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버드 열림원 이삭줍기 7
허먼 멜빌 지음, 최수연 옮김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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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줄거리(스포일)
상선 <인간의 권리>호가 순항하던 어느 날, 영국 해군의 군함이 접근해온다. 군함에서 건너온 장교는 <인간의 권리>호의 선원들을 대상으로 강제징집을 명령한다. 법률상 의무가 지워진 일이었기에 선장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장교의 지명을 기다리며 선원들은 나란히 선다. 그 가운데 장교의 눈을 한 번에 사로잡은 이가 있으니, 바로 막내선원 빌리 버드였다. 결국 장교는 빌리만을 징집하기로 결정한다. 선장은 자신이 총애하는 젊은 뱃사람을 빼앗아간다는 점에 얼마간 항의를 해보지만 군대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빌리 버드는 <인간의 권리>호를 떠나 군함 <벨리포텐트>호에 오른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전형적인 앵글로색슨족의 건장한 체구를 지닌 빌리는 곧 군대 생활에 적응해간다. 앞돛대 망루병으로 보직을 받아 근무를 서고, 동료 병사들의 인기를 얻는다. 그는 성실하고 민첩한 행동과, 뱃사람으로 나고 자란 때문에 지성은 없으나 특유의 순진무구함이 오오라처럼 뿜어져 나오는 매력의 소유자이다. 거의 모든 군인들이 그를 좋아하지만, 단 한 사람 위병선인하사관인 클래가트만은 내심 그를 못마땅히 여긴다.
클래가트는 보통의 수병들과 달리 병사들을 실내에서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므로 허여멀건 한 얼굴을 가진 자로, 돌출된 턱만 제외하면 그런대로 멀끔히 생기긴 했다. 빌리에게 겉으로 늘어놓는 칭찬 속에는 왠지 모를 가시가 감추어져 있다. 빌리는 그런 클래가트의 속마음을 읽지 못하고 단순히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클래가트는 빌리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빌리를 증오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특별한 실수는커녕 클래가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 따위를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클래가트 앞에서 저지른 빌리의 유일한 실수는,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 스프를 엎지른 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클래가트는 빌리가 스프를 엎지르기 이전부터 증오심을 키워왔다. 클래가트는 그저 빌리의 존재 자체가 싫은 것이었다. 그 알 수 없는 증오는 스프를 엎지름으로써 모종의 논리마저 갖추게 되었다.
어느 날 빌리에게 수상쩍은 수병이 접근한다. 그는 빌리에게 강제징집된 병사들의 선상반란 획책에 가담할 것을 요청하며 뇌물을 꺼내지만, 빌리는 단칼에 거절한다. 한 경험 많은 노병에게 이 일에 대해 언급하자, 노병은 클래가트의 음모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챈다. 그러나 그는 빌리에게 그저 단순한 경고를 주는 데에 그칠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클래가트는 그동안 음모를 착실히 진행시켜서 마침내 빌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그는 함장에게 가서 빌리가 선상반란을 꾀하고 있노라고 보고한다. 함장은 빌리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고, 또 선상반란이란 것은 병사들의 분위기에 직접적이고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삼자대면을 하기로 결정한다. 함장실로 불려온 빌리는 클래가트의 모함을 듣고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억울하며 분노한 나머지 클래가트의 잘생긴 이마를 주먹으로 때린다.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실수를 만회할 기회도 없이 클래가트는 즉사하고 만다. 함장은 빌리에게 반란죄가 전혀 없을 뿐더러 모함을 받은 피해자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심판해야 했다. 임시군법회의가 열리고, 빌리는 교수형을 언도받는다.
빌리는 모든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밧줄에 목이 매달린다.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도 빌리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함장 또한 빌리에게 억울한 죽음을 강요해야 함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이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는 군법을 따를 뿐이었으니까.
빌리가 죽고 나서도 한참이나 수병들은 그가 목 매달린 돛대를 기념비처럼 여기고 시를 짓는 등 빌리를 추모한다. 함장은 몇 년 뒤 전투 중 부상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지만 병사한다. 함장은 마지막으로 “빌리 버드, 빌리 버드.”라고 말하고는 숨을 거둔다. 그의 그런 말에는 후회의 감정 같은 것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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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뻘글)
「모비 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재미없을 것이란 예감, 또는 편견 때문이었다. 허먼 멜빌, 헨리 제임스, 나다니엘 호손 따위의 작가들은 왠지 이름만 들어도 하품이 날 정도의 지루함이 느껴졌었다. 워싱턴 어빙이라면 또 모르지만.
이유 없이 읽기가 꺼려지는 작가들이 있듯이, 이유 없이 싫어지는 사람 또한 있게 마련이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 경험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자신이 소시오패스의 자질이 숨어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인정하기 싫다면, 클래가트를 살펴보라. 그는 본능적으로 빌리를 싫어한다. 그리고 본능적 증오에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을 더해서 스스로의 증오심을 중무장시킨다. 클래가트는, 소설이 쓰일 당시에는 그런 용어가 없었겠지만,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유형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대상이 여성이나 살인, 재물 등이 아닌 빌리였을 뿐이다. 나는 ‘소시오패스’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운운 하는 연애소설들의 닳고 닳은 이 구절이 생각나곤 한다. 아무튼 클래가트라는 캐릭터는 나를 완전히 압도했고,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물론 함장과 빌리의 캐릭터도 대단했다. 이처럼 살아 숨쉬는 캐릭터가 창조된 것은, 이른바 ‘썰’이 길었기 때문인 듯하다. 썰을 풀어가는 과정이 조금 지루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모든 썰들이 합쳐지니 엄청난 깊이를 가지게 되는 느낌이었다. 스토리 자체에도 엄청난 썰 - 넬슨 제독과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과 영국 해군의 선상반란 사건 따위의 역사 - 이 나오는데, 약간 톨스토이적이기까지 한 이 방대한 썰은 결국 소설에 엄청난 깊이와 풍성한 의미, 기다란 여운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작가의 썰을 대충 훑어 넘기지 말고 존중해줘야겠다.
한편, 왜 빌리는 죽어야 했는가? 어째서 함장은 빌리에게 사형을 내려야만 했는가? 이것이 소설의 주제라고 볼 수 있는데, 캐릭터의 개인적인 면모를 아무리 파헤쳐봐야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답은 개인에게서 절대 찾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고결한 야만인(빌리)’과 ‘군법의 실행자(함장)’라는 측면, 즉 사회적이라 해도 좋고 시스템적이라 해도 좋을 그 무언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멜빌은 모든 개개인의 개성을 엄청나게 중요시여기는 한편, 모든 개개인을 균일화 해버리는 사회제도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식으로 한 번 풀어보자.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100만원을 꿔 주었다고 치자. 한 달 뒤 갚기로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라고 치자. 채무자 B는 A의 연락마저 피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A는 길거리에서 B를 발견한다. B는 비싼 가게에서 여자친구에게 값나가는 어떤 물건을 선물해주고 있다. 화가 난 A는 B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돈이 없다며 염치도 없이 잡아떼는 B를 힘으로 제압하고 B의 지갑을 꺼내 100만원을 끄집어내 가져간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이 A를 연행해가고, 재판관은 A에게 징역형을 선고한다. 채무불이행에 대해 자력구제를 할 수 없도록 법률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언가 불합리함을 느꼈다면, 우리는 멜빌의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사건이 불합리하기는 하나 어쩔 수 없이 용납되어야 한다고도 느껴진다면, 우리는 함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빌리를 이해하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고귀한 야만인’의 순진무구함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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