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캉디드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7
볼테르 지음, 김혜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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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올 볼테르의 글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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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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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원작을 읽어본 후 든 생각은. 지금까지 에피쿠로스는 거의 기만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를 볼 때 흔히 우리는 '쾌락'을 떠올린다. 고등학교 시절 기계적으로 암기한 탓일까, 에피쿠로스와 쾌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통용되는 '쾌락'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도리어 그의 철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점에서 노자, 마음의 평정인 아타락시아를 향해간다는 점에서 불교와 유사하다. 에피쿠로스의 글에는 인간의 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듯한 '쾌락'이라는 말보다,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는 '수도승'이라는 표현이 어울려 보인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단순한 신체적, 감각적 만족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단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되면, 육체적인 쾌락은 증가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바뀐다.
반면에 정신적인 쾌락은 우리 지성이 쾌락과 정신에 가장 큰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을 때 그 한계에 도달한다.
p.127

그가 정신적인 쾌락을 지향한다. 육체가 고통에서 벗어난 아포니아와 정신적인 만족감을 뜻하는 아타락시아 중에서, 아타락시아는 고통이 제거된 이후에도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원인을 이해함에 따라 계속해서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죽음에 주목한다. 철학사를 조망할 때 죽음에 대한 사유가 그 큰 줄기를 이룬다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유한한 인간으로의 생애를 생각할 때 죽음을 조망하는 에피쿠로스의 방향성은 타당해 보인다. 독특한 점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역설적으로 우리를 가장 행복한 쾌락의 상태로 이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장 끔찍한 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궁극의 행복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행복, 그 자체를 탐구하는 일 역시 멈춰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선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을 통해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화와 같이 신을 추앙하는 일은 옳지 않다. 도리어 스스로의 감각을 통해 선과 악을 판단해야 한다.

이런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수 천년이 지난 아직까지 수많은 이가 강력한 신에 의존하는 세태를 살펴볼 때, 꽤 놀랍다. 그리고 그 위에는 신에게 구원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의 수양에 전념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아른거린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에피쿠로스의 인식은 원자론적인 사상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에 의해 세상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에피쿠로스 쾌락>의 상당한 전반부가 그의 원자론, 자연론에 할애되어 있다. 이는 에피쿠로스의 자연과 과학에 대한 인식이 결국은 인간과 도덕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원자론을 거쳐 귀결된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를 향한 사랑은 불교의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되는 다른 독자들은 자연과 원자에 대한 부분 역시 주의 깊게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크지 않아 다소 어렵게 책장을 넘겼던 부분이었지만, 도리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의 과학과 자연론적 사고관에 관심이 생겼을 정도였다.)

말초적이고 단편적인 속된 쾌락이 만연한 오늘날,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그가 외쳤던 육체적인 만족은 보다 참된 선을 찾는 과정에서 물리적 고통이 영향을 미치지 않게 위함이었다. 육체적 만족을 넘어서 욕망을 다스리는 정신적인 궁극점을 향한 그의 철학은 지금의 우리에게 진정한 '쾌락'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행복을 좇아야 하는가를 되묻는다.
  • 출판사지원 리딩투데이 서평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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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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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어렵다. 고등학생 때부터 읽었지만, 숨어져있는 것들을 유추하는 것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단편은 더욱 그런 편이다. "내용의 8분의 1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헤밍웨이의 말은 그의 단편이 쉽게 읽히지 않으리란 걸 잘 보여준다.
오랜만에 집어든 헤밍웨이의 단편선을 넘기며, 수많은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외롭다못해, 극단에 치닫은 고독함. 여러 단편 속 주인공들은 분명 주변인과 함께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한 그들을 마주한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또 누구와 있더라도 그렇다. 마치 고독함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첫 단편인 <킬리만자로의 눈>은 죽음 앞에서 결국은 홀로 서게 되는 외로움을 그린다. 함께하는 연인도, 그가 열심히 모아온 글감도 죽음 앞에선 해리와 함께하지 못한다. 결국은 죽음 앞에서 삶의 집착마저 떠나보내게 되는 해리의 생각을에는 고독함이 짙게 배여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전체를 관통한 고독함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도 깊어, 해리에게 은밀하게 내려앉는 고독함을 함께 느끼며 숨을 쉬기 어려웠다. 필연적인 고독함의 깊이에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다. 사랑했기에 자연스러웠던 욕심과 요구, 인간이기에 응당 가질 수 밖에 없는 집착을 내려놓은 해리는 그 누구보다 고독한 사람이자 우리의 먼 훗날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다른 연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너무 많이 싸워서 그들은 마지막엔 항상, 싸움의 부식작용으로 자신들이 함께했던 것을 죽여버렸다. 그는 너무 많이 사랑했고, 너무 많이 요구했다. 그리하여 전부 닳아 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 이렇게 죽는 거구나, 듣지 못했던 속삭임 속에서. 그래, 더 이상 싸움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이 하나의 경험을 그는 이제 망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걸 망쳤었다. 그러나  이번엔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망가뜨려진 이들을 경멸해왔다. 이해했다고 해서 좋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관심을 주지않았다면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그는 죽음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한가지 그가 항상 두려워했던 것은 고통이었다.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누구 못지않게 고통을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지독한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느꼈을 즈음, 그 고통은 멈추었다."

