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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컬러링 필사북 고흐와 니체 - 손끝에서 뇌가 다시 젊어지는 시간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송동윤 엮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starlogo(스타로고) / 2026년 6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택배를 받자마자 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짙은 초록을 배경으로 왼쪽에는 고흐의 해바라기가 노랗게 다 피어 있고, 오른쪽에는 같은 꽃이 색 없이 선으로만 남아 있더군요. 완성된 절반과 비어 있는 절반을 나란히 둔 표지였습니다. 컬러링북이니 당연한 구성인데도, 그 비어 있는 쪽이 유독 오래 눈에 밟혔어요. 나머지 반은 이 책을 든 사람이 채우라는 뜻이었습니다.
<시니어 컬러링 필사북 고흐와 니체>는 스타로고에서 나온 책입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마흔여섯 편을 색칠할 수 있는 도안으로 싣고, 그 맞은편에 철학자 니체의 문장 마흔여섯 편을 손으로 옮겨 적을 수 있게 배치했어요.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끝내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참 닮았습니다. 살아서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저마다의 고통을 안은 채 붓과 펜을 놓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야 위대함을 인정받았죠. 그 두 사람을, 색을 고르는 손과 문장을 옮겨 적는 손으로 함께 만나게 하는 구성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이 책을 받았습니다. 봉투를 열고 처음 든 생각은 의외로 가볍고 얇다는 것이었어요. 두툼한 아트북을 예상했는데 손에 얹으니 부담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펼쳐 보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실로 꿰맨 제본이라 활짝 열면 가운데가 뜨지 않고 180도로 평평하게 눕습니다. 색을 칠하다 보면 접히는 안쪽이 늘 아쉬웠는데, 이 책은 펼친 면을 끝까지 쓸 수 있어요. 얇고 가벼워 아무 데나 두고 하루에 한 장씩 채워 가기에도 좋습니다. 만듦새 하나에서 이 책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가 보였어요.
앞쪽에는 손으로 색칠하고 글씨를 쓰는 일이 왜 뇌에 좋은지를 다섯 갈래로 풀어 놓았습니다. 색을 인식하는 영역과 손을 움직이는 영역, 글을 다루는 영역이 동시에 깨어난다는 이야기, 손글씨가 기억을 붙드는 힘을 지녔다는 연구, 색을 채우는 반복이 명상과 비슷한 안정을 준다는 대목이 이어져요. 저는 이론보다 그 뒤에 나오는 문장에 마음이 갔습니다. 한 페이지를 다 채웠을 때 밀려오는 뿌듯함이 은퇴나 자녀 독립 뒤에 찾아오는 '나는 이제 쓸모없어졌나' 하는 공허함에 조용한 답이 될 수 있다는 대목이었어요. 손을 놀리는 그 단순한 행위가 실은 자기를 돌보는 시간이라는 말로 읽혔습니다.

책을 넘기다 오래 눈이 머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첫 장부터가 '별빛도 시간을 원한다'예요.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이 실려 있고, 그 아래 니체의 문장이 놓여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글인데, 번개와 뇌성에도 시간이 필요하듯 별빛도 사람의 눈에 닿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살아서 빛을 보지 못한 두 사람의 삶이 첫 문장에서부터 그대로 겹쳐 옵니다. 지금 당장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것이 의미 없는 건 아니다.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한참을 넘기다 스물여섯 번째 장에서 다시 멈췄습니다. '인간은 고뇌하는 동물이다'라는 제목 옆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의자에 앉은 노인을 그린 '슬픔에 잠긴 노인'이 함께 있어요. 그림만 봐도 마음이 서늘해지는데, 니체는 여기서 인간이 어떤 동물보다 약하고 불안정한 존재, 곧 고뇌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운명에 반항하고 미래에 도전하는 존재라고 덧붙여요. 고뇌를 결함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읽어 준 셈입니다. 이런저런 걱정을 안고 사는 게 나만 유별난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흔들리며 나아간다는 말로 다가왔어요.

가장 곱씹게 된 건 서른아홉 번째 장 '개인은 늘 새로운 것의 창조자다'입니다. 니체는 개인이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설령 감정과 지식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순간 늘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이 문장이 곧 이 책의 성격입니다. 고흐의 그림과 니체의 문장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완성된 것이지만, 그 위에 어떤 색을 얹고 어떤 마음으로 문장을 옮기느냐는 온전히 지금 이 책을 든 사람의 몫이니까요. 표지의 비어 있던 절반이 여기서 다시 떠올랐습니다.
일곱 번째 장 '축복은 삶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얻게 한다'도 담아 두고 싶은 대목입니다.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긴 싸움과 덧없는 선물에도 감사하는 여린 마음에, 인생이 마침내 축복을 내리고 그로써 자신의 사명을 되찾게 된다는 문장이에요. 고단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 건네는 담담한 인사 같았습니다.
물론 니체의 문장이 늘 다정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비참함도 시련이다' 같은 장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서늘해서, 처음 읽으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다만 그런 날 선 문장까지 한 글자씩 손으로 옮겨 적다 보면, 빠르게 읽고 지나칠 때는 놓쳤던 결이 조금씩 만져집니다. 눈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의 차이가 거기 있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필사 지면의 줄 간격이 조금 더 넉넉했다면 글씨가 큰 분들도 편했겠다 싶었어요.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인 책이 있는가 하면, 곁에 두고 천천히 쓰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이 한 권은 분명 뒤쪽입니다. 한 번에 다 읽어 치우는 책이 아니라, 마음이 헛헛한 날 한 장씩 펼쳐 색을 얹고 문장을 옮기며 스스로를 돌보게 되는 안내서에 가까워요. 그림을 오래 손에서 놓았던 사람, 좋은 문장을 눈으로만 스쳐 보냈던 사람, 하루가 너무 빠르게 흘러 정작 제 마음은 들여다볼 틈이 없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하루 십 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부모님께 무언가 해 드리고 싶은데 마땅한 걸 못 찾았던 이에게도 조용히 건네볼 만하고요.
여름의 한복판입니다. 열기가 오래 머무는 계절이라 마음도 쉬 지치는데, 시원한 자리 하나 잡고 앉아 색연필을 쥐고 고흐의 별빛을 천천히 칠하는 저녁이라면 이 무더위도 제법 견딜 만해집니다. 물 한 잔 곁에 두고 한 장씩 채워 가기에 이만한 계절도 없겠다 싶어요.
완성된 절반을 감상하고 비어 있는 절반을 채우며 백 년 전 두 사람과 나란히 앉아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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