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서점
가쿠타 미츠요.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이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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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분의 리뷰로 알게 되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쿠타 마쓰요와 오카자키 다케시의 헌책방 순례기-라고 쓰면 대충 맞을 것 같은 매력적인 잡문이다. 가쿠타 마쓰요가 헌책방계의 스승인 오카자키 다케시에게 입문해 그의 지령에 따라 일본 각지의 헌책방을 찾아 그 감상을 과장 없이 소소하게 적어가는 식이며, 사부인 오카자키의 만담같은 지령(및 가쿠타 마쓰요가 쓴 글에 대한 소회)과 카쿠타 마쓰요의 감상이 교차되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대체 오카자키는 어떤 사람인가 싶었다. 오카자키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헌책도의 초심자에게 걸맞는 헌책의 던전들을 가쿠타에게 추천해주고, 가쿠타는 그 지령을 수행하며 얻은 감상들을 적는다. 여기서 놀라운 지점은 오카자키의 수다였다. 가쿠타의 보고를 받은 사부 오카자키는 가쿠타의 감상에 대한 코멘트 뿐 아니라 그녀의 소비목록이나 그녀가 순례 중 얻은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늘어놓는다. 가쿠타가 어떤 책을 구매했다고 적으면 그 책의 역사나 저자의 인생, 심지어 저자가 관계한 또다른 작가나 출판사의 역사까지 서술하는 식이다. 헌책에 대한 박식함으로 따지자면 과연 사부가 아닐 수 없다. 대체 헌책에 대해 얼마만큼의 애정을 갖고 어느 정도의 수행을 쌓아야 오카자키의 수다가 가능한 걸까. 매우 유머러스하고 키치적인 문체로 ‘이런 지식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투로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 또한 그의 문하로 들어가 헌책 수행에 입문하고 싶어질 지경이 된다.

그러나 김연수의 추천사대로, 이런 생각은 퍼뜩 나를 슬프고, 안타깝고, 괴롭게 만든다.

2.
나는 청주에 산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꼭 롯데시네마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다. 그리곤 아마 읽지도 않을(혹은 다 읽으려면 수 년은 필요할) 책들을 잔뜩 사서는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쌓아둔 책이 얼만지.. 언제 다 읽을지 짐작도 안된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기기 전에는 청주의 헌책방 거리에 종종 들렀다. 청주에 사시는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잉? 청주에 그런 거리가 있었어?‘ 라고 되물을 테지만, 헌책방 거리는 내 마음대로 붙여 부르는 이름일 뿐, 대체로 청주인들에게 그 거리는 요즘에 ‘소나무 길‘이라고 불리는 듯하다. 지금은 소나무 길이라고 불리는 그 길에는, 아직도 여전히 헌책방들이 많이 늘어서 있긴 하지만, 수 년 전까지만 해도 헌책방 거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헌책방이 많았다. 도시를 들여다보는 일을 하다보면 문득 궁금해지는 것들 중 하나는 ‘어째서 오래된 도시에는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같은 업종의 가게들이 자연스레 밀집해서 거리를 형성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꽃가게를 연다. 왜인지 모르게 그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다른 꽃가게를 차린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결국 그 거리는 꽃가게 거리가 된다. 약국 거리도 마찬가지고 애견샵 거리도 있다. 이런 흐름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어쨌든 청주 시내의 그 거리에는 헌책방이 자연스레 밀집해 있었다.

그곳에 가면 가쿠타가 이 책에 써놓은 감상들에 동의할 만한 분위기가 언제나 가득했다. 작은 입구 전면의 디자인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책방들의 입구는 언제나 책방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난 헌책들이 입구 밖까지 흘러나와 책장처럼 가득 쌓여져 있었으니까. 그런 책방에 가면 낡은 종이들이 내는 냄새와 함께 특유의 공기에 휩싸인 감각이 느껴졌다. 다른 공간에 온 느낌이랄까. 그곳의 시간은 문 밖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작은 매장에 흘러넘칠 만큼의 책들이 들어차 있었으므로 그곳에는 눕혀져 쌓아올린 책들 사이의 작은 길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책들을 넘어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길들을 돌아다니면, 내가 읽었거나 읽고 싶었던 책들, 내가 좋아하거나 이름만 알고 있었던 작가들의 책들이 눈에 띈다. 그 책들을 조심스레 펼쳐보면 시간의 흔적과 함께 매장에 은은하게 배어있던 낡은 종이의 냄새가 덩어리가 되어 훅 하고 얼굴을 덮친다. 몇차례 고민한 끝에 살 책들은 사고 그렇지 않은 책들은 제자리(라고 하지만 아무데나 놔도 괜찮을 법하다)에 돌려놓는다. 계산은 반드시 현금. 어딘지 무뚝뚝한 할아버지(거의 반드시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에게 돈을 지불하고 나오면 다시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른다.