"킬러들"도 그렇다. 살인청부업자가 본인을 좇고 있다는 소식에도 앤더슨은 덤덤하다. 스스로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말리는 동료들을 내버려둔 채 소식을 알리고자 달려온 닉과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며 죽음을 체념한 엔더슨의 모습이 대비되며, 그의 절망감이 도드라진다.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 "미시간 북부에서"에 등장하는 낙태와 강간은 소재만으로도 고독함이 극대화된다. 낙태를 사실상 강요받는 여자 주인공과 감정적 교류 없는 강간을 당하는 리즈는 격정적인 고독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빗속의 고양이”에서는 가장 긴밀하다는 부부 관계임에도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이 드러난다.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두 명이자 한 방에서 묶는 부부임에도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이해와 교류도 드러나지 않는다. kitty를 바랬지만 커다란 구갑고양이를 안아야 했던 마무리는 그 누구와도 온전히 소통할 수 없는 고독함 속에 빠져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헤밍웨이의 단편을 통해 변주되며 반복되는 고독함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단편 중 하나를 뽑자면, 역시 제목인 <킬리만자로의 눈>이지 않나 싶다. 헤밍웨이가 말하는 고독함이 궁금하다면, <킬리만자로의 눈>을 권한다.
  • 출판사지원 리딩투데이 서평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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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인간혐오자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5
몰리에르 지음, 김혜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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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너무 많은 불의와 모순이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말은 너무 많이 읊어져 진부하게 마저 들릴 정도다.
그러나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한 지적을 단순한 클리셰로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교훈이 너무 무겁다.

'인간혐오자'는 불완전한 우리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다. 주인공 알세스트는 세상의 모순에 분노한다. 아첨과 가식, 기만이 가득한 도시와 궁정은 그에게 말그대로 '분'한 곳이다. 알세스트는 타인을 위한 꾸밈과 가식에 반기를 드는데, 바로 솔직함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다만 알세스트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 그는 노골적인 표현을 내뱉으며 타인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조롱한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가장 근본적인 질서로 삼는 사교계에서 알세스트는 비판의 중심에 서게 된다. 마치 모두에게 외면받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처지다.

그럼에도 알세스트는 세간의 평가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살롱에 남은 이유는 오직 셀리맨 때문이다. 그녀는 알세스트가 혐오하는 꾸밈과 가식, 그 자체인 인물이지만 알세스트의 열렬한 추종을 받는다.

알세스트의 셀리맨을 향한 구애를 담은 희곡 '인간혐오자'는 꽤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알세스트는 현시대 살롱, 즉 지금의 사회에 있는 가식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속에서,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우스운 존재처럼 보인다. 보통의 이야기에서 웃긴 존재, 우스운 존재는 우리가 비판할만한 대상에게 부여된다. 가령, 레미제라블의 주인 부부와 같이 속물적인 태도가 비웃음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알세스트는 알송달송한 인물이다. 알세스트는 우리가 전형적으로 비판하는 가식적인 사교계를 향해 대항하는 주인공임에도, 그의 날 선 공격성 역시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 타인을 향해 노골적인 비판을 늘어놓는 알세스트에게는 쉽사리 정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몰리에르의 희곡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혐오자'는 프랑스 고전 희곡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몰리에르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 이유는 단연 알세스트의 이중적인 모습에 있을 것이다.

