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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줄거리(스포일)
서울의 한 디자인회사에 다니던 나는 불황의 여파에 떠밀려 사직을 한다. 그리고 휴전선 부근의 수목원에서 세밀화가로 채용되고 서울을 떠나 전방으로 떠난다. 고속도로를 타고 죽 가다가 우회전을 한 번 하자 도시의 젊은 여자인 내 앞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눈에 뒤덮인 겨울의 숲을 배경으로, 군인들의 차량과 쓸쓸한 전방의 소읍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나를 채용한 수목원 연구실장 안요한은 다달이 피고 지는 꽃들의 모습을 세밀화로 그릴 것을 지시한다. 안 실장은 저명한 식물학자로 꽃이 어째서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원리를 연구하고 있었다. 내가 그릴 꽃과 나무의 그림들은 종자 보존실에 해당 식물의 종자와 함께 영구 보존될 예정이다.
한편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아버지가 가석방되어 밖으로 나온다. 뇌일혈로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는 어머니가 따로 마련해놓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요양한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떨어져나가고 싶어 했다. 지방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뇌물수뢰 등의 비리로 형을 받았었다. 그 형은 교도소 밖에서도 가석방이라는 명목 하에 계속 집행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태로 미루어보아, 그 형을 마칠 때까지 아버지는 살아 있기가 힘들 터였다. 아버지가 죽으면 형을 집행 받을 사람이 없어지므로 자연히 형이 소멸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죽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셈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다른 아파트로 쫓아내 놓고도 여전히 아버지를 떨쳐내지 못한다. 이혼 도장을 찍는 것으로 인연을 소멸시키기에는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의 삶이 너무나도 얽히고설켜 있는 탓일 것이다. 아버지가 복역 중이어서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았을 때도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도망가지 못했고, 다만 인연의 질김을 체감하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수목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민통선의 초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초소대장인 김민수 중위에게 나는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김 중위는 복무가 끝나가는 학군단 장교였다. 수목원에 처음 온 날 그가 군용 지프차로 나를 수목원까지 데려다주었었다. 그 후로 그에 대한 호감이 점차 피어오르지만, 나는 김 중위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며 그에게 사무적인 태도를 애써 유지한다.
안 실장에게는 신우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아내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다고 한다. 신우는 자폐 증세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안 실장은 신우를 휴학시키고 거의 매일 수목원으로 데리고 와서 보살핀다. 신우는 하루 종일 연구용 인공연못의 곤충들과 땅바닥의 개미들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신우의 모습이 소름끼칠 정도로 그의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작업은 수월치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처럼, 붓으로 그려낼 수 없는 색깔을 꽃들은 품고 있었다. 활짝 핀 꽃의 어두운 중심부에서 쟁쟁쟁, 하고 생명의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소리를 붓으로 그려내기란 불가능해서 나는 그림을 완성한다기보다는 그저 제출기한이 다가오면 그림을 끝낼 뿐이다. 나무와 꽃들은 어떻게 해서 살아가고 어떻게 해서 저런 색을 뿜어내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밝혀내고 그려내는 일은 나무와 꽃의 문제가 아니라 안 실장이나 나의 문제였던 것이다. 안 실장은 더러는 재작업을 요구하지만, 대개 모호한 말을 흘리면서 그림을 받아든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즈음 625 전쟁 유해발굴단으로 전출된 김 중위는 나에게 유골들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해온다. 유골을 그리는 일도 꽃을 그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삭아서 나무젓가락만큼 하찮아진 뼈들은 생명의 토대를 이루었을 때의 원형을 여전히 간직한 채, 골즙이 메말라버린 자글자글한 뼈 구멍들 사이로 꽃잎처럼 쟁쟁쟁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나는 안 실장의 삶으로도, 김 중위의 삶으로도 진입하기를 여전히 망설이면서 겨우 세밀화들을 그려간다.
겨울이 다가올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죽은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통곡하며 쓰러진다.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해서 수목원 근처의 숲에 뿌렸다. 밥에 버무려져서 눈 위에 던져진 아버지의 재들을 새들이 주워 먹었다.
