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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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연수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더 자주 읽게 되는 것은 그의 산문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소설이 끝난 뒤 펼쳐지는 ‘작가의 말‘을 매우 신뢰하기도 한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펼쳐 보이는 그의 세계관이 마음에 든달까. 또한 그의 회화적인 공간과 시적인 은유 모두가 마음에 든다. 종종 은연중에 내가 쓰는 일기에도 그의 문장들이 녹아있다. 좋아하는 문장들은 메모장에 적어 두고 기억하려 애쓴다. 이 정도면 매우 성실한 팬이 아닐까 싶다.

그의 비소설 중, 단연 가장 많이 읽고 또 여행 중에 특히 읽게 되는 책이 바로 ‘여행할 권리‘다. 지난 번 대마도 여행 때에도 들고 가 순식간에 읽어내려갔었더랬다. 오직 우리에겐 여행할 권리만이 있다는 문장으로 끝이 나지만,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국경과 리얼리티에 대한 내용이다.

김연수가 여행한 일련의 장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의 아버지의 고향인 일본 나고야, 그가 소설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독일의 밤베르크, 중국의 연변, 미국의 버클리까지 다양한 공간을 넘나들며 세계와 문학의 경계,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는 리얼리티와 현실 사이의 이야기들이 그만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되었다. 만일 그의 팬이라면, 그의 소설들 중 어느 것들이 이 산문 속 어느 장소에서 탄생했는지를 알아보는 즐거움도 소소히 누릴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를 쓰기 위해 그는 만주로 넘어가 깐두부만 먹는 훈춘대씨를 만났고, 윤동주와 차학경을 기억하며 연변을 떠돌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그가 밤베르크의 빌라 콘코르디아에 예술가 자격으로 체류하며 쓰여졌다. 버클리에서의 후사코 할머니와의 만남 역시 그의 소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상 혹은 김해경을 치열하게 추적하며 쓴 소설인 ‘꾿빠이, 이상‘에 대한 추적기 역시 이 산문집의 마지막에 놓여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필체로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과시한다면 후반부는 보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이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글들이 펼쳐진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나고야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전쟁세대에 속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한 세계의 붕괴를 통해 발생하는 개인의 리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한다. 개인의 리얼리티가 세계라는 이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에 놓여 있을 때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인물들을 몇 알고 있다. 매년 새로운 한국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본의 S모군은 매번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올해에도 S모군은 어떤 예쁜 한국 여자에게 첫 눈에 마음을 빼았겼더랬다. 그러나 그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냉담했다. 그런 그녀에게 S모군이 던진 비애의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일본인인 것이 싫어.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얼마나 슬픈 문장인가. 한 여자(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 많은 여성들을 짝사랑했다)에 빠져 자신의 리얼리티를 가짜라고 여기는 한 젊은 남성이라니!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었다. 웃을 수밖에, 그 예쁜 한국 여자는 결국 내 여자친구가 되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S모군에게 마음을 줄 리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그녀와 만나지 않지만 당시 내가 들었던 S모군의 충격적인 고백은 무엇보다 깊이 기억에 남는다. 비단 일본인 뿐인가, 내가 아는 형님들 중 K모형 역시 마찬가지다. 해가 갈수록 점점 일본인처럼 변해가는 형의 모습을 눈치챈 것은, 내가 일본을 여행하며 만난 다수의 일본 어른들의 일본 특유의 제스쳐를 보며 형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였다. 그는 매년 겨울 일본을 찾게 된 것을 계기로, 이제는 그곳의 여름마저 섭렵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 그 지역의 축제에 참여하고 그곳의 지역민들과 어울리는 그의 리얼리티 역시 한국에 있는 것 같지 않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그의 일상은 일본에서의 진짜 일상을 위한 준비의 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불행은 아마 이런 지점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행복은 현실/기대라는 공식으로 정량화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현실이 0에 수렴하고 기대는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가 있는, 즉 분모는 무한대에 가깝고 현실은 제로인 지점에서 행복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은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혹은 자신의 리얼리티가 존재하는 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백 퍼센트의 만족감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결국 좌절하게 된다. 허무를 느끼게 된다.

