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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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2년 전 어떤 길고 긴 여행중이었다. 나는 가져간 책들, 그러니까 ‘사월의 미, 칠월의 솔‘같은 소설들을 읽고 또 읽어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그리움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ebook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7번 국도‘와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구매해서 다시 또 몇번을 열렬히 읽었고, 결국 폰에 담아간 만화책까지 네다섯번을 읽고 난 뒤, 나는 일종의 텍스트 그로기 상태에 돌입하게 됐다. 링에 오른 복서가 계속해서 같은 펀치를 맞아가며 라운드를 넘기기만 할뿐인 고독하고 괴로운 상태였달까. 당시 내게 가장 넘쳐나는 재산은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틈만나면 글을 읽었고 일기를 썼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그리워서 텍스트에 대한 짙은 향수에 빠져갈 즈음, 우리의 여행에 솔이 합류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고, 나는 솔에게 부탁이니 내가 원하는 책 두권만 사서 가져다주지 않으련, 하고 물었다. 그렇게 솔이 사다준 책이 ‘여행할 권리‘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였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여행중에 몇번 읽었다. 가장 처음 완독했던 장소가 기억난다. 미얀마 양곤의 어느 펍이었는데, 피곤하다는 득을 숙소에 두고 나와 솔과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며 각자 책을 읽었었다. 꽤 분위기가 좋았던 그 펍의 나선형 목조 계단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대낮의 펍이란 이런 한가로운 분위기로군,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책을 읽어나갔다. 나는 솔이 가져다준 이 책을 펴자마자 앉은자리에서 완독했고, 곧 또 몇번을 더 읽으리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어제 잠이 안와 누운 침대에서 스탠드를 켜고 이 소설집의 두 편을 다시 읽었다. 두 편의 소설 중 아마 이 소설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편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이 펼쳐지던 사회상황 속에서 여자친구의 죽음으로 실연을 경험한 주인공이 그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설산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김연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몇가지 특징으로 아름답게 펼쳐보였다. 하나는 시대적인 거대서사의 흐름 속에 겪는 개인의 상실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적인 부분이다. 주인공의 여자친구는 시대의 등떠밀림에 부끄러움과 죄책감, 책임감을 느끼며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붕괴하고, 자신과 자신의 연인간에 존재했던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거시적이었던 세계는 결국 개인의 상실에 초점을 맞추고, 그 안에서 시대적인 모든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이 소설집의 첫번째 특징이다.

두번째. 소설 내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왕오천축국전‘은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한편의 학술지에서 출처한 듯한 문장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의문을 증폭시킬 때 즈음, 이야기의 바깥에 있던 화자인 ‘나‘가 등장하여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죽은 여자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그 책에 주석을 단 ‘나‘를 통해 주인공이 설산을 향해간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가 김연수의 소설을 별자리 그리기의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평했던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 표현은 아주 탁월하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아름답고 매끄러운 하나의 그림으로 엮어내는 김연수의 화술은 대단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법이 주제 자체를 드러낸다. 이것이 두번째 특징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연결되려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방식이 이야기의 층위를 넓혀 전체 서사를 아주 입체적으로 만든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김연수가 하고싶은 말은 무엇일까. 나는 아주 순진하게 말한다면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김연수의 또다른 장편인 ‘원더보이‘의 한 대사를 인용하면 더 설명이 쉬울 것이다.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김연수식 사랑이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설산의 주인공은 여자친구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고, 설산의 ‘나‘는 주인공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마지막을 상상해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에 진실이 있던지 없던지, 혹은 의미가 있던지 없던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김연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그런 기준을 해체한다. 모든것은 결국 쓰여질 수 없는 이야기들 속에 의미가 있으며,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 수도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그리고 그를 위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우리의 존재나 우리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의 유무와는 별개로 우리는 스스로의 상실을 극복하고 때론 이해할 수 없었던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해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이 소설집에서 보여지는 마지막 특징이다.

따라서 설산의 마지막은 너무도 아름답다. 실존적인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으나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는 그의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조심스레 들려주는 그 장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아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으로 적어넣던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 그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녀와의 실연을 이해해보려고 결국엔 소설까지 썼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사랑도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은 그는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으로 향한다. 어느것도 맞을 수 있고 틀릴 수 있을 때, 내 세계가 붕괴한 상황에서 내게 의미를 주는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긴 사랑의 기록이다. 무엇도 맞을 수 있고 무엇도 틀릴 수 있다면, 그 마지막 이야기는 내가 그렇다고 믿는 한 언제나 옳다.