김 중위는 유해발굴단 임무를 마치고 12월에 재대할 예정이었다. 제대 후에는 건설회사에 채용되어서 동해안의 교각 및 도로 건설 현장으로 파견된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제대 후에 쓰일 명함을 미리 건네준다. 꼭 연락을 달라고, 후방의 도회지에서 만나길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받아든 명함을 핸드백에 넣어 둔다.
안 실장의 아들 신우는 결국 이혼한 어머니에게 맡겨진다. 예산이 줄어들어서 수목원에서는 나에게 재계약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 또한 김 중위가 제대하고 3일 후에 민통선 지역을 떠나게 된다. 계약 만료 전 나는 마지막 과제로 나무들의 겨울눈을 그린다. 더러는 솜털에 뒤덮이고 더러는 가죽 같은 껍질에 싸인 겨울눈 속에는 꽃 한 송이가 미미하지만 온전하게 잉태되어 있었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나는 차를 몰고 수목원을 떠난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좌회전 한 번에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으로 진입해 들어간다. 나는 김 중위가 제대하고 일하게 되었다는 동해안의 바닷가 마을을 생각한다. 너무 커져서 낯설어지기 전에 꼭 신우를 만나서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엑셀을 세게 밟아서 속력을 높인다. 차는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빠르게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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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뻘글)
「공무도하」 이후로, 김훈은 더럽고 구역질나지만 중생들의 현실에 애착을 갖고 엉덩이를 부벼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듯하다. 물론 그전에도 어떤 긍휼함을 느끼고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작들로부터의 변화가 확연히 느껴졌다. 어쩌면 작가가 품은 ‘긍휼함’이, 본래 긍휼함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성질인 ‘관조’를 초월해서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바야흐로 속세를 향해 ‘좌회전’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수목원으로 가는 길처럼, 하찮은 속세를 등지는 데에는 우회전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나 인연에서 벗어난 삶에서도 끊임없이 인연은 다가오고 멀어진다. 인연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것은, 해가 지면 어두워지고 해가 뜨면 날이 밝아지는 것처럼, 여름엔 무덥고 겨울에 추운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현상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안 실장은 조의금 봉투를 내밀면서 “자살을 포함한 모든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외진 곳에 떨어져 있어도 어머니의 넋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있는 한은 타인의 삶과 버무려질 수밖에 없다. 그런 건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실내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하게 에어컨을 튼다 하더라도, 문밖에서 내리쬐는 한낮의 땡볕을 지워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여름에는 더운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수목원을 나와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속세로 향하는 것이다. 김 중위의 삶 속으로, 타인의 삶 속으로 자신을 진입시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희망’이라든지 ‘기대’ 따위의 단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어쩌면 주인공의 앞날은 불행으로 점철될지도 모른다. 김훈은 이야기 이후의 주인공이 겪는 삶의 험난함에 대해 아무런 암시를 주지 않는다. 비가 내리고 날이 개는 것이 본래 희망이며 절망을 뜻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자연현상이듯, 타인과 함께 너저분하게 삶을 뒹구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운명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문장은 그래서 공허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속세를 상징하는 ‘이쪽 언덕’인 도시에서 ‘피안’이라고 할 수 있는 수목원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속세의 인연과 삶의 비루함이 뒤범벅된 이쪽 언덕을 향해 차를 몰아간다. 모든 것의 허망함을 깨우치고 강을 건너 피안으로 향하는 관세음보살의 공허함만큼이나, 괜스레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갔다가, 강물에 젖은 옷자락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이쪽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일 역시 못지않게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훈의 문장은 공허하면서도 깊숙하다. 왜냐하면 그런 공허한 짓거리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인데, 우리는 우리와 닮은 것들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꾸만 언어로 표현되지 못할 것들을 작가가 그려내려 애쓰는 까닭에 유난히 문장들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붓다마저도 입을 다물었던 것들을 어째서 작가는 기를 쓰며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애초부터 언어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려 애쓰느라 참 힘든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