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레시피대로 가지 않는다 - 어쩌면 당연했던 흔들림의 기록
한정환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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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장님은 없었다, 한정환 <인생은 레시피대로 가지 않는다> 서평


누가 저한테 한 단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면, 아마 잠깐 머뭇거릴 거 같아요. 회사 이름이나 직함을 대면 되긴 하는데, 그게 저를 다 설명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이 책의 저자도 딱 그 머뭇거림에서 출발하더라고요. "배우 한정환입니다", "셰프 한정환입니다"처럼 자기를 망설임 없이 소개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는 고백으로요.


<인생은 레시피대로 가지 않는다>는 유튜브 채널 <서울 사는 남자>를 운영하는 한정환 작가의 첫 책입니다. 제목에 레시피가 들어가 있어서 처음엔 요리책인 줄 알았어요. 앞치마부터 둘러야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앞치마 두른 사람들의 이야기더군요.

저자는 고등학생 때부터 요리를 했고, 12년째 외식업 관련 일을 하고 있대요. 주변에서는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는데, 정작 본인은 흔들린 순간이 많았다고 털어놓습니다. 대학 시절엔 친구들과 미래 얘기를 할 때면 제 차례를 기다릴 만큼 목표가 선명했는데, 졸업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벽을 만나면서 확신이 흐려졌다고요. 그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마흔 후반인 지금도 그 질문에서 자유롭다고는 말 못 하니까요.


부러웠던 건 직업이 아니라 그 말을 자신 있게 꺼내기까지 버텨온 시간이었다는 문장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그동안 다닌 수많은 식당 가운데 오래 기억에 남은 열두 곳의 사장님을 다시 찾아가요. 질문은 하나. 저 사람이 걸어온 길은 어땠을까.

<인생은 레시피대로 가지 않는다>는 꼭지마다 흘러가는 방식이 재미있어요. 가게 첫인상과 음식 맛 묘사로 시작했다가, 그 맛에서 생긴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사장님 쪽으로 옮겨 가거든요. 맛집 리뷰로 들어갔다가 인터뷰로 빠져나오는 느낌이랄까요. 수백 곳을 다닌 사람이라 그런지 묘사가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고, 꼭지마다 가게 사진이 실려 있어서 그 골목 앞에 서 있는 기분도 들더라고요.


1부 첫 꼭지 (마음을 여는 열쇠 — 덕희커피)는 맛보기로 딱이에요. 입구부터 (응답하라 1988) 촬영지 같은 곳이래요. 평상 위에 바둑판이 놓여 있고, 문 옆엔 '덕희커피'라고 쓴 나무 간판이 걸려 있고요. 다른 카페들이 깔끔한 와이셔츠라면 여기는 체크무늬 남방 같다는 비유에서 가게 분위기가 단번에 그려졌습니다. 좌석을 늘리면 매출이 오를 텐데 굳이 혼자 온 손님을 위한 공간처럼 꾸며놓은 것도 궁금증을 키우더군요.


저자가 주문한 건 땅콩 크림이 들어간 크림 라떼, 피넛스윙이에요. 고소한 크림 위로 크럼블이 바삭하게 씹히고, 마지막에 따라오는 에스프레소가 "해맑은 녀석들 사이로 진중함을 더하는 어른 같은 역할"을 한대요. 커피 맛 설명인데 이상하게 사람 얘기처럼 읽혔어요. 회사에서 저는 해맑은 쪽일까, 진중한 쪽일까.

그다음 장면에서는 크게 웃었습니다. 같이 간 일행이 얘기하다 웃음이 터져서 커피를 창문에 뿜었는데, 사장님이 물티슈를 건네면서 이러셨대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손님을 단골로 만들고 그 단골을 팬으로 만드는 카페라는 저자의 말이 그대로 납득되는 한마디 같아요. 인터뷰 요청에 다음 날 온 답장도 그 사장님다웠어요. 고민이 끝났고 재밌을 것 같아서 참여해 보고 싶다며, 끝에 "일정 조율 렛츠기릿".


렛츠기릿이라니.

