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예전보다 더욱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됐다. 별다른 작품들을 작곡하지 못한 채, 1811년은 별 소득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바로 그 직후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7번과 8번 교향곡이 작곡된 것이다. 그것은 승리, <웰링턴의 승리〉였다. 빈 의회와 유럽에 세워진 새로운 질서에 대해 베토벤은 기념비적인 칸타타 영광스런 순간이여-유럽이 일어선다>로 대응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당시 수차례 일어났던 국경의 변동은비공식적이고 임의적인 행위를 조장했다(폴란드, 이탈리아, 작센의분열, 스웨덴의 노르웨이 합병), 베토벤에게는 오로지 나폴레옹과프랑스를 모욕하고, 확정된 국경이 제공하는 한정된 안정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희망하는 일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베토벤은 전쟁을 저주하였으며, 정치적 긴장 완화와 안식을희망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고 꿈꿔 온 자유는 군주제의 경계선 안에서 이룰 수 있기에 그는 완전한 전복을 지지하지 않았다. 혁명이 계급제도를 영구히 철폐시켜 주리라는 희망 또한 그는 나폴레옹 독재 이후 더는 꿈꾸지 않았다.