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라는 우연
브라이언 워싱턴 지음, 최현영 옮김 / 더픽션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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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독립은 좋은 거죠" 열아홉 시간을 날아간 엄마 이야기 <아름다움이라는 우연> 서평


이 소설의 두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끝까지 '어머니'와 '아들'로만 불립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번역하신 분도 혹시 어딘가에 이름이 나오는데 놓친 건 아닐까 싶어 여러 번 되짚어 읽었다고 하더군요. 끝내 나오지 않았대요. 처음엔 조금 어색했는데, 장을 넘길수록 이름이 없어서 오히려 어느 집 이야기로든 읽히는 구석이 생기는 거 같아요.


<아름다움이라는 우연>은 브라이언 워싱턴의 장편소설이고, 최현영 님이 옮겨서 더픽션에서 나왔습니다. 원제는 Palaver예요. 2025 LA타임스 도서상 소설 부문 수상작이고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대요. 이 작가 책이 한국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니, 저처럼 이름이 낯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휴스턴에 사는 어머니가 도쿄로 날아가면서 시작돼요. 아들은 도쿄에서 산 지 십 년이 넘었고, 삼 년 전부터는 어머니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침묵이라는 리듬을 그냥 묵인하며 지내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도쿄 시간으로 새벽 네 시에 아들의 전화가 걸려 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들은 "모르겠어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라고만 해요. 어머니는 결국 가장 겁나던 질문으로 아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그 길로 비행기표를 알아봅니다.


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와 타이베이를 거쳐 하네다까지 열아홉 시간이 걸린대요.

어머니가 낼 수 있는 휴가는 12일인데, 좀 더 우겼다면 14일도 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문장이 붙어 있어요. 여기서 피식 웃었습니다. 휴가 이틀을 두고 속으로 셈해 보는 그 마음, 회사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 알잖아요.


도쿄에 도착한 어머니는 신오쿠보에서 길을 잃어요. 네모반듯한 회색 건물들이 다 똑같아 보이고, 아까 지나친 세븐일레븐을 또 지나칩니다. 아들에게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고요. 그러다 길 건너 작고 푸른 건물에서 노란 'Bistro' 글씨를 발견하는데, 프랑스어도 일본어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그 글씨가 도쿄에서 본 것 중 가장 눈에 익었다고 하더군요. 아름다움과 혼돈이 한 끗 차이라는 문장도 이 근처에 있어요.


한 시간쯤 지나 휘청거리며 나타난 아들은 첫마디부터 퉁명스러워요. "하느님 맙소사"를 달고 사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그렇게 하느님을 찾아대니 누가 보면 네가 크리스천인 줄 알겠다." 하고 받아치는데, 말싸움으로는 어머니도 한 수 위 같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이래요.


"엄마는 길을 잘못 들었어요." "나는 여러 번 방향을 틀었는데 어떤 게 잘못된 길이었을까?"

길을 물은 건데 대답은 인생 얘기처럼 들리는 거 같아요.

아들은 깔끔한 걸 넘어서 결벽에 가까워요. 어머니가 머그잔을 조리대에 올려 두면 바로 치우고, 의자에 걸어 둔 재킷은 세탁기에 넣어 버려요. 신발 신은 채 들어오면 어머니가 슬리퍼를 신을 때까지 고개를 저으며 지켜보고요. 밤마다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그 작은 확인이 다음 날 아침을 무사히 맞게 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요. 어머니는 땅 밑 지각판은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움직이니 그건 환상일 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어 하는데, 저는 아들 쪽 마음도 조금 알 것 같았어요. 퇴근 전에 책상을 정리해 둬야 내일이 덜 무서운 기분, 그거 비슷한 거 아닐까요.


그 침대를 두고 어머니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을 세 줄로 정리해 둔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혐오. / 그다음, 수용. / 그리고 질문."

그다음 질문은 이거예요. "내가 언제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니?" 아들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라고 답하고, 어머니는 그 순간 아들이 가식을 떨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설명은 짧은데 어머니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보여서 좋았어요. 이런 문장이 툭툭 나오는 게 <아름다움이라는 우연>의 재미인 거 같습니다.


어머니는 시차 적응도 금방 해요.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한 바퀴씩 돌고는 신오쿠보 끝에서 신주쿠 끝까지 다 파악했다고 큰소리를 치죠. 아들이 그냥 기웃거리는 거라고 하자 "그럼 같이 여행을 가서 누가 지치는지 한번 보자."라고 받아칩니다. 산책길 풍경 중에는 오쿠보역 옆 육교 밑 터널이 기억에 남아요. 삿포로 캔맥주를 마시며 담배 피우는 남자들 사이로 태국어, 타갈로그어, 이그보어가 들려오는데, 어머니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그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줘요. 번쩍거리는 관광객들 세계로 다시 나가기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머니에게는 거기가 가장 편안한 장소였대요.


낯선 말들 한가운데서 오히려 숨이 놓이는 기분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비스트로 셰프인 벤과 저녁을 먹는 장면이에요. 간판도 없는 식당 앞에서 어머니가 비밀 술집이냐고 놀리니까, 벤이 문을 세 번 두드리고 암호를 말하라고 받아줘요. 그러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고, 어머니가 내 잘못 같다고 털어놓자 벤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은 나쁜 일을 의미해요. 독립은 좋은 거죠."

