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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 ㅣ 메이트북스 슬림북 10
미셸 몽테뉴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400년 전 동네 형님의 솔직한 넋두리 |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 서평
빨간 표지가 먼저 손을 끄는 책이에요. 새빨간 바탕에 흰 글씨 제목이 큼직하게 들어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목에 하얀 주름 깃을 두른 몽테뉴가 옆얼굴로 서 있습니다. 표정이 근엄해서 처음엔 잔소리 꽤나 하실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이 양반, 자기 얘기를 몽땅 털어놓는 스타일이더군요. 이름부터 몽테뉴라 그런가 싶었습니다.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는 편역자의 말부터 요즘 얘기로 문을 열어요. 프로필을 고르고, 잘 나온 사진을 남기고, 성취를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시대라고요. 그렇게 보여주는 일이 많아질수록 정작 실제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는 일은 뒤로 밀리기 쉽다는 거예요. 회사 메신저 프로필 사진 하나 고르는 데도 은근히 신경 쓰는 게 사람 마음이라, 첫 장부터 뜨끔한 느낌이 들었어요.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그 사이가 멀어지는 시대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가 조금 특이한 건 생김새부터예요. 몽테뉴가 평생 쓰고 고친 <수상록> 세 권 전체를 바탕으로 53가지 주제를 뽑아 요즘 말로 다시 풀어 쓴 편역서거든요. 완역본도 아니고 유명한 문장만 모은 명언집도 아니라고 편역자가 직접 밝혀두었더라고요. 몽테뉴처럼 한 가지 생각을 여러 방향에서 살펴보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않는 태도를 살리고 싶었다는데, 읽어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꼭지마다 몽테뉴가 "나는" 하고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이라, 철학 강의를 듣는다기보다는 동네 형님 넋두리를 듣는 기분에 가깝습니다.
편역자의 말에서 웃음이 났던 대목도 있어요. 몽테뉴는 사랑과 성, 식사와 수면, 병과 노화, 배변과 통증처럼 점잖은 철학책이 피하기 쉬운 문제를 거리낌 없이 다뤘대요. 배변까지 철학에 넣은 사람이라니. 기억력이 나쁜 것도 숨기지 않았고, 생각이 바뀌면 바뀐 흔적까지 남겼다고 하니 이 정도면 솔직함이 거의 체질인 분 같았어요.
몽테뉴 하면 서재에 틀어박힌 근엄한 사상가부터 떠올렸는데, 이 책 속 몽테뉴는 꽤 사람 냄새가 납니다. 보르도 시장으로 뽑혔을 때 처음엔 사양했다가 왕의 명령까지 더해지자 결국 맡았고, 두 번이나 선출됐다고 해요. 그때 시민들 앞에서 기억력과 경험은 부족하지만 야심과 탐욕, 폭력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는데, 취임 인사치고는 참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말 같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02번 꼭지, 한 번의 행동으로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였어요. 어제는 위험 앞에서 담대했던 사람이 오늘은 사소한 일에 겁을 먹고, 한때 너그러웠던 사람이 작은 이익 앞에서 인색해지기도 한다고 하죠. 사람은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만큼 한결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름표가 참 쉽게 붙는다는 걸 알게 돼요. "그 친구는 원래 좀 덜렁대", "그 팀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요. 몽테뉴는 친절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유능한 사람, 실패한 사람이라고 빠르게 정해버리면 그 뒤로는 이름표에 맞는 행동만 골라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읽다 보니 제가 남한테 붙여둔 이름표들이 몇 개 떠오르더군요. 제 등에 붙어 있을 이름표도요.
그리고 이 꼭지의 마지막 문장.
"한 번 잘했다고 완성된 사람인 척하지 말고, 한 번 잘못했다고 자기 전부를 버리지도 마라."
남 얘기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말이었어요. 몽테뉴도 다른 사람에게 그래야 하지만 자신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덧붙이거든요. 실수 하나에 며칠씩 끙끙 앓는 중년 직장인에게는 이만한 처방이 없는 거 같습니다.

03번 꼭지에서는 웃으면서 찔렸어요. 몽테뉴는 나이가 들어 욕망이 줄었다고 해서 자기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대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유혹을 덜 따르게 된 것과 더 현명해진 것은 다른 일이라고요. 나이 들어 저녁 약속 줄어든 걸 철든 증거로 여기는 중년이 저만은 아닐 텐데요. 몽테뉴 앞에서는 그냥 체력 문제였던 걸로.
그래도 이 꼭지가 놀리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몽테뉴는 자신을 한 문장으로 완성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금의 생각이 내일 달라질 수도 있고 그 변화 역시 나라고 말합니다. 어제 한 말과 오늘 생각이 다르면 체면 깎이는 것 같아 괜히 우기게 될 때가 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면 바뀐 이유를 함께 보면 된다는 얘기가 편하게 들렸어요.
요즘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보니 22번 꼭지가 특히 반가웠습니다. 몽테뉴는 박식하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책을 읽지 않았고, 길고 힘든 독서를 억지로 견디지도 않았대요. 플루타르코스의 짧은 글과 세네카의 편지를 좋아한 것도 필요한 곳에서 펼치고 원하는 때에 덮을 수 있어서라고요. 키케로처럼 훌륭한 사람의 글도 서론이 길게 이어지면 지친다는 고백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400여 년 전 대철학자도 서론 긴 건 힘들었구나 싶어서요.
"나는 인용을 세지 않고 그 무게를 잰다"는 문장도 마음에 들었어요. 몇 권 읽었나 세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몽테뉴는 그 책으로 내가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라고 하더군요.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를 읽으며 이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는 이유랑도 닮은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번 꼭지는 회의실 풍경 그 자체예요. 논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누가 이기는지부터 따지고, 생각이 막히면 목소리를 높이거나 말꼬리를 잡는다고 하죠. 그 옛날 프랑스나 지금 우리네 회의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몽테뉴는 상대의 이유가 더 강하다면 거기에 굽히는 것도 승리라고 말해요. 대화를 마친 뒤에는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는가"를 묻고 싶다고요.

