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도감
박우진 지음 / 모티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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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부터 손에 잡히는 느낌이 평소 읽던 책과 달랐어요. 형광에 가까운 초록 바탕에 굵직한 글씨가 박혀 있고, 흔히 보는 직사각형이 아니라 정사각형에 가까운 판형이라 잡는 순간부터 어쩐지 가볍고 산뜻했습니다.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오랜만에 그림 많은 만화책을 펼치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죠. 실제로 술술 읽혔어요. 한 꼭지가 짧고, 손그림 같은 컷이 빠르게 이어지다 보니 속도감이 붙어서 어느새 뒷부분까지 와 있더라고요.


제목이 <인간실격>을 슬쩍 비틀어놓은 거라, 처음엔 농담처럼 읽혔습니다. 부제도 '우리 주변의 이상하고 솔직한 사람들'이라 가볍게 웃자는 책인 줄 알았고요.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그 '우리 주변'에 결국 저 자신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생활 만화를 그리는 박우진 작가가 우리가 평소 괜찮은 척 덮어두는 찌질하고 옹졸한 속마음을 하나씩 끄집어내는데, 비웃자고 그리는 게 아니라 "그래, 다들 그렇잖아" 하고 어깨를 툭 치는 결이라 거부감 없이 읽힙니다.


초반에 할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주 오는 날을 달력에 표시해두고 신이 나서 시장으로 장을 보러 가는 할머니. 무거운 봉지를 양손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정작 손주는 "아 맞다 미안" 하면서 게임에 빠져 있고 결국 용돈만 송금받죠. 책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어요. "그렇게 전해지지 못한 할머니의 정성은 지금 이 시간에도 차가운 냉장고 속에서 멈춰 있다." 웃으면서 보다가 이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엄마 편도 비슷해요. 프로필 사진이 바뀐 걸 보고 전화를 건 엄마,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 하나,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라는 짧은 메시지. 자식이 보낸 "나 잠깐 바빠서 미안" 아래로 "여기까지가 마지막 메시지 내용입니다."라는 건조한 안내가 떠 있는 컷을 보면, 그 무심함이 어디로 향할 수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가족 이야기만큼이나 오래 붙잡힌 건 직장인의 자리에서 그려낸 것들이었어요. 어릴 적 친구들과 게임 캐릭터 흉내를 내며 신나게 뛰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정장을 입고 명함을 주고받는 사이로 변해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똑같이 손을 뻗는 동작인데, 한쪽은 상상 놀이였고 한쪽은 사무적인 인사라는 게 묘하게 아팠어요. "뭐야.. 다 왜 그렇게 된 거야?"라는 물음이 남의 일 같지 않더라고요. 번아웃을 다룬 꼭지에서는 한 인물이 "나이가 들면 나를 증명하는 무대가 커질 거라 믿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엔 OMR 카드였던 그 무대가, 이제는 A4 용지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무언가를 증명하라고 다그치고 있다는 거죠. 종이의 크기만 달라졌지 우리는 계속 시험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작가는 효율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텍스트로만 마음을 주고받는 우리를 두고 "우리는 서로에게 무수한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낸다"고 적었는데, 그게 사실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다 떨어지는 가벼운 마음이라는 문장이 오래 따라왔습니다.


책이 단순히 찔러대기만 했다면 이렇게 끝까지 들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뒤로 갈수록 작가는 슬쩍 손을 내밉니다. 남들처럼 멀리 나아가지 못한 것 같아도 한 자리를 지키며 버텨온 시간만큼은 그 어떤 거리보다 멀리 온 것이라고, 자식을 위해 돈을 벌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을 콕 집어 다독여 줄 때는 한참을 그 페이지에 머물게 됩니다. 우진이라는 학생이 등장하는 졸업식 장면도 그래요. 다들 부모와 사진을 찍는데 혼자 남은 아이를 선생님이 곁으로 불러 "잘했어. 잘해 냈고 잘 버텼어"라며 안아 줍니다. 그런데 마지막 컷에서, 그 선생님이 실은 아이가 마음속으로 불러낸 환상이었다는 게 드러나요. 정작 위로가 필요했던 순간에 혼자였던 아이가, 스스로를 다독이려고 만들어낸 장면이었던 겁니다.


고슴도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상처받아 가시를 잔뜩 세운 사람에게 가족이 다가가다 그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에휴… 덮고 자야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하며 이불을 덮어 주는 장면. 가시를 세운 채 혼자 견디는 것보다 그 품에 기대어 울어도 괜찮다는 작가의 말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마음을 닫고 사는 게 어른의 미덕인 줄 알았던 사람에게는 따끔하면서도 다정한 한마디였습니다.


마지막 장은 째깍거리는 초침에 관한 이야기로 닫힙니다. 누군가의 동료로, 누군가의 부모로, 혹은 그냥 나 자신으로 흘려보낸 1분 1초 안에도 각자의 사투와 사랑이 담겨 있다는 글이요.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과, 너로 인해 상처받은 나. 이 둘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을 때, 어제의 나를 답습하지 않는 성숙함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못나고 미숙한 부분까지 들여다볼 때 비로소 어제보다 나아진다는 이야기. 다자이의 인간실격이 무너지는 사람의 기록이었다면, 이 책의 '실격'은 그 무너짐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시작하자는 쪽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아 읽게 된 책인데, 처음엔 그림 많고 가벼운 만화책이라 금방 넘기겠거니 했습니다. 다 읽고 나니 가장 늦게까지 곁에 남는 종류의 책이 되어버렸네요. 웃다가 뜨끔하고, 뜨끔하다가 위로받는 이상한 순서로요. 부모님께 연락을 미뤄두고 있거나, 회사에서 무언가를 끝없이 증명하느라 지친 사람, 혹은 괜찮은 척 가시를 세우고 사는 자기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어느 페이지에선가 분명 멈칫하게 될 거예요. 가까운 사람에게 슬쩍 건네주기에도 좋은 책입니다. 직접 "너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긴 멋쩍은 마음을, 이 책이 대신 해주거든요.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요즘은 공기가 무겁고 눅눅합니다. 이런 계절엔 두꺼운 책보다 가볍게 손이 가는 한 권이 반가운데,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오래 두드리는 도서라면 더 고맙죠. 비 오는 저녁에 천천히 넘겨보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괜찮은 척 살아온 우리에게 "너만 그런 거 아니야"라고 웃으며, 그러나 끝내 따뜻하게 건네는 솔직한 만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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