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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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크게 앓았다. 앓는 와중에 나는 농담이라는 책을 읽었다, 라고 쓴 일기가 있다. 기억해보려 하면 기억나진 않는 아픔인데, 그 때 쓴 일기를 읽어보면 꽤나 크게 아팠던 듯 하다. 탈수기에 스스로를 넣은 듯 하루 종일 게워내고 쏟아내고 하는 것이 일과였던 그 때에 소설을 한 권 읽었다니 참 대단하다 싶다. 그러고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자 아팠던 기억은 물론이고 책에 대한 내용까지 흐려져 시간을 내서 다시 읽었다. 정신이 혼미했던 그 때에도 ‘참 좋았다‘싶었던 소설인데, 다시 읽으니 여전히 그랬다. 참 좋다.

이 소설은 한 이부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동생인 한 쪽은 아마추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고, 형인 다른 쪽은 우주로 쏘아올려진 우주비행사다. 서로의 존재마저 어슴푸레 알고 있던 두 형제간의 이야기는 두 남자의 어머니가 죽은 뒤, 형인 이일영에게 어머니가 남긴 열 두통의 편지를 동생인 송우영이 발견하며 연결된다. 송우영이 이일영에게 편지를 전해주려는 과정을 통해 서사가 진행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우주 속에서 고립된 이일영의 독백이 독립적으로 지나간다. 두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순서 없이 교차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뒤섞인 시간 속에서 이일영의 독백이 과거의 시간들과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신비적이고 기묘한 분위기를 담은 채 매력적으로 직진하며, 이내 이야기들이 모두 연결되는 마지막에서는 감탄과 함께 알 수 없는 촉촉한 감정이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맺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는 모두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다- 라는 표현은 아마 김연수의 소설집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을 통해 붙인 말일 것이다. 이 문장은 왜인지 아주 직설적으로 이 소설에 바치는 문장인 것만 같다. 세상의 이야기는 모두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다. 소설 속에서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즐비하게 달려가는데, 송우영과 세미의 스탠드업 코미디도, 강차연의 이야기도, 캡틴과 이일영의 이야기도 모두 소설 속 뼈대를 구성하며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송우영과 이일영의 어머니인 정소담과 이일영의 이야기다. 어떤 이유 때문에 정소담이 이일영이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이일영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은 읽어낼 수 있지만, 그녀가 어째서 그를 떠나게 됐는지, 이일영은 그녀를 어떻게 그리워하고 원망했는지, 그 사이의 일들은 몇몇 근거들을 통해 어렴풋이 유추해볼 뿐이다. 장장 12통에 이르는, 한 번 읽어내려가는 데에만 한시간 반이 걸리는 그 소설 한 권 분량의 편지들도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어두운 방처럼 몇몇 문단들만이 제시될 뿐, 그 전체의 내용이 모두 열려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일영과 정소담의 이야기는 그 구체적인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은 저마다 한 명의 이야기꾼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김중혁의 능숙한 이야기 작법으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저 먼 우주에서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강차연과 송우영은 그 후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었을지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꾸며볼 수 있다. 송우영의 말처럼, 그리고 김중혁의 작가의 농담처럼, 그 이야기들 속에 송우영도 살고, 이일영도 살고, 김중혁도 살고 있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이야기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노력을 어쩌면 이 소설의 모든 주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떤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그 간절한 마음을 통해 이일영과 정소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미 만났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두 번째로 연결될 수 있었다. 간절한 마음, 그리고 애쓰는 노력. 이 두 가지가 이야기를 만든다.

+ 김중혁의 농담 실력은 그와 김연수가 서로의 친분과 디스실력을 과시한 산문집, ‘대책 없이 해피 엔딩‘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최근 소설리스트에서 한 회분을 펑크낸 김연수를 디스한 그의 글 역시 마찬가지). 그 농담 실력은 최근작인 이 소설을 통해 더욱 농밀해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비 인기 영역을 되살려 이 소설의 뼈대를 구성한 그의 노력에 감탄한다. 그리고 소설 속 코미디들은 그 자체로도 꽤나 재미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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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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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좋아하는 책들을 여러 번 읽긴 하지만, 다들 읽었다는 위대한 작품들을 읽다가 흥미가 없어 다시 책장에 꽂아놓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 외에는 넓게 탐독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그 외의 많은 것들에서도 동일하다. 이를테면 인간관계라던지, 나의 생활 방식같은 것들도.

