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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귀 뚫기
집영 지음 / 모티브 / 2026년 6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서점이든 인터넷이든, 영어책 코너 앞에서 한 번쯤 멈칫해본 분들이 많을 거예요. 저도 그랬습니다. 영어에 미련은 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거든요. 단어를 외워도 돌아서면 잊고, 외국인 앞에선 입이 굳던 기억만 차곡차곡 쌓인 탓이겠죠.

그런 제 눈길을 붙든 게 모티브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의 표지였습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어딘가 공부하는 학생 같으면서도 ‘저렇게 켜놓기만 하면 정말 귀가 뚫린다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더라고요. 표지의 노란빛도 산뜻했고요. ‘공부하지 마, 그냥 켜 놓기만 해’라는 카피가 농담처럼 보이면서도, 나이 들면 영어는 안 된다는 제 오래된 고정관념을 슬쩍 건드렸습니다. 이 책은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아 읽게 되었어요.
<영어 귀 뚫기>의 저자 집영은 미술을 전공했고, 4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라, 아기가 모국어를 익히듯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면서부터였다고 해요. 단어 암기와 문법, 한국어 해석을 잠시 내려놓고 영어를 소리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 단순한 반복이 어느 순간 안 들리던 문장을 들리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에서 가장 후련했던 건 ‘자막을 보면 듣기가 안 되는 이유’를 풀어낸 대목이에요. 자막을 읽는 순간 뇌는 소리 덩어리를 듣지 않고 글자에서 곧장 의미로 직행해버린다고 합니다. 실제 영어는 단어가 또박또박 들리는 게 아니라 뭉쳐서 들리는데, 자막에 기대면 이 연결음을 영영 못 듣게 된다는 설명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자는 듣기가 예민해진다는 걸 “‘볼륨이 커진다’가 아니라 들은 소리의 분해 능력이 올라간다는 뜻”이라고 정의해요. 자막을 ‘엄마’에 빗댄 비유도 좋았습니다. 없으면 무섭지만 언젠가는 독립해야 홀로 설 수 있다는 흐름이 영어 듣기를 성장의 문제로 바꿔놓더라고요.
문법을 다룬 장도 흥미로웠습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어색하다는 걸 우리가 문법을 따지지 않고도 그냥 느끼듯, 영어 역시 바른 소리가 충분히 쌓이면 어색함을 감각으로 알게 된다고 말하거든요. 저자는 귀를 뚫은 지 3년이 됐을 때 테솔(TESOL) 자격증 시험을 봤는데, 그 시험의 8할 이상이 문법 문제였는데도 “문법 공부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적습니다. 조동사니 전치사니 하는 이름은 몰라도 문장이 자연스러운지는 느낄 수 있었다고요. 우리가 모국어에서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느낌으로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 사례 가운데 특히 오래 남은 건 저자의 두 아이 이야기였어요. 문법 공부를 따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집에 오던 길에 놀이터에서 외국인 아이 둘이 모래놀이를 하며 주고받던 말을 ‘저절로 들리고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한 아이가 모래를 건네자 상대가 뿌리지 말라 했고, 건넨 아이는 ‘이거 너 주려고 그래’라고 했다는 그 사소한 대화를요. 그리고 큰아이는 시작한 지 1년이 된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엄마, 영어가 한국어처럼 들려요.”
이 한마디가 책을 덮은 뒤로도 마음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영어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느새 곁에 익숙해진 소리가 된다는 것. 그게 어른에게도 가능하다고 책은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는 여러 언어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온 ‘이해 가능한 인풋(comprehensible input)’ 개념을 끌어와 이 주장을 단단히 받쳐줍니다. 결국 말하기는 이해한 만큼 따라 나오는 것이고, 흥미롭게 즐기며 이해할 때 언어는 저절로 몸에 밴다는 거죠. ‘그냥 켜놓기만 하라’던 가벼운 카피가 막연한 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신뢰가 그제야 생겼습니다.

읽는 내내 회사에서 영어를 마주하던 순간들이 자연스레 겹쳤어요. 그런 자리마다 늘 따라붙던 건 ‘틀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말이 트일 무렵 실수를 매번 지적받으면 오히려 뇌가 긴장해 말문이 막힌다고 짚습니다. 실수는 줄여나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요. “우리는 어른이니 울지 않는다. 그저 울고 싶을 뿐이다”라는 문장에서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말이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는 그 답답함을, 저자는 막 말 배우는 아이에 빗대 따뜻하게 다독여줘요. 영어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친근한 무언가로 다가올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어요. 저자 자신과 두 아이의 경험이 설득력 있게 담겼지만, 연령대나 환경이 다른 사례가 좀 더 다양하게 실렸더라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책 속에서 만나는 반가움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핵심 메시지를 흐릴 정도는 아니었고요.
이 책이 특히 가닿을 사람을 떠올려봤어요. 영어 앞에서 한 번쯤 마음을 접어본 사람, 그리고 영어가 여전히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분명 얻어갈 게 있습니다. 시험 점수를 위한 책이 아니라, 영어 때문에 작아졌던 자신감을 슬그머니 다시 세워주는 책에 가깝거든요.
장마를 앞둔 6월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이 책은 의외로 가볍고 산뜻하게 읽혔습니다. 거창한 결심 없이 좋아하는 영상 하나를 틀어놓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하니, 여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가만히 시도해보려 합니다. 서평단으로 받아 읽은 책이지만, 오래 미뤄둔 영어라는 숙제를 다시 마주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제겐 꽤 의미 있는 한 권으로 남았습니다.
나이 들면 영어는 끝이라는 고정관념을, 아기처럼 듣는 법으로 다정하게 깨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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