나는 이런 김연수식 태도에 큰 위로를 받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일들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린 세계다. 나는 그 일들을 이야기로 거듭 써나간다. 때로는 불면의 밤에, 때로는 만취한 군중 속, 혹은 고독 속에서, 혹은 내 앞에 마주칠 그 많은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들로서 나는 나를 이해하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모두 옳을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면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믿고 위로받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상실을 극복하였다면 그것 역시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을 때 극복될 수 있다는 말에 체험적으로 공감한다.


+ 그리고 더 해야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어휘의 탐색꾼의 역할을 자처한 김연수의 노력이다. 이 책에는 지금은 쓰여지지 않아 잊혀졌지만 현실세계를 기록하는데에 더욱 정확한 의미를 갖는 유려한 어휘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푸접스럽게‘, ‘버성긴 마음‘, ‘끄느름한 하늘빛‘, ‘누기진 눈동자‘ 같은 것들. 언젠가 작가와의 대화같은 자리에서 한 독자가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책에 등장하는 어휘들이 낯설어 책을 읽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그러자 김연수는, 나도 공부하면서 써내려간 글이니 독자들도 공부하며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다. 최근 소설들에는 이러한 표현들이 많이 줄었지만, 그가 왜 이러한 어휘를 시간의 무덤 속에서 캐어내어 사용하였는지는 그의 다른 책인 ‘소설가의 일‘에서 밝힌 바 있다. 그때 그는 화가의 일에 이를 비유하였는데, 화가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정확한 빛깔을 찾아내어 사용하듯이, 작가가 사용하는 어휘라는 것은 화가가 사용하는 색과 같은 것이므로 작가에겐 정확한 어휘를 구사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러한 신념들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 굳이 여기서 ‘소설가의 일‘을 더 이야기해서 그가 이야기를 만들며 화자와 문장의 일치에 신경쓴다는 사실을 꺼내놓을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등산가에게는 등산가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고, 중공군 출신의 화자에게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있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깊은 밤, 기린의 말‘에서 그가 한 쌍둥이를 화자로 내세웠을 때, 심지어 아이의 문장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명받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책으로까지 내놓은 소설작법을 스스로의 작품에서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러한 성취가 그의 모든 소설에 편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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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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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 년 전 봄과 여름 사이, 그러니까 아마 거의 지금의 계절과 가까웠을 즈음에 나는 거의 갑작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급하게 네팔이라는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네팔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으며(동남아 근처에 있을 법한 이름이었다), 어떤 역사를 갖고 있고 어떤 건축문화를 향유하고 있으며 식문화와 종교와 기후, 풍토 등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주 무지한 상황이었다. 그런 나라에 물론 흥미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면 신기할 지경이지만, 사실 나는 그 나라의 이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바는 있었다. 역시 그로부터 수 년 전 읽었던 어떤 책에 의한 것인데, 나는 박범신의 나마스테라는 책을 읽고는 네팔과 네팔에 있다는 신성한 산들에 대해 일종의 환상같은 것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네팔은 물론, 그곳에 있다는 산에 내가 정말로 가게 될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네팔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한데 왜 그럴까? 나는 종종 그곳에서 만났던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비친 내 얼굴, 그러니까 양쪽 눈에 하나씩 총 두 개의 얼굴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할 것 같다가도 그때 함께 여행했던 사람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던 표정이라던지 바람을 맞으며 걷던 방식 같은 것들을 점점 잊어가기도 한다. 그때 나눴던 대화들과 걸었던 거리들과 먹었던 음식들, 그 더위와 그늘의 안락함과 누웠던 잠자리와 흐르던 강물, 내리던 빗소리같은 것들이 점점 잊혀져간다. 우리는 둘 중 어느 누구도 카메라같은 것을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의 여행에 대한 어느 객관적인 기록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끄적였던 낙서와, 회계장부같은 일기따위와, 오래도록 앉아서 고요한 유적지의 풍경을 그렸던 그림 같은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 그리고 지갑 속에 참 오랫동안 꾸깃꾸깃 접혀 넣어져있는 네팔의 화폐 한장도.

