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이렇게 책을 읽었더라면
장경철 지음 / 생각지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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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이 책이 도착한 날, 표지부터 한참을 들여다봤어요. 아이보리빛 양장본에 검은 책갈피 띠가 단정하게 늘어져 있고, 노란 형광펜으로 그어둔 듯한 부제 ‘읽고, 배우고, 자기 것으로 남기는 온전한 독서법’이 눈에 들어왔어요. 표지 자체가 잘 정돈된 공부 노트 같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신청한 이유도 그 부제 한 줄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 속독법까지 배워가며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는 데 골몰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렇게 통과시킨 글자들이 지금 제 안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자문하면 자신이 없거든요. <진작 이렇게 책을 읽었더라면>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 묘하게 찔리는 데가 있었어요.


장경철 교수가 쓰신 이 책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서 출발해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공부한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이어집니다. 키워드는 네 동사예요. 생각하라, 반복하라, 축적하라, 발효시켜라. 단순한 독서법 안내가 아니라, 좋은 내용을 어떻게 자기 삶에 ‘거주’시킬 것인가에 대한 깊은 권유에 가깝습니다.


가장 먼저 마음에 닿은 챕터는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오는 중이다’였어요. 저자는 인간을 ‘개방된 존재’로 봅니다. 우리가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가치관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만남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그래서 한 번 들어온 생각을 새로운 기회에 능동적으로 다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희망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문장을 건넵니다. 40대 후반에 이르고 보니,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어요. 이 문장은 그 감각을 조용히 뒤집어 주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지금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표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어요.


같은 챕터에서 저자는 ‘불만’을 다르게 봅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현실화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신호가 바로 불만이라는 거예요. 아무 내용물이 없는 냉장고에서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는 비유가 따라옵니다.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제때 쓰이지 않을 때 부패하고 냄새가 나듯, 사람이 품는 불만도 잠재성이 잠자고 있다는 증거라는 시선이에요. 추운 겨울 마차를 놓쳐 두세 시간을 떨었던 스티븐슨이 결국 증기기관차를 만들었고, 새를 보며 “왜 새들만 날아야 하지?” 묻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일화를 거치며 저자는 ‘건설적 불만’이라는 표현을 꺼냅니다. 직장 생활에서 가끔 솟구치는 답답함을, 저는 그동안 그저 다스려야 할 감정으로만 여겼던 것 같아요. 그 안에 아직 실현되지 못한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덮은 뒤로 종종 떠올랐습니다.


‘반복하고 활용하라’ 챕터는 제가 가장 줄을 많이 그은 자리예요. 저자는 이은성의 <동의보감>을 빌려 허준과 유도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유도지는 명의 유의태의 아들로 매일 일대일 과외를 받았는데도 끝내 허준의 계승자가 되지 못했어요. 저자는 ‘허준이 천부적이었다’는 답도, ‘몇백 배 더 노력했다’는 답도 거부합니다. 그가 찾은 차이는 듣는 ‘태도’였어요. 유도지는 적지 않고 부주의하게 들었고, 허준은 공부방 처마 밑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오감을 다 동원해 적으며 들었다는 거예요. 같은 가르침 앞에서도 흡입력의 차이가 결과를 가른다는 통찰이 오래 남았습니다. “얼마나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이며, 얼마나 자주 활용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라는 문장은, 평생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로 자신을 매겨온 저에게, 그 잣대를 바꿔보라는 말처럼 들렸어요.


이 챕터에는 사탕과 호주머니 비유도 있어요. 그냥 메모만 해두면 자루에 사탕을 쏟아 둔 것과 같아서, 정작 필요할 때 어느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데 시간이 다 가버린다는 거예요. 겨우 꺼냈을 땐 이미 토론 주제가 바뀌어 있고요. 그런데 노트를 만들며 분류해 두면 박하사탕은 오른쪽 주머니, 초콜릿 사탕은 왼쪽 주머니에 넣어 두는 식이라, 적을 때는 시간이 들지만 꺼낼 때는 훨씬 빠르다고 말합니다. 회의실에서 분명 어제 자료를 읽었는데 막상 말이 안 풀리던 순간, 좋은 강연을 듣고도 며칠 지나면 흐려지던 경험을 떠올리면 무릎을 칠 만한 비유였어요. 저자는 노트 만들기의 시작을 거창하게 잡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그렇게 옮긴 노트에 시간과 횟수를 더해가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해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책은 점점 ‘삶의 태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시간과 횟수를 더하며 발효시키기’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자기 고백이 인상적이었어요. 학생들 앞에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겼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고, 더 당혹스러웠던 건 자신이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는 거예요. 분명 어젯밤 연구실에서는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 앞에 서니 흔들렸다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그가 찾은 해법은 ‘대상을 바꿔가며 옮기는 반복’이었어요. 좋은 내용을 만나면 아내에게 먼저 들려주고, 반응이 좋으면 조교들에게, 그다음 전공 수업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외부 강연으로 옮긴다는 거예요. 일곱 문장을 옮겼다고 치면, 청중이 반응한 대목은 더 깊이 풀어내고 반응 없는 대목은 다음 자리에서 덜어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겼던 강의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기 것으로 바뀌어가는 ‘발효’가 그렇게 일어났다는 거예요.