그래서 내 방에는, 엄청나게 오래된 듯한 책들이 종종 책장 사이에 껴있다. 이외수의 옛날 소설들이라던지, 에리히 프롬의 (이제는 고전이 된 듯한)심리학 책들 같은 것들을 나는 그런 낡은 것들로 읽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세로쓰기에 강하다.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책들은 대체로 세로쓰기가 살아있을 시절의 것들이 많다. 세로쓰기로 된 책들을 읽으면 어딘지 모르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갈 때의 간격이 굉장히 먼 것처럼 느껴지고, 같은 문장을 두세번 읽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고 재미가 있다. 그래서 헌책방을 자주 찾았다. (얼마전 읽은 하루키의 여행법도 헌책이었다-책의 맨 앞장에는 어떤 여성의 이름이 적힌 감사장?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지)

3.
2번의 내용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쓸쓸하고, 괴롭고, 슬픈 지점이다. 지금은 청주에도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어 과거의 헌책방이 수행했던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의 인과관계는 혹은 반대일 수도 있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전국에 오프라인 지점으로 생기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헌책방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일수도 있고, 헌책방이 사라지며 알라딘 중고서점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어느쪽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헌책방은 점점 우리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를 여행할 때 나 역시 헌책방을 자주 찾았다. 제천에서도 그랬고, 전주에는 꽤나 번화한 헌책방 거리가 있기도 했다. 혹은 헌책방만을 보기 위해 여행한 적도 있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산골의 그 헌책방은 후에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은신하는 장소로 등장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헌책방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처럼, 헌책방 자체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쓸쓸함은 책에서도 드러난다. 비록 쓸쓸한 감상을 저자들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책 속에 책방의 실명들이 등장할 때 종종 각주로 *현재는 폐점-과 같은 설명이 달려있기도 했던 것이다. 폐점된 책방의 수는 우리나라 출판 이후 더 많아졌는지, 책 뒤에 따로 정리되어 있기도 했다.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더욱 안타깝고, 혹은 이 책의 저자들이 부러운 지점은 문학에 대한 애정의 온도가 이곳과 그곳이 다르다는 점이다. 가쿠타는 사부의 지령에 따라 가마쿠라를 찾아 그곳의 헌책방을 순례하며 가마쿠라 출신 문인들의 책들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가마쿠라를 비롯한 각지의 헌책방들이 지역 출신의 문인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긍지와 자부심이 어떻게 가격으로 드러나는지를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넘어온다면 그런 깨달음의 광채는 조금 흐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지역의 문학관을 찾는 일을 좋아하기도 한다. 전주에 가면 꼭 최명희 문학관을 들르고, 부여의 신동엽 문학관이나 서울 윤동주 문학관을 답사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한 문학관에 가면 얻어지는 특수한 감상이 있다. 위대한 문인들의 정신세계속에 묻혀있는 느낌, 그들의 우물 속에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감각같은 것들. 물론 이것은 문인들의 찬란한 문장들이 실제로 그곳에 가득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건축적인 연출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방의 문학관들이 그 지방의 이름을 내걸고 서있는 것은 본 기억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청주의 문인들‘이라던지, ‘강경 출신의 문학가‘ 같은 것들은 듣기에도 이상해보인다. (물론 지역색이 강한 문인들이 있긴 하다, 논산을 아끼는 박범신이라던지 춘천의 이외수 등이 떠오르지만 내가 모르는 많은 문인들이 있겠지)

