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성군의 가면 뒤, 설계하는 왕 세종 <세상이 정한 방식으로는 결코 나를 담아낼 수 없다> 서평
지폐 속에서 제일 자주 뵙는 얼굴인데 정작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는 분이 계세요.
세종대왕님이요. 명절만 되면 지갑에서 유난히 빨리 떠나가시는 분이라 얼굴 뵙기가 더 힘들기도 하고요.
그렇게 익숙한 얼굴을 두고 이 책은 첫머리부터 가면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지폐 속에 박제되고 교과서 속에 정갈하게 앉아 있는 인자한 얼굴이 세종 진면모의 절반도 안 된다고요. 시작부터 제법 세게 나오는구나 싶었어요.
<세상이 정한 방식으로는 결코 나를 담아낼 수 없다>는 출판사 결의 <한국철학전집> 두 번째 책이에요. 첫 권은 이순신 편인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는 자는 결코 남을 벨 수 없다>였고요. 권마다 인물이 달라서 이 책부터 읽어도 괜찮지만,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시리즈 분위기를 잡기가 편해요. 마침 오늘이 금요일이자 한가위 당일이네요. 출근 걱정 없는 금요일이라니, 명절이 주는 선물 중에 이만한 게 없는 거 같습니다. 표지에도 세종 옆으로 둥근 달이 하나 떠 있어서 추석에 꺼내 이야기하기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이 세종에게 붙이는 이름은 '설계하는 왕'이에요. 백성을 불쌍히 여긴 왕은 역사에 흔했는데 왜 유독 세종만 오백 년 넘게 이름이 남았느냐고 묻고는, 답을 아주 짧게 내놓습니다. "그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감정을 도구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여느 왕들과 세종을 나란히 세워 보여주는데, 이 대목이 참 시원시원했어요. 다른 왕들이 탄식하고 끝낼 때 세종은 문자를 만들었고, 관리를 야단치고 말 때 십칠만 명에게 직접 물었고, 중국 달력을 베껴 나눠줄 때 조선의 하늘을 새로 계산했다는 거죠.
장 구성도 좀 특이한 편이에요. 법고창신, 지인지감, 분골쇄신, 실사구시, 제왕지업까지 네 글자 사자성어로 다섯 장을 세웠고, 그 아래 꼭지 제목은 거의 다 "~하라", "~마라"로 끝나요. 목차만 보면 자기계발서 기운이 확 풍기는데, 막상 들어가 보면 세종 시대 이야기가 뼈대를 단단히 받치고 있어서 읽는 맛이 따로 있더군요.
1장 첫 꼭지는 훈민정음 이야기로 열립니다. 표지에 적힌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든다"가 바로 여기로 이어지는 셈이에요. 15세기 조선은 법전도 판결문도 임금의 교서도 전부 한자였고, 백성은 관아에 끌려가도 자기에게 무슨 죄목이 씌워지는지 읽을 수 없었대요. 책은 백성이 문맹이 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이 이 꼭지의 심장 같았어요.

"어려움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한문을 익히는 데 십수 년이 걸리니 지식은 극소수에게 몰리고, 그 소수가 문서를 쥐고, 문서를 쥔 자가 나라를 쥐었다는 흐름이에요. 그러니 훈민정음이 쉬웠다는 것 자체가 사대부들한테는 위협이었다는 얘기고요. 쉬움은 혁명이라는 표현이 처음엔 좀 과한가 싶었는데, 여기까지 따라오고 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그다음이에요. 책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회사 이야기를 꺼내거든요. 어떤 업무는 왜 특정한 몇 사람만 다룰 수 있게 남아 있는지, 어떤 정보는 왜 상급자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지, 어떤 결정은 왜 닫힌 방 안에서만 내려지는지.
이 나이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이런 장면이 전혀 낯설지 않죠. 그 사람한테 물어보러 가야 하고, 그 사람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 사람이 알려주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구조. 책은 그 안에 갇혀 있으면 아무리 성실해도 그 사람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뜨끔하면서도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어요. 이어서 "당신은 지금 누구의 문자로 자신을 적고 있는가"라고 묻는데, 내 이력서와 하루와 성과를 적는 문법이 정말 내 것이냐는 질문이라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더군요.
"남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 마라. 남의 문법으로 자신의 성과를 정리하지 마라. 남의 기준으로 자신의 시간을 재지 마라."
세종이라는 사람이 제일 가깝게 느껴진 건 오히려 몸이 무너져 가는 대목이었어요. 말년의 세종은 소갈증을 오래 앓았고, 책은 이걸 지금 이름으로 당뇨라고 설명합니다. 그 병이 눈까지 갉아먹어서 결국엔 자기가 만든 문자마저 제 눈으로 온전히 읽기 어려워졌다고 해요.

