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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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짙은 남색 바탕에 촘촘한 격자가 깔려 있는데, 천의 짜임을 크게 확대해 놓은 모양입니다. 가운데에는 손 하나가 실패를 쥐고 있어요. 실패의 살구색과 손등의 결이 꽤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붉은 실 한 가닥이 풀려 나와 화면 위쪽의 파란 사선을 가로지릅니다. 띠지는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볼 수 없어 더욱 선명하게 느끼는 것들이 있다, 라고 적혀 있고, 띠지 아래쪽은 다시 붉은 직물 무늬로 마감돼 있습니다. 표지 전체가 이미 소설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죠.


<기억의 무늬>는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쓴 백희성 작가의 두 번째 장편입니다. 띠지에 폴 메이몽 프랑스 젊은건축가상 수상, 장 누벨 사무소 전 디렉터라는 이력이 적혀 있어요. 북로망스 서평단을 통해 받았고, 304쪽이라 부담 없이 며칠에 나눠 읽었습니다. 아래 글에는 중반부 전개가 어느 정도 들어갑니다. 범인의 정체와 결말은 적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읽고 싶은 분은 여기서 접어두셔도 좋겠습니다.


주인공 카미는 스물둘, 파리에서 의상을 공부하는 학생 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하나로 맺히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어요. 세 살 때 눈앞에서 부모를 잃었는데, 수사 기록에는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얼굴은 남지 않았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의 감촉만 손끝에 남았습니다. 미제로 묻혀 있던 살인 사건이 19년 만에 다시 수사 선상에 오르면서 이야기가 움직입니다.


중반의 직물 추적 대목에서 이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드러납니다. 카미가 결정적인 단서를 알아채는 순간이 하필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중이에요. 떨어지는 몸에 커튼이 스치고, 뺨에 닿은 감촉으로 찾았다고 외칩니다. 눈으로 뒤져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 겁니다. 그 커튼은 방수 처리가 개발되기 이전의 거친 원단이고, 부드러움도 냄새도 없어야 할 천인데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남습니다. 잘라낸 조각을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서술이 뒤따르고요. 단서가 위안을 주는 물건으로도 쓰인다는 점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가구의 비밀 장은 조금 더 촘촘합니다. 아기 침대와 어머니의 의자가 원래부터 한 덩어리처럼 보이도록 제작되었다는 설정인데, 두 조각의 나뭇결을 이어 맞춰 이음매를 지웠다고 해요. 나무가 계절마다 줄고 부푸는 성질까지 계산해 두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나무의 미래를 예측하는 게 설계자의 숙명이라는 표현도 있고요. 이 가구를 다시 떼어내는 방식이 또 특이합니다. 힘으로 뜯으면 망가지고, 사람이 몸을 실어 안는 자세라야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면 원형을 훼손해야 하고 원형을 지키려면 진실을 덮어야 하는 상황이 여기서 만들어지는데, 미스터리의 장치이면서 이 소설이 계속 붙들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후반부는 화자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기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기 오래된 나무 벤치를 두고 하는 말이 있어요.


"할머니가 늘 앉아 계시던 그 자리만…… 오랜 세월의 마찰로 나뭇결이 닳고 닳아 유독 매끄럽게 패여 있었지."


제목이 왜 무늬인지 이 한 줄로 설명이 됩니다. 사람이 오래 머문 자리에는 표시가 남고, 그 표시는 닳아서 생긴다는 것. 앞서 나온 직물도 가구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늬는 기억 자체라기보다 지금의 내가 그 기억을 이해하고 있는 모양에 가깝습니다. 사건은 그대로인데 뒤늦게 알게 된 사실 하나가 같은 장면의 결을 바꿔놓는 일이 이 소설 안에서 여러 번 일어납니다.


아픔을 다루는 방식도 마음에 남았습니다. 어떤 통증이 사라졌는데 그것을 회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이 나와요. 그 아픔이 남아 있던 마지막 끈이라고 여겨서,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서 소멸의 징조를 읽습니다. 잊히지 않아서 힘든 상태와 더는 아프지 않아서 두려운 상태 사이의 거리를 이렇게 그린 소설은 드물었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어둘게요. 후반 회고 구간은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문장이 계속 이어지면서 호흡이 늘어집니다. 장면 자체의 밀도는 높은데 한 겹 건너 듣는 느낌이 생겨서, 앞 장의 현장감과 비교하면 속도가 떨어져요. 카미의 감각이 필요한 순간마다 정확히 작동하는 것도 다소 편리해 보였습니다. 가구점 쪽 인물이 진술을 바꾸는 대목 역시 저항이 크지 않아서, 추리의 재미를 기대한 독자라면 싱겁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범인을 좁혀가는 쾌감보다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에 무게를 둔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뒤표지에는 상처도 하나의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저는 이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는 못하겠어요. 다만 닳은 자리를 흠으로 부르지 않고 결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감각은, 19년이든 그보다 짧은 시간이든 무언가를 오래 안고 살아온 사람에게 어느 정도 힘이 됩니다. 사물의 결을 짚는 이야기가 결국 사람 쪽으로 돌아오는 소설입니다.


8월 중순, 낮은 여전히 덥고 저녁이 되어야 겨우 바람이 도는 시기입니다. 두께가 부담스럽지 않고 문장도 어렵지 않아서 여름 끝자락에 붙잡기 좋은 책입니다. 조용한 이야기를 천천히 읽고 싶은 시기에 어울립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직물과 나뭇결을 짚어 19년 전의 진실에 닿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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