그 중에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의 소설들을 거의 다 읽었다. 아마 읽지 않은 것은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맞나?)와 해변의 카프카 정도일 것 같은데, 그의 소설들을 읽어내려간 수 년 간의 열정에 비해 그의 산문집은 거의 읽지 않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의 소설들을 읽던 시절에 나는 오로지 소설만을 닥치는대로 읽어대던 소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최근 책장에 손이 닿아 읽지 않고 꽂혀있던 하루키의 여행 산문집을 한 권 읽었다.

‘하루키의 여행법‘이라는 국내 제목으로 출판된, 이 괴상한 디자인의 책에는 표지 디자인의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꽤나 인상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하루키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서도 그가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여행기를 읽노라면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그의 세련된 유머감각, 그가 여행을 하는 방식, 숙소를 정하거나 식사의 메뉴를 결정하는 기준같은 것들. 이 책에서는 너무나 하루키적인 여행기가 여러편 겹쳐져 수록되어 있다.

하루키의 여행은 너무나 일상적이다. 그는 여행하며 얻은 감상들을 과장하지 않는다. 나는 대체로 여행하며 적는 글에는, 좋았던 점과 인상깊은 상념만을 기록하는 편이다. 나의 여행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므로,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목적에 맞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여행기에는 여행지에서 얻은 피로와 당황스러운 현지의 문화, 여행의 불편함과 지루함과 이를 데 없이 끔찍하거나 무서운 장면들이 여과없이 드러나있다. 그가 멕시코를 여행하며 멕시코적인 모든 불확실한 당황스러움을 덤덤히 받아들여가는 과정은 매우 유머러스하고 하루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의 건축가들은 모두 새로 짓는 건물들을 수십년은 된 것 처럼 허름하게 만드는 훈련을 받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멕시코의 인디언 마을을 방문한 뒤 자신과 동행한 사진기자가 사진찍히기를 싫어하는 현지인들이 집어던진 온갖 것들에 맞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곳 사람들은 매일 뭔가를 향해 물건을 내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지나 않나 싶을 정도로 제대로 머리에 명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저 사람과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하는 표정으로 멀찍이서 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곤 한다. 꿈꿨던 8000km 미대륙 횡단을 하면서도 ‘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소가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며, 지루하기 이를데 없는 여행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여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 온갖 곳들에서 이 지난한 피로와 고충과 당황스럽고 황당한 독창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발적으로 또다시 길을 나서는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의 곳곳에 그에 대한 답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답변은 이것이다.

˝내가 멕시코에서 겪은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어낼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에 오지 않고서는, 멕시코의 공기를 들여마시고 멕시코 땅을 발로 밟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가 없는 그런 피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피곤을 거듭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멕시코라는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책에는 또한 하루키가 역사 혹은 기억을 찾아 여행하는 기록들도 있다. 여기서 나는 하루키의 의도적인 객관성, 혹은 중립성같은 것을 발견한다. 그가 중국을 찾아 상상을 뛰어넘는 인파를 바라보며 ‘어쩌면 난징 대학살과 같은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가 그 앞에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놓았을지라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심한 의문이 들 때 즈음, 그가 그의 정신적 고향인 고베 산노미야를 도보로 방문하는 여행기가 마지막에 진행된다. 또한 일본이 참패한 노몬한 전적지를 찾아 그가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두 지점에서 하루키의 난징 대학살에 대한 발언의 논점이 파악된다. 하루키가 말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그의 의도적인 객관성에 의한 것이다. 학살당한 숫자에 대한 의심과 진짜 중국을 방문한 뒤에 느낀 그 의심에 대한 고백일 뿐, 그가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은 노몬한 전적지를 찾아 언급한 것처럼, 그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미치는 실제가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식으로 말하진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베트남같은 곳에 가서는 ‘어쩌면 이곳에서 실제로 한국군이 베트남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증언을 계속하고 목소리를 내는 한, 그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므로(혹은 객관적인 정보에 논란이 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일관하는 태도(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루키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는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대하는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일이다.