그때 나는 어떤 감정같은 것들을 믿고 있었는데, 혹은 맹세나 약속같은 것들을 생각하곤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내가 신성한 산 밑자락에서 보았던 커다란 식물의 씨앗이 날리던 풍경처럼 공허하기만 한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눈송이, 혹은 터진 곰인형의 채워져있던 속살같이 허공을 부유하던 씨앗들은 거대한 바위들 위로 솟아올라 계곡을 따라서 하릴없이 흩어졌다. 그것들은 어딘가에서 싹을 틔우고 지금쯤 열매를 맺었을까? 그때 내가 했었던 생각들, 그러니까 감정이나 맹세나 약속같은 것들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썩어 없어져버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나면 과연 그때 그 여행을 통해서 내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차라리 과연 나는 ‘실제로‘ 그 여행을 다녀오긴 한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어떤 사진도 남겨지지 않았고 모든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나는 정말 그곳에 다녀온 것이 맞을까? 흐린 날씨 탓에 윤곽만이 들떠있던 그 설산을 바라보며 내가 했던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런 재미없는 생각들은 종종 찾아와 날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안심시키는 것은 어떤 기억이다.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울 때, 내게 너무도 선명해서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기억, 기억이라기보다는 흔적이거나 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들. 그 장면들은 이런 것이다. 여행중에 동행인은 한 책을 들고 다니면서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혼자서도 읽었고, 나와 함께 있을 때도 읽었으며, 종종 잠들기 전이나 나른한 오후의 시원한 그늘 아래서 내게 소리내서 그 책의 장면들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며, 책 속의 인물들의 감정과는 거리감있는 정적인 말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종종 장난기가 섞여있기도 했다. 입을 크게 움직이지 않고 오물거리는 그 음성의 발음이 꽤나 정확해서 나는 그 책의 내용들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 책이 바로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였다는 사실이 결국 그 책에 대한 이야기의 이 기나긴 서문이다.

2.
나는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연수의 그 소설집을 십수 번을 더 읽었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서, 김연수의 소설을 왜 좋아하냐는 식의 질문을 들었는데, 나는 그 때 소통에 대한 노력을 언급했던 것 같다. 이 책의 모든 소설들에는, 그런 노력들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소통들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알지 못하던 관계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라고 믿었던 사람과 단절된 경험 끝에 진행되기도 하며, 때로는 1대1이 아니라 다대다의 형식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그만큼 김연수의 이야기 작법이 능수능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소설들이 탄생한 지점은 김연수가 인간에 갖는 애정과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고통을 겪었다. 지구가 텅 비어버릴만한 크나큰 상실일 수도 있고, 오랜기간 숨겨온 자신만의 부끄러운 기억일 수도 있고, 단순히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날 때에 느껴지는 권태나 허무같은 것일수도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두가 어떤 아픔을 겪었거나 그것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만나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김연수는 이 소설들을 통해서 언어를 통한 소통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겪을 수 있는지 다양한 장치를 통해 보여준다. 가령 외국인이 경험하는 한국어의 발음같은 것들이거나, ‘묻다‘와 같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한국어의 동사를 활용한다거나, 서투른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비문 투성이의 문장같은 것들. 그런 장치들을 지나쳐 결국엔 소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김연수가 하고자했던 이야기들이 명확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가 하는 말의 뜻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모든 이야기들은 연결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연결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연수는 그런 노력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 꼽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말하라면 ‘달로 간 코미디언‘의 마지막 장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이런 언급들이 무의미하게도 이 소설집에 속한 아홉편의 중단편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매력으로 빛난다. 나는 김연수의 장편들도 좋아하지만, 사실 더욱 자주 읽는 것들은 그의 소설집이다. 단편 혹은 중편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 모두에게 동등한 이야기를 쥐여주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내게 일종의 살아나갈 힘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이런 힘이다. 내가 실패했던 것은, 내가 그 날들을 잊어가거나, 그날의 약속이나 맹세같은 것들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동등하게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날이 의미없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매순간 노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며, 우리가 살아있는 한, 사랑한다고 믿는 한, 우리는 과거의 시간들을 반추하며 더욱 노력해야한다. 무엇에 대해 노력해야 하는가? 구구절절히 이야기했듯이, 한치도 모르겠는 서로의 언어를 듣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내것처럼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어떤 일련의 불꽃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그 불꽃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꽃은 우리의 상실일 수도 있고,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고통을 넘어선 어떤 사건일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그런 불꽃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 불꽃은 전염되어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어떤 지점을 형성한다. 서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전염된 우연의 불꽃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지금 김연수가 소설을 쓴다면, 분명 2014년의 그 가슴아픈 사건과 작년과 올해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던 촛불들을 불꽃으로 담아 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전염되어 우리를 형성하는 무엇들을 한순간에 뒤바꿔 놓는 불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하고, 노력해야한다고, 결국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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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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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더 자주 읽게 되는 것은 그의 산문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소설이 끝난 뒤 펼쳐지는 ‘작가의 말‘을 매우 신뢰하기도 한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펼쳐 보이는 그의 세계관이 마음에 든달까. 또한 그의 회화적인 공간과 시적인 은유 모두가 마음에 든다. 종종 은연중에 내가 쓰는 일기에도 그의 문장들이 녹아있다. 좋아하는 문장들은 메모장에 적어 두고 기억하려 애쓴다. 이 정도면 매우 성실한 팬이 아닐까 싶다.

