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Who - 누가 인생 후반전에서 승리하는가
박형수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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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40대 후반 직장인이 읽은 <은퇴 후 Who>서평, 퇴직이 조금 덜 무서워졌어요


"지잉~."

휴대전화 진동 한 번에 27년 다닌 회사와 작별하게 된 상무님이 있습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재무담당 부사장이었고, 들려온 말은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요…"였다고 해요. <은퇴 후 Who>는 이 전화 한 통으로 첫 이야기를 엽니다. 저 같은 40대 후반 직장인한테는 첫 장면부터 남의 일로만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10월 첫 수요일이에요. 한 주의 딱 허리쯤이라 몸은 무겁고 주말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날인데, 이런 날 붙들고 있기엔 '퇴직'이 좀 무거운 단어이긴 하죠. 솔직히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은퇴 후~' 하고 길게 한숨 쉬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영어 Who, 그러니까 '누가'였습니다. 누가 인생 후반전에서 웃게 되는지를 묻는 책이더군요.


<은퇴 후 Who>는 중앙일보 '더중앙플러스'에서 박형수 기자가 연재하는 '은퇴Who'를 바탕으로 엮었다고 해요. 기자가 퇴직 뒤 새 삶을 시작한 50명을 직접 만났고, 그중 24명의 이야기를 골라 담았습니다. 기자가 쓴 책이라 딱딱한 기사체를 떠올렸는데, 막상 펼쳐 보면 주인공이 "나는"으로 시작해 자기 얘기를 직접 풀어 가는 1인칭이에요. 중간중간 인터뷰 육성이 따로 들어가 있어서, 옆자리 선배한테 살아온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은퇴후조언'이라는 페이지가 붙어서 본인이 직접 뽑은 실전 팁을 따로 정리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보통 자기계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한 사람 이야기가 한 편씩 끊겨 있어서 마음 가는 사람부터 골라 읽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첫 주인공 강찬영 씨 이야기는 숫자에서 시작합니다. 한진해운 상무 시절 월 1000만원, 퇴직 직후 스카우트된 곳에서는 월 800만원. 그 자리마저 1년 2개월 만에 끝나자, 같은 업계로 다시 가 봐야 옛 후배들한테 반갑지 않은 부탁이나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고 해요. 이 대목에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군요. 회사 이름을 떼고 나면 '부탁하는 사람'으로 남기 쉽다는 건, 직장 생활 좀 해 본 사람이면 대충 아는 그림이라서요.


그 뒤의 선택이 재밌었어요. 아내가 가계 사정을 꼼꼼히 따져 보더니 근검절약 모드로 바꾸면 월 300만원이면 되니까 "당신은 200만원만 벌어오면 된다"고 했다는 거예요. 차를 팔고, 골프를 끊고, 휴대전화는 알뜰폰으로 바꿨대요. 그렇게 시작한 일이 택배 분류였습니다. 오전엔 원광디지털대 동양철학과 온라인 수업을 듣고,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는 현장에 나가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이 뚫린 작업장이라 여름엔 옷에 소금꽃이 피었다는데, 정작 본인은 나중엔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몸은 고돼도 업무 고민이 없으니 마음은 가벼웠다고요. 임원 시절엔 경영진과 부하 직원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했는데, 여기선 일한 만큼 정확하게 받으니 "세상 편했다"고 합니다.


샌드위치 신세.

책에 나온 이 표현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웃고 나니 조금 씁쓸하기도 했어요. 중간관리자로 사는 40대 후반이라면 위아래로 눌리는 그 느낌을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택배 상자 앞에서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 편하다는 게 꼭 몸이 편한 것만은 아닌 거 같아요. 지금은 국민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그림으로 돌아와 '시니어 웹툰 작가'로 지내고, 방탄소년단 노래 가사를 주역과 명리학으로 풀어서 해외 팬들과 나눈다고 하니 인생 참 모를 일입니다.