이야기가 돌아왔지만, 이 여행기에는 실제로 피식피식하며 읽을 세련된 유머가 돋보이는 문장들도 많이 있고 솔직한 여행기로서 갖는 희귀한 매력도 있다. 하루키의 스케치(이 책을 통해 그의 그림을 처음 봤다)라는 보기 드문 기록도 있고, 그의 사진들도 꽤나 많이 수록되어 있어 재밌다. 노몬한에서 겪은 기이한 경험을 기록한 대목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그의 소설의 한 대목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할 만큼 문학적인 정취도 있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지의 감상을 기록하길 좋아하는 내가 읽기 적합한 책이었다고나 할까. 모름지기 여행기란 이래야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여행기를 쓰려 한다면 자신만의 판타지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십분 동의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쓰려고 했던 것은 이런게 아니었다는 생각만 들 뿐이니 빨리 마침표를 찍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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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서점
가쿠타 미츠요.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이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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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분의 리뷰로 알게 되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쿠타 마쓰요와 오카자키 다케시의 헌책방 순례기-라고 쓰면 대충 맞을 것 같은 매력적인 잡문이다. 가쿠타 마쓰요가 헌책방계의 스승인 오카자키 다케시에게 입문해 그의 지령에 따라 일본 각지의 헌책방을 찾아 그 감상을 과장 없이 소소하게 적어가는 식이며, 사부인 오카자키의 만담같은 지령(및 가쿠타 마쓰요가 쓴 글에 대한 소회)과 카쿠타 마쓰요의 감상이 교차되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대체 오카자키는 어떤 사람인가 싶었다. 오카자키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헌책도의 초심자에게 걸맞는 헌책의 던전들을 가쿠타에게 추천해주고, 가쿠타는 그 지령을 수행하며 얻은 감상들을 적는다. 여기서 놀라운 지점은 오카자키의 수다였다. 가쿠타의 보고를 받은 사부 오카자키는 가쿠타의 감상에 대한 코멘트 뿐 아니라 그녀의 소비목록이나 그녀가 순례 중 얻은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늘어놓는다. 가쿠타가 어떤 책을 구매했다고 적으면 그 책의 역사나 저자의 인생, 심지어 저자가 관계한 또다른 작가나 출판사의 역사까지 서술하는 식이다. 헌책에 대한 박식함으로 따지자면 과연 사부가 아닐 수 없다. 대체 헌책에 대해 얼마만큼의 애정을 갖고 어느 정도의 수행을 쌓아야 오카자키의 수다가 가능한 걸까. 매우 유머러스하고 키치적인 문체로 ‘이런 지식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투로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 또한 그의 문하로 들어가 헌책 수행에 입문하고 싶어질 지경이 된다.

그러나 김연수의 추천사대로, 이런 생각은 퍼뜩 나를 슬프고, 안타깝고, 괴롭게 만든다.

2.
나는 청주에 산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꼭 롯데시네마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다. 그리곤 아마 읽지도 않을(혹은 다 읽으려면 수 년은 필요할) 책들을 잔뜩 사서는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쌓아둔 책이 얼만지.. 언제 다 읽을지 짐작도 안된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기기 전에는 청주의 헌책방 거리에 종종 들렀다. 청주에 사시는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잉? 청주에 그런 거리가 있었어?‘ 라고 되물을 테지만, 헌책방 거리는 내 마음대로 붙여 부르는 이름일 뿐, 대체로 청주인들에게 그 거리는 요즘에 ‘소나무 길‘이라고 불리는 듯하다. 지금은 소나무 길이라고 불리는 그 길에는, 아직도 여전히 헌책방들이 많이 늘어서 있긴 하지만, 수 년 전까지만 해도 헌책방 거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헌책방이 많았다. 도시를 들여다보는 일을 하다보면 문득 궁금해지는 것들 중 하나는 ‘어째서 오래된 도시에는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같은 업종의 가게들이 자연스레 밀집해서 거리를 형성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꽃가게를 연다. 왜인지 모르게 그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다른 꽃가게를 차린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결국 그 거리는 꽃가게 거리가 된다. 약국 거리도 마찬가지고 애견샵 거리도 있다. 이런 흐름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어쨌든 청주 시내의 그 거리에는 헌책방이 자연스레 밀집해 있었다.