그의 비소설 중, 단연 가장 많이 읽고 또 여행 중에 특히 읽게 되는 책이 바로 ‘여행할 권리‘다. 지난 번 대마도 여행 때에도 들고 가 순식간에 읽어내려갔었더랬다. 오직 우리에겐 여행할 권리만이 있다는 문장으로 끝이 나지만,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국경과 리얼리티에 대한 내용이다.

김연수가 여행한 일련의 장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의 아버지의 고향인 일본 나고야, 그가 소설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독일의 밤베르크, 중국의 연변, 미국의 버클리까지 다양한 공간을 넘나들며 세계와 문학의 경계,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는 리얼리티와 현실 사이의 이야기들이 그만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되었다. 만일 그의 팬이라면, 그의 소설들 중 어느 것들이 이 산문 속 어느 장소에서 탄생했는지를 알아보는 즐거움도 소소히 누릴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를 쓰기 위해 그는 만주로 넘어가 깐두부만 먹는 훈춘대씨를 만났고, 윤동주와 차학경을 기억하며 연변을 떠돌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그가 밤베르크의 빌라 콘코르디아에 예술가 자격으로 체류하며 쓰여졌다. 버클리에서의 후사코 할머니와의 만남 역시 그의 소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상 혹은 김해경을 치열하게 추적하며 쓴 소설인 ‘꾿빠이, 이상‘에 대한 추적기 역시 이 산문집의 마지막에 놓여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필체로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과시한다면 후반부는 보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이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글들이 펼쳐진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나고야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전쟁세대에 속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한 세계의 붕괴를 통해 발생하는 개인의 리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한다. 개인의 리얼리티가 세계라는 이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에 놓여 있을 때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인물들을 몇 알고 있다. 매년 새로운 한국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본의 S모군은 매번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올해에도 S모군은 어떤 예쁜 한국 여자에게 첫 눈에 마음을 빼았겼더랬다. 그러나 그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냉담했다. 그런 그녀에게 S모군이 던진 비애의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일본인인 것이 싫어.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얼마나 슬픈 문장인가. 한 여자(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 많은 여성들을 짝사랑했다)에 빠져 자신의 리얼리티를 가짜라고 여기는 한 젊은 남성이라니!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었다. 웃을 수밖에, 그 예쁜 한국 여자는 결국 내 여자친구가 되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S모군에게 마음을 줄 리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그녀와 만나지 않지만 당시 내가 들었던 S모군의 충격적인 고백은 무엇보다 깊이 기억에 남는다. 비단 일본인 뿐인가, 내가 아는 형님들 중 K모형 역시 마찬가지다. 해가 갈수록 점점 일본인처럼 변해가는 형의 모습을 눈치챈 것은, 내가 일본을 여행하며 만난 다수의 일본 어른들의 일본 특유의 제스쳐를 보며 형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였다. 그는 매년 겨울 일본을 찾게 된 것을 계기로, 이제는 그곳의 여름마저 섭렵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 그 지역의 축제에 참여하고 그곳의 지역민들과 어울리는 그의 리얼리티 역시 한국에 있는 것 같지 않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그의 일상은 일본에서의 진짜 일상을 위한 준비의 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불행은 아마 이런 지점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행복은 현실/기대라는 공식으로 정량화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현실이 0에 수렴하고 기대는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가 있는, 즉 분모는 무한대에 가깝고 현실은 제로인 지점에서 행복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은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혹은 자신의 리얼리티가 존재하는 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백 퍼센트의 만족감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결국 좌절하게 된다. 허무를 느끼게 된다.