두 번째로 오래 붙잡고 읽은 사람은 변성일 씨예요. 이분은 출발선부터 다릅니다. 대기업 임원이 아니라 여러 중소기업을 12년 동안 옮겨 다닌 사무직이었고, 둘째가 태어난 2011년에 회사를 나왔어요. 그때 나이가 마흔이었대요. 본인 말로는 "버티고 버티다 떠밀리듯 나온" 거였고요.

다른 꼭지보다 유독 천천히 읽게 된 건 그다음부터였어요. 국비 지원으로 가구 만들기 과정을 듣고 이력서를 100장 넘게 냈는데 번번이 떨어집니다. 정말 가고 싶던 공방에서는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은 뽑지 않으니 그만 지원했으면 좋겠다"는 이메일이 왔다고 하더군요. 겨우 들어간 공방은 월급 100만원에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소리 지르는 대표 밑에서 10개월을 버티다 나왔다고 하고요. 퇴직하고 3년이 지나도록 자리를 못 잡자 "억장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그 짧은 말에 담긴 가장의 사정이 어떤 건지 대충은 짐작이 가더라고요.


솔직히 이 책에서 제 마음에 제일 걸린 것도 그 이메일이에요. 나이가 이력서 맨 윗줄에서 먼저 읽히는 세상이라는 건 알고 있어도, 이렇게 활자로 보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계속 무겁게만 흐르지는 않아요. 좌절해 있던 그의 눈에 신문 기사 하나가 들어오는데, 세계적인 가구 기업 이케아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었어요. '카펜터'라는 직군을 보고 목수를 뽑나 보다 싶어 무작정 지원했다가 서류에서 떨어지고, 몇 달 뒤 인사팀에서 다른 직군으로 면접을 보겠느냐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 면접 장면이 이래요.

"무작정 간 그 면접이 진짜 재밌었어요. 그룹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들이 '우리는 당신의 배경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궁금하다'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더라고요. 그리고 정말로 나이, 경력, 학벌, 자격증 등 배경에 대해선 단 하나도 묻지 않았어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물건 3개를 가져오라'는 준비물에 그가 챙겨 간 건 직접 깎은 나무 소품 하나, 그리고 손수 만든 샌드위치와 김밥이었대요. 조언 페이지를 보면 면접이 4시간이나 걸렸고,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어떻게 화해하는지까지 물었다고 하네요. 이 대목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그 면접에서도 결국 떨어지지만, 카펜터가 매장 쇼룸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게 수확이었다고 해요. 그 길로 인테리어 현장에서 '노가다'를 4년 했고, 2018년 이케아 고양점이 문을 열 때 마흔일곱 살에 합격합니다. 아내가 '이케아 직원 세일 혜택' 얘기를 듣고 함박웃음을 지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따라 웃었어요.


입사 뒤 이야기에는 찔리는 데가 하나 있었어요. 예전 직장에선 근무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몰래 주식 창이나 야구 중계를 보다가, 팀장 눈치를 보며 늦게까지 야근하는 일이 흔했대요. 이케아에서는 일할 땐 '초집중'하고 퇴근이나 휴가는 눈치 안 보고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지긋지긋하던 월요병까지 다 나았다니, 그 말이 제일 부러웠습니다.


세 번째 사람, 김민식 PD 편은 결이 또 다릅니다. 2020년 24년 다닌 MBC를 명예퇴직으로 나왔는데, 코로나19가 한창이라 평생 꿈꾸던 산티아고 순례길도, 동료들과의 밥자리도 다 막혔다고 해요. 선배들 환송연은 기획하고 MC까지 보던 예능 PD가 정작 자기 환송연 하나 없이 회사를 나왔다는 대목에선 웃을 수가 없었어요. 퇴직자들을 모아 놓고 강사가 꺼냈다는 첫마디 "여러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퇴직자들이십니다"도 저한테는 쉽게 지나가지지 않는 말이었고요.


