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역 ㅣ 21세기 시선으로 읽는 동양고전
박찬근 지음 / 청년정신 / 2026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흰 바탕에 연둣빛으로 周易 두 글자를 크게 앉히고, 그 위에 낡은 옛 책들을 층층이 쌓아 올린 표지였습니다. 주역이라 하면 검은 바탕에 금박, 팔괘 도형이 빼곡한 얼굴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 한 권은 그런 쪽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요. 색이 순하고 여백이 넉넉합니다. 책을 알리는 문구에도 점치는 책이 아니라 삶의 무늬를 읽는 책이라고 못을 박아 두었더군요. 판형도 분량도 부담 없는 크기라, 마음먹고 덤벼야 하는 고전이 아니라 손닿는 자리에 두고 지내도 되는 도서에 가깝습니다.
지은이 단산 박찬근 선생은 사십 년 가까이 한학을 붙들어 온 분입니다. 유튜브 <단산학당>에서 오래 강의해 오셨고, 그 시간에 쌓인 말투가 문장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64괘를 하나씩 짚되 원문 해석에 오래 매달리지 않고, 춘추전국 사람들의 이야기로 먼저 문을 엽니다. 괘사와 대상전은 음과 뜻을 나란히 붙여 짧게 지나가고, 마지막은 늘 오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읽는 동안 한 가지가 눈에 걸렸습니다. 챕터마다 '마흔이 넘으면'으로 시작하는 문단이 꼭 한 번씩 나온다는 점이었어요. 거짓의 무게가 달라진다고 하고, 막힘의 무게가 더 무겁다고 하고, 풀리지 않는 것들이 쌓인다고 하고, 배움 앞에 방어막이 생긴다고 합니다. 주역 해설서를 펼쳤는데 어느새 상담실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더군요.
몽괘를 읽을 때가 그랬습니다. 제환공이 자기 배에 활을 쏜 관중을 재상으로 앉히고 중부라 부르며 배웠다는 이야기인데, 저자는 환공의 어리석음을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분노와 편견으로 짚습니다. 원한에 매달렸다면 평생 몽매한 군주로 남았을 것이라고 뒷날 환공이 회고했다지요. 그 뒤에 붙은 대목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만큼 살았는데 지금 와서 모른다고 손을 드는 일이 부끄럽고, 후배 앞에서 묻는 것이 체면 상하는 일처럼 느껴지고, 어느 순간부터 배우는 자리보다 가르치는 자리가 편해졌다는 진단이요. 사십 대의 몽은 아직 열려 있다는 증거라는 정리에서, 배움은 언제나 배우는 사람 쪽에서 시작된다는 괘사의 뜻이 뒤늦게 몸에 붙었습니다.

책의 앞쪽 상경에는 막힘을 다룬 비괘가 있습니다. 분서갱유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위에서 아래로는 명령만 내려가고 아래에서 위로는 아무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는 문장이 유독 선명해요. 충언과 진실이 나가고 아첨과 침묵만 남았다는 대목도요. 조정 이야기지만 회의실 풍경으로 읽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주역이 태괘 바로 다음에 비괘를 놓았다는 지적, 그 순서 자체가 가르침이라는 해석이 이 챕터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었습니다. 막힌 시절의 처방으로 저자가 내놓는 것은 겨울 씨앗처럼 땅속에서 버티며 재능을 감추는 일, 그리고 비 다음에 반드시 태가 온다는 사실을 믿는 일 두 가지입니다.
풀림을 다룬 해괘는 그 뒤에 놓고 읽으면 좋습니다. 초 장왕이 석 달간 포위했던 정나라를 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했다는 말이 이 챕터의 중심이에요.
"해解란, 매듭을 푸는 것이오. 칼로 자르면 순간적으로 끊어지지만 원한이 남소. 손으로 풀면 시간이 걸려도 깨끗이 풀리고 오히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오. 억지로 뚫으려 하면 더 막히듯, 풀림은 때를 기다려야 오는 것이오."
