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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역사 - 중동의 3천년 역사를 이해한다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시토미 유조 지음, 정애영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낙타 안장 하나가 연 3천 년, <아라비아 역사> 서평
10월 들어 첫 수요일이에요. 한 주의 한가운데라 그런지 수요일은 이름부터 '수'고 많다는 소리로 들리더라고요.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는데, 이번에 받은 책은 한낮 사막의 열기를 잔뜩 품고 있었습니다.
중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석유랑 전쟁 말고는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라비아 역사>는 그 땅의 3천 년을 처음부터 같이 걸어 보자고 손을 내미는 느낌이 듭니다.

3천 년이라.
부제만 보고도 살짝 겁이 났는데, 두께도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이걸 낙타 한 마리에 다 실을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판형이 아담한 문고판이라 손에는 생각보다 잘 감기더군요. 원서는 일본 주코신쇼에서 2018년에 나온 <物語 アラビアの歴史>이고, 시토미 유조는 도쿄대 명예교수로 아라비아 고대사와 동서 해상 교류사를 연구해 온 분이라고 합니다. 역자는 그를 '본연의 아라비아사'를 쓴 선구적 연구자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게 왕이나 영웅이 아니고 낙타 안장이라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기원전 12세기 무렵 단봉낙타에 얹는 안장이 고안되면서 대상로와 향료의 길이 열렸고, 그 길을 따라 남아라비아의 사바 왕국 같은 문명이 자라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도구 하나가 길을 만들고, 길이 나라를 만들고.
셰바 여왕 대목에서는 저자가 꽤 깐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열왕기 상) 10장으로 익숙한 전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법 없이 하나씩 다시 따져 보거든요. 그러면서 사바의 실제 모습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기록 쪽에서 찾아 들어갑니다. 낙타 200마리, 사르곤 2세 시절인 기원전 716/5년, 카리빌이라는 이름까지. 전설 속 나라가 숫자와 이름을 달고 지도 위로 내려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원서 출간 무렵 인터뷰에서 저자가 젊은 연구자들에게 선입관을 버리고 통설을 그대로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던데, <아라비아 역사>의 이 장에서 그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았어요.

다른 데보다 속도를 늦춰 천천히 읽게 된 건 이슬람의 탄생을 다룬 대목이에요. 저자는 이슬람의 출현을 '네이티비스트 무브먼트', 우리말로 토착주의 운동이라는 틀로 읽어 보자고 제안합니다. 기존 종교로는 설명이 안 되는 큰 변동이 닥쳤을 때 새 종교로 사회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을 가리킨다고 해요.
여기서 끌어오는 비교 사례가 뉴질랜드와 중국이라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1840년 와이탕기 조약 뒤 토지가 팔려 나가며 흔들리던 마오리 사회에서, 테우아 하우메네가 1862년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다며 마오리를 선민으로, 뉴질랜드를 약속의 땅으로 설파한 하우하우 운동이 하나예요. 다른 하나는 과거에 낙방하고 앓아누웠던 홍수전이 꿈속 노인을 상제 야훼로, 자신을 예수의 동생으로 여기면서 시작된 태평천국이고요. 멀리 떨어진 두 땅에서 이렇게 닮은 일이 벌어졌다는 게 신기하더군요.
이 틀을 아라비아에 대입하는 부분은 따라가는 재미가 제일 쏠쏠했던 것 같아요. 무함마드 사후 사자흐, 아스와드, 투라이하 같은 이른바 '가짜 예언자'들이 잇따라 나타나는데, 저자가 무게를 두는 건 그들을 따른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아라비아에 예언자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는 거죠. 3세기 이래 오리엔트 3대 열강 사이에 끼어 지냈고, 무함마드가 장년이던 무렵엔 동서 두 제국이 20년 넘게 사투를 벌였다고 해요. 부족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전황을 지켜봤다는 짧은 표현에 그 시절 긴장이 다 들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먼저 털어놓고 조심조심 추론을 쌓아 가는 서술이라 오히려 믿음이 가더라고요.
근현대로 넘어오면 인물들이 훨씬 또렷해져요. 1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이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고, 이란 유전과 아바단섬 제유소를 지키려 바스라를 점령하는 데서 석유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메카의 후세인은 카이로의 맥마흔과 1915년부터 이듬해까지 서로 5통씩 편지를 주고받고, 아랍제국을 약속받았다고 믿은 채 1916년 6월 반기를 들어요. 연락장교로 합류한 로렌스는 히자즈 철도를 거듭 노리는 게릴라전을 펼치고요. 이름만 들어 본 로렌스가 나와서 반가웠는데, 저자의 평가는 차분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였어요.
"광범한 사회의 지지를 얻은 진정한 의미의 아랍혁명은 되지 못했다."

그 사이 영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까지 세 갈래 외교를 벌여 두었고,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시리아·레바논은 프랑스, 팔레스타인·트랜스요르단·이라크는 영국 위임통치로 갈라집니다. 파이사르가 왕으로 추대된 시리아국은 4개월 만에 무너지고요. 영국이 1921년 파이사르를 이라크 국왕으로, 1923년 압둘라를 트랜스요르단 국왕으로 앉혀 "하심가의 체면은 세워주었다"는 문장에서는 쓴웃음이 났습니다.
후세인이라는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좀 복잡해져요. 오스만의 위협이 사라지자 영국의 재정 지원이 끊겼고, 아랍 수장의 권위는 부하들에게 부를 얼마나 나눠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설명 끝에 이런 문장이 붙어 있더군요.
"친척을 제외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는 더 이상 없었던 것"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예산 따라 사람이 움직이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데, 사막의 정치도 결국 비슷한 원리로 굴러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924년 튀르키예 공화국 정부가 칼리파 제도를 없애고 며칠 뒤, 후세인이 스스로 칼리파 즉위를 선언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넘어갑니다.

옮긴이의 말도 따로 챙겨 읽을 만했어요. 정애영 역자는 어린 시절 친척 집 큰 저택에 갑자기 불이 꺼지고 보일러를 못 틀었던 기억이, 커서 보니 70년대 오일쇼크였다고 털어놓습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린 한국인 근로자들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불같이 뜨거운 사막"을 그려 봤다는 회상도 이어지고요. 중동 건설 현장 이야기는 제 또래라면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얘기라, 아득하던 사막이 이 대목에서 성큼 가까워졌어요.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 험한 역사를 겪은 아라비아가 한국사와 닮았다는 역자의 말도, 마른 침을 삼키던 부족들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솔직히 낯선 인명과 지명이 쉴 새 없이 나와서 따라가기 버거운 구간이 있긴 해요. 역자도 그걸 알았는지 "아라비아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으로"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 말을 떠올리니 이름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고요.
아라비아만 따로 떼어 3천 년을 훑는 책은 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중동 소식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꺼내 보기 좋겠다 싶어서, <아라비아 역사>는 책장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두고 싶은 쪽입니다.
석유와 전쟁으로만 알던 땅에 낙타 대상이 오가던 긴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좋은 책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바람이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는 요즘, 사막 열기 한 번 제대로 쬐고 나니 이번 환절기는 거뜬히 넘길 것 같은 기분입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또 재밌는 책 들고 찾아올게요.
낙타 안장 하나에서 시작해 석유의 시대까지, 아라비아만 따로 떼어 3천 년을 따라가 보는 역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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