이와 동시에 김연수는 국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국경이란 말 그대로의 물리적인 국경이었다가 곧 한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어떤 사건의 지평선에 대한 개념으로 환원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국경을 가져본 일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분단된 국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 어느 섬나라의 현실보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배나 비행기 따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은 월북 밖에는 없다. 그렇게 작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가.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념을 버려야 하고 국가로부터의 추방을 각오해야하는 우리는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 김연수는 차를 달려 북으로, 북으로 달려 그 한계를 경험했고, 러시아로 넘어가 두 눈으로 국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찾는 국경이란 그런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찾는 진짜 경계란, 그걸 넘고자 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밀어낸 일종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일련의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세계의 끝‘이라는 모티브, 그것은 진짜 세계와 비세계의 경계에 대한 물리적 실체가 아닌 한 개인이 넘어갈 수 없는 비물질적 한계선으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계를 넘어간 한국 문학사의 인물들로 차학경과 이상에 대해 주제가 넘어가며 이 책의 이야기는 본격화된다.

어쩌면 감옥과도 같은 이 현실(비관주의자로서의 세계관이 아닌 한국이라는 국적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서 인식되는 현실적인 인식을 말한다)에서 우리의 월경은 정말이지 현실적이지 않은 단어인 것만 같다. 우리는 국경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진짜 국경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우리가 갖고 있는 휴전선이 목숨과 사상을 걸고 넘나들어야하는 철책이라면 진짜 국경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것들을 걸고 온몸으로 그것에 부딛혀나가는 걸까?

내가 최초로 국경을 두 다리로 걸어 넘어갔던 것은 캄보디아에서 라오스로 넘어가던 2년 전의 봄과 여름 사이였다. 물론 육로로 넘어간 것을 포함한다면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넘어갔던 야간버스가 최초겠지만, 내게 더 의미있었던 것은 전자의 일이다. 캄보디아의 얼렁뚱땅한 벤을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간 라오스의 국경은, 정말이지 보잘 것 없었다. 생김새로 치자면 고속도로를 타다가 진입한 전주 IC와 비슷했고 넘어가는 절차상의 복잡함으로 따지자면 롯데월드에서 자유이용권을 구매한 뒤 검표원을 지나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유사했다. 국경 앞에서 우리는 벤에서 잠시 내린 뒤, 운전수가 내미는 표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입하고 놀이공원에서 표값을 지불하듯 일정 기간의 체류에 대한 비자 비용을 지불하고 배낭을 멘 채로 두 다리로 걸어서 국경을 넘어갔다. 삼엄한 경계와 날카로운 철조망은 물론이고 벽이나 바리케이트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 넓고 단단하고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사뿐히 건너가면, 뒤에 정차했던 벤이 천천히 우리 뒤를 따라왔다.

생각해보면 그 때 나는 약간, 김이 빠진다고나 할까. 우리가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놈, 그 놈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위축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고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월경이란 마치 월남이나 월북과 마찬가지로 고되고 험난하고 크디큰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거대한 행위였는데, 내가 마주한 국경이란 그다지도 간단하고 편리한 일종의 사무적인 행위의 장소였을 뿐이었다. 세계라는 넓은 범주에서 우리의 비극은 얼마나 사소한가.

