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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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 년 전 봄과 여름 사이, 그러니까 아마 거의 지금의 계절과 가까웠을 즈음에 나는 거의 갑작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급하게 네팔이라는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네팔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으며(동남아 근처에 있을 법한 이름이었다), 어떤 역사를 갖고 있고 어떤 건축문화를 향유하고 있으며 식문화와 종교와 기후, 풍토 등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주 무지한 상황이었다. 그런 나라에 물론 흥미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면 신기할 지경이지만, 사실 나는 그 나라의 이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바는 있었다. 역시 그로부터 수 년 전 읽었던 어떤 책에 의한 것인데, 나는 박범신의 나마스테라는 책을 읽고는 네팔과 네팔에 있다는 신성한 산들에 대해 일종의 환상같은 것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네팔은 물론, 그곳에 있다는 산에 내가 정말로 가게 될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네팔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한데 왜 그럴까? 나는 종종 그곳에서 만났던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비친 내 얼굴, 그러니까 양쪽 눈에 하나씩 총 두 개의 얼굴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할 것 같다가도 그때 함께 여행했던 사람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던 표정이라던지 바람을 맞으며 걷던 방식 같은 것들을 점점 잊어가기도 한다. 그때 나눴던 대화들과 걸었던 거리들과 먹었던 음식들, 그 더위와 그늘의 안락함과 누웠던 잠자리와 흐르던 강물, 내리던 빗소리같은 것들이 점점 잊혀져간다. 우리는 둘 중 어느 누구도 카메라같은 것을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의 여행에 대한 어느 객관적인 기록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끄적였던 낙서와, 회계장부같은 일기따위와, 오래도록 앉아서 고요한 유적지의 풍경을 그렸던 그림 같은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 그리고 지갑 속에 참 오랫동안 꾸깃꾸깃 접혀 넣어져있는 네팔의 화폐 한장도.

그때 나는 어떤 감정같은 것들을 믿고 있었는데, 혹은 맹세나 약속같은 것들을 생각하곤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내가 신성한 산 밑자락에서 보았던 커다란 식물의 씨앗이 날리던 풍경처럼 공허하기만 한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눈송이, 혹은 터진 곰인형의 채워져있던 속살같이 허공을 부유하던 씨앗들은 거대한 바위들 위로 솟아올라 계곡을 따라서 하릴없이 흩어졌다. 그것들은 어딘가에서 싹을 틔우고 지금쯤 열매를 맺었을까? 그때 내가 했었던 생각들, 그러니까 감정이나 맹세나 약속같은 것들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썩어 없어져버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나면 과연 그때 그 여행을 통해서 내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차라리 과연 나는 ‘실제로‘ 그 여행을 다녀오긴 한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어떤 사진도 남겨지지 않았고 모든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나는 정말 그곳에 다녀온 것이 맞을까? 흐린 날씨 탓에 윤곽만이 들떠있던 그 설산을 바라보며 내가 했던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런 재미없는 생각들은 종종 찾아와 날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안심시키는 것은 어떤 기억이다.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울 때, 내게 너무도 선명해서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기억, 기억이라기보다는 흔적이거나 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들. 그 장면들은 이런 것이다. 여행중에 동행인은 한 책을 들고 다니면서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혼자서도 읽었고, 나와 함께 있을 때도 읽었으며, 종종 잠들기 전이나 나른한 오후의 시원한 그늘 아래서 내게 소리내서 그 책의 장면들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며, 책 속의 인물들의 감정과는 거리감있는 정적인 말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종종 장난기가 섞여있기도 했다. 입을 크게 움직이지 않고 오물거리는 그 음성의 발음이 꽤나 정확해서 나는 그 책의 내용들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 책이 바로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였다는 사실이 결국 그 책에 대한 이야기의 이 기나긴 서문이다.

2.
나는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연수의 그 소설집을 십수 번을 더 읽었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서, 김연수의 소설을 왜 좋아하냐는 식의 질문을 들었는데, 나는 그 때 소통에 대한 노력을 언급했던 것 같다. 이 책의 모든 소설들에는, 그런 노력들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소통들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알지 못하던 관계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라고 믿었던 사람과 단절된 경험 끝에 진행되기도 하며, 때로는 1대1이 아니라 다대다의 형식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그만큼 김연수의 이야기 작법이 능수능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소설들이 탄생한 지점은 김연수가 인간에 갖는 애정과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고통을 겪었다. 지구가 텅 비어버릴만한 크나큰 상실일 수도 있고, 오랜기간 숨겨온 자신만의 부끄러운 기억일 수도 있고, 단순히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날 때에 느껴지는 권태나 허무같은 것일수도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두가 어떤 아픔을 겪었거나 그것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만나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김연수는 이 소설들을 통해서 언어를 통한 소통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겪을 수 있는지 다양한 장치를 통해 보여준다. 가령 외국인이 경험하는 한국어의 발음같은 것들이거나, ‘묻다‘와 같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한국어의 동사를 활용한다거나, 서투른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비문 투성이의 문장같은 것들. 그런 장치들을 지나쳐 결국엔 소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김연수가 하고자했던 이야기들이 명확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가 하는 말의 뜻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모든 이야기들은 연결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연결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연수는 그런 노력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 꼽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말하라면 ‘달로 간 코미디언‘의 마지막 장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이런 언급들이 무의미하게도 이 소설집에 속한 아홉편의 중단편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매력으로 빛난다. 나는 김연수의 장편들도 좋아하지만, 사실 더욱 자주 읽는 것들은 그의 소설집이다. 단편 혹은 중편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 모두에게 동등한 이야기를 쥐여주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내게 일종의 살아나갈 힘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이런 힘이다. 내가 실패했던 것은, 내가 그 날들을 잊어가거나, 그날의 약속이나 맹세같은 것들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동등하게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날이 의미없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매순간 노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며, 우리가 살아있는 한, 사랑한다고 믿는 한, 우리는 과거의 시간들을 반추하며 더욱 노력해야한다. 무엇에 대해 노력해야 하는가? 구구절절히 이야기했듯이, 한치도 모르겠는 서로의 언어를 듣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내것처럼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어떤 일련의 불꽃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그 불꽃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꽃은 우리의 상실일 수도 있고,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고통을 넘어선 어떤 사건일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그런 불꽃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 불꽃은 전염되어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어떤 지점을 형성한다. 서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전염된 우연의 불꽃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지금 김연수가 소설을 쓴다면, 분명 2014년의 그 가슴아픈 사건과 작년과 올해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던 촛불들을 불꽃으로 담아 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전염되어 우리를 형성하는 무엇들을 한순간에 뒤바꿔 놓는 불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하고, 노력해야한다고, 결국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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