2부 (어른의 사춘기 — 일이사당)은 제목부터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사춘기라는 말이 중년에게도 붙을 수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조금 찔리기도 하고요. 저자가 자주 가는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비밀의 방앗간'이라며 알려준 곳인데, 자기만 알고 싶어서 꼭꼭 숨겨뒀던 데래요. 깊숙한 뒷골목의 작은 빵집이고, 문을 열면 진열대에 빵이 가득하고 벽에는 르 꼬르동 블루 디플로마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빵을 사장님 혼자 다 만든대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문을 열어서 쉬는 날이 많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쉬는 날에 주로 밑 작업을 하신다고요. 쉬는 날이면 소파부터 찾는 저 같은 사람은 괜히 뜨끔했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부분도 하나 있어요. 이 책, 배고플 때 펼치면 곤란합니다. 크로슈는 겉이 바삭하게 부서지고 속은 부드럽게 사라지는데, 그 순간 바닐라빈 크림이 풍미를 터뜨린대요. 퀸아망은 캐러멜의 끈적한 단맛 뒤에 빵의 담백함이 따라오는 게 "진한 반찬 뒤에 먹는 흰밥" 같다고 하고요. 빵에 흰밥 비유를 붙이는 걸 보면서 이 사람은 진짜 음식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경력과 완성도에 비해 가격이 유난히 합리적이어서 그 열정이 쌓인 과정을 들으러 가게를 다시 찾아가는데, 거기서부터는 책으로 만나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3부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것 — 쇼니노)는 결이 조금 달라요. 용산 골목의 이탈리안 식당인데, 지인이 건넨 "거기는 입구부터 달라."라는 한마디로 소개가 시작됩니다. 저자는 그 입구를 마주하고, 어릴 때 읽은 책에서 문 하나를 열면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지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해요. 곳곳에 레몬이 놓여 있고, 천장의 네모난 창으로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곳이래요.


"삶이 팍팍하고 힘들어 굳어 있던 마음도 누그러뜨릴 만큼의 온기."

이 문장엔 밑줄을 긋고 싶었어요. 종이 울리면 다 같이 잔을 드는 '살루테' 시간이나 서비스로 나온 티라미수처럼 즐거운 장면이 이어지는데, 저자는 나중에 사장님이 과거에 백혈병을 앓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작은 이탈리아는 어떤 시간을 지나 만들어진 것일까. 저자가 품은 그 질문을 읽는 저도 똑같이 품게 되더라고요.


다른 꼭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에필로그였습니다. 저자는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할 때마다 책을 찾았대요. 한 권을 읽으면 정답이 보이는 듯했고, 두 권을 읽으면 서로 다른 정답 앞에서 혼란스러웠다고요. 서평단을 하면서 이 책 저 책 만나다 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어요. 여러 권을 읽고 나서야 지겹도록 듣던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 비로소 마음에 들어왔다는데, <인생은 레시피대로 가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그 말을 저자 식으로 바꾼 거구나 싶더라고요.


마지막엔 도종환 시인의 구절이 나와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처음엔 감성적인 구절 정도로 여겼는데 지금은 다르게 다가온다며, 저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 또한 그 꽃이었구나.'

<인생은 레시피대로 가지 않는다>는 보통 에세이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열두 집을 돌았으니 그럴 만도 하죠. 사진이 넉넉하게 들어가 있어서,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는 마음에 남은 가게를 찾아갈 때 다시 꺼내 보게 될 책 같아요. 저자도 프롤로그에서 마음에 남는 매장이 있다면 언젠가 찾아가 보라고 권하더라고요. 사장님이 만든 음식과 공간, 그 안에 담긴 시간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이라면서요. 저는 덕희커피 피넛스윙이랑 일이사당 퀸아망이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맞나 싶은 날이 잦은 분이라면 화려한 성공담보다 이 열두 사람의 흔들림이 훨씬 가깝게 느껴질 거 같아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남의 인생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제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10월도 하순이라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요. 한 주의 허리쯤인 수요일, 따뜻한 라떼 한 잔이 생각나는 날씨네요. 흔들려도 괜찮다는 말을 열두 번쯤 들은 기분이라 마음 갈무리가 좀 된 거 같습니다. 가을 타는 아재들, 이번 가을엔 이 책이랑 같이 타 보시죠.


 


맛집 열두 곳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사장님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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