다시 S모군으로 돌아가서, ‘한국인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왜 일본에 태어나서‘와 같은 생각은 물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비관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에는 언제나 낭만이 있으며 그것으로 한 인간의 인생이 극변하여 결정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행복=현실/기대 라는 공식으로 넘어가자면, 생각할 수 있는 보다 많은 현실들을 상정하되 특정한 값의 기대치는 저버리는 편이 좋다. 나로 말하자면, ‘어디든,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이라는 식의 생각은 하지만 딱히 현실에서의 리얼리티에 괴리감을 느끼진 않는다. 물론 종종 그럴 때도 있긴 하지만, ‘내가 원빈처럼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따위로 생겨먹어서!‘라던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일본이나 독일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같은 생각을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현실에 대해 철저하리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주어진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현재 내게 주어진 세계의 한계선과 현실의 범주에 대해서. 다만 내가 여행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내 현실에서 주어진 것들에 비관하지 않고 희망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내 세상의 끝을 가늠하고 그것을 온몸으로 밀어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여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독일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세계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 내 세계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고 나는 나 자신의 국경을 넓혀갈 수 있다. 그것이 이상이나 차학경이 넘었던 궁극적인 차원의 어떤 영역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세계는 내게 낯설다. 만일 내게 오직 여행할 권리만이 있다면, 나 역시도 그것을 통해 온몸으로 국경을 밀고 나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 세계의 끝에서도 언제나 세계는 낯설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기를, 호기심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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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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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통 이야기의 층위가 다층적이고, 인물의 심리에 깊게 파고들며, 문장에 감각이 살아있는 소설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하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살아온 세계 속에서 목소리를 잃은 자들의 입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소설이어야만 한다. 그런 모든 점들을 통틀어서 부족함이 없게 ‘이 소설들, 정말 좋다-‘ 하면서 읽은 것이 바로 이 소설집, 조해진의 ‘빛의 호위‘다. (써놓고 보니 김연수의 소설들이 모두 그러하다)

낯선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감탄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만큼 내가 독서에 게으르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 작가의 이 책이 정말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표제작인 ‘빛의 호위‘를 비롯해 총 9편의 소설들이 묶여있다. 하나같이 감각적인 문장들이 살아있으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담겨 있고, 무엇보다 유려하다고 할 만한 시각적 연출이 두드러진다. 아닌게 아니라 소설 속에서는 종종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연출로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의 백스토리가 펼쳐지곤 하는데, 이러한 연출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을 느낄 수 있다.

빛의 호위를 비롯해 소설 속에는 현재의 상징질서 속에 소외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불우한 가정사 속에서 친구가 준 카메라를 자신의 유일한 빛으로 여겨 사진작가로 성장한 권은, 동백림 사건으로 갑작스런 단절을 경험하게 된 유학생과 독일여성의 이야기, 언론사 파업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기자와 그 기자의 사진을 보고 작품활동을 재개한 재미교포 작가, 인문학과의 철폐로 직장을 잃고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는 전직 철학과 강사 등.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을 세상의 변두리로 몰아챈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시작되지만, 소설은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 사건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한다. 나는 그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인물의 상처에 집중할수록 더욱 가슴 깊이 와 닿는 세계의 이기성, 물질문명의 폭력성, 상징질서의 잔혹한 보수성 등이 부각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 소설은 소설 속 인물들을 있는 힘껏 위로하거나 응원한다.

2017년에 출판된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모두 근 수 년 간에 쓰여진 젊은 소설들이다. 또한 소설 속 시간적 배경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동백림사건과 유학생간첩조작사건 등의 잊어서는 안될 역사 속의 국가적 폭력사건들이 소환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 소설들의 층위가 세대를 걸쳐 진행되며, 사람과 사람을 다리삼아 전해지기 때문이다. ‘동쪽 백의 숲‘이 그러한 점에서 인상적이다. 독일과 한국의 문학가가 서로에게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사건이 서술되는 서간체 형식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이만큼 아름답고 슬픈 소설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상처와 슬픔은 세대를 통해 유전되고, 끝내 그들의 세대에서 치유된다. 국가적 폭력이 주는 상처는 이토록 씁쓸하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좋아하게 됐다. 앞서 말한 이유들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마지막 소설인 ‘작은 사람들의 노래‘에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부적절한 운영 끝에 언론에 폭로되어 해체된 고아원 출신인 주인공 균의 갈 곳 없이 처절한 분노가 향한 곳이 마치 나를 향하는 것 같아서, 정작 그들을 학대하고 방치하고 구타한 고아원의 원장이나 교사들이 아니라, 그곳을 매년 방문하여 신의 자애와 인간의 믿음을 노래하던 성가대를 저주했다는 것에서 나는 거울을 보는 것만 같은 자책감을 느꼈다. 독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소설은 많지 않다. 조해진의 다른 소설들도 찾아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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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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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나는 시코쿠의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가져간 책이 그 책에 바쳐진 헌사들에 비해서 그다지 뛰어나게 재미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결국 핸드폰에 항상 담겨 있는 몇 권의 책들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하루 중 정해진 쉬는 시간은 일과 후를 제외하면 점심을 먹은 뒤(대체로 오후 1시 쯤이다)부터 세 시 쯤까지 였으므로, 그 시간에 툇마루에 누워 뒹굴거리며 읽을 적당한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던, 그리하여 이내 내용 전체를 외울 지경이 되었던 소설을 다시 열었다.