그곳에 가면 가쿠타가 이 책에 써놓은 감상들에 동의할 만한 분위기가 언제나 가득했다. 작은 입구 전면의 디자인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책방들의 입구는 언제나 책방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난 헌책들이 입구 밖까지 흘러나와 책장처럼 가득 쌓여져 있었으니까. 그런 책방에 가면 낡은 종이들이 내는 냄새와 함께 특유의 공기에 휩싸인 감각이 느껴졌다. 다른 공간에 온 느낌이랄까. 그곳의 시간은 문 밖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작은 매장에 흘러넘칠 만큼의 책들이 들어차 있었으므로 그곳에는 눕혀져 쌓아올린 책들 사이의 작은 길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책들을 넘어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길들을 돌아다니면, 내가 읽었거나 읽고 싶었던 책들, 내가 좋아하거나 이름만 알고 있었던 작가들의 책들이 눈에 띈다. 그 책들을 조심스레 펼쳐보면 시간의 흔적과 함께 매장에 은은하게 배어있던 낡은 종이의 냄새가 덩어리가 되어 훅 하고 얼굴을 덮친다. 몇차례 고민한 끝에 살 책들은 사고 그렇지 않은 책들은 제자리(라고 하지만 아무데나 놔도 괜찮을 법하다)에 돌려놓는다. 계산은 반드시 현금. 어딘지 무뚝뚝한 할아버지(거의 반드시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에게 돈을 지불하고 나오면 다시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른다.

그래서 내 방에는, 엄청나게 오래된 듯한 책들이 종종 책장 사이에 껴있다. 이외수의 옛날 소설들이라던지, 에리히 프롬의 (이제는 고전이 된 듯한)심리학 책들 같은 것들을 나는 그런 낡은 것들로 읽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세로쓰기에 강하다.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책들은 대체로 세로쓰기가 살아있을 시절의 것들이 많다. 세로쓰기로 된 책들을 읽으면 어딘지 모르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갈 때의 간격이 굉장히 먼 것처럼 느껴지고, 같은 문장을 두세번 읽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고 재미가 있다. 그래서 헌책방을 자주 찾았다. (얼마전 읽은 하루키의 여행법도 헌책이었다-책의 맨 앞장에는 어떤 여성의 이름이 적힌 감사장?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지)