"당신의 역할은 그 친구가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거예요."라는 말도 이어져요. 마흔 후반이 되니 자식 노릇과 부모 노릇이 한꺼번에 걸리는 나이라 그런지, 착륙할 곳이라는 말이 편하게 들어오더라고요. 무언가를 해 주는 쪽보다는 그 자리에 계속 있어 주는 쪽에 더 가까운 말 같아서요.


일본, 프랑스, 페루 요리를 섞은 아홉 가지 코스도 줄줄이 나와요. 고추냉이를 살짝 바른 구운 가지, 매실주 잼을 올린 사워도 빵, 일본주에 넣고 끓인 송이버섯까지 메뉴만 읽어도 배가 고파집니다. 그리고 이 저녁 자리에서 책 제목이 등장해요.


"그 시는 아니에요. 이 하늘은 아무도 이끌고 가지 않아요. 종소리를 들을 사람도 아무도 없어요. 이 세상과 함께 있는 동시에 떨어져 있는 곳이에요. 오래전에 그 시를 읽었어요. 자메이카에 있을 때 교과서에서요." "어떻게 자메이카 교과서에 바쇼의 시가 실릴 수 있죠?" "나도 몰라요. 아마도 우연이었겠죠. 아름다움이라는 우연. 하지만 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게 사실인지, 바쇼가 묘사한 이곳의 석양이 정말 그런지 내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아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벤의 말에 어머니는 마음속에 질문이 하나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해요. 이 장면에서 어머니가 누구의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웨이터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윙크를 날려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대목에서는 그냥 웃었습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오빠 스테판이 자주 나와요. 자메이카에서 보낸 어린 시절, 친구 셰릴과 셰릴 곁에 나타난 얼, 그리고 얼이 어깨에 팔을 걸치자 말을 멈추던 스테판이 있어요. 스테판이 놀리듯 혀를 쏙 내밀면 어머니도 똑같이 혀를 내밀어 주던 그 순간을, 어머니는 오빠가 죽은 뒤 마음속으로 되돌아보곤 했대요.


"그들의 세상은 작았다. 하지만, 스테판은 그걸로 만족했다."

그 세상이 오빠에게 충분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자신에게는 충분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이어지는데, 쉬운 답을 내놓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다른 회상 속 스테판이 "땡처리 세일입니다요. 반품 불가. 패키지 상품입니다." 하고 너스레를 떨 때, 웃기면서도 마음이 쓰였어요. 아들의 휘청이는 걸음걸이에서 어머니가 스테판을 언뜻 보는 초반 장면도 그래서 다시 떠오르고요.


솔직히 처음에 좀 걸렸던 건 시간이 오가는 방식이었어요. 도쿄의 저녁 식탁과 어머니의 지난 시절이 별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붙어 있어서, 몇 번은 지금이 언제인지 잠깐 헤맸습니다. 신오쿠보의 어머니처럼요. 그래도 금방 익숙해졌고, 과거의 얼에게 "셰릴 곁에 그냥 있어. 변함없이."라고 말해 주던 어머니가 현재의 벤에게서 착륙할 곳 이야기를 듣는 걸 보니 두 시간이 서로 비춰 주는 느낌도 들었어요.


책은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어머니는 도쿄까지 열아홉 시간을 날아갔다는데, 이 책도 손목한테는 나름 장거리 비행입니다.

한국어판만의 즐거움도 있어요. 맨 앞 '한국 독자들에게'에서 작가는 돌기민 <보행 연습>, 한강 <희랍어 시간>,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손원평 <아몬드>를 꼽으며 한국 작가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털어놓아요. <대도시의 사랑법>은 자기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 듯한 몇 안 되는 책이라고 하더군요. 글 끝에는 언젠가 신주쿠 니초메에 있는 앨런의 작은 바에 와서 빈자리에 편히 앉아 달라는 인사가 붙어 있고요. 맨 뒤 옮긴이의 말에는 '손끝에서 시작되는 사소한 친절'이나 일기일회 같은 말로 이 소설을 풀어 주는 대목이 있어서, 앞뒤로 안내를 받으며 읽는 기분이었어요. 원색 붓질로 두 얼굴을 그린 표지까지 생각하면 <아름다움이라는 우연>은 책장에 꽂아 둘 맛이 나는 책입니다.


전화 한 통을 자꾸 미루게 되는 사람이 하나쯤 있다면, 읽는 내내 그 얼굴이 겹쳐 보일 거예요.


10월도 끝자락이라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어요. 소설 속 도쿄의 건조한 겨울바람이 남의 일 같지 않은 목요일입니다. 요즘 가을 타냐고 물어보시면, 저는 책 탄다고 대답하고 있어요. <아름다움이라는 우연>을 덮고 나니 소식 뜸했던 사람한테 안부 문자 하나 보내고 싶어지네요. 따뜻한 책 한 권 만나서 좋았습니다.


십여 년의 침묵을 건너온 이름 없는 어머니와 아들이 도쿄의 작은 방에서 서로에게 착륙할 자리를 더듬어 찾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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