여기서 저자는 교통체증을 끌어옵니다. 서울도 막히고 베이징도 막히는데 경적을 울리고 차선을 끼어들수록 더 막히고, 출퇴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풀린다고요. 고전 해설서에서 이런 비유를 만나는 게 반가웠습니다. 다만 해괘가 기다림만 말하지는 않습니다. 갈 곳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이 길하지만, 갈 곳이 생기면 빨리 가는 것이 길하다고 괘사는 양쪽을 다 적어 두었어요.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쪽이 오히려 더 어려운 주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망괘는 이 책에서 가장 조용하면서 오래 남는 장이었습니다. 식객 삼천을 거느린 신릉군이 시장 문지기 노인을 모시러 직접 수레를 몰고 가고, 그 노인이 도살장 앞에서 한참을 지체하는데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서 있었다는 장면이요. 화려한 수레도 식객 삼천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한 가닥 진심이 훗날의 헌신을 만들었다는 정리에, 저자는 경계 하나를 덧붙입니다. 진실하되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무망이 아니라 망령됨이며,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조종하거나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는 일은 무망일 수 없다고요. 이 문장이 없었다면 무망은 그저 착하게 살자는 말로 흘러갔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단 하나만이라도 거짓 없이 살아보라고, 그 하루가 쌓이면 삶이 된다고 챕터를 닫습니다. 마흔 이후의 삶은 쌓아온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얼마나 참으로 살고 있느냐로 산다는 앞 문단과 이어지면서요.
물론 고개가 갸웃해진 대목도 있었습니다. 신릉군의 진심에 감복한 후영과 주해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결말은 진심이 통한다는 근거로 삼기에 지금의 감각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어요. 저자도 그 부분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헌신의 크기를 목숨으로 재는 옛 서사를 그대로 받아 오늘의 교훈으로 옮기는 자리에서는 한 번쯤 속도를 늦춰도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챕터마다 마지막 절이 독자를 향한 물음으로 통일되어 있는 구성도, 여러 편을 이어 읽으면 결론의 모양이 비슷해지는 인상이 있고요. 다만 이건 흠이라기보다 이 도서의 사용법에 가깝습니다. 앞쪽에 상황별로 괘를 찾아 읽으라는 안내가 붙어 있는 이유가 읽다 보면 저절로 납득이 됩니다. 하는 일이 막혔을 때 29괘 감과 39괘 건과 47괘 곤을, 조직을 이끌 때 7괘 사와 14괘 대유를 펼치라는 식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필요한 자리를 그때그때 여는 편이 이 책과 맞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였습니다. 그동안 받아 본 책들 가운데 읽는 속도가 가장 느렸고, 대신 다 읽고 나서 서가에 꽂지 않고 손 닿는 자리에 그냥 세워 둔 유일한 한 권이기도 합니다. 완독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할 때 펼칠 목록이라는 걸 읽는 동안 알게 됐거든요.
입추가 지났는데 아직도 여름의 끝은 보이지 않는 무렵에 이 책을 읽어서인지, 봄 우레가 울려야 얼었던 땅이 녹는다는 해괘의 그림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넘어가는 자리에 서 보면 그 말이 결국 맞다는 것도 알게 돼요. 아무리 지독한 더위도 결국 끝이 나고, 그 끝을 앞당길 방법은 없지만 오지 않는 법도 없으니까요. 지금 어딘가 꽉 막혀 있는 분이라면 비괘와 해괘를 나란히 펼쳐 보시길 권합니다. 새로 배워야 할 것 앞에서 자꾸 나이를 핑계 삼게 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몽괘 쪽이 먼저일 테고요. 정답을 주는 도서는 아닙니다만,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이름을 붙여 주는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해냅니다. 이름이 붙으면 견디기가 조금 수월해지지요.
64괘를 인생의 64가지 상황으로 옮겨 놓은 안내서, 흔들리는 마흔 이후에게 지금 서 있는 자리의 이름을 알려주는 한 권.
#주역 #박찬근 #단산박찬근 #청년정신 #동양고전 #21세기시선으로읽는동양고전 #주역64괘 #고전읽기 #인문교양 #춘추전국시대 #자강불식 #마흔의독서 #직장인책추천 #서평단 #북유럽카페 #책추천 #인생책 #고전에서길찾기 #40대추천도서 #북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