희곡 '인간혐오자'는 단순히 비판할 대상과 긍정할 대상을 이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인 주인공과 주변 환경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친절의 탈을 쓴 가식'과 '날 선 진실' 사이의 나만의 경계선을 그려보게 된다.

희곡의 1장과 5장은 똑같은 말로 마무리 짓는다. 바로 친구 필랭트가 혼자의 삶을 좇으려는 알세스트를 붙잡는다.

"아무리 빈정거려도 나는 자네를 떠나지 않을 거야. P.38 - 1장 마지막"
"부인, 그가 마음 속에 품은 계획을 포기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동원해 봅시다. P.141 - 5장 마지막"

알세스트를 사교계, 즉 우리의 곁에 머물게 해야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문장이 아닐까. 당황스럽게 별난 주인공은 날서다 못해 공격적인 진실함을 의미한다. 알세스트를 붙잡는 필랭트의 대사는 진실을 우리 곁에 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
그렇게 질 떨어지는 알랑거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무리 최고의 영광을 쏟아부어도 결국 싸구려 잔치에 불과해.
우리가 전체라는 영역 안에서 함께 뒤섞이는 순간 특혜라고 생각했던 존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거야.
모두를 존중한다는 건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
P.13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를 조금 거두어 봐. 무조건 발톱을 세우고 살펴보려고 하지 말고 조금 여유를 가지고 인간들의 결점을 바라보려고 해 봐.
요즘 세상에서는 너그러움도 미덕이야. 지나치게 따지고 들면 비난받기 십상이거든.
완벽한 이성을 지니고 싶다면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게 절제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해.
...
사람들에게 완전무결하기만 바라면 안 돼. 아집만 내세우지 말고 시대에 유연해져야지.
세상을 고쳐 볼 생각만 하고 관대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미쳐 날뛰는 광기에 불과해.
P.18

자네처럼 화가 날 때도 있어.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
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해. 그들이 행동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려고 해.
내가 도시에서든 궁정에서든 자네처럼 화내지 않는 건 침착함이야말로 진짜 철학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야.
P.18

이  타락한 시대 속에서 그녀의 영혼은 나의 사랑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을 거야
P.23

우정이라는 이름을 너무 쉽게 사용하면 진정한 참뜻을 퇴색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정으로 맺어지려면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 있어야 하죠.
우리가 친구가 되기 전에 먼저 서로를 잘 알아야 해요.
P.27

점잖은 사람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에 몸이 근질거려도 절대적인 힘으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글을 쓰는 데 너무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요.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너무 안달이 나면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거라고도 말했답니다.
P.31

지금처럼 인간 사회 여기저기에 악덕이 만연해있는 건 당신들처럼 곁에서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사람들 때문이에요.
P.57

세상이 변하려면 사람들이 아예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할걸.
그런데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이 사회를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어?
인간은 살아가면서 결점으로 인해 철학을 수행하는 방식을 깨닫게 되거든.
미덕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이거야.

모두가 정직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모두가 정직하고 정의롭고 온순하다면 대부분의 미덕은 쓸데없겠지.
왜냐하면 미덕이라는 건 타인의 불의가 우리의 권리를 파고들 때 우리가 꼿꼿하게 감내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거거든.
P.122

  • 출판사지원 리딩투데이 서평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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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돌프의 사랑>은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두 사람의 사랑, 특히 사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아돌프의 고민과 열정을 담아내고 있다.

두 남녀 외의 등장인물은 세부적인 서술도 전무하다 싶이 하며, 독특한 이벤트나 사회적 갈등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아돌프의 관점에서 느끼는 감정적 변화선이 서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단순한 플롯으로 구성된 책이지만, <아돌프의 사랑>은 다양한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아돌프의 고뇌는 세간의 평판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다. 혹은 옮긴이의 말처럼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집중했을 때야 발견할 수 있는 내적 갈등으로도 읽을 수 있다.


2/ <아돌프의 사랑>은 인간이 성장하지 못했을 때, 어떤 파국을 맞을 수 있는지 역시 생생하게 보여준다.