그런 그가 지금은 스스로 '연금술사'이자 '월천거사'라고 해요. 연금으로 술을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사람, 그리고 월 소득이 1000만원 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래요. 그런데 비결이라고 내놓는 게 의외로 소박합니다. 30대부터 적은 돈으로 연금저축을 시작했고, 보너스나 승진으로 목돈이 생기면 써 버리지 않고 연금 상품에 하나씩 더 들었다고 해요. 퇴직 위로금으로 대출을 갚고 남은 5000만원으로 평생 처음 자기한테 선물을 하려다가, '사고 싶은 게 생기면 최소 6개월은 묵혀두자'는 원칙 때문에 캠핑카를 결국 안 샀대요. 대신 그 돈에 붙은 이자 70만원으로 자전거를 샀다는 일화에선 웃음이 나더라고요. 본인도 "좀 지독한가요. 하하." 하니까요.


김민식 PD가 4050에게 해 주는 얘기는 저한테 제일 실용적으로 와닿았어요. 지금의 소비와 취미가 퇴직 뒤에도 이어질 수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것, 그리고 후배가 할부로 뭘 사려고 하면 "그럼 일단 12개월 적금 넣어"라고 말해 준다는 대목이요. "사람이 좌절하는 순간은 선택지를 빼앗겼을 때인 것 같아요"라는 말은 골프 얘기 끝에 나오는데, 꼭 골프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닌 거 같더군요.


세 사람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니 공통점이 몇 가지 보였어요. 강찬영 씨와 변성일 씨는 둘 다 아내가 먼저 등을 밀어줬습니다. 강찬영 씨는 "나보다 빨리 과거와 결별해 준 아내"라고 했고, 변성일 씨의 아내는 동화작가였는데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행복한 일을 찾아야 한다"며 자기가 글로 돈을 벌 테니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라고 했대요. 강찬영 씨 조언 페이지 첫 항목도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배우자'였고요. 또 하나는 다들 숫자부터 따져 봤다는 거예요. 강찬영 씨 아내가 계산한 월 300만원, 김민식 PD가 가계부를 써서 뽑은 생존비 월 200만원 같은 숫자들이요.


결국 다들 덜 쓰는 법부터 익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퇴 후 Who>는 한 번에 쭉 읽고 꽂아 두기보다 곁에 두고 한 사람씩 꺼내 읽기 좋은 책 같아요. 오늘은 세 사람 얘기만 했지만, 목차에는 '연봉 1억'의 마술사 소방관, 농협을 그만둔 72세 화가, 구례에서 1억을 버는 부부 같은 제목이 줄줄이 있어서 다음엔 누구 얘기를 들어 볼까 고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인물마다 실린 사진도 반가웠어요. 웹툰 화면 앞의 강찬영 작가, 쇼룸 앞에서 팔짱 낀 변성일 씨 얼굴을 보고 나니 활자로만 읽던 사람이 옆 동네 형님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표지에서 턱을 괸 할아버지 옆에 그려진 자전거가, 다 읽고 나면 김민식 PD의 그 자전거처럼 보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예요. 퇴직이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든 바로 그 문턱에 선 사람이든, 자기 나이에 맞는 대목 하나쯤은 건질 거 같아요.


길가 은행나무들이 슬슬 노란 물이 들 채비를 하는 10월입니다. 인생으로 치면 저도 딱 이 계절쯤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은퇴 후 Who>를 덮고 나니 다가올 겨울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지네요. 한 주의 반환점인 수요일에 좋은 선배들 얘기를 실컷 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일단 저는 '30년 뒤의 나'한테 혼나지 않게 오늘 저녁엔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올라가 볼까 해요. 김민식 PD 계산법대로라면 그것만으로 PT비 5만원은 번 셈이니까요.


직함을 내려놓은 선배들이 '회사원 나'에서 '그냥 나'로 돌아가는 길을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는, 40대 직장인에게 미리 건네는 든든한 예고편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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