3.
2번의 내용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쓸쓸하고, 괴롭고, 슬픈 지점이다. 지금은 청주에도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어 과거의 헌책방이 수행했던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의 인과관계는 혹은 반대일 수도 있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전국에 오프라인 지점으로 생기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헌책방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일수도 있고, 헌책방이 사라지며 알라딘 중고서점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어느쪽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헌책방은 점점 우리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를 여행할 때 나 역시 헌책방을 자주 찾았다. 제천에서도 그랬고, 전주에는 꽤나 번화한 헌책방 거리가 있기도 했다. 혹은 헌책방만을 보기 위해 여행한 적도 있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산골의 그 헌책방은 후에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은신하는 장소로 등장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헌책방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처럼, 헌책방 자체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쓸쓸함은 책에서도 드러난다. 비록 쓸쓸한 감상을 저자들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책 속에 책방의 실명들이 등장할 때 종종 각주로 *현재는 폐점-과 같은 설명이 달려있기도 했던 것이다. 폐점된 책방의 수는 우리나라 출판 이후 더 많아졌는지, 책 뒤에 따로 정리되어 있기도 했다.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더욱 안타깝고, 혹은 이 책의 저자들이 부러운 지점은 문학에 대한 애정의 온도가 이곳과 그곳이 다르다는 점이다. 가쿠타는 사부의 지령에 따라 가마쿠라를 찾아 그곳의 헌책방을 순례하며 가마쿠라 출신 문인들의 책들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가마쿠라를 비롯한 각지의 헌책방들이 지역 출신의 문인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긍지와 자부심이 어떻게 가격으로 드러나는지를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넘어온다면 그런 깨달음의 광채는 조금 흐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지역의 문학관을 찾는 일을 좋아하기도 한다. 전주에 가면 꼭 최명희 문학관을 들르고, 부여의 신동엽 문학관이나 서울 윤동주 문학관을 답사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한 문학관에 가면 얻어지는 특수한 감상이 있다. 위대한 문인들의 정신세계속에 묻혀있는 느낌, 그들의 우물 속에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감각같은 것들. 물론 이것은 문인들의 찬란한 문장들이 실제로 그곳에 가득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건축적인 연출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방의 문학관들이 그 지방의 이름을 내걸고 서있는 것은 본 기억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청주의 문인들‘이라던지, ‘강경 출신의 문학가‘ 같은 것들은 듣기에도 이상해보인다. (물론 지역색이 강한 문인들이 있긴 하다, 논산을 아끼는 박범신이라던지 춘천의 이외수 등이 떠오르지만 내가 모르는 많은 문인들이 있겠지)

일본에 오타루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정말 작은 도시인데, 우리나라로 비유해보자면 군산이 비슷한 도시일지도 모른다. 그 도시에는 ‘오타루 문학관‘이라는 곳이 있다. 이른바 오타루 출신의 문인들에 대한 박물관이다. 문학관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한 스시집의 연회장인 ‘카모메테이‘라는 곳에 종종 갔는데, 그곳의 내부에는 오타루 문인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약력, 대표작들이 적힌 판넬이 벽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 가쿠타는 가마쿠라에서 가마쿠라 문학관을 찾았다는데, 이렇게 일본에는 지역의 이름을 건 문학관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부럽기도, 참 아쉽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내 무지가 가장 크게 작용한 감상일 것이고, 또한 물리적인 크기의 차이를 보이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무시한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울과 서울 아닌 곳‘으로 구분되는 우리나라의 현대적인 특성 역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헌책방에는 지역색이 드러난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썼다. 헌책방은 커녕, 서울 아닌 변방의 색채는 사라져가는 우리나라의 현상을 살펴보면 종종 깊은 한숨이 나온다. 혹은 지방에 지방 속의 서울-이 등장해서 반짝 인기를 끄는 식이다. 어딘가 특색있는 지방의 거리가 뜬다 싶으면 ‘운리단 길‘, ‘망리단 길‘, ‘천리단 길‘하는 식의 네이밍이 붙는다는 것이 아쉽다는 뜻이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한 밀도 차이가 이 책을 읽으며 확연하게 느껴져 씁쓸함이 더해졌다.

3.
어쩌다보니 좋은 책이었다-로 시작해서 슬프고 안타깝고 괴롭다-라는 식으로 끝나버릴 것 같아 덧붙이자면, 이 책은 앞서 말한대로 굉장히 매력적이다. 책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이 책을 읽노라면 나도 짐을 싸서 당장 우리나라의 얼마 남지 않은 헌책방들을 순례하고 그 책방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두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오카자키 사부의 박식한 수다에 감탄하고 가쿠타의 겸손하면서 감상적인 기록들을 보노라면 책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 와중에 오카자키의 파트에서는 실제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위트있는 지점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가상의 인물인 제자 ‘야나스케‘가 씬스틸러처럼 오카자키와의 케미를 통해 웃음을 선사한다.

