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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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체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 젊은 여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부감 다시라고 하는 그 여인은 링감 사원의 무희였다. 사원에 소속된 그녀의 일은 거대한 링감 조각상 앞에서 의식의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는 올리브색 피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여자였다. 가슴이 레몬 모양이었고 커다란 눈은 비스듬히 찢어졌다. 길게 이어진 가느다란 두 눈썹 사이 한가운데에 붉은 미인 점을 찍었다. - p. 72

`코브라의 심판`이란 이런 것이었다. 내 아버지와 삼촌이 코브라 한 마리와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방에 갇힌다. 방 안은 완전히 깜깜하여 마치 고문실과도 같다. 코브라에게 물린 사람은 당연히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러면 코브라 마법사가 방문을 열고, 물리지 않은 사람을 구출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남자를 부감 다시는 남편으로 맞이할 것이다.
고문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내 아버지는 부감 다시에게 자신을 위해서 한 번만 더 성스러운 사원의 춤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이를 수락한 부감 다시는 코브라 마법사가 부는 피리 소리에 맞춰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었다. 펄럭이는 횃불 아래서 그녀는 의미심장한 동작으로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고, 마치 코브라처럼 유려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런 다음 아버지와 삼촌은 코브라가 있는 깜깜한 방에 갇혔다. 그런데 안에서는 살려달라는 공포의 외침 대신에 비통한 탄식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미친 듯한 광기의 비명이 커다랗게 들렸다. 문이 열렸고, 내 삼촌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삼촌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엄청나게 나이가 들어버렸고, 피부는 주름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머리칼은......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쉭쉭거리며 다가오는 코브라가 불러일으킨 공포심, 빤히 쳐다보는 코브라의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눈동자, 코브라의 무서운 독이빨, 코브라의 몸체와 기다란 목, 숟가락처럼 부풀린 목덜미와 조그만 머리, 이 모든 것이 불러일으킨 공포심이 어찌나 큰지 방에서 나오는 내 삼촌의 머리칼은 완전히 하얗게 백발이 되어 있었다. 부감 다시는 약속을 지켰고, 그날 이후 삼촌의 아내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사실은, 그날 시험에 통과하여 방에서 나온 사람이 정말로 누구인지, 아버지인지 아니면 삼촌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지독한 공포 때문에 살아나온 사람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 전부를 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나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내 삼촌일 거라고 간주해버렸다. 이 이야기에는 내 인생의 결정적인 어떤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소름 끼치게 울리던 웃음소리의 메아리가, 그 공포스러운 시험의 흔적이 내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p.75~77

죽은 후 피는 혈관 속에서 굳어가고 어떤 신체 부위는 죽은 지 하루 만에 부패를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과 손발톱은 사망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해서 자라난다. 그렇다면 감정과 인식은 어떠할까? 심장이 멈추면 그것들도 함께 완전히 정지하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남아 있는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은, 감정과 인식도 잠시 동안이나마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는 걸까?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이미 죽은 이들은 얼마나 더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공포와 두려움에 직면하면서 죽어갔겠는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죽어가는 노인들이 있다. 마치 하나의 꿈에서 다른 꿈속으로 넘어가듯이 자연스럽게, 혹은 기름 램프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말끔히 타버린 후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하듯이.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젊어서 죽은 자들, 젊고 힘 있는 신체를 가지고 모든 기력을 다해 오랫동안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가 죽어가는 자들은 최후에 어떤 감정일까? - p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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