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어제, 그러니까 19일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 주최의 여성정책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토크콘서트의 부제는 무려 ‘한국 정치 : 마초에서 여성으로‘였다나. 거기 참석한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의 발언이 어처구니가 없다. ‘젠더 폭력이 뭐냐‘, ‘요즘은 성평등을 넘어 여성우월사회 아니냐‘ 같은 발언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애초에 나는 그 정당을 지독히도 불신하고, 그들의 기만적 행동들을 매우 불쾌해하는 사람이지만 이제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명징해졌다. 그 당은 글러먹었다.

굳이 자유한국당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 당에 대한 비판을 해보자는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이 갖는 평균적인 젠더감수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홍대표와 그 당의 혁신위원장은, 자기네 동네에서는 이런 말들이 매우 보편적인 어휘여서 여성혐오로 인식되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갖는 생각이 평균적인 한국 남성의 인식수준일 것이라는 둥의 변명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 그리 틀리지 않게 들린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넬리 아르캉의 소설 ‘창녀‘는, 이런 세계에서 발버둥치는 한 여성의 자전적인 고백으로 읽힌다. 넬리 아르캉의 실제 ‘섹스노동자‘ 생활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그 문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프랑스 등지에서 크게 호평받으며 팔려나갔다. 대학생이자 창녀였던 작가의 자전적인 성격이 화제가 되었던 것도 물론 주목을 끌었겠지만, 실제로 이 책이 어떤 힘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치열한 문장들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비범한 구석이 많은 소설이다. 아니, 그 전에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를 먼저 이야기해봐야 한다. 화자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두서 없이 이어지는 이 소설은, 그 형식적인 면에서도, 구성적인 면에서도 과연 소설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일종의 수다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녀의 문장들은 계속해서 쉼표를 찍으며 나아간다. 마침표는 한 페이지에 두 번 있을까 말까. 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은 그녀 의식세계의 무규칙적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 보인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사건이 아닌 의식을 쫓아가고, 사건은 그 속에서 표류하는 몇 척의 요트처럼 종종 드러났다가는 삽시간에 사라진다. 인물들은 등장하지만 그들이 주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만들지도 않고, 오로지 그녀의 생각들 속에서 방향키를 잡았다가 실종된다. 계속해서 소환되는 인물은 주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죽은 그녀의 친언니 정도일 뿐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그녀의 황폐한 정신 속의 뜨거운 불길을 묘사하거나 해석하려는 노력에 할애된다. 그녀의 황폐한 정신이란, 그녀가 겪은 일련의 트라우마를 통해 얻은 염세적이고 정신병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속의 뜨거운 불길이란 도발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녀의 신선한 문제의식을 말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비소설성을 어느정도 나타낸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지만 부인과의 불화로 집 바깥에서 종종 성욕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어머니는 순종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으로, 어딘가 병환이 있는 모양인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그들 사이에는 화자 이전에 낳았던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화자가 태어나기 전에 어린 나이로 죽은 것으로 쓰여졌다. 이 기묘한 가족관계 속에서 뒤틀린 창녀 넬리 아르캉, 혹은 창녀명 신시아(이 이름은 죽은 그녀의 언니의 것이다)가 성장한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중성에서 자신이 상대하는 남자들의 보편성을 관찰한다. 그녀의 어머니의 지리한 삶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 미래를 파괴하기 위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결코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매일 저 문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노크하는 수 많은 아버지들을 상대하는 창녀짓을 선택했고, 그 창녀짓을 한 번 제대로 해보기 위해 대학에서 문학까지 공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욕정이 은밀하게 해소되는 그녀의 작업공간에서, 그녀는 수 없이 다양한 양태의 아버지들을 본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상하며 그 모든 연결고리에서 독립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것은 그녀의 정신상담사로, 그녀는 그와는 절대로 성관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를 은밀하게 욕망한다.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녀와 그녀의 죽은 언니, 그리고 그녀의 정신상담사의 미묘한 관계가 이 흐트러진 문장들 속에서 어렴풋이 부유한다.

결국 이 소설을 통해 스스로 무너지는 한 인간의 내밀한 정신상태를 아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통해 어떻게 창녀로서의 삶을 강요당했는지, 그리고 그 생활을 그녀가 얼마나 능동적으로 해치워나가는지, 그리고 때때로 사귀게 되는 그녀의 고객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그녀의 정신세계 속에 무수히 흩뿌려져 있는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 정신의 본질로서 나타나는 그녀의 어머니는 어떻게 그녀를 파괴하는지. 그러므로 이 소설은 강요당하는 여성성을 분석하려는 세대소설로만 읽힐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절망과 염세와 도발이라는 이야기를 갖는 드라마로 읽혀도 좋다.


+ 감탄할만한 것은, 그녀의 문장들이 대부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며 묘사에 탁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화제성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이 아니다. 때때로 읽으며 더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만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녀의 생살 위에 날카로운 펜으로 구겨 쓴 책 같이 그녀가 고통하지 못하는 피가 철철 흐른다.
++ 젠더폭력이 뭐냐는 홍대표에게, 넬리 아르캉이 말한다.
“내가 창녀가 된 게 첫 손님을 받으면서부터가 아니라는 점을 당신은 알아야 해, 천만의 말씀, 그보다 훨씬 이전, 그러니까 피겨스케이팅과 탭댄스를 배우던 어린 시절에 이미 난 창녀였어, 무조건 제일 예뻐야 하고 실성한 듯 잠자야 하는 동화속에서부터 난 창녀였다구, ”
+++ 아참 이 소설은 문학동네로부터 리뷰어로 선정되어 제공받았고, 이 리뷰는 그래서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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