헌책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매니악한 분야처럼 느껴지는 장르에 대한 책이라 전문적인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 책은 전혀 어려운 책이 아니다. 가볍게 읽혀지고 쉽게 이해된다. 그 지점 역시 이 책이 가진 강점이 아닐까. 가쿠타가 ‘가아프가 본 세상‘이라는 책을 가이드 삼아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했듯이,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도쿄 근교를 여행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읽을 수 없는 책 투성이겠지만, 그곳은 아마 그렇게 낯선 곳들은 아닐 것이다. 헌책방이라는 것이 대개 그런 것처럼.

+ 왓차에 별점 넣으면서 보니까 저자 가쿠타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종이달‘의 원작가이기도 하고, 왜인지 모르게 오래도록 내 책장에 꽂혀있는 (역시 헌책방에 산 듯한)‘가족방랑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가족방랑기는 표지가 별로여서 안읽고 있었는데 (그럼 대체 왜 산거?) 읽어봐야겠다. 종이달 역시 마찬가지.
++ 갑자기 생각나서 추가. 아주 옛날, 지금은 헤어진 옛 연인과 함께 파주 출판단지를 찾은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 있던 아름다운 가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그곳과는 달랐다. 거의 거대한 헌책방이라고 할만큼 중고서적들이 물품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 아마 승효상이 설계한 건물이었을텐데, 그곳에서 산 책들의 목록까지 기억이 난다. 김훈의 소설과 ‘르꼬르뷔제의 손‘이라는 책.
+++ 또 추가. 김연수가 추천사를 붙여서 상상해보건데, 그의 단편집 ‘스무 살‘을 보면 ‘공야장 도서관 음모사건‘이라는 단편이 나온다. 이것이 아마 이 책의 영향을 받은건 아닐까? 라는 추측. 아마 아닐 것인데 그래도 왠지 연관되어 생각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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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차 모바일에 도서 기능이 추가된지 꽤 됐다. 알림을 통해 그 소식을 듣고는 읽었던 책들을 두서 없이 평가 목록에 집어 넣었더랬다. 원래는 ‘산책‘이라는 어플을 썼었는데, 핸드폰이 바뀌거나 앱이 업데이트되거나 할 때마다 초기화되어버리는 앱의 안정성 문제로 한동안 독서목록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어떤 걸까. 나는 그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딱히 책을 많이 읽는 인간도 아니고, 취향이 너무도 편협한 탓에 어디가서 얘기할 껀덕지도 못된다.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없고-만일 그렇다면 나는 떠벌이가 됐겠지만, 내 오프라인 친구들 중에 내가 책 얘기를 나누는 친구들은 거의 단 한명도 없다- 주변인들과의 대화를 위해 읽는 것도 아니고, 전공 지식같은 것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전혀 상관없는 책들만 읽는다-.

내게 그것은 그냥 그런 것이다. 책이라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냥 궁금한 게 생기면 읽고, 읽다보면 좋아하는 분야나 작가가 생기고, 그럼 더 읽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연스레 ‘그냥‘ 책을 읽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보니 무슨 내가 책벌레가 된 기분이지만, 나는 잠보에 먹보에 술보에 게임도 해야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쓸데 없는 웹서핑도 해야하므로 그런 위대한 책벌레는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얘기하고자하는 건, 기껏해야 남들이 쌓아놓은 위대한 지적 성채 속에 잠깐 여행하고 돌아오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그 성채의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을 제것인 줄 아는 사람이 왜이리 많느냐는 거다. 자신이 읽은 책들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읽은 책들이 위대하다면 위대할 뿐, 그것을 읽는 행위밖에 하지 않는 개인들의 위대함은 결코 그들이 읽은 독서목록에서 발현되지 않는다는거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치 그런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왜 이런 얘기를 줄줄이 하느냐면, 왓차에 독서목록을 저장해두며 인상적인 책들에 한줄평도 남겨뒀는데, 남기는 중에 보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에 다른 사람들이 앞서 남겨둔 한줄평이 가관이어서 얘기가 길어졌다. 어떤 식이냐면, 대체로 ‘이걸 지식이라고..‘, ‘이 책을 읽고 지적 대화가 가능하진 않을 듯‘,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지식‘, ‘각종 오류가 가득한 좆문가 양성 책‘ 등등의 폄하 위주의 댓글들이 많은 추천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의 저자인 채사장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이 책을 비호하거나 칭찬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이런 댓글들을 보니 참 한숨밖에 나올 것이 없더라. 그래서 그냥 내 나름대로의 짧은 한줄평을 달았는데-이 책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식의- 어떤 사람이 내가 말한 장점은 이 책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라는 코멘트를 이어 달았다. 어휴, 이 고귀하신 지식의 호위기사들을 어찌하면 좋을꼬.