평생 문서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문서를 읽지 못하게 된 거죠.
그런데도 세종은 물러나지 않았대요. 승지가 문서를 읽어 아뢰던 관행을 사실상 자기 눈으로 삼아, 귀로 듣고 지시를 내렸다는 겁니다. 눈으로 읽는 문서는 앞뒤를 오가며 다시 볼 수 있지만 귀로 듣는 문서는 흘러가 버리잖아요. 그 자리에서 바로 판단하려면 지방 사정이며 관료들 성향이며 재정과 국경 형편이 머릿속에 한 장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야 했을 거라고요. 몸이 무너질수록 머릿속 조선은 더 뚜렷해졌다는 설명에서는 존경스러운 마음과 서늘한 기운이 같이 느껴졌어요. 책이 이걸 광기에 가깝다고까지 표현하는데 과장으로 들리지는 않더라고요.
눈이 감겨가는 왕이 문서를 귀로 듣던 그 방을 상상해 보라는 문장도 있어요. 어둡고, 무겁고, 조용했을 거라고 하는데, 그 세 마디가 이 꼭지 전체의 공기 같았습니다.
솔직히 좀 걸렸던 대목도 이 꼭지에 있어요. 책이 독자의 몸에 직접 말을 걸거든요. 눈이 침침한가, 어깨가 뭉치는가, 잠이 얕은가. 늘 피곤한 게 기본값인 사람한테는 하나같이 제 얘기라 웃음이 나다가, 오늘 좀 피곤해서 일을 미뤘다는 말이 얼마나 초라해지느냐는 문장에서는 좀 따끔했어요. 책 전체 말투가 워낙 단호해서 처음엔 세게 들리는 순간도 있었고요. 그런데 곧이어 "우리는 세종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혹한 삶이다"라는 문장이 나와요. 이 대목에서 어깨 힘이 조금 풀리더군요. 균형 잡힌 삶에서 나오는 균형 잡힌 결과도 나쁘지 않다고 인정해 주는 대목도 앞에 있어서, 무작정 몰아붙이는 책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꼭지 끝머리의 짧은 문장들도 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화려하지 않다, 낭만적이지도 않다, 다만 무너지지 않는다.
중년 입장에서 제일 할 말이 많아지는 건 4장의 달력 이야기였어요. 조선은 오랫동안 명나라 달력을 받아 썼는데, 하늘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별이 뜨는 각도도 해의 길이도 달라서 조선 농부들은 늘 며칠씩 어긋난 시간표 위에서 살았대요. 세종은 그 어긋남을 참지 않고 혼천의와 간의를 세우고, 앙부일구를 거리에 놓고, 자격루로 궁궐 안에 시간을 알리게 했죠. 그 끝에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다시 계산한 역법서 <칠정산>이 나왔고요. 앙부일구가 거리에 놓이면서 백성이 처음으로 자기 눈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는 대목이 참 좋았어요.
그러다 책이 슬쩍 묻습니다. 스물다섯에 무엇을 해야 하고, 서른에 무엇을 이루어야 하고, 마흔에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그 시간표는 누가 만들었느냐고요.
마흔을 한참 지나온 입장에서는 이 질문이 좀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남들 달력으로 보면 늘 조금씩 늦은 거 같고 뭔가 놓친 거 같은 기분이 드는 나이거든요. 책은 그게 잘 살지 못해서가 아니라 남의 기준표 위에 서 있어서 어긋나 보이는 거라고 말해줘요. 회사에서 남이 짜준 일정표대로만 움직이는 게 답답했던 분이라면 이 장이 특히 즐겁게 읽힐 거 같아요.
"남의 시간표를 사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 계절을 산다."
이 문장은 따로 오려서 책상 앞에 붙여두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세상이 정한 방식으로는 결코 나를 담아낼 수 없다>는 판형이 손에 쏙 들어오고, 두께도 보통 교양서보다 얇은 편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부담이 없어요. 책은 가벼운데 내용은 체급이 꽤 나가서, 헤비급 선수가 라이트급 계체량을 가뿐히 통과한 느낌이랄까요. 프롤로그 면 바탕에 표지 그림이 흐릿하게 깔려 있는 것도 소장하는 맛을 더해줍니다. <한국철학전집>이 권수를 늘려갈수록 책장 한 칸을 따로 비워주고 싶어지는 시리즈예요.

오늘 밤엔 한가위 보름달이 뜨겠죠. 표지 속 둥근 달이랑 겹쳐 보일 것 같고, 한글날도 두 주 남짓 남았으니 이 계절에 세종 이야기를 만난 건 타이밍이 꽤 좋았던 셈이에요. <세상이 정한 방식으로는 결코 나를 담아낼 수 없다> 덕분에 올해는 보름달한테 소원을 빌면서 제 달력 한 장도 새로 그려볼 생각입니다. 좋은 책 한 권 품고 맞는 명절이라 마음이 든든하네요. 다들 넉넉한 한가위 보내세요.

마음을 문자와 달력으로 옮겨 만든 왕 세종이, 남의 시간표로 살아온 중년에게 내 하늘은 내가 직접 계산해 보라고 말을 거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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