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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박상영.박의정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주는 책,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서평
독감 보름, 아니면 온몸 두드러기 보름.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이세요?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첫 꼭지를 이 밸런스 게임으로 엽니다. 저자는 망설임 없이 독감을 고르겠다고 하더군요. 독감은 약을 털어 넣고 이불 속에 누워 쉴 권리라도 있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채 쉼 없이 가려운 피부병은 단 1분 1초의 평온함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어요.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저도 독감 쪽에 손을 들게 되더라고요.

10월 초입, 한 주의 허리쯤인 수요일입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바삭하게 마르기 시작하니 피부과 책을 만나기에 딱 맞는 철인 거 같아요. 제목만 보면 마지막 경고장 같은데, 막상 열어보면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주는 책이더라고요.
요즘 피부과라고 하면 레이저랑 시술부터 떠오르잖아요.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진주에서 20년 넘게 진료실을 지켜온 두 원장의 진료 기록이에요. 피부과 전문의 박상영 원장과 신경과 전문의 출신 박의정 원장 부부가 함께 썼습니다. 레이저를 켜기 전에 환자의 하루부터 묻는 의사들이라는 소개가 읽어보니 꼭 맞는 거 같았어요.
진료실 이야기만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왕도 피하지 못한 가려움)이라는 소제목 아래로 조선의 세조가 등장합니다. 종기와 궤양이 온몸을 덮어 진물과 고름이 끊이지 않았고, 정사를 뒤로한 채 전국의 약수터와 온천을 찾아다녔다고 하더군요. 욕조 안에서 업무를 보던 장 폴 마라도 나와요. 초상화마다 조끼 안에 손을 넣고 있는 나폴레옹의 그 포즈가 가려움을 참으려던 습관이었을지 모른다는 추측까지 이어지고요. 처칠의 하얀 각질, 마이클 잭슨의 백반증 이야기도 뒤따릅니다.
역사책 속 그 근엄한 얼굴들 뒤에 가려움이 숨어 있었다니.
저자들은 통증은 응급실로 달려갈 명분이 되는데 가려움은 유난스러움 취급을 받는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피부병은 그걸 겪는 당사자에게 재난이라고 잘라 말하죠. 앞에 깔아둔 역사 이야기 덕분인지 그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더라고요. 한 해 700만 명이 넘는 사람, 그러니까 국민 7명 중 1명이 피부 문제로 병원을 찾는다는 숫자도 함께 나옵니다. 첫 꼭지 끝자락의 이 문장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거 같아요.

"피부과는 단순히 매끄러운 피부를 만드는 곳만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붉은 자국 뒤에 숨겨진 환자의 재난을 읽어내고, 무너진 피부 장벽을 다시 세워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주는 곳이다."
40대 후반 직장인으로서 제일 찔렸던 건 PART 4 첫 꼭지 (정기적으로 혈압은 재면서 피부는 왜?)였어요. 회사 건강검진 때마다 혈압 재고 피 뽑고 내시경까지 받으면서, 피부를 검사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종합건강검진 항목에서 피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1%도 안 된다는 대목에선 괜히 웃음이 나더라고요. 딱 제 얘기라서요. 나이에 따라 봐야 할 곳이 다르다면서 40대와 50대는 호르몬 변화와 그동안 쌓인 자외선 손상을 살펴야 한다는데, 이 나이에 쌓인 게 어디 자외선뿐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유독 속도를 늦춰 읽게 된 건 70대 후반 할머니 이야기예요. 팔다리가 가렵다며 가려움증 주사 한 대만 놔달라고 오셨는데, 원장님 눈에 뺨 한구석의 거칠거칠한 검은 점이 걸렸대요.
"어르신, 이거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아이고, 원장님. 안 그래도 이것도 나중에 시간 나면 싹 빼려고 했어요."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 그 점은 오랜 세월 선크림도 없이 뙤약볕 아래서 농사지으며 쌓인 자외선 손상이 만든 광선각화증이었어요. 피부암으로 진행될 수 있는 전암성 병변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해 깨끗하게 나았다는 문장까지 가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가려운 팔다리만 보고 처방전을 뚝딱 끊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이분들이 진료 시간을 왜 그렇게 길게 쓰는지 알 것 같았어요. 발바닥 사마귀로 왔다가 얼굴과 목덜미의 아토피까지 함께 잡게 된 중학생 이야기도 같은 결입니다. 보호자는 그저 체질이려니 하고 지내왔다는데,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더군요.

