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쓸모 - 평범한 대화를 더 근사하게 만드는 어휘의 힘
차민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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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단어의 쓸모>를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가 그동안 얼마나 같은 말만 반복하며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의실에서 누군가의 기획안이 영 미덥지 않을 때 저는 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했어요. 나쁜 뜻은 없었지만 그 말 뒤에 따라오던 어색한 침묵을, 이제와 돌아보면 꽤 자주 겪었던 것 같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이 책을 받았을 때 솔직히 어휘책이라기엔 표지가 너무 말랑하다고 생각했어요. 동글동글한 동물 둘이 말풍선을 주고받는 그림이 표지를 채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캐릭터들이 책 안에서 그대로 살아나 중간중간 짧은 만화로 등장합니다. 묵직한 풀이 사이에서 고양이 상사가 곰 사원에게 일을 건네는 장면 같은 게 불쑥 나오니, 두께가 제법 있는데도 숨 막히지 않게 넘어가더라고요. 공부한다는 부담 없이 에세이 읽듯 읽힌다는 출판사 소개가 빈말은 아니었습니다.

저자 차민진은 대치동에서 고등 국어를 가르치다 지금은 '랜선 국어쌤'으로 불리는 사람이에요. 어휘력이란 낱말을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정확한 말을 꺼내 쓰는 감각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익숙하지만 거친 표현 대신 한 끗 더 정교한 말을 고르는 순간 말의 인상과 관계의 온도가 달라진다는 것이죠. 책은 매일 쓰는 말을 어른스럽게 다듬는 법부터 관계 어휘, 직장 어휘, 시사 어휘, 고급 어휘까지 다섯 단계로 차곡차곡 올라갑니다.


읽으면서 제 발목을 붙든 건 직설적인 반대를 부드럽게 바꾸는 법을 다룬 부분이었어요. '회의적'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풀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그 방향성에 조금 회의적입니다. 혹시 다른 데이터도 있을까요?"라고 말하면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제 의견을 분명히 전할 수 있다는 거예요. 게다가 회의적인 태도가 냉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설명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냉소가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며 팔짱 끼고 비웃는 체념이라면, 회의는 "정말 그럴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며 더 나은 답을 찾으려 질문하는 태도라는 거죠. 책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회의적이라는 말은 "믿지 않기 위해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믿기 위해' 잠시 확신을 보류하는 건강한 멈춤"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에 시큰둥해지기 쉬운데, 그 시큰둥함이 냉소인지 회의인지 스스로 물어보게 되더군요.

의견이 정반대로 갈릴 때 쓰는 '궤를 달리하다'라는 표현에서는 한 가지 장면이 따라붙었어요. 책에는 저자가 대학 토론 수업에서 한 선배에게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닌가요"라는 비웃음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던 일화가 나옵니다. 그때 침묵을 깬 교수의 한마디가 "두 사람의 생각이 궤를 좀 달리하네. 어떻게 다른지 더 들어볼까"였다고 해요. 태양계의 행성들이 수십억 년 동안 부딪히지 않고 도는 건 힘이 세서도 서로 눈치를 봐서도 아니라 그저 각자 자기 궤도를 따라 돌기 때문이라는 비유까지 읽고 나니, "이 사안에서는 저와 궤를 조금 달리하시네요"라는 말이 '당신이 틀렸다'는 공격과 얼마나 다른지 단번에 와닿았습니다.


일에 관한 어휘들도 슬며시 마음을 데웠습니다. 지친 동료에게 건네는 '고무적'이라는 말이 사실은 북을 치고 춤을 추며 기운을 끌어올리던 옛 풍습에서 왔다는 이야기, 그래서 딱딱한 회의에서 "이번 발표 고무적입니다"라는 말도 뜯어보면 북소리와 춤사위가 숨어 있다는 풀이에선 저도 모르게 웃었어요. 시작은 거창한데 끝이 흐지부지되곤 하는 제게는 '매조지다'라는 순우리말도 콕 박혔습니다. 일의 끝을 단단히 묶어 마무리한다는 뜻인데, 야구로 치면 9회를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 같은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거라는 그 평범한 말이, 정확한 단어 하나에 실리니 다르게 들렸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책은 단순한 단어 교체를 넘어섭니다. 영화를 10분짜리 요약으로 보고 "봤다"고 말하는 시대를 짚으며 '피상적'이라는 말을 꺼내는 흐름이 그랬어요. 좋은 작품은 원래 내 가치관을 흔들고 생각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줄거리 요약에는 그 마찰이 없다는 거죠. 누군가 정성껏 만든 케이크에서 비닐 커버만 핥아 먹은 셈이라는 비유가 따끔했습니다. 그 반대편에 놓인 단어가 '톺아보다'예요. 살살이 살피며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뜻의 이 순우리말이, 뜻밖에도 애플코리아가 홈페이지에 쓰면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읽는 재미가 쏠쏠했고요. 빠르게 넘기고 요약으로 때우는 시대에, 책 한 권을 천천히 톺아보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곰곰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어요. 어휘마다 풀이가 워낙 알차다 보니 사전 정의와 예문이 표로 정리되는 구성이 단계마다 반복되어, 한 번에 몰아 읽으면 비슷한 리듬이 이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루에 몇 꼭지씩 천천히 곁에 두고 펼치는 편이 훨씬 잘 맞는 것 같아요.

이 책이 특히 반가울 사람을 떠올려보면, 메일 한 통 쓰면서도 단어 고르느라 커서만 깜빡이게 두는 직장인이 먼저 생각납니다. 솔직하게 말한 것뿐인데 자꾸 오해를 사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이라면, 책장을 넘기는 동안 조용한 위로를 받을 거예요. 거창한 화술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조금 더 정확하게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한 권입니다.


서평단으로 받은 책들 사이에서 이 한 권은, 무언가를 빨리 읽어치우는 데 익숙해진 제 습관을 잠깐 멈춰 세웠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표현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이 곧 제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걸, 읽는 내내 조용히 일깨워주었거든요.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요즘은 공기가 한결 묵직합니다. 창밖이 흐린 날, 빗소리를 배경으로 이런 책을 한 꼭지씩 넘기는 시간은 꽤 어울려요. 마음에 드는 낱말 하나를 주워 그날 누군가에게 건네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단어 하나를 바꾸면 말의 온도가 달라진다는 걸, 부담 없이 그러나 깊이 있게 일러주는 어휘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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