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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
김지수 지음, 나태주 인터뷰이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양말 뒤집어 벗는 아재가 뜨끔했던 책, 나태주×김지수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
수요일은 한 주의 허리라서 그런지, 제 허리도 꼭 이날 제일 뻐근합니다.
이번에 만난 책은 표지부터 퍽 귀여워요. 크림색 바탕 위로 물방울 두 개가 똑, 똑 떨어지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물방울이 꽃잎이 되어 피어납니다. 그런데 제목은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예요. 비참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말랑한 파스텔 옷을 입고 있으니 고개가 살짝 갸웃해지더라고요. 띠지에 적힌 시인의 한마디를 읽고 나서야 조금 감이 왔어요.

"산다는 건… 말이지요. 매우 비참한 가운데 명랑한 거예요."
'인터스텔라' 인터뷰로 이름난 김지수 기자가 2023년 2월부터 5월까지 매주 월요일, 공주 풀꽃문학관으로 나태주 시인을 찾아가 나눈 이야기를 엮은 책이에요. 원래 <나태주의 행복수업>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가을을 맞아 새 옷과 새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고 하더군요. 봄 한철의 기록이 낙엽 지는 계절에 돌아온 셈이라, 계절이 한 바퀴 빙 돌아 제자리로 오는 기분도 듭니다.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를 펼치면 금방 눈치채게 되는 게 하나 있어요. 묻고 답하는 인터뷰집 모양새가 아니에요. 두 사람을 '태주'와 '지수'라고 이름으로 부르면서 소설 속 인물처럼 3인칭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거든요. 여든을 바라보는 노시인을 '태주'라고 부르는 게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몇 꼭지 지나니까 그 호칭 덕분에 두 사람이 동네 단짝처럼 보이더라고요. 서문에서 작가는 이 책을 인터뷰 대화록이자 공주의 제철 여행기, 서툰 어른의 참회를 담은 동화, 시 해설서라고 소개합니다. 읽어보니 그 말이 꼭 들어맞는 느낌이었어요. 윤동주의 (새로운 길),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이형기의 (낙화) 같은 시들이 갈피마다 불쑥불쑥 피어나니까요.
다른 페이지보다 걸음을 늦춰 정독하듯 읽은 건 봄맞이꽃 이야기였어요. 정원 한쪽에서 작은 꽃 하나가 하루 종일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까 지수가 묻습니다. "얘는 왜 이렇게 드드드드 떨고 있어요?" 시인의 대답은 이랬어요.

"약하니까. 그냥 있는 게 떠는 거예요."
"가여워라. 꼭 나 같다"는 지수의 혼잣말에, 시인은 "생명체가 다 떨림이니까. 떨면서 나아가는 거예요"라고 받아줍니다. 회사 다니는 사람 중에 안 떨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요. 보고 들어가기 전에도 떨고, 인사철에도 떨고, 카드 명세서 열 때도 떨고. 그 떨림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표시로 봐주는 시선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7부에 가면 이 꽃이 다시 나와요. 혼자서는 사시나무 떨듯 하던 봄맞이꽃이 동무들과 어울려 핀 자리에서는 미동도 안 하고 새초롬했다고 하더군요.
같은 7부에는 지수가 열 살 소년과 다낭으로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도 실려 있어요. 45인승 버스에 옵션 관광, 쇼핑센터가 나오고, "여행비보다 비싼 양털 이불과 영양제 앞에서 홀린 듯 카드를 긁은 후" 서로의 어리석음에 안도하는 순간들도 나와요.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났는데, 이 문장에서는 괜히 뜨끔했습니다.
"남자들은 방어적인 수줍음으로 가족을 돌봤고, 여자들은 적당히 방심하며 경계를 풀었다."
가족 여행 가서 괜히 지도 앱만 들여다보며 앞장서는 아빠들 얼굴이 줄줄이 떠오르는 거 같았어요. 재미있는 건 이 패키지 이야기가 곧장 공주로 이어진다는 점이에요. 가이드 뒤를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닐 때의 그 '수동적인 편안함'을 지수는 태주의 등 뒤에서도 똑같이 느꼈다고 하거든요. 최고의 행복 가이드라니, 이런 가이드라면 옵션 관광을 전부 신청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 속 태주는 영락없는 정원사입니다. 농사꾼 모자를 쓰고 전지가위를 들고, 검은 털신 신은 작은 노인이 나뭇가지 같은 손을 뻗어 인사하죠.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봤냐는 물음에는 "찔려봤다마다. 이게 그 상처예요" 하며 짐짓 심각한 얼굴을 지어요. 열매가 맺히면 "얘는 기분 나쁘겠지만 잘 자라라고 나는 계속 가지를 잘라줘"라고도 하는데, 듣기에 따라 자식 키우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후배 챙기는 이야기 같기도 했어요.