일본에 오타루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정말 작은 도시인데, 우리나라로 비유해보자면 군산이 비슷한 도시일지도 모른다. 그 도시에는 ‘오타루 문학관‘이라는 곳이 있다. 이른바 오타루 출신의 문인들에 대한 박물관이다. 문학관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한 스시집의 연회장인 ‘카모메테이‘라는 곳에 종종 갔는데, 그곳의 내부에는 오타루 문인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약력, 대표작들이 적힌 판넬이 벽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 가쿠타는 가마쿠라에서 가마쿠라 문학관을 찾았다는데, 이렇게 일본에는 지역의 이름을 건 문학관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부럽기도, 참 아쉽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내 무지가 가장 크게 작용한 감상일 것이고, 또한 물리적인 크기의 차이를 보이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무시한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울과 서울 아닌 곳‘으로 구분되는 우리나라의 현대적인 특성 역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헌책방에는 지역색이 드러난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썼다. 헌책방은 커녕, 서울 아닌 변방의 색채는 사라져가는 우리나라의 현상을 살펴보면 종종 깊은 한숨이 나온다. 혹은 지방에 지방 속의 서울-이 등장해서 반짝 인기를 끄는 식이다. 어딘가 특색있는 지방의 거리가 뜬다 싶으면 ‘운리단 길‘, ‘망리단 길‘, ‘천리단 길‘하는 식의 네이밍이 붙는다는 것이 아쉽다는 뜻이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한 밀도 차이가 이 책을 읽으며 확연하게 느껴져 씁쓸함이 더해졌다.

3.
어쩌다보니 좋은 책이었다-로 시작해서 슬프고 안타깝고 괴롭다-라는 식으로 끝나버릴 것 같아 덧붙이자면, 이 책은 앞서 말한대로 굉장히 매력적이다. 책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이 책을 읽노라면 나도 짐을 싸서 당장 우리나라의 얼마 남지 않은 헌책방들을 순례하고 그 책방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두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오카자키 사부의 박식한 수다에 감탄하고 가쿠타의 겸손하면서 감상적인 기록들을 보노라면 책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 와중에 오카자키의 파트에서는 실제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위트있는 지점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가상의 인물인 제자 ‘야나스케‘가 씬스틸러처럼 오카자키와의 케미를 통해 웃음을 선사한다.

헌책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매니악한 분야처럼 느껴지는 장르에 대한 책이라 전문적인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 책은 전혀 어려운 책이 아니다. 가볍게 읽혀지고 쉽게 이해된다. 그 지점 역시 이 책이 가진 강점이 아닐까. 가쿠타가 ‘가아프가 본 세상‘이라는 책을 가이드 삼아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했듯이,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도쿄 근교를 여행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읽을 수 없는 책 투성이겠지만, 그곳은 아마 그렇게 낯선 곳들은 아닐 것이다. 헌책방이라는 것이 대개 그런 것처럼.

+ 왓차에 별점 넣으면서 보니까 저자 가쿠타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종이달‘의 원작가이기도 하고, 왜인지 모르게 오래도록 내 책장에 꽂혀있는 (역시 헌책방에 산 듯한)‘가족방랑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가족방랑기는 표지가 별로여서 안읽고 있었는데 (그럼 대체 왜 산거?) 읽어봐야겠다. 종이달 역시 마찬가지.
++ 갑자기 생각나서 추가. 아주 옛날, 지금은 헤어진 옛 연인과 함께 파주 출판단지를 찾은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 있던 아름다운 가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그곳과는 달랐다. 거의 거대한 헌책방이라고 할만큼 중고서적들이 물품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 아마 승효상이 설계한 건물이었을텐데, 그곳에서 산 책들의 목록까지 기억이 난다. 김훈의 소설과 ‘르꼬르뷔제의 손‘이라는 책.
+++ 또 추가. 김연수가 추천사를 붙여서 상상해보건데, 그의 단편집 ‘스무 살‘을 보면 ‘공야장 도서관 음모사건‘이라는 단편이 나온다. 이것이 아마 이 책의 영향을 받은건 아닐까? 라는 추측. 아마 아닐 것인데 그래도 왠지 연관되어 생각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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