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좋아하는 책들을 여러 번 읽긴 하지만, 다들 읽었다는 위대한 작품들을 읽다가 흥미가 없어 다시 책장에 꽂아놓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 외에는 넓게 탐독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그 외의 많은 것들에서도 동일하다. 이를테면 인간관계라던지, 나의 생활 방식같은 것들도.

그 중에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의 소설들을 거의 다 읽었다. 아마 읽지 않은 것은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맞나?)와 해변의 카프카 정도일 것 같은데, 그의 소설들을 읽어내려간 수 년 간의 열정에 비해 그의 산문집은 거의 읽지 않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의 소설들을 읽던 시절에 나는 오로지 소설만을 닥치는대로 읽어대던 소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최근 책장에 손이 닿아 읽지 않고 꽂혀있던 하루키의 여행 산문집을 한 권 읽었다.

‘하루키의 여행법‘이라는 국내 제목으로 출판된, 이 괴상한 디자인의 책에는 표지 디자인의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꽤나 인상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하루키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서도 그가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여행기를 읽노라면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그의 세련된 유머감각, 그가 여행을 하는 방식, 숙소를 정하거나 식사의 메뉴를 결정하는 기준같은 것들. 이 책에서는 너무나 하루키적인 여행기가 여러편 겹쳐져 수록되어 있다.

하루키의 여행은 너무나 일상적이다. 그는 여행하며 얻은 감상들을 과장하지 않는다. 나는 대체로 여행하며 적는 글에는, 좋았던 점과 인상깊은 상념만을 기록하는 편이다. 나의 여행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므로,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목적에 맞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여행기에는 여행지에서 얻은 피로와 당황스러운 현지의 문화, 여행의 불편함과 지루함과 이를 데 없이 끔찍하거나 무서운 장면들이 여과없이 드러나있다. 그가 멕시코를 여행하며 멕시코적인 모든 불확실한 당황스러움을 덤덤히 받아들여가는 과정은 매우 유머러스하고 하루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의 건축가들은 모두 새로 짓는 건물들을 수십년은 된 것 처럼 허름하게 만드는 훈련을 받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멕시코의 인디언 마을을 방문한 뒤 자신과 동행한 사진기자가 사진찍히기를 싫어하는 현지인들이 집어던진 온갖 것들에 맞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곳 사람들은 매일 뭔가를 향해 물건을 내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지나 않나 싶을 정도로 제대로 머리에 명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저 사람과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하는 표정으로 멀찍이서 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곤 한다. 꿈꿨던 8000km 미대륙 횡단을 하면서도 ‘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소가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며, 지루하기 이를데 없는 여행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여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 온갖 곳들에서 이 지난한 피로와 고충과 당황스럽고 황당한 독창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발적으로 또다시 길을 나서는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의 곳곳에 그에 대한 답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답변은 이것이다.

˝내가 멕시코에서 겪은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어낼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에 오지 않고서는, 멕시코의 공기를 들여마시고 멕시코 땅을 발로 밟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가 없는 그런 피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피곤을 거듭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멕시코라는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책에는 또한 하루키가 역사 혹은 기억을 찾아 여행하는 기록들도 있다. 여기서 나는 하루키의 의도적인 객관성, 혹은 중립성같은 것을 발견한다. 그가 중국을 찾아 상상을 뛰어넘는 인파를 바라보며 ‘어쩌면 난징 대학살과 같은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가 그 앞에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놓았을지라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심한 의문이 들 때 즈음, 그가 그의 정신적 고향인 고베 산노미야를 도보로 방문하는 여행기가 마지막에 진행된다. 또한 일본이 참패한 노몬한 전적지를 찾아 그가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두 지점에서 하루키의 난징 대학살에 대한 발언의 논점이 파악된다. 하루키가 말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그의 의도적인 객관성에 의한 것이다. 학살당한 숫자에 대한 의심과 진짜 중국을 방문한 뒤에 느낀 그 의심에 대한 고백일 뿐, 그가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은 노몬한 전적지를 찾아 언급한 것처럼, 그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미치는 실제가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식으로 말하진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베트남같은 곳에 가서는 ‘어쩌면 이곳에서 실제로 한국군이 베트남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증언을 계속하고 목소리를 내는 한, 그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므로(혹은 객관적인 정보에 논란이 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일관하는 태도(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루키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는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대하는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일이다.

이야기가 돌아왔지만, 이 여행기에는 실제로 피식피식하며 읽을 세련된 유머가 돋보이는 문장들도 많이 있고 솔직한 여행기로서 갖는 희귀한 매력도 있다. 하루키의 스케치(이 책을 통해 그의 그림을 처음 봤다)라는 보기 드문 기록도 있고, 그의 사진들도 꽤나 많이 수록되어 있어 재밌다. 노몬한에서 겪은 기이한 경험을 기록한 대목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그의 소설의 한 대목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할 만큼 문학적인 정취도 있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지의 감상을 기록하길 좋아하는 내가 읽기 적합한 책이었다고나 할까. 모름지기 여행기란 이래야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여행기를 쓰려 한다면 자신만의 판타지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십분 동의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쓰려고 했던 것은 이런게 아니었다는 생각만 들 뿐이니 빨리 마침표를 찍어야겠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