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2년 전 어떤 길고 긴 여행중이었다. 나는 가져간 책들, 그러니까 ‘사월의 미, 칠월의 솔‘같은 소설들을 읽고 또 읽어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그리움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ebook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7번 국도‘와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구매해서 다시 또 몇번을 열렬히 읽었고, 결국 폰에 담아간 만화책까지 네다섯번을 읽고 난 뒤, 나는 일종의 텍스트 그로기 상태에 돌입하게 됐다. 링에 오른 복서가 계속해서 같은 펀치를 맞아가며 라운드를 넘기기만 할뿐인 고독하고 괴로운 상태였달까. 당시 내게 가장 넘쳐나는 재산은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틈만나면 글을 읽었고 일기를 썼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그리워서 텍스트에 대한 짙은 향수에 빠져갈 즈음, 우리의 여행에 솔이 합류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고, 나는 솔에게 부탁이니 내가 원하는 책 두권만 사서 가져다주지 않으련, 하고 물었다. 그렇게 솔이 사다준 책이 ‘여행할 권리‘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였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여행중에 몇번 읽었다. 가장 처음 완독했던 장소가 기억난다. 미얀마 양곤의 어느 펍이었는데, 피곤하다는 득을 숙소에 두고 나와 솔과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며 각자 책을 읽었었다. 꽤 분위기가 좋았던 그 펍의 나선형 목조 계단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대낮의 펍이란 이런 한가로운 분위기로군,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책을 읽어나갔다. 나는 솔이 가져다준 이 책을 펴자마자 앉은자리에서 완독했고, 곧 또 몇번을 더 읽으리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어제 잠이 안와 누운 침대에서 스탠드를 켜고 이 소설집의 두 편을 다시 읽었다. 두 편의 소설 중 아마 이 소설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편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이 펼쳐지던 사회상황 속에서 여자친구의 죽음으로 실연을 경험한 주인공이 그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설산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김연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몇가지 특징으로 아름답게 펼쳐보였다. 하나는 시대적인 거대서사의 흐름 속에 겪는 개인의 상실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적인 부분이다. 주인공의 여자친구는 시대의 등떠밀림에 부끄러움과 죄책감, 책임감을 느끼며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붕괴하고, 자신과 자신의 연인간에 존재했던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거시적이었던 세계는 결국 개인의 상실에 초점을 맞추고, 그 안에서 시대적인 모든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이 소설집의 첫번째 특징이다.

두번째. 소설 내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왕오천축국전‘은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한편의 학술지에서 출처한 듯한 문장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의문을 증폭시킬 때 즈음, 이야기의 바깥에 있던 화자인 ‘나‘가 등장하여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죽은 여자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그 책에 주석을 단 ‘나‘를 통해 주인공이 설산을 향해간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가 김연수의 소설을 별자리 그리기의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평했던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 표현은 아주 탁월하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아름답고 매끄러운 하나의 그림으로 엮어내는 김연수의 화술은 대단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법이 주제 자체를 드러낸다. 이것이 두번째 특징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연결되려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방식이 이야기의 층위를 넓혀 전체 서사를 아주 입체적으로 만든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김연수가 하고싶은 말은 무엇일까. 나는 아주 순진하게 말한다면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김연수의 또다른 장편인 ‘원더보이‘의 한 대사를 인용하면 더 설명이 쉬울 것이다.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김연수식 사랑이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설산의 주인공은 여자친구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고, 설산의 ‘나‘는 주인공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마지막을 상상해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에 진실이 있던지 없던지, 혹은 의미가 있던지 없던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김연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그런 기준을 해체한다. 모든것은 결국 쓰여질 수 없는 이야기들 속에 의미가 있으며,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 수도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그리고 그를 위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우리의 존재나 우리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의 유무와는 별개로 우리는 스스로의 상실을 극복하고 때론 이해할 수 없었던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해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이 소설집에서 보여지는 마지막 특징이다.

따라서 설산의 마지막은 너무도 아름답다. 실존적인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으나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는 그의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조심스레 들려주는 그 장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아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으로 적어넣던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 그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녀와의 실연을 이해해보려고 결국엔 소설까지 썼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사랑도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은 그는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으로 향한다. 어느것도 맞을 수 있고 틀릴 수 있을 때, 내 세계가 붕괴한 상황에서 내게 의미를 주는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긴 사랑의 기록이다. 무엇도 맞을 수 있고 무엇도 틀릴 수 있다면, 그 마지막 이야기는 내가 그렇다고 믿는 한 언제나 옳다.

나는 이런 김연수식 태도에 큰 위로를 받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일들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린 세계다. 나는 그 일들을 이야기로 거듭 써나간다. 때로는 불면의 밤에, 때로는 만취한 군중 속, 혹은 고독 속에서, 혹은 내 앞에 마주칠 그 많은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들로서 나는 나를 이해하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모두 옳을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면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믿고 위로받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상실을 극복하였다면 그것 역시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슬픔은,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을 때 극복될 수 있다는 말에 체험적으로 공감한다.


+ 그리고 더 해야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어휘의 탐색꾼의 역할을 자처한 김연수의 노력이다. 이 책에는 지금은 쓰여지지 않아 잊혀졌지만 현실세계를 기록하는데에 더욱 정확한 의미를 갖는 유려한 어휘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푸접스럽게‘, ‘버성긴 마음‘, ‘끄느름한 하늘빛‘, ‘누기진 눈동자‘ 같은 것들. 언젠가 작가와의 대화같은 자리에서 한 독자가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책에 등장하는 어휘들이 낯설어 책을 읽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그러자 김연수는, 나도 공부하면서 써내려간 글이니 독자들도 공부하며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다. 최근 소설들에는 이러한 표현들이 많이 줄었지만, 그가 왜 이러한 어휘를 시간의 무덤 속에서 캐어내어 사용하였는지는 그의 다른 책인 ‘소설가의 일‘에서 밝힌 바 있다. 그때 그는 화가의 일에 이를 비유하였는데, 화가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정확한 빛깔을 찾아내어 사용하듯이, 작가가 사용하는 어휘라는 것은 화가가 사용하는 색과 같은 것이므로 작가에겐 정확한 어휘를 구사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러한 신념들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 굳이 여기서 ‘소설가의 일‘을 더 이야기해서 그가 이야기를 만들며 화자와 문장의 일치에 신경쓴다는 사실을 꺼내놓을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등산가에게는 등산가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고, 중공군 출신의 화자에게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있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깊은 밤, 기린의 말‘에서 그가 한 쌍둥이를 화자로 내세웠을 때, 심지어 아이의 문장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명받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책으로까지 내놓은 소설작법을 스스로의 작품에서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러한 성취가 그의 모든 소설에 편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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