어째서 지식에 고유한 윤리를 덧씌우고 그것에 벗어난 것들을 단죄하고 폄하하기에 여념이 없을까. 그들이 독점한 지식의 권좌에는 한치의 오류도 없어야하며, 오로지 정당하고 고귀한 무언가여야만한가 보다. 지식에 성을 쌓고 그 안에 들어올 수는 있되, 그 성에 대한 어떠한 소문도 거부하는 그들의 배타적인 태도에서 나는 오히려 이 책의 정당한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한 자들의 지식에의 윤리, 이를테면 ‘지식은 이분되어서는 안된다‘, ‘한 점의 오류가 있는 지식은 유통되어선 안된다‘, ‘고등교육 수준에서 가르쳐지는 지식은 보편적이고 모든 이에게 응당 이미 주어진 것이기에 가공되거나 편집되어 다시 교육하는 것은 우습고 저열한 행위이다‘, 같은 생각들이 오히려 이 책의 필요성을 입증해줄 뿐이다. 그들의 태도가 이 세계에서 보편적이었어야할 ‘넓고 얕은‘ 지식들을 추방시켰고, 결국 이 세대에 ‘지적 대화‘가 부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성을 쌓고 그 성 안에서 지복한 자존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의 표현처럼-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고, 굳이 이 책에 대한 우월감을 표시하는 댓글들을 남기지 않아도 좋겠다. 그냥 니네들은 똑똑하고 많이 아는 거 알겠으니까 그 성에서 멋지고 고귀하게 그 단단한 성을 지키며 사시길. 그래서야 그 성 밖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무슨 좋은 영향이 있겠느냐 싶다만은.

+ 추가해서, 전공자들이 자신의 각 전공영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나라고 채사장이 건축사를 이분해서 설명하는 지점에서 온전히 동의만을 했으리라고. 하지만 중요한 큰 나무가 그게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채사장이 이 책을 쓰고 읽으라고 상정한 기대독자가 그들이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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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어제, 그러니까 19일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 주최의 여성정책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토크콘서트의 부제는 무려 ‘한국 정치 : 마초에서 여성으로‘였다나. 거기 참석한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의 발언이 어처구니가 없다. ‘젠더 폭력이 뭐냐‘, ‘요즘은 성평등을 넘어 여성우월사회 아니냐‘ 같은 발언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애초에 나는 그 정당을 지독히도 불신하고, 그들의 기만적 행동들을 매우 불쾌해하는 사람이지만 이제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명징해졌다. 그 당은 글러먹었다.