이와 동시에 김연수는 국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국경이란 말 그대로의 물리적인 국경이었다가 곧 한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어떤 사건의 지평선에 대한 개념으로 환원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국경을 가져본 일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분단된 국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 어느 섬나라의 현실보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배나 비행기 따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은 월북 밖에는 없다. 그렇게 작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가.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념을 버려야 하고 국가로부터의 추방을 각오해야하는 우리는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 김연수는 차를 달려 북으로, 북으로 달려 그 한계를 경험했고, 러시아로 넘어가 두 눈으로 국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찾는 국경이란 그런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찾는 진짜 경계란, 그걸 넘고자 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밀어낸 일종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일련의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세계의 끝‘이라는 모티브, 그것은 진짜 세계와 비세계의 경계에 대한 물리적 실체가 아닌 한 개인이 넘어갈 수 없는 비물질적 한계선으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계를 넘어간 한국 문학사의 인물들로 차학경과 이상에 대해 주제가 넘어가며 이 책의 이야기는 본격화된다.

어쩌면 감옥과도 같은 이 현실(비관주의자로서의 세계관이 아닌 한국이라는 국적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서 인식되는 현실적인 인식을 말한다)에서 우리의 월경은 정말이지 현실적이지 않은 단어인 것만 같다. 우리는 국경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진짜 국경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우리가 갖고 있는 휴전선이 목숨과 사상을 걸고 넘나들어야하는 철책이라면 진짜 국경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것들을 걸고 온몸으로 그것에 부딛혀나가는 걸까?

내가 최초로 국경을 두 다리로 걸어 넘어갔던 것은 캄보디아에서 라오스로 넘어가던 2년 전의 봄과 여름 사이였다. 물론 육로로 넘어간 것을 포함한다면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넘어갔던 야간버스가 최초겠지만, 내게 더 의미있었던 것은 전자의 일이다. 캄보디아의 얼렁뚱땅한 벤을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간 라오스의 국경은, 정말이지 보잘 것 없었다. 생김새로 치자면 고속도로를 타다가 진입한 전주 IC와 비슷했고 넘어가는 절차상의 복잡함으로 따지자면 롯데월드에서 자유이용권을 구매한 뒤 검표원을 지나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유사했다. 국경 앞에서 우리는 벤에서 잠시 내린 뒤, 운전수가 내미는 표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입하고 놀이공원에서 표값을 지불하듯 일정 기간의 체류에 대한 비자 비용을 지불하고 배낭을 멘 채로 두 다리로 걸어서 국경을 넘어갔다. 삼엄한 경계와 날카로운 철조망은 물론이고 벽이나 바리케이트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 넓고 단단하고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사뿐히 건너가면, 뒤에 정차했던 벤이 천천히 우리 뒤를 따라왔다.

생각해보면 그 때 나는 약간, 김이 빠진다고나 할까. 우리가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놈, 그 놈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위축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고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월경이란 마치 월남이나 월북과 마찬가지로 고되고 험난하고 크디큰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거대한 행위였는데, 내가 마주한 국경이란 그다지도 간단하고 편리한 일종의 사무적인 행위의 장소였을 뿐이었다. 세계라는 넓은 범주에서 우리의 비극은 얼마나 사소한가.

다시 S모군으로 돌아가서, ‘한국인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왜 일본에 태어나서‘와 같은 생각은 물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비관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에는 언제나 낭만이 있으며 그것으로 한 인간의 인생이 극변하여 결정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행복=현실/기대 라는 공식으로 넘어가자면, 생각할 수 있는 보다 많은 현실들을 상정하되 특정한 값의 기대치는 저버리는 편이 좋다. 나로 말하자면, ‘어디든,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이라는 식의 생각은 하지만 딱히 현실에서의 리얼리티에 괴리감을 느끼진 않는다. 물론 종종 그럴 때도 있긴 하지만, ‘내가 원빈처럼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따위로 생겨먹어서!‘라던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일본이나 독일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같은 생각을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현실에 대해 철저하리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주어진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현재 내게 주어진 세계의 한계선과 현실의 범주에 대해서. 다만 내가 여행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내 현실에서 주어진 것들에 비관하지 않고 희망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내 세상의 끝을 가늠하고 그것을 온몸으로 밀어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여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독일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세계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 내 세계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고 나는 나 자신의 국경을 넓혀갈 수 있다. 그것이 이상이나 차학경이 넘었던 궁극적인 차원의 어떤 영역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세계는 내게 낯설다. 만일 내게 오직 여행할 권리만이 있다면, 나 역시도 그것을 통해 온몸으로 국경을 밀고 나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 세계의 끝에서도 언제나 세계는 낯설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기를, 호기심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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