여든의 사랑을 묻는 대목도 빼놓을 수 없어요. 시인 말로는 "부지런한 사랑"이래요. 아내가 목욕하라면 목욕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양말도 뒤집어서 벗지 않고. 이불 속에 식탁 아래 벗어 던지지 않고." 세상 아저씨들이 조용히 넘기고 싶은 대목이 아닐까 싶네요. 양말 뒤집어 벗는 거,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지수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쓴 사람이라 책 곳곳에 이어령 선생의 그림자가 겹쳐요. 두 어른을 나란히 놓고 쓴 문단이 있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이어령은 크고 명료한 생각의 스승이었고 나태주는 웃기고 다정한 느낌의 아버지였다고 해요. 한 사람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동작이 컸고, 한 사람은 희극 배우처럼 표정이 변화무쌍했고요. 그러고는 둘 다 충청도 사람이고 유머가 풍부했고 키가 작았다는 문장이 툭 붙어요.
좋은 시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흘러가요.
"습윤이라는 게 있어요. 좋은 시에는 습기가 있고 반짝임이 있답니다." "모이스처네요. 물광 같은 건가요?" "네. 모이스처예요." "습기와 물기는 언제 생기나요?" "솔직할 때 생깁니다."
지수가 나의 솔직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지 늘 염려된다고 하자, 시인은 "솔직은, 그런 것조차 다 포기하는 데서 와요"라고 답합니다. 물광이라는 말에 피식했다가 마지막 대답에서 오래 눈이 갔어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까지 내려놔야 솔직해질 수 있다니, 체면 챙기며 사는 중년한테는 제일 어려운 숙제 같더라고요.
시인이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들었다는 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너는 머리가 좋은 애가 아니야. 열심히 노력하니까 그만큼 하는 거란다." 듣기 좋은 칭찬 대신 건넨 이 한마디가 평생의 지침이 됐다고 해요. 무식한 양반이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다는 회고까지 읽고 나니, 어른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얼마나 오래 붙들어 주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처음엔 마음에 걸린 문장도 있었어요. 글 쓰는 일과 정원 일 중에 뭐가 더 힘드냐는 질문에, 시인은 둘 다 정직한 육체노동이라며 이렇게 말해요. "인생, 편하게 가려고 하지 마라. 절대로 안 편할 테니까. 오히려 '인생, 절대 안 편하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더 편해집니다." 매일 조금이라도 덜 힘든 길을 찾느라 머리 굴리는 직장인으로서는 처음에 이 말이 좀 야속하게 들렸어요.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의외로 숨통이 트이는 구석이 있더군요. 기대를 내려놓으면 실망할 일도 줄어드니까요.
책 끝에는 나태주 시인이 직접 쓴 글 '흘러서 바다에 닿거라'가 실려 있어요. 첫 문장이 "겨우 1장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예요. 젊은 날의 자신을 "주목받지 못한 변두리 인간"이라고 부르고, 서울 사람에 기자에 이어령 선생의 대담자라 처음엔 조금 긴장했다는 고백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지음"이 되었다고 해요. 서문에서 지수가 건넨 인사에 시인이 맨 끝에서 답장을 보내는 모양새라, 책 한 권이 편지 한 통을 주고받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친구란 내 슬픔을 대신 지고 가주는 사람이다.
<비참을 알고도 명랑하게>는 보통 에세이보다 살짝 도톰한 편인데, 손에 쥐면 생각보다 가벼워서 가방에 넣고 다니기 좋아요. 꼭지가 짧게 나뉘어 있어서 아무 데나 펼쳐 한 편씩 읽기도 편하고요. "흔들려야 안 무너져요", "미워하지 마, 또 볼 사람이니까" 같은 꼭지 제목만 훑어봐도 위로가 되니, 기운 빠지는 날 목차만 넘겨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새로 입은 표지도 고와서 책장 앞쪽에 세워두고 싶어집니다.
어느새 10월도 하순이네요. 책 속 태주는 구절초와 마가렛이 다 비슷해 보인다는 지수에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니야. 구절초는 가을에 피고 마가렛은 여름에 피어요"라고 알려줘요. 지금이 딱 구절초 필 무렵이라, 길가에 핀 들국화도 한번 쪼그려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제일 지치는 수요일인데도 마음 한구석이 한결 말랑해졌습니다. 비참한 일이야 내일도 있겠지만, 이 아재도 떨면서 명랑하게 나아가 보렵니다. 좋은 어른 한 분 뵙고 온 것 같아서 참 좋았어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가을 보내세요.
떨어도 괜찮다고, 비참한 가운데 명랑한 게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풀꽃 시인과 지친 서울 어른의 봄 한철 우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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