굳이 자유한국당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 당에 대한 비판을 해보자는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이 갖는 평균적인 젠더감수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홍대표와 그 당의 혁신위원장은, 자기네 동네에서는 이런 말들이 매우 보편적인 어휘여서 여성혐오로 인식되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갖는 생각이 평균적인 한국 남성의 인식수준일 것이라는 둥의 변명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 그리 틀리지 않게 들린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넬리 아르캉의 소설 ‘창녀‘는, 이런 세계에서 발버둥치는 한 여성의 자전적인 고백으로 읽힌다. 넬리 아르캉의 실제 ‘섹스노동자‘ 생활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그 문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프랑스 등지에서 크게 호평받으며 팔려나갔다. 대학생이자 창녀였던 작가의 자전적인 성격이 화제가 되었던 것도 물론 주목을 끌었겠지만, 실제로 이 책이 어떤 힘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치열한 문장들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비범한 구석이 많은 소설이다. 아니, 그 전에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를 먼저 이야기해봐야 한다. 화자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두서 없이 이어지는 이 소설은, 그 형식적인 면에서도, 구성적인 면에서도 과연 소설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일종의 수다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녀의 문장들은 계속해서 쉼표를 찍으며 나아간다. 마침표는 한 페이지에 두 번 있을까 말까. 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은 그녀 의식세계의 무규칙적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 보인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사건이 아닌 의식을 쫓아가고, 사건은 그 속에서 표류하는 몇 척의 요트처럼 종종 드러났다가는 삽시간에 사라진다. 인물들은 등장하지만 그들이 주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만들지도 않고, 오로지 그녀의 생각들 속에서 방향키를 잡았다가 실종된다. 계속해서 소환되는 인물은 주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죽은 그녀의 친언니 정도일 뿐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그녀의 황폐한 정신 속의 뜨거운 불길을 묘사하거나 해석하려는 노력에 할애된다. 그녀의 황폐한 정신이란, 그녀가 겪은 일련의 트라우마를 통해 얻은 염세적이고 정신병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속의 뜨거운 불길이란 도발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녀의 신선한 문제의식을 말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비소설성을 어느정도 나타낸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지만 부인과의 불화로 집 바깥에서 종종 성욕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어머니는 순종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으로, 어딘가 병환이 있는 모양인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그들 사이에는 화자 이전에 낳았던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화자가 태어나기 전에 어린 나이로 죽은 것으로 쓰여졌다. 이 기묘한 가족관계 속에서 뒤틀린 창녀 넬리 아르캉, 혹은 창녀명 신시아(이 이름은 죽은 그녀의 언니의 것이다)가 성장한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중성에서 자신이 상대하는 남자들의 보편성을 관찰한다. 그녀의 어머니의 지리한 삶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 미래를 파괴하기 위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결코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매일 저 문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노크하는 수 많은 아버지들을 상대하는 창녀짓을 선택했고, 그 창녀짓을 한 번 제대로 해보기 위해 대학에서 문학까지 공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욕정이 은밀하게 해소되는 그녀의 작업공간에서, 그녀는 수 없이 다양한 양태의 아버지들을 본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상하며 그 모든 연결고리에서 독립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것은 그녀의 정신상담사로, 그녀는 그와는 절대로 성관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를 은밀하게 욕망한다.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녀와 그녀의 죽은 언니, 그리고 그녀의 정신상담사의 미묘한 관계가 이 흐트러진 문장들 속에서 어렴풋이 부유한다.

결국 이 소설을 통해 스스로 무너지는 한 인간의 내밀한 정신상태를 아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통해 어떻게 창녀로서의 삶을 강요당했는지, 그리고 그 생활을 그녀가 얼마나 능동적으로 해치워나가는지, 그리고 때때로 사귀게 되는 그녀의 고객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그녀의 정신세계 속에 무수히 흩뿌려져 있는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 정신의 본질로서 나타나는 그녀의 어머니는 어떻게 그녀를 파괴하는지. 그러므로 이 소설은 강요당하는 여성성을 분석하려는 세대소설로만 읽힐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절망과 염세와 도발이라는 이야기를 갖는 드라마로 읽혀도 좋다.


+ 감탄할만한 것은, 그녀의 문장들이 대부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며 묘사에 탁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화제성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이 아니다. 때때로 읽으며 더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만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녀의 생살 위에 날카로운 펜으로 구겨 쓴 책 같이 그녀가 고통하지 못하는 피가 철철 흐른다.
++ 젠더폭력이 뭐냐는 홍대표에게, 넬리 아르캉이 말한다.
“내가 창녀가 된 게 첫 손님을 받으면서부터가 아니라는 점을 당신은 알아야 해, 천만의 말씀, 그보다 훨씬 이전, 그러니까 피겨스케이팅과 탭댄스를 배우던 어린 시절에 이미 난 창녀였어, 무조건 제일 예뻐야 하고 실성한 듯 잠자야 하는 동화속에서부터 난 창녀였다구, ”
+++ 아참 이 소설은 문학동네로부터 리뷰어로 선정되어 제공받았고, 이 리뷰는 그래서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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