엘레노르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그들의 사랑은 더 이상 크지 않은 아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비극적인 결말이다. 아돌프는 엘레노르를 잃기 전까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다.

마치 장난을 치다 풍선이 터져버리고 나서야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아이 같다. 자신이 쥐고 있는 풍선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얼마나 취약한지 모른다. 그러니 조심히 다루지 않고, 영영 잃어버린 후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릴 뿐이다.


나는 최후의 연줄이 끊어진 것을,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 무서운 현실이 영원히 가로놓인 것을 깨달았다.

P. 152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견디기 힘든 부담이었다.

...

나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누구하고도 무관한 타인이었다.

P. 153


3/ 무엇보다 아돌프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아이일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이 소설은 백몇 십여 페이지에 걸쳐 두 성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아버지에 대한 묘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특히, 아돌프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제1장에서 아돌프는 독자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주인공 아돌프가 생각하는 '아돌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1장 속 묘사에서 그가 정의하는 스스로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유아성'이다.

아돌프는 자신이 괴팅겐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 이후 곧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나에게 유럽의 여러 이름난 나라들을 두루 돌아보게 했다. 그런 다음 나를 곁에 불러다가 당신이 관장하는 부서에서 일을 배우게 한 뒤, 때가 되면 당신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제일은 다음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아버지는 나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적잖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아버지가 그토록 관대했던 것은 이런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P. 15


아돌프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도 아버지의 평가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시리다. 이 대목을 읽자마자 비극적인 결말을 예감했다. 첫 장부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이미 아프게 끝맺어질 아돌프의 사랑을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1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내게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 제1장, 첫 페이지를 권하겠다.)


소설을 끝마칠 때까지 아돌프는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엘레노르와의 사랑에 고통받을 때, 스스로 사랑을 끝내는 대신 아버지의 복귀 요구를 내심 기대한다. 6개월간의 밀회는 아버지의 허락하에야 가능했다.

아돌프가 엘레노르를 따라 떠났을 때도 아버지의 편지를 받는다. 물론 이때는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마치 아돌프에게 자유가 주어진 듯하다.

엘레노르가 상속인으로 지정되며 상황이 변화하자, 곧바로 아버지가 힘을 쓰기 시작한다. 엘레노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편지는 아버지의 사실상 대리인이었던 T 남작에게서 보내졌다.

아돌프의 사랑은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야 가능했다.


4/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겪으며 성장한다. 사랑 역시 그렇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은 정말 다양한 감정을 담아낸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감정을 포착하고, 정교한 언어로 구체화한다. 인생을 수많은 감정의 집합체로 본다면, 우리가 미처 경험하기 어려운 인생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게 소설은 인생을 그린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만날 때 한층 성장한다. 소설은 생경한 감정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인생을 선사한다. 독서를 통해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버는 셈이다. 가령 <아돌프의 사랑>은 내게 엘레노르와 아돌프가 사랑을 한, 그 몇 년의 인생을 선물했다.

아돌프 역시 엘레노르를 만나기 전 소설에 빠져보았다면,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그만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했다.


+)

무지로 끝이 나는 비극적인 사랑을 마주할 때면 항상 느끼듯, 진심을 다한 엘레노르가 안타깝다.

그녀는 아돌프와 달리 성장한 어른이었다. 사랑의 무게를, 또 그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더 귀한 결정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 부, 남편과 자식, 심지어는 그토록 귀중히 여겼던 명예마저도 손에서 놓아버렸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중간중간 엘레노르가 절망하는 부분이 나온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상대가 실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참담하고 절망했을까. 그녀가 느꼈을 감정은 상상조차 어렵다.

특히, 아래 구절을 읽을 때는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래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라고요.

당신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동정일 뿐이예요.

P. 88


아돌프는 엘레노르의 죽음 이후 비참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책 곳곳에 암시되어 있다. 누군가의 현명함과 진심을 져버렸을 때, 그 벌로 받게 되는 응당한 결과가 아닐까.


++) <아돌프의 사랑>을 처음 읽을 때는 책장이 가볍게 넘어갔다. 하지만 서평을 쓰며 다시금 속독을 하고, 고민하며 그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의미를 곱씹을수록 진가를 알 수 있는 소설이다. 2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글이지만, 분량으로 가늠할 수 없는 감정적인 격동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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