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사랑하고 꽃피운 윤동주 김소월 필사북 - 뮤지컬, 영화, 노래가 된 동주·소월 시 108선
윤동주.김소월 지음 / starlogo(스타로고)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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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 들어 필사라는 걸 곁에 두게 됐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처음 접했는데, 펜을 들고 글자를 한 자씩 옮겨 적는 그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빠르게 흘러가던 하루에서 잠깐 비켜서서 오롯이 저만 갖는 시간이 생기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손으로 글을 옮기다 보면 눈으로 읽을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문구 하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을 한 번 더 새기게 됩니다. 작은 힐링이라는 말이 딱 어울려요.


이번에 받아 본 <윤동주 김소월 필사북>은 그런 시간을 위해 만들어진 책입니다. 표지를 처음 손에 들었을 때부터 마음이 갔어요. 분홍과 보라로 나뉜 화면 위에 자음과 모음을 꽃송이처럼 흩어놓은 디자인인데, 색감이 참 곱고 보고 있으면 기분이 환해집니다. 한글이 곧 꽃이라는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림 하나로 보여주는 표지라 더 정감이 갔어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을 기념해 만든 책이라고 해요. 한글을 가장 사랑한 시인 윤동주와,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 김소월의 작품 108편을 직접 손으로 써 내려가도록 엮은 필사 전용 책입니다. 뮤지컬과 영화, 노래로 다시 살아난 시들을 모았고, 페이지를 펼치면 시 한 편 옆으로 줄이 그어진 넉넉한 공간이 나란히 놓여 있어요. 읽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옮겨 적을 수 있게 설계해둔 점이 살뜰합니다. 잘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책이라는 게, 펜을 처음 대는 사람에게는 꽤 다정한 배려예요.


윤동주와 김소월. 한국 사람이라면 이 두 이름을 모르는 분은 없을 거예요. 교과서에서 만나고,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다시 불려 나오는 시인들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손으로 한 줄씩 옮겨 적어보니, 익히 안다고 여겼던 시들이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윤동주의 '아우의 인상화'가 그랬어요.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하는 짧은 문답이 시의 전부인데, 옮겨 적다 보면 그 대답이 묵직하게 내려앉습니다.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라고 시인은 적었지요. 무엇이 되겠다는 거창한 말 대신 그저 사람이 되겠다고 답하는 아이의 얼굴을,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슬픈 그림 같다고 바라보는 형의 마음이 오래 남았습니다.


'별 헤는 밤'은 또 어떻고요.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로 시작해,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그리고 어머니를 하나씩 붙여 부르는 그 호명을 손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먹먹해져요. 어렵고 화려한 단어 하나 없이, 맑은 우리말이 별처럼 박혀 있는 시입니다.


펜을 멈칫하게 만든 시도 있었어요. 김소월의 '산유화'였습니다. 소월의 시는 읽기만 해도 노래가 되는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가락 그 자체예요.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로 열렸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피네'가 '지네'로 바뀌며 닫힙니다. 피고 지는 세상의 이치를 이렇게 짧고 맑은 우리말로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어요.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는 한 줄에 담긴 거리감과 외로움은, 손으로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갈 때 한결 사무치게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로 시작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끝나는 이 시를 옮기다 보니, 문득 마야가 부른 록 버전이 듣고 싶어졌어요. 곱게 보내드리겠다는 말 속에 끝내 삼킨 슬픔이, 록의 거친 목소리와 만나 다르게 흘러나오던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소월의 우리말이 백 년을 건너 다시 노래가 되는 일. 시가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또 다른 시대의 목소리로 불리는 흐름의 한 자락에 슬쩍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두 시인은 우리말이 가장 위태로웠던 시절을 살았던 분들이에요. 조선어를 가르치는 일이 금지되고 이름까지 빼앗기던 시대에, 그럼에도 한글로 시를 썼습니다. 윤동주는 시집을 세 부 직접 베껴 썼고 그중 한 부가 살아남아 오늘 우리에게 닿았다고 하지요. 필사로 지켜진 시들이 다시 필사북이 되어 손안에 놓이는 셈인데, 이 이어짐이 가만히 마음을 데워줍니다. 펜을 들고 한 글자씩 눌러 적는 일이, 알고 보면 580년 전 세종대왕이 품었던 마음과 그 말을 끝까지 지켜낸 시인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인사였던 거예요.


이 책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에요. 예쁜 손글씨를 연습하려는 책도 아니고요. 그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천천히 따라 적으면서, 그 말이 몸에 배어드는 시간을 갖고 싶은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하루 중 단 몇 분이라도 화면에서 눈을 떼고 펜을 쥐고 싶은 분, 익숙한 줄 알았던 한글의 결을 손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한 권이 그 시작점이 되어줄 거예요. 시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말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곁에 둘 만합니다.


유월로 접어드는 요즘, 창밖의 초록이 한창 짙어지고 있어요. 이런 계절에는 에어컨 바람보다 가끔은 펜 끝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더 마음을 가라앉혀주더군요. 바쁜 일상에 치인 저녁이면 이 책을 펼쳐 시 한 편을 천천히 옮겨 적어보려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조금 단정해질 테니까요.


눈으로 스치고 지나갈 뻔한 시들을 손으로 붙잡아 다시 만나는 시간. 저에게 이 책은 그런 한 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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