회의 끝나고 나오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뭐였더라.
30번과 32번 꼭지는 같이 읽으면 재미가 두 배예요. 몽테뉴는 말을 살 때는 다리와 눈, 몸 상태부터 살피면서 사람을 볼 때는 왜 옷과 신분부터 보느냐고 물어요. 칼집이 화려하다고 그 안의 칼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비유도 이어지고요. 통풍이 찾아오면 왕도 다른 사람처럼 아프다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었습니다.
32번에서 몽테뉴는 가장 높은 자리를 바라지 않았고, 파리에서 둘째나 셋째쯤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대요. 이 나이쯤 되면 위로 올라가는 자리와 내 생활을 지킬 수 있는 자리 사이에서 저울질하게 되는데, 몽테뉴는 그 앞에서 별로 망설이지 않았던 거 같아요. 왕자들이 제대로 배우는 건 말 타기뿐이라는 말도 나와요. 말은 왕의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요. 알렉산드로스가 고개를 기울이면 신하들도 따라 기울였다는 이야기, 파보리누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논쟁을 져주면서 서른 개 군단을 거느린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우길 수 있겠느냐며 웃었다는 일화까지. 높은 자리일수록 솔직한 말을 듣기 어렵다는 얘기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놓으니 술술 읽히더라고요.
33번 꼭지는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빌려줄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은 나에게 남겨두어야 한다."
몽테뉴의 아버지도 같은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대요. 늙은 몸과 건강, 집안의 평온까지 잊을 만큼 도시 일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해요. 몽테뉴는 그 선의를 존경했지만 그 방식까지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고 밝힙니다. 일에 모든 걸 쏟아부은 윗세대를 보며 자란 사람이라면 이 몇 줄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책임은 다하되 그 일이 영혼을 모두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되고, 지나친 열정은 오히려 판단을 흐린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되, 내 힘 밖의 결과까지 끌어안지는 않겠다고요. "세상의 모든 짐을 내 마음속에 들여놓을 필요는 없다"는 문장은 월요일 아침마다 한 번씩 꺼내 보고 싶더라고요.
솔직히 걸렸던 부분은 48번 꼭지였어요. 몽테뉴는 늙어서 그리스어를 새로 배우기 시작한 카토의 열정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해요. 좋은 일에도 제때가 있다고요. 이 나이에 와서야 책 읽는 재미를 붙인 사람으로서는 순간 서운하더군요. 늦게 시작한 게 죄인가 싶어서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문단에서 마음이 풀렸어요.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멈추라는 뜻은 아니래요. 공부는 언제든 이어갈 수 있고, 다만 늘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살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지금 삶에 맞는 공부를 하고 이미 배운 것을 더 잘 쓰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면 된다고요. 몽테뉴가 정말 경계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몸은 늙는데 욕망은 계속 젊어지는 것. 무덤에 한 발을 두고도 새 집을 짓는다는 비유 앞에서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망설여졌어요.
몽테뉴는 이제 가장 긴 계획도 한 해를 넘기지 않으려 한다고 해요. 무엇을 더 시작할지만 묻지 않고 무엇을 누리고 마치고 놓아줄지도 생각하겠다는 말이 이 나이에 듣기 딱 좋았습니다. 회사는 여전히 삼 년짜리 계획표를 들이밀지만요.
49번 꼭지는 조금 더 차분하게 읽혔어요. 우리는 일흔이나 여든까지 사는 걸 당연한 몫처럼 여기지만, 자연은 누구에게도 몇 살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예요. 그렇다고 내일 죽을 사람처럼 모든 일을 서두르라는 뜻은 아니라고 하고요. 다만 시간이 많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해야 할 말과 선택, 책임을 이유 없이 미루지는 말라고 합니다.
미뤄둔 말들이 몇 개 떠올랐어요.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는 메이트북스 슬림북 시리즈 중 한 권이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얇은 책이에요. 저보다 훨씬 날씬해서 살짝 질투가 날 정도. 한 꼭지가 짧아서 아무 데나 펼쳐도 되고, 마음이 복잡한 날 목차에서 지금 필요한 제목 하나 골라 읽기에도 좋아요. 필요한 곳에서 펼치고 원하는 때에 덮을 수 있는 책을 좋아했다는 몽테뉴의 취향이 책 모양에 그대로 담긴 것 같더라고요. <수상록>을 통째로 읽을 엄두는 안 나는데 몽테뉴가 어떤 사람인지는 궁금했다면 이만한 입구가 없을 거 같습니다. 책상 옆에 두고 오래 꺼내 볼 책으로 손색이 없어요.

어느새 11월 첫 주, 월요일을 겨우 넘기고 맞은 화요일입니다. 길가 은행잎이 바닥에 수북하게 깔리고 곧 입동이라니 한 해가 정말 빠르네요.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 덕분에 마음 한쪽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좀 내려놓은 기분이에요. 완벽해지려고 애쓰기 전에 오늘 하루라도 나한테 솔직해 보기로, 몽테뉴 형님이랑 조용히 약속 하나 해봅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차 한 잔 곁에 두고 좋은 책 만나시길 바랄게요.
완벽한 척 대신 흔들리는 나를 그대로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400년 전 동네 형님 몽테뉴의 53가지 솔직한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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