도 시적인 사연이었다. 나도 사랑을 한다면 베르테르처럼 그토록 열렬히 한 여인을 사모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볼만한 아름다운 비극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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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니에.스텔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외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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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년, 괴테가 최초로 완성한(불과 18세의 나이때) 희곡이다. 에글레, 아미네, 에리돈, 라몬 4인방이 등장하며 매우 목가적인 분위기와 서정적인 대사들로 가득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물음을 던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글레와 라몬이 한쌍이고, 아미네와 에리돈이 또 다른 연인이다.

에글레와 라몬은 서로의 입장과 성격을 이해해주며 티격태격 다투다가도 금방 화해할 수 있는 성숙된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아미네와 에리돈은 '지나친'사랑으로인해 번진 집착과 소유욕에 의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연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의 '의처증'에 가까울 정도로 아미네를 신뢰하지 못하는 에리돈의 편협한 사고방식과 기가막힌 상상력은 (둘의)파멸의 불가피성을 내포하고 있을 정도이다.

괴테는 바로 후자에 설정된 연인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과 연 사랑이 무엇인지...? 진부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린 저 연인들의 모습을 다시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랑은 집착과 소유욕을 절대 벗어날 수는 없다. 그만큼 사랑은 시작과 함께 이미 구속과 속박을 전제로 한 행복의 수단이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돈처럼 지나치게 상대방을 구속하고 무모하리만치 자신옆에만 머물게 하려하는 '이기심'은 결코 사랑으로 승화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이들(동성이든, 이성이든)과 함께 그 사람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동반될 때에 비로소 풍요로운 사랑의 열매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이 본 희곡의 결론격이라 할 수 있겠다.

에글레의 앙증맞은 수완으로 에리돈의 어리석음을 각성케하고, 아미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행복한 미래를 예감케 하는 뉘앙스로 막을 내리는 본 작품에서 난 '사랑'은 '자유'와 '구속'과 '공유'의 혼합물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보게 되었다... 이책은 가장 '단순한'작품이라 사료되는 연인의변덕외에도 풍성한 읽을거리들이 잠복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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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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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 특유의 전개방식과 너무도 완벽한 문장력, 그리고 흥미진진한 스토리까지... 훌륭한 소설이 지녀야 할 장점들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본작품은 '이방인'과 함께 까뮈를 세계적인 문학가로 인정받게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제목에서 어느정도 감지할 수 있듯이 본작은 한 지방을 통째로 삼켜버릴만한 가공할 위력을 지닌 병 '페스트'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오랑'이라는 알제리의 작은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의 내용은 아주 정교한 철학적 의식과 고뇌를 바탕으로 천천히 진행되어 나간다.

너무도 인간적인 의리파 의사 리외를 주축으로 본능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오랑의 이방인 투루, 종교적인 비능률적 의식으로 페스트를 이겨보겠다고 외치는 판느루신부, 성실하고 충분한 문학적 재능을 지닌 그랑... 위에서 언급한 정도의 인물구도로서 소설의 주제가 형성되어 나간다고 볼 수 있겠다.

어느날 정체불명의 병 페스트의 습격으로 인해 마을의 수천마리에 이르는 쥐들이 나뒹굴게 되면서 페스트와 인간의 치열한 사투가 시작된다. 까뮈는 천천히, 서두르지 않으면서 리외의 존재를 빌려 이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된 마을의 모습과 사람들의 본능에 가까운 공포감, 그리움, 자포자기같은 필연적 감정들을 섬세하면서도 진실되게 그리고 있다. 페스트가 마을에 상륙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갈등에 관한 언급은 너무도 방대하여 이곳에 다 펼쳐보이지는 못하지만 그 모든 묘사와 서술들은 까뮈의 역량을 온몸과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로서 남겨두고 싶다...

까뮈는 부조리와 반항의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 페스트 역시 '이방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페스트를 인간의 절대악으로 규정하여 행복했던 지난 시절들에 반한 부조리로써 페스트를 적절히 자신의 이념과 접목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이 모든 부조리는 인간 스스로가 결자해지 해나가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까뮈는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의 부조리(악한감정)는 소설마지막 부분에서 '몇십년간 가구나 내복속에 잠자고 있다가 언제어디서 침투해 올 지 모르는 페스트'와 같은 존재로 비유되면서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즉,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한 모든 부조리는 항상 가능성을 지닌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까뮈는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일반인들이 직시하게끔 소설 '페스트'에서 유효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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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드 셰익스피어 전집 1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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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중 '그 정리가 가장 잘 되어있는'작품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희극작품이다. 멕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왕 '덩컨'의 총애하던 장군이었다. 하지만 마녀들의 예언과 자신의 권위욕에 휘말려 자신의 아내와 함께 덩컨을 시해하고 만다. '의도적인'계략의 반쪽 성공으로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나 절대 편치만은 않은 왕좌이다.
항상 악몽에 시달리고 귀족들의 심상치않은 의심의 눈빛들이 날카롭게 번뜩이는 상황에서 맥베스의 아내는 반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맥베스 역시 '사실'을 밝혀낸 귀족 '맥더프'에게 살해된다. 운명을 맹신하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체 기득권탈환을 감행한 맥베스의 불행한 최후는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해 준다. 인간은 만족할 줄 아는 동물이다. 끝이 없는 욕심과 집착이 방해가 되더라도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자제'라는 미덕이 있지 않은가... 맥베스의 비극적인 삶을 교훈삼아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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