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해도 실력이 팍팍 느는 릴리의 어반스케치 고급+응용 ㅣ 릴리의 어반스케치
릴리의 아뜰리에(김민아) 지음 / 심통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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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말 한마디면 AI가 그럴듯한 그림을 뚝딱 만들어주는 시대죠. 그런데 저는 요즘도 연습장을 펼치고 펜을 쥡니다. 손끝으로 선을 긋고 색을 얹어 가는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가만히 가라앉고, 누가 대신 만든 적 없는 제 그림 한 장이 남거든요. 그 소소한 즐거움을 좀 더 키워보고 싶어서 집어 든 책이 <혼자해도 실력이 팍팍 느는 릴리의 어반스케치 고급+응용>입니다.


기초편으로 어반스케치에 발을 들였던 터라, 그다음이 늘 궁금했어요. 보이는 대로 따라 그리는 건 어느 정도 익혔는데, 막상 제 그림은 어딘가 뻣뻣하고 늘 2%가 비어 보였거든요. 이 책은 딱 그 답답한 자리를 건드려 줍니다. 고급 펜 드로잉 기법과 수채화·마카·프러스펜을 활용한 채색법으로, 어떻게 하면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지 차근차근 보여줘요.


받아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딱 적당하다'였습니다. 부담스럽게 두껍지 않아서, 예제를 하나씩 직접 따라 그려보기에 좋아요. 고급편이라고 어렵게만 늘어놓지 않고 핵심만 섬세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낸 느낌이라, 오히려 손이 더 자주 갔습니다.


책 앞쪽 팁 코너부터 마음을 편하게 해줘요. 그중에서도 "모든 것을 다 그릴 필요는 없어요"라며 마음에 드는 한 요소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생략하라는 대목, "종이를 꽉 채울 필요 없이 여백을 남겨놓아도 좋습니다"라는 조언이 좋았습니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을 슬그머니 내려놓게 해주거든요. "낙서하듯이 편안하게 선을 그어보세요"라는 안내도 그래요.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선도 괜찮다고, 그러다 보면 자기만의 개성 있는 선을 갖게 된다고 다독여 줍니다.


따라 그리다 보면 저절로 몸에 배는 태도가 하나 있어요. 복잡한 대상일수록 덩어리째 겁먹지 말고 쉬운 구조로 쪼개서 보라는 것. 캐나다의 '빨강머리 앤 초록지붕집'은 사각형 몸체에 삼각 지붕을 얹고 창문과 덧문을 더해 가며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평범한 정면 형태로 출발하지만, 창과 문 안쪽에 해칭선을 넣고 외벽에 가로선을 그어 판재의 질감을 살리고 그늘진 곳에만 명암을 더하면, 어느새 입체감이 도는 한 채의 집이 완성돼요. 작품의 완성도라는 게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이런 자잘한 디테일과 빛에서 갈린다는 걸 손으로 직접 깨닫게 됩니다.


여행 드로잉 파트로 가면 그 태도가 더 또렷해져요. 누구나 압도되는 파리의 에펠탑조차 "삼각형 모양과 층별 구조만 기억하면 쉽게 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으로 큰 윤곽을 잡고, 빼곡한 X자 철골은 아래로 갈수록 크게 그린다는 요령 하나로 막막함이 가시죠. 탑 아래에 작은 나무나 가로등을 함께 그리면 거대한 규모감이 더 살아난다는 귀띔도 재미있었어요. 별 셋짜리 난도인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은 "다소 어려운 소재"라고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외벽 무늬나 조각장식까지 다 그리려 들지 말고 전체 외형만 잡으라고, 어두운 부분만 진하게 긋고 나머지는 약하게 그으라고 일러줍니다. 표지에도 보이는 그 주황빛 돔에 색을 얹고 황토색 외벽에 짙은 음영을 더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멀게만 느껴지던 랜드마크가 제 손 안에서 천천히 모습을 갖춰 가요.


채색 파트에서는 꽃집 예제가 유난히 사랑스러웠습니다. 색이 화려해 복잡해 보이는 꽃들도 "색점으로 찍기만 해도 예쁜 꽃들이" 된다고 해요. 펜으로는 화분만 또렷하게 그리고 꽃 자리는 비워둔 다음, 여러 색으로 콕콕 찍어 채우는 방식이죠. 흰 화분에는 흰 물감을 쓰지 않고 어두운 쪽에만 푸른빛으로 명암을 넣고, 마무리로 빨간 물감을 차양 줄무늬에 얹되 왼쪽으로 갈수록 연하게 해서 원근감을 살립니다. 색을 그저 칠하는 게 아니라 빛과 거리를 색으로 조절한다는 감각을, 이 한 장으로 익히게 돼요. 게다가 그 꽃집이 아현동의 어느 골목이라는 점도 정겨웠습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동네 어귀에서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남더라고요. 어반스케치는 결국 형식이 아니라 활동이고, 일상의 행복을 담은 작은 이야기라는 것. 책에서도 그림 옆에 장소와 감상을 적어두면 추억을 담은 여행일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잘 그리는 기술서라기보다, 내 시선으로 세상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안내서에 가까워요. 기초를 떼고 그다음이 궁금하던 차라면 이 책이 자연스러운 디딤돌이 되어줄 거예요. 한동안 손그림과 멀어져 있다가 문득 무언가 직접 만들어내고 싶어지는 분에게도 잘 어울리고요. 무엇이든 척척 생성되는 시대라서 오히려, 서툴더라도 제 손으로 완성한 한 장의 무게가 더 묵직해지는 요즘입니다.


이 책은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만났어요. 여러 권을 받아 읽다 보면 정보만 전하고 마는 책과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 갈리기 마련인데, 이 한 권은 분명 후자였습니다. 덮고 나서 끝이 아니라, 정말로 펜을 꺼내 연습장을 펼치게 만들었으니까요.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요즘, 창밖 초록이 부쩍 짙어졌어요. 이런 계절이면 카페 창가에 작은 스케치북을 펼쳐두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천천히 옮겨보고 싶어집니다. 잘 그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벼운 마음으로요.


보이는 대로 그리던 손에 '내 시선으로 덜어내고 강조하는 법'을 쥐여주는, 부담 없이 따라 그리기 좋은 어반스케치 심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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