나는 내가 뒹굴었던 툇마루의 오래된 방충망을 떼어내 집 근처 저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이던 경치 좋은 물가에 앉아 땡땡이라는 아주 근사한 단어에 대해 명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사한 단어 덕택에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이 책을 또 읽을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세풀투라의 노래를 듣던 세희의 모습을 묘사하던 첫 장에서부터, 그리고 짜장면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면들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소설들 중 가장 서정적이고 너무나도 사적인 문장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겪었던 첫 사랑, 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어쩐지 첫사랑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이야기가 결국 미성숙한 청춘들의 보편적이랄 수 있는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재현과 서연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정확하게 첫 사랑이라는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왜 첫사랑일까? 이 소설이 불러일으켜내는 나의 기억이 그 부분에 닿아있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문장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재현과 세희가 서로를 상처주면서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의 어느 한 기간을 함께 보냈다면 그것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정하는 부분에서.

나는 꽤나 이상한 방식으로 첫 연애를 관통해 왔다. 그것은 모든 더위를 녹여버릴 만큼 뜨겁기도 했고, 세상 모든 낙엽들을 쓸어버릴 만큼 매몰차기도 했으며, 사막의 모든 오아시스가 절멸해버린 것만큼 황폐하기도, 세상 모든 언어의 수사들이 시들어버릴 만큼 황홀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당시 내게 어느 친구가 권유했던 존 레논의 노래처럼, 세상은 그녀를 알게 된 후로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하늘은 더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고, 내 눈과 마음은 그 모든 것들을 향해 새롭게 열려졌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도 이내 끝이 나고야 말았고, 나는 상처 준 마음에 오래도록 신음했고, 자책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따라서 소설의 주인공이 내뱉은 이토록 간단하고도 명확한 그 문장은 내게 많은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 문장은 내게 첫 연애의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꽤 괴로운 일이기도 하면서 마음이 젖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은 비선형적이다. 그것은 어느정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삶을 통해 수없이 재구성해본 사람들이라면 십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는 통로가 있고, 우리는 때로 여러 방법을 통해 그 통로의 틈새를 통해 이전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것은 동시적이며 통시적이다. 현재와 동시에 과거가 나란히 따라가는 인생이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을지도 모른다. 김연수는 그러한 시간의 성질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 소설 속에 차용하여 구성상의 특징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수 많은 시간의 책갈피가 있으며, 그 시간의 책갈피는 결코 시간의 순방향을 따르지 않는다. 책갈피의 이름들 역시 너무나 사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연애를 기억하고 반추하는 방식과 같다. 개개인의 이야기에 이름 붙여진 책갈피들의 이름은 얼마나 엉뚱할 것인가. 거리의 칼국수집 간판, 낯익은 머나먼 도시의 이름, 오래된 가수의 남들은 모르는 노래의 제목 같은 것들. 이 소설 속 책갈피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7번 국도‘라는 모티브에 관여한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책갈피들을 통해 ‘나‘와 재현과 서연과 세희의 이야기들을 동분서주하다보면 어느새 아쉽게도 소설이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라면, 약간의 허무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한 희망에 대한 송가, 혹은 매일 이별하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들의 성장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하지 않겠다. 세희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가장 아름답다. 그 안에는 신비주의적인 성찰과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 대한 아득한 애정, 상실을 딛고 일어선 단단한 자의 아름답고 견고한 모습들이 들어있다. 나도 그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편지였다.

이 소설 속 곳곳에는 그들의 시간 만큼이나 이 책을 읽어온 나의 시간까지 함께 들어있다. 그들의 책갈피의 이름들과는 별개로, 나만의 키워드와 나만의 기억법으로 이 소설 곳곳에 나의 기억들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이 건강하게 미래로, 무엇이 나오든 단 하나가 아닌 모든 것을 열망하는 미래로 향했으면 좋겠다. 이만큼 애정을 갖고 오래도록 지켜본 허구의 존재들이 또 있을까. 이런 문장들로 내가 이 소설에 갖는 애정들이 다 표현되었으면 좋겠다. 어서 김연수가 새 작품을 내어 주었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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