‘생략으로 단순하게 하기’는 글쓰기 조언처럼 시작해서 결국 삶의 조언으로 닿습니다. 저자는 보고서를 쓰자마자 곧장 제출하는 사람들의 함정을 짚어요. 막 쓴 글을 다시 읽으면 모든 문장이 명문으로 보이는데, 그건 사실 환각 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출 전에 반드시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제정신을 회복하는 시간이라는 정의가 좋았어요. 제정신이 돌아왔다면 작성자의 입장이 아니라 읽게 될 독자 한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읽고, 빨간 펜으로 지워도 뜻에 손상이 없는 단어들을 지워나가야 한다고 권합니다. “명문은 명단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단어들이 사라지면서 남겨진 평범한 단어들이 멋진 문장을 구성하게 됩니다”라는 문장은, 일터에서 메일과 보고서를 매일 만지는 사람으로서 가슴에 박혔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같은 원리가 인생으로 확장돼요. 탁월한 삶을 위해 자꾸 덧붙이려 하지만, 오히려 안 해도 되는 순간들을 제할 때 삶의 탁월성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여요. 삶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번은 버림을 받아보아야 한다고요. 버림을 받은 후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단어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한 부품이고 순간이라는 거예요. 회사 일에서, 관계에서, 익숙해진 습관에서 이 문장을 적용해보면 마음이 가만히 멈춥니다.


책의 끝자락에 저자는 오랫동안 품어온 솔직한 물음을 꺼냅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의를 들었는데 왜 자기 삶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까. 그가 찾은 답은 ‘방문’과 ‘거주’의 구분이었어요. 좋은 내용이 잠시 우리 삶을 방문하는 것과, 그 내용이 우리 안에 거주하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겁니다. 거주가 되려면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옮기는 ‘유통’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요. 좋은 언어는 옮기고 또 옮기는 사이에 지성에 스며들고 물든다는 표현, 그래서 우리가 언젠가는 좋은 언어를 산출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사실 이 책을 받기 전까지 저는 서평 쓰는 일을 ‘읽은 책을 정리해 두는 작업’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누군가 읽어줄 한 사람을 떠올리며 책의 내용을 제 언어로 옮기는 일, 그러는 동안 글의 결을 다시 곱씹고 분류하고 덜어내는 작업이, 저자가 말한 ‘유통’과 ‘발효’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서평단으로 활동하며 만난 도서들 중에서 이 책은 특히 그런 의미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떤 자세로 책을 마주하고, 어떻게 옮겨 적고, 어떻게 다시 펼쳐보아야 하는지를 차분히 일러준 안내서였습니다. 진작 이렇게 책을 읽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잠깐 스치다가도,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저자의 말이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봄과 여름 사이, 햇살이 점점 길어지는 오후에 이 책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빠르게 넘기지 않고, 줄을 긋고, 한 번 덮었다가 다시 펴는 식으로요. 그렇게 읽고 나니 책장에 꽂아둔 표지들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다시 펴볼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이 갈리고, 그동안 ‘다 읽었다’고 믿었던 것들 중 사실은 방문만 허용했을 뿐 거주는 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알겠어요. 이번 여름엔 새로 한 권을 사는 대신, 줄을 그어둔 표지를 다시 꺼내 펴 볼 생각입니다.


책장에 꽂혀 있던 한 권이 비로소 내 삶에 거주하게 되는 길을 일러주는 안내서.

읽긴 많이 읽는데 돌아서면 남는 게 없어 답답하셨던 분께, 그리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묻는 자녀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망설이고 계신 부모님께도 조용히 건네고 싶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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