개인적으로 제일 반가웠던 건 박스 글 (의사 박의정이 진단한 마흔의 피부 기록)이에요. 남에게 권하는 검사를 정작 자기는 받아본 적이 없다면 권할 자격이 없다며, 원장님이 직접 검진을 받고 결과를 털어놓거든요. 유·수분이 부족하고 색소와 주름이 잘 생기는 피부,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짙어진 기미가 결과로 나왔대요. 결과는 대체로 무난했는데 정작 마음에 걸린 건 습관이었다고 하더군요. 아침에 한 번 바르고 마는 자외선 차단제, 하루 여덟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내는 건조한 실내, 오래 내버려 둔 변비와 소화불량 같은 것들이요.
솔직히 이 대목에서 좀 걸렸어요. 하루 여덟 시간 모니터 앞이면 저는 양반 소리 들을 처지고, 자외선 차단제는 아침에 한 번이라도 바르면 다행인 날이 더 많거든요. 원장님은 그 뒤로 외출할 때 두세 시간마다 차단제를 덧바르고, 물을 더 마시고, 식이섬유를 챙긴대요. 그 목록이 하나같이 제 일상에서 빠져 있는 것들이라 뜨끔했습니다.
대단한 처방은 아니다.
원장님이 스스로 붙인 이 한마디라서 오히려 믿음이 가는 거 같아요. 환자에게 권하기 전에 내가 먼저 겪어봤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마무리까지, 의사가 쓴 글인데 옆자리 동료가 건네는 얘기처럼 편하게 읽혀요.

PART 5로 넘어가면 결이 조금 달라집니다. 백반증을 앓던 80대 중반 할머니가 허리 압박 골절로 큰 수술을 받은 몸으로 진주 외곽에서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매주 병원을 찾으셨대요. 치료가 정체되던 무렵 원장님이 날도 추운데 석 달쯤 쉬었다가 봄에 다시 시작하자고 권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나중에 자식들이 오래도록 볼 영정사진 찍어야 하는데 이 얼룩덜룩한 얼굴로 찍으면 자식들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겠나.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고쳐놓으려고 내가 이렇게 오는 거잖아."
원장님은 이 말 앞에서 이동 거리와 치료 효율만 셈하던 자기 시야가 부끄러웠다고 고백해요. 미용 치료라는 말을 이런 자리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거울 앞에서 단정하고 싶은 마음은 나이가 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거치고 나니 한결 또렷하게 들리는 거 같아요.
또 한 분은 편도로 버스 세 번, 왕복 여섯 번을 갈아타며 일주일에 두 번씩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셨다는 할머니예요. 원장님 수술이 길어지는 바람에 그냥 돌아가셔야 했던 날이 있었대요. 미안한 마음에 다음 진료를 무료로 해드렸더니, 그다음 진료일에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한 상자 가득 안고 오셨다고 하죠. 그 뒤로 직원들이 레이저 기계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가장 먼저 할머니 차트를 찾아 전화를 드렸다는 대목이 참 좋았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알아서 한 일이었다고 하니까요. 이어지는 동정과 공감 이야기에서는 환자의 발치로 내려가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게 공감이라고 하는데, 두 할머니 이야기를 지나온 뒤라 설명이 쉽게 들어오더라고요.

맺는 글 (그렇게 의사가 된다)에는 박상영 원장의 전공의 시절이 나와요. 새벽 2시, 병원에서 차로 20분 거리였던 문산휴게소의 자판기, 그리고 당시 500원이던 파란색 캔커피 하나. 고급 커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지금도 그 캔커피를 제일 좋아한다는 고백이 괜히 반갑더라고요. 캔커피 한 잔으로 버티던 시절 이야기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품고 있는 거 같아서요. 그 무렵 큰 사고를 당해 근무하던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서도 처음 꺼낸 말이 "아까 내원한 환자 어디 있습니까?"였대요. 그런데 원장님은 지금이라면 후배에게 절대 권하지 않을 일이라고 스스로 선을 긋습니다. 그 솔직함 덕분에 영웅담처럼 읽히지 않아서 좋았어요. 좋은 의사는 정답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 앞에서 끝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 책 전체를 한 줄로 묶어주는 느낌이 듭니다.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두께도 보통 에세이 정도라 부담이 없고, 물방울이 둥글게 고리를 그린 하늘빛 표지가 깔끔해서 책장에 꽂아두기에도 좋아요. 차례를 보면 아이의 아토피부터 사춘기 여드름, 대상포진과 옴, 무좀, 탈모, 피부암, 끝나지 않는 두드러기까지 생애 주기를 따라가요. 집에 누가 피부 때문에 고생할 때 해당 장을 펼쳐보면 되는 구성이라 오래 두고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에서 얼굴 두껍게 버티는 건 자신 있었는데, 정작 진짜 피부 두께는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네요.
10월 들어 공기가 제법 건조해졌어요. 이번 가을엔 로션 한 통이랑 선크림 하나쯤은 가방에 넣고 다닐 생각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덕분에 좋은 의사 두 분을 책으로 먼저 만난 거 같아서, 마음까지 촉촉해진 기분이에요.
가려움도 재난이라고 말해주는 두 의사의 진료실, 혈압은 재면서 피부는 왜 안 보느냐는 질문 앞에서 내 습관부터 돌아보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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