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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김종해 지음 / 문학세계사 / 2023년 3월
평점 :
시인 김종해는 전문 출판인이자 등단 60년 시력의 문학인이다. 또한 시인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출판, 행정, 문학의 축을 그동안 충실하게 담당해 왔던 생활인이기도 하다.
"나는 고향 부산을 떠났다. (...) 수중에는 1,450원뿐, (...) 이제 나는 다시/ 고향 부산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 <서울 입성> 젊은 날 시인은 광야의 사막을 가는 모세처럼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떠났다. 가난과 고통의 타향살이 속에서도 시는 그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새벽녘, 아들의 연행 사실을 알게된/ 어머니는 부엌 연탄불 위에 된장 시래기국솥을 얹었다./ 연행되어 가는 아들에게 먹일 한 그릇의 뜨끈한 해장국밥." - <된장 시래기국>
어머니와 아내, 세아이의 아버지인 젊은 가장은 서슬퍼런 독재의 시절, 새벽같이 들이 닥친 형사들에게 연행당하면서도 어머니의 된장 시래기국의 따뜻함을 잊지 못한다.
"바다위에 차린 일천 첩의 반상 위에/ 섬들은 모두 떠날 수 없는 한 가족이다" - <신안 앞바다> 이제는 4대의 대가족을 꾸린 시인은 밥상위의 반찬같은 가족이 한없이 소중하다. 증손녀의 탄생을 축하하며 축하시를 헌정하고 얼마남지 않은 노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
"덩굴장미 꽃가지 한 송이 꺾으려면/ 꽃송이 하나 말고도/ 줄기에 매달린 예리한 가시/ 손끝을 찌르는/ 그 아픔마저도 가져가야 한다" - <덩굴장미꽃은 아름답다> 시인이 그동안 추구해온 시와 예술은 꽃송이만 가볍게 취해온 것이 아닌 고통을 수반한 아름다움이었음을 고백하면서 다시금 "시의 외연에 갇혀 오래 지냈으므로 (...)/ 나는 며칠간 무릎을 끓고/ 말의 닦달질을 계속해야 한다 - <나무연필로 시를 쓰다> 시인의 자아성찰이면서 요즘 젊은 시인의 번지르르한 외연을 비판한다. 다시금 시인은 통렬한 반성의 시간을 보낸다. "따뜻한 군불마저도 지피지 못했던 시들/ 쓰레기 분리 배출장에 가서도/ 버려야 할 저 시들 때문에/ 나는 괴롭다 - <시를 버리다>
팔순의 시인은 무위자연의 시심으로 무리하지 않고 우러나는 느낌을 그대로 덜어 담는다.
"바람이 눈에 보인다 (...)/ 가을 햇볕도 귀에 소리로 들린다 (...)/ 오늘도 길 밖의 바람이 친구처럼 눈에 보인다 - <나이 팔십 산수가 되니>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사랑하는 모든 대상은 억지로 그러하지 않다. 심지어 팔순의 시인은 바람이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모처럼 혼자 맞이하는 적요/ (...) 아내 눈치 때문에 보지 못했던 성인영화/ (...) 아슬아슬한 범죄자의 시간/ (...) 얼굴 붉히며 망연자실 바라보는 노인의 시간/ - <노인의 시간> 늙어도 시인이어도 남자는 남자다. 시간의 자투리 마저도 소중해지니 일탈의 작은 순간도 부끄럽지 않다.
외연에 갇힌 요즘 시는 어려워지는데 원숙